'Bergson'에 해당되는 글 20건

  1. 2007/03/04 아우라(aura)
  2. 2006/12/29 이미지 존재론: 물질의 운동과 영화 이미지
  3. 2006/12/29 사진과 영화의 존재론적 위상
  4. 2006/12/22 들뢰즈의 예술론(14): 다양성의 긍정(지속에서의 공존 혹은 보존)
  5. 2006/12/22 들뢰즈의 예술론(12): 다양성의 두 측면(양적 다양성/질적 다양성)
  6. 2006/12/22 들뢰즈의 예술론(11): 복합물로서의 운동의 나눔
  7. 2006/12/22 들뢰즈의 예술론(10): 주관적 계열과 객관적 계열로의 나눔
  8. 2006/12/22 들뢰즈의 예술론(9): 직관의 나눔은 본성상의 차이의 발견
  9. 2006/12/22 들뢰즈의 예술론(8): 인간적 조건 하에서의 진리란 그 자체 기만적인 것이다
  10. 2006/12/22 들뢰즈의 예술론(7): 다양성 개념을 통한 변증법 비판
  11. 2006/12/22 들뢰즈의 예술론(6): 부정과 일반관념 비판 (퇴행과 무능력)
  12. 2006/12/22 들뢰즈의 예술론(5): 근본적 환상에 대하여
  13. 2006/12/22 들뢰즈의 예술론(4): 정도상의 차이와 본성상의 차이(운동에 관한 참된 이해와 잘못된 이해)
  14. 2006/12/22 들뢰즈의 예술론(3): 직관에 관한 잘못된 오해
  15. 2006/12/22 들뢰즈의 예술론(2): 직관의 비판능력
  16. 2006/12/22 들뢰즈의 예술론(1): 베르그송 요약의 개요
  17. 2006/11/10 웃음과 거리 (2)
  18. 2006/11/09 엠마(Emma)의 눈과 단일한 시간, 그리고 다양성의 공존의 목록 (4)
  19. 2006/08/30 추상이란 무능력을 의미한다 (3)
  20. 2006/08/19 베르그송(Henri Bergson): 예술과 현실 (1)

벤야민(Walter Benjamin)의 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한 국왕이 어릴적 맛보았던 산딸기 오믈레트를 다시 맛보고 싶어, 유능한 요리사를 불러 명령하였다.

50여년 전 짐의 선왕은 동쪽에 있는 나쁜 이웃 왕과 전쟁을 했었지. 그때 그 왕이 싸움에 이겨 우리들은 도망을 쳐야만 했어. 그래서 우리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도망을 쳐 드디어 어느날 어느 어두컴컴한 숲속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때 우리는 숲속에서 길을 잃어 허기와 피로에 지쳐 거의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어느 조그만 오두막을 발견하게 되었지. 그 오두막에는 한 노파가 살고 있었는데, 그 노파는 뛰어나와 우리를 반기면서 손수 부엌에 나가서 곧 무엇을 들고 나왔는데, 그것이 바로 산딸기 오믈레트였어. 내가 이 오믈레트를 한입 입에 넣자마자 나에겐 기적처럼 힘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고, 또 새로운 희망이 샘솟는 것 같았어. . . . 그러나 짐이 훗날 이 요리가 생각이 나서 짐의 전 제국을 뒤져 그 노파를 찾아보게 했지만 그 노파는 물론이고 그 노파의 산딸기 오믈레트를 요리해 줄 만한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어. 그대가 만약 짐의 이 마지막 소원을 성취시켜 준다면, 짐은 그대를 사위로 삼아 이 제국의 후계자로 만들걸세. 그러나 만약 나의 기대를 만족시켜 주지 못하면 그대는 죽어야만 하네.(『벤야민의 문예이론, 민음사, 2000, 24-25쪽)

그러나 요리사는 한참을 생각 하더니 다음과 같이 말을 하였다.

폐하! 정 그러시다면 교수형리를 곧장 불러주십시오. 물론 저는 산딸기 오믈레트 요리법과 하찮은 냉이에서 시작해서 고상한 티미안 향료에까지 이르는 모든 양념을 훤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오믈레트를 만들 때 어떻게 저어야 마지막 제 맛이 나는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폐하! 저는 죽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제가 만든 오믈레트는 폐하의 입에 맞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폐하께서 그 당시에 드셨던 모든 양료(養料)를 제가 어떻게 마련하겠습니까? 전쟁의 위험, 쫓기는 자의 주의력, 부엌의 따뜻한 온기, 뛰어 나오면서 반겨주는 온정, 어찌 될지도 모르는 현재의 시간과 어두운 미래--이 모든 분위기는 제가 도저히 마련하지 못하겠습니다.(같은책, 25쪽)

결국 요리사는 목숨은 건졌지만 파면되고 말았다. 사람들은 간혹 벤야민을 신비적이라고, 독일인 답지 않다고 말들을 한다. 그들이 주로 객관화된 현실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벤야민의 글에 짙게 배인 베르그송의 영향탓이 아닐까 싶다. . . 아우라! 잘라내거나 요약할 수 없는 그 잠재적 시간!

Posted by huun

1. 베르그송: 실제의 운동을 양적으로 재구성하는 환영으로서 영화

우리는 운동을 공간의 이동과 관련지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특정한 물체가 하나의 공간에서 다른 하나의 공간으로 이동하거나, 특정한 공간이 다른 공간들 사이를 주파하거나 겹치고 뒤덮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운동은 공간들의 결합과 위치 이동에 의해 재구성될 수 있는 것으로 정의된다. 예로, 직선상의 점들을 통과하는 것으로 운동이 정의되고 나면, 이제 다시 이 점들의 결합을 상상하거나, 하나의 점에서 다른 하나의 점으로의 이동을 사유함으로써 운동을 재구성할 수 있는 것이다. 이로써 운동과 공간은 양태를 서로 달리하는 동일한 실체가 된다. 운동은 공간의 이동이며, 운동 중에 있는 특정한 순간은 공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움직이지 않는 그 특정한 순간들을 결합하면 최초의 그 운동이 재현될 수 있는 것일까? 베르그송에 따르면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우선, 운동을 공간의 이동과 동일화하는 것은, 움직이지 않는 순간이나 특정한 위치에 추상적인 연속 개념만을 추가한 것일 뿐이다. 연속하지 않는 두 점을 연속하는 것으로 취하기 위해 두 점 사이에 놓여있을 무수한 점들을 설정하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를 위해 연속이라는 개념을 추가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뿐이다. 이 관점에서 운동과 공간은 실질적인 차이가 없다.

운동과 관련하여 베르그송의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그 무수한 직선상의 점들을 실제로 통과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불연속하는 계기들이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연속을 갖기 위해서는 이 계기들간에 존재하는 새로운 양태가 필요하지 않을까? 만일 운동이 움직이지 않는 단편이나 공간화된 위치를 통해 유추된 것이라면, 공간과의 실제적인 차이는 무엇에 근거하는가? 이와 같은 베르그송의 질문은 존재와 관련하여 보다 근원적인 논의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우선적으로 이 질문은 운동과 공간이 실질적인 차이를 갖는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에 따르면 운동은 공간의 이동이 아니라, 공간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운동은 언제나 실제적 지속 안에서만 발생한다. 그리고 이 실제적 지속이 바로 질적 차이를 의미한다. 베르그송은 처음에 매우 단순한 동기에서 시작하였을 것이다. 아킬레스는 어떻게 앞서가고 있는 거북이을 추월할 수 있을까? 철학은 아킬레스의 운동을 무수한 점들의 통과로 이해함으로써, 아킬레스와 거북이 간에 놓여진 거리를 해소할 수 없는 심연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의 경험과 모순적이다. 아킬레스 뿐 아니라 모든 존재들의 거리가 실제로 좁혀져 추월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는 이 모순을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논제를 던진다: 아킬레스의 운동(그리고 거북이의 운동)은 둘 간에 놓여진 공간의 이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과 거북간의 관계 전체, 다시 말해 아킬레스와 거북의 관계를 포함하고 있는 공간적, 시간적, 더 나아가 우주 전체의 변화를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그 운동은 점들의 단순한 통과가 아니라, 점들의 배열 자체, 혹은 이 점들이 포함되어 있는 좌표계 전체의 변화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실질적 차이의 의미이다. 나의 한발의 운동은 나를 둘러싼 우주 전체의 변화이다.

운동은 공간을 지나가면서 매 순간 공간을 감싸고 있으며, 시간적으로 현재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이질적이며 환원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운동은 분리될 수가 없고, 분리하기 위해서는 분할되는 매 순간들의 질적 변형이 요구된다. 반면에 공간은 시간적으로 과거이며, 동질적이다. 따라서 하나의 점과 다른 하나의 점은 질적인 차이가 없고 단선적이다. 공간은 쪼갤 수 있고 분할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운동과 공간의 질적 차이는 다음과 같은 명제를 함축하고 있다: "우리는 공간 속의 위치들(positions) 또는 시간 속의 어떤 순간들을 가지고는 운동 자체를 재구성할 수 없다"(Deleuze 1). 따라서 베르그송에 의하면 운동에 관한 두 가지 공식이 서로 대립을 이루고 있다. (1) 분할할 수 없는 매 순간의 질적 변형으로서 실제적 운동 혹은 지속 (2) 분할 가능하고 불연속하는 단편들의 집합과 사유에 의해 구성된 시간으로 이루어진 공간적 운동.

베르그송에 의하면 우리의 지각은 실제의 흐름이나 운동을 신체의 물리적 장치를 통해(감관, 신경계 등) 혹은 지식의 장치(사유)를 통해 스냅샷을 찍듯이 외부의 자극을 수용한다. 지각은 실제의 운동을 자르고 재연결하는 일련의 메커니즘을 갖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의 운동을 잘못된 형식으로 재현하는 것으로서, 베르그송은 이를 『창조적 진화』에서 영화적 환영(the cinematographic illusion)이라 불렀다. 따라서 영화는 두 수준의 형식적 운동을 통해 구성된다. (1) 이미지라고 불리는 순간적인 파편들이 있으며, 이 파편들은 공간적으로 결정된 움직이지 않는 이미지이다. (2) 이 파편들을 연속하는 것으로 만드는 영화적 장치들의 운동이 있다. 이 운동은 비인간적인 운동이며, 단일하고도 동질적인 운동, 즉 추상화된 운동이다. 따라서 이것은 지각되지 않으며, 지각을 넘어선 형식적 운동이며, 공간화된 시간이다. 예를 들어 장치의 속도의 증감에 따라 이미지들의 연속적 운동의 양태는 전혀 다르게 지각될 것이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영화는 그 자체로 움직이지 않는 단편적인 이미지들을 외적 장치에 의해 연속의 환영을 만들면서 운동을 재구성한다. 그래서 영화는 운동을 직선상의 점들의 통과로 이해하는(제논의 역설) 고대적 사유방식과 다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영화가 재현하는 운동은 잘못된 운동의 전형이다.

2. 운동을 재 구성하는 두 가지 유형

『창조적 진화』에서 베르그송은 운동을 양적으로 재구성하는 두 가지 방식에 대해 언급한다. 이 두 방식 모두 실제의 운동 자체와는 관계가 없다.

(1) 고대철학에서 운동은 지성이 파악할 수 있는 요소들과 관계하면서 나오는데, 이는 사물로부터 초월하여 그 본질을 표현하는 형상이나 이데아의 질서에 의해 가능하다. 예로, 물은 차가운 상태와 뜨거운 상태만이 포착될 뿐이다. 상태들간에 놓여진 무수하고도 실제적인 이행은 지성이 파악할 수 없으므로, 물 온도의 운동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운동은 변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것들의 추상적 종합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형상은 물질의 실제적 흐름과 관계하면서만 현실화되는 것이지만, 지성이 관심을 갖는 것은 실제의 흐름 자체가 아니라, 이들이 본질로서 드러나는 최종적 계기 혹은 특정한 순간(차가운 순간 혹은 뜨거운 순간)이다. 그리고 이 특정 순간들을 이상적으로 종합함으로써, 운동을 변증법적 질서에 따라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운동은 하나의 형상에서 다른 하나의 형상으로 규칙적이고도 단속적인 이행의 형식으로 구성된다. 운동은 물질의 흐름이 아니라, 사유에 의해 연역되어 초월적 질서를 갖는 포즈(pose) 혹은 특정한 순간들의 질서가 되는 것이다.

[고대 철학에서] 형상들 혹은 관념들은 본질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하나의 특정한 순간으로 특징지어진다. 이 순간의 나머지들은 이행으로 채워져 있으며, 형상이나 이데아는 이들의 운동 자체에는 관심이 없고, 다만 하나의 형태에서 다른 하나의 형태로의 이행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는다. [. . .] 따라서 그 순간은 최종적 순간 혹은 정점(telos, akme`)으로 간주되며, 이 정점은 본질적 순간으로 결정된다: 이 순간은 사물의 전체과정을 표현하기 위해 언어에 의해 포착된 순간이다. 또한 과학은 그 순간을 특징짓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 된다(Bergson 359).


실제의 운동을 변증법적 질서로 대체하는 것은, 이행이 완결된 것으로 간주되는 포즈의 이상적 종합이다. 이것은 공간 사이에 추상적 사유의 운동을 추가하는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운동을 재구성하는 고대적 방식은 자연적으로 주어진 지각과 관계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인간화된 관점 속에서만 확립될 수 있다. 지성을 이루고 있는 지각은 실제의 운동을 완전히 포착할 수 없으므로, 개념상 본질적이라고 파악되는 특정한 요소들을 뽑아내어 그 전체를 요약하고 재구성한다. 운동에 관한 고대적 재구성을 추상적 요약 혹은 초월적 종합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2) 현대과학은 이행이 종결된 특정 상태 혹은 본질의 순간을 통해 운동을 이해하지 않는다. 즉 운동은 더 이상 포즈들의 변증법적 종합에 의해 연결되지 않는다. 현대 과학은 자르고 재 연결하는 양적 메커니즘을 통해 운동을 불특정한 순간으로 재구성한다(이것이 테크놀러지의 심화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따져봐야 할 것이다). 물론 이 역시 운동을 양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긴 하지만, 더 이상 형식적이고 초월적인 요소들이 아니라, 물질적 흐름의 내재적 요소들(즉 파편들)로 재구성되는 것이다. 완결된 형상으로서 포즈들이 변증법적으로 구성되기 위해서는 이 포즈들간의 단절된 간극에 외적인 요소들(추상, 관념)을 끌어 들여야 한다. 그러나 현대적 의미에서 파편적인 요소들을 재구성하는 것은 운동 그 자체를 미분하여 축적하려는 노력이다. 즉 운동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순간들(불특정 순간들)을 표현하는 것이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순수)지각은 물질과 동일한 실재성을 갖는다. 또한 지각은 물질의 운동을 그 자체 내에서 전달하고 끊는다.

이런 식으로 하나의 궤도와 그것이 가로지르기 위해 필요한 시간의 관계를 결정함으로써 현대 천문학이 형성되고(Kepler); 떨어지는 물체가 갖는 시간에 뒤덮힌 공간을 연결함으로써 현대 물리학이 형성되고(Galileo); 현대 기하학은 평곡선의 방정식, 즉 움직이는 직선 위의 임의의 한 점의 위치를 [공간과 시간의 함수로]풀어냄으로서 성립된다(Descartes); 그리고 무한히 접근하는 면들을 검토하게 되면서 미적분학이 나온다(Newton과 Leibniz). 어디를 보든지 불특정한 순간들의 기계적 연속이 포즈들의 변증법적 질서를 대체한다: "현대과학은 우선적으로 시간을 독립변수로 간주하려는 열망에 의해 생겨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Deleuze 4). [ ]괄호는 필자


현대적 의미에서 운동은 그 물질적 요소들(감각적 요소와 같은 불특정 순간)의 기계적 연속으로 구성된다. 이에 따르면 운동은 이행하는 임의의 점(편재된 점)들을 감각적으로 포착하여 같은 거리로 균등 분할한 이 요소들을 적분한 총체를 의미한다. 그것은 더 이상 포즈의 종합이 아니다. 현대적 의미의 운동은 자연적 지각과 관계하지 않으며, 따라서 비인간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무차별적인 공간의 분할과 재 연결 혹은 양적인 것들간의 관계의 법칙에 의해 이루어진다. 운동의 현대적 재구성을 감각적 미분 혹은 내재적 분석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운동을 두 방향에서 설명해 왔다: 하나는 지적인 요소들의 개념적 종합으로서 변증법적 방식. 다른 하나는 감각적 혹은 물질적 분석에 의해 즉각적으로 포착된 불특정 순간을 미분하고 적분함으로써 구성하는 해석학적인 방식.

운동을 구성하는 방식에 있어 저 두 번째 방식을 따른 것이 바로 영화이다. 영화는 운동이 완결된 특정 순간이 아니라, 운동 중에 있는 불특정 순간을 잘라낸다. 다시 말해 그것은 시간이 생략된 단편이 아니라, 흐르고 있는 시간에서 임의의 구역을 잘라내는 방식이다. 영화의 결정적인 조건으로서의 스냅 샷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이점에 있어서는 영화와 사진의 근본적인 차이를 발견하기 힘들 것이다. 따라서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운동-이미지의 불특정한 어떤 블록이다. 또한 이 블록에는 실제의(시간의) 부피가 내재해 있으므로, 운동은 그 자체로 내재적 성질을 갖는다. 블록은 하나의 순간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베르그송이 지속(dure'e)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실제의 운동과 시간에 스며들어 있는 부피였다. 그 유명한 Muybridge의 말 촬영에서 하나의 예를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말의 운동을 분석하기 위해, 달리는 말을 동일한 간격의 빛으로 포착함으로써, 운동과 빛의 물질적 함수관계를 시간으로 매핑(mapping)한다(달리는 말은 카메라에 연결된 줄을 끊고, 끊어진 줄은 말의 운동 간격에 따라 카메라의 셔터를 누른다). 이때에 잘려진 단편은 지적인 요소로 추상화된 하나의 상태가 아니라, 물질적 요소들로 채워져 실제의 부피를 갖는 면을 이루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영화는 실제의 운동을 쏙 빼놓은 포즈들의 결합이 아니라, 꽉 들어찬 시간의 어느 한 구역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영화가 근본적으로 유물론에 그 존재론적 토대를 두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운동의 단편에 관한 이 같은 영화적 해석은 운동을 전혀 다른 수준에서 정의하게 한다. 우선 운동을 설명하는 두 유형 중에서 전자의 경우, 즉 고정된 순간이나 그 단편으로부터 설명하는 방식은 운동의 발생 근거를 그 자체에서가 아니라 외부적 결정요인에서 찾는다. 추상적인 하나의 점이 운동성을 갖기 위해서는 다른 형태의 추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즉 시간적 부피나 평면으로부터 설명하는 방식은 운동의 발생 근거를 그 자체 내에서 찾는다. 시간의 부피를 갖는 이 블록들의 간격 사이에는 다른 외재적 힘이 들어갈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운동은 재현되는 순간 전혀 다른 것으로의 질적 변형이 일어나므로, 우리는 그것을 자를 수도 없으며 재현할 수도 없다. 다만 양적인 냉각만이 있을 뿐이다. 운동을 재현하는 두 형식을 다음과 같이 구분해보자: 회화적 방식으로서 초월적 요약. 그리고 영화적 방식으로서 내재적 냉각. 전자의 경우 운동 그 자체는 생략되고, 후자의 경우에는 그 자체로 얼어붙는다.

3. 들뢰즈: 운동-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영화

베르그송이 말했듯이 우리의 지각이 지식이나 신체의 장치를 통해 실제의 운동을 단속적으로 잘라서 이를 재구성하는 것이며, 이를 영화가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눈을 깜빡거리면서 언제나 영화를 찍고 있는 것인가? 혹은 우리가 스크린을 보면서 실제로는 눈앞에서 움직이는 사물의 동작들을 사유하고 있는 것인가? 현상학자들을 모호하게 언급하면서 들뢰즈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영화는 자연적 지각과 두 가지 점에서 다르다. 또한 이 차이는 운동과 관련하여 영화를 새로운 국면에 위치시킨다.

(1) 영화는 운동이 (사유에 의해)부가된 이미지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운동하는 이미지와 운동 그 자체의 이미지를 제시한다. 영화가 단편적인 필름 조각(photogramme)들을 결합하여 일정한 속도(24/sec, 18/sec)를 갖는 장치를 통해 연속의 환영을 만들어내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우리가 영화를 통해 보는 것은 각각의 조각들이 아니다. 우리는 그 조각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이미지를 보는 것이지 그 조각들 자체를 보지는 않는다. 따라서 단편적 조각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운동은 우리의 지각이나 사유를 통해서가 아니라 이미 영화적 장치에 의해 실현되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영화에서의 이미지는 사유에 의해 운동이 추가된 것이 아니라, 이미 운동이 내재하고 있는 이미지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평균 이미지(intermediate image)이며, 이 평균 이미지에 운동이 부가되거나 추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즉각 주어진 것으로서 평균 이미지에 운동이 속하게 된다"(Deleuze 2). 자연적 지각에서 운동은 지각의 대상 뿐 아니라 지각을 가능케 하는 조건들에 의존해 있다. 현상학자들에 따르면 지각의 주체는 이미 세계 안에 존재하고 있는 실존이다. 이것이 바로 주체의 세계-내-존재, 세계에의 정박, 혹은 의식의 열림을 가능케 해주는 실존의 근거들이다. 이로써 지각은 곧 존재를 포함하는 세계를 의미한다. 그러나 영화적 지각에서의 운동은 이 대상들과 조건에 관계없이 그 자체 내부에서 즉각적으로 운동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다시 말해 영화는 주체의 실존적 조건으로서 세계의 지평을 배제함으로써 대상들을 빼고 그들로부터 운동의 순수 이미지만을 추출해 낸다. 이로부터 세계는 그 자신의 이미지가 되거나, 나아가 지각 뿐 아니라 하나의 앎의 형식이 되어 버린다(현상학은 자연적 지각을 우위에 두고 영화적 운동이 자연적 지각의 조건에 맞지 않기 때문에 영화를 비판했다. Deleuze 57을 참조하라). 영화는 우리에게 운동이 부가된 이미지가 아니라 즉각적으로 운동-이미지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연적 지각과 영화적 지각은 질적으로 다르다. 우리가 스크린을 통해 보는 것은 사물의 움직임이 아니라, 이미지의 움직임이며 동시에 움직임의 이미지이다: "영화는 하나의 단편(단면)을 제공하지만, 여기서의 단편은 움직이고 있는 단편이지, 움직이지 않는 단편 + 추상화된 운동이 아니다"(Deleuze 2). 자연적 조건들을 넘어서는 운동-이미지는 영사장치의 속도에 의해 이미지의 운동양태가 달라진다는 점만을 보아도 알 수 있는 문제이다.

(2) 영화는 고정된 관점을 취하는 자연적 지각과는 전혀 다른 메커니즘으로 운동을 생산한다. 물론 영화는 초기에 자연적 지각과 다르지 않았다. 우선 관점(카메라)이 고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때의 쇼트는 그 안에 배열되어 있는 부분 대상들이 점유하고 있는 텅 빈 공간, 혹은 데카르트적 공간처럼 구성된다. 영화 초창기의 프레임은 일종의 좌표계처럼 설정되는데, 따라서 쇼트는 공간적이었고 부동적인 것이었다. 또한 촬영 장치 역시 영사장치와 결합되어 있었으므로, 배치된 사물들을 포함하고 있는 단일한 하나의 추상적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영화의 본질과 그 자신의 고귀함은 카메라가 이동하게 되면서부터 획득하기 시작했다. 카메라의 이동은 고정된 관점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공간의 이동이나 확장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카메라의 이동은 두 차원에서 실행되는데, 하나는 카메라의 실제적인 이동(트래킹 쇼트나 패닝 등)이며, 다른 하나는 쇼트의 편집(몽따쥬)이다. 전자의 경우 운동은 지각과 완전히 분리된 형태는 아니다. 카메라는 마치 우리의 눈이 그렇게 하듯이 사물들을 포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근본적인 수준에서 공간적 범주에 속했던 쇼트가 시간적 범주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선 몽따쥬에 의한 공간적 비약은 (관객의)지각으로 하여금 시간이라는 변수를 개입시키도록 강요한다. 쇼트 A와 쇼트 B의 이질성은 공간 뿐 아니라 시간적 변수에 의해 연속성을 갖게되는 것이다. 또한 몽따쥬는 프레임 안에 위치하고 있는 사물들을 배치하는 좌표계 자체의 이동과 변화를 의미한다. 몽따쥬는 좌표점들간의 공간적 운동이 아니라 좌표계 자체의 운동을 실현하는 것이다. 쇼트 내에서 움직이지 않고 정지해 있는 인물이나 사물을 보여주는 경우에도, 쇼트의 편집은 시간적 변화를 내포하고 있다. 쇼트가 시간적 범주가 됨으로써 영화에서의 운동은 이제 인물이나 사물들간의 이동이나 위치에 종속되거나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들을 운동과 변화 속에 종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영화는 운동의 공간이 아니라 공간의 운동을 생산한다. 몽따쥬는 현실을 하나의 시점에서가 아니라 다양한 관점에서 탐구하는 것인데, 이로부터 시간은 클로즈-업 되어 현실의 심오한 내적 시간이 획득된다. 여기에 "적극적 관찰자(active observer)"(Pudovkin 82)라는 개념을 사용한 푸도프킨의 좋은 예가 있다: 몽따쥬는 거리의 데모를 구경하기 위해 지붕 위에 올라가서, 다시 군중이 들고 가는 플래카드를 읽기 위해 창가로 내려오고, 군중들의 표정을 느끼기 위해 그 속에 섞인다.

베르그송은 존재 일반을 포함하는 단일한 하나의 지속이 아니라 존재들 각자에 스며든 다양한 내적 지속을 주장했는데, 그가 『창조적 기억』에서 언급했듯이 영화는 잘못된 운동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가 주장했던 지속의 다양성을 영화가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4. 운동-이미지란 무엇인가?

시간과 관련하여 사진은 수학적 의미의 점의 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은 시간의 모든 지속을 제거해버린 하나의 추상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화석의 이미지이다. 따라서 사진은 시간의 실질적인 부피나 두께를 가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영화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베르그송이 말했듯이, 영화의 실제적 조건인 스냅사진들의 결합(동일한 간격을 갖는)과 연속은 잘못된 운동을 보여주는 것이므로, 영화 역시 시간이나 운동과 관련하여 화석의 이미지라고 말할 수 있을까? 베르그송이 영화를 추상적 점들의 결합으로, 그리고 운동의 환영으로 이해하면서 이를 비난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영화를 사진과 관련지어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에 대한 이와 같은 형태론적 접근에도 불구하고, 베르그송은 이미 『물질과 기억』에서 사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운동을 구현하고 있는 영화적 운동을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 책 1장에서 사유와 운동의 이원론적 대립의 해소라는 주제를 위해 그가 설정했던 "이미지"의 개념을 영화가 가장 잘 예증해주고 있다.

의식은 공간에 펼쳐지지 않은 질적인 표상이며, 물질은 공간 속에서 양적으로 펼쳐진 운동이다. 이제 의식과 사물 혹은 표상과 운동이라는 서로 다른 두 질서가 마주보고 있다. 적어도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적인 구분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두 질서의 이행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에 있다. 지각에서와 같이 연장성을 갖는 물질의 운동이 어떻게 비연장적인 표상으로 이행할 것인가? 반대로 (가능한)행동에서처럼 표상이 어떻게 운동으로 전환될 것인가? 관념론과 유물론의 해소할 수 없는 이 대립은, 동일한 문제를 서로 다른 방향에서 출발함으로써, 사유의 표상과 물질의 운동을 서로 도달할 수 없는 심연으로 만들어 놓았다. 따라서 유물론은 순수한 물질의 운동을 가지고 의식의 질서를 재구성하고자 한다. 표상은 물질적 운동으로부터 비롯된 비 실재적 효과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지각이 표상한 내용은 물질의 외양에 불과한 것이며, 물질의 심층에는 지각과는 독립하여 질적으로 다른 무엇인가가 존재한다. 반대로 관념론은 의식 안에서의 순수한 이미지들로 우주의 질서를 재구성하고자 한다. 이에 따르면 잠재적 표상 안에 이미 운동이 존재한다. 같은 말이지만 물질은 우리의 지각 안에서 구성되고, 표상은 물질의 본질을 결정하는 것이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관념론과 유물론은 너무 덜 나아갔거나 혹은 너무 나아갔다. 이들은 각각 실재하고 있는 하나의 질서만을 긍정하고, 다른 하나의 질서를 전자의 부정으로서 즉 파생실재로 결정함으로써, 두 질서를 이원론적으로 구성하였다. 이로부터 의식과 사물은 접근할 수 없는 심연을 사이에 두고, 표상은 그 자신의 이미지 안에서 물질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 반대 역시 어떠한 실재로 나아가지 못한다. 우리는 이로부터 물질을 표상으로 망상하거나, 혹은 물질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가 없게 된다. 이렇게 해서 정신은 우리 자신의 영역으로 제한된다: "우리가 취하는 지각으로 물질을 환원하는 것이나, 사물이 그 자체 다른 본성을 갖는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지각 안에서 생산될 수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은 모두 오류"이다(Bergson Matter and Memory xi). 따라서 베르그송은 정신과 물질이 어떻게 접면을 이루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필요했으며, 표상과 운동 그리고 의식과 사물의 이원론을 극복해야만 했을 것이다. 『물질과 기억』의 서문 첫줄에서 베르그송은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정신의 실재와 물질의 실재의 긍정. 그러나 어떻게 서로 다른 심연이 관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실제로 사물들을 접하고 있으며, 우리의 내부에서 이들을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또한 이 둘을 너무 멀리에 놓음으로써 주관적 경험이 객관적 질서와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를 잃어버린 것이 사실이 아닌가?

가설적 이론이 직접적인 체험과 일치하지 않거나 이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게 되었을 때, 필요해지는 것은 경험을 설명해줄 수 있는 새로운 기제를 연역하는 일이다. 표상과 사물의 관계를 분명히 하기 위해, 베르그송은 『물질과 기억』의 1장에서 두 가지 이례적인 이론을 언급하고 있는데, 하나는 이미지에 대한 새로운 가설이며, 다른 하나는 새롭게 정의된 이미지와 관계하는 지각에 대한 가설이다. 이런 점에서 그 책 1장에서의 이론은 문제를 두 방향에서 접근하고 있는 셈이다. 하나는 물질-운동의 관점에서 시작하는 방향이며, 다른 하나는 지각의 관점에서 시작하는 방향이다.

(1) 나타나는 모든 것들의 집합을 이미지라고 부르자. 그에 따르면 이미지는 물질과 동일한 것이다. 물질은 이미지의 집합이며, 반대로 이미지는 물질의 집합이다. 나아가 우리가 우주라고 부르는 것 역시 이미지의 총체로 이루어져 있다. 이미지에 관한 이 정식은 심리학의 역사에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즉 이것은 이미지가 더 이상 의식 안에 존재하고 있는 비연장적인 표상이 아니며, 물질 역시 의식적 표상으로서의 이미지와 근본적으로 구분되어 주관성으로부터 초월적인 신비물이 아님을 함축하고 있다: "물질은 이미지들의 집합이다. 우리가 말하는 이 이미지란 말하자면 관념론자들이 말하는 표상보다는 더한 존재이며, 유물론자들이 말하는 사물보다는 덜 한 존재이다. 즉 그것은 사물과 표상의 중간에 위치한 존재이다. 물질(이미지)에 대한 이 개념은 매우 단순하고 상식적인 것이다"(Bergson Matter and Memory xi). 관념론은 사물을 가깝게 놓기 위해 그것을 정신과 동일시했으며, 유물론은 정신으로부터 독립된 질서 속에 그것을 놓음으로써 우리로부터 너무 먼 곳에 사물을 놓았다. 사물이 우리의 정신 안에만 있는 것이라거나 혹은 우리가 지각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독립된 것이라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그러니 상식의 수준에서 그 사물은 그 자신 안에 존재하며, 반면에 우리가 그것을 지각함에 따라 하나의 이미지가 된다. 따라서 이미지는 의식적 지각 안에 존재하는 표상일 뿐 아니라 사물과 본성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다. 이미지는 우리가 사물을 지각하는 바대로 거기에 혹은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 이미지가 물질과 표상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가 지각하는 대상이 사물이며 세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미지, 즉 물질은 곧 우리의 지각이며, 그 내부에 혹은 그 배후에 어떠한 심층도 내포하고 있지 않다.

우주를 이루고 있는 이미지들 각각은 서로 다른 이미지들에 작용하고 반응한다. 오히려 각각의 이미지는 그 자신이 작용이며 동시에 반응이다. 이들은 서로 주고받는 운동을 통해서 스스로를 변형시키며, 다른 이미지들을 통과시키고 통과한다. 심지어 모든 사물 즉 이미지들은 자신들의 작용이나 반작용과 혼동되어 표면화된 운동을 이루고 있다: "이 모든 이미지들은 그들의 기본적인 부분들 속에서 다른 이미지에 작용하고 반응한다. 이 상호작용은 내가 자연의 법칙이라고 부르는 끊임없는 법칙들에 따라 작용하며, 이미지들의 미래는 그들 현재 안에 포함되어 있으며, 거기에 새로운 어떤 것도 첨가되지 않는다"(Bergson Matter and Memory 1). 또한 이미지는 우리의 외관에 주어진 원자적 실체로서만 정의되지 않는다. 우리의 신체 역시 물질이며 이미지이다. 우리의 두뇌, 신경, 기관, 세포, . . . 이 모든 것들은 이미지이며, 우주를 이루고 있는 이미지 총체의 부분들이다. 따라서 나의 몸은 쉼 없이 증식하고 소멸하며 변형이 이루어지는 분자-이미지와 원자-이미지들의 집합이다: "이것은 보편적 변이의 세계, 보편적 파동, 보편적 물결(파문)의 세계이다: 거기에는 축도, 중심도, 좌/우도, 상/하도 없다. 모든 이미지들의 이와 같은 무한한 집합은 일종의 내재성의 표면(plane of immanence)을 이루고 있다. 이 표면 위에서 이미지는 그 자체로 존재한다. 이러한 이미지의 즉자성. 이것이 바로 물질이다: [물질은] 이미지의 배후에 숨겨진 어떤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이미지와 운동의 절대적 동일성이다. 이미지와 운동이 동일하다고 간주되는 순간 우리는 즉시 운동-이미지와 물질이 동일하다고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 . . 운동-이미지흐름-물질은 분명히 동일한 것이다"(Deleuze 58-59).

(2) 그렇다면 중심이나 심층이 없이 부분적인 이미지들 각각의 고유한 운동 속에서 내재적 표면을 이루는 운동-이미지가 어떻게 하나의 표상으로 혹은 단단한 실체로 구별될 수가 있을까? 또한 물질의 흐름을 누가 구별할 수 있을 것인가? 나의 신체나 두뇌 역시 그 이미지들과 동일한 실재성을 갖는 하나의 이미지가 아닌가? 유물론자들에 대한 베르그송의 비판은 물질이 의식적 표상으로 이행되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으로 집약될 수 있는데, 바로 여기에서 운동-이미지의 또 다른 체계 즉 신체의 지각이 언급되고 있다. 만일 나의 지각이 사라지거나 미약해 졌을 때, 이 이미지-물질의 운동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때 우리는 하나의 특별한 이미지를 보게 된다. 이 이미지는 세계를 이루고 있는 이미지들 중 특정한 유형의 작용을 수용하고, 수용된 이미지들의 운동을 구심신경, 척수, 두뇌, 원심신경, 근육 등과 같은 통로-이미지들을 따라 다시 그 이미지들에게 운동을 되돌려준다. 외부의 이미지들을 선별하고 전달하여 다시 운동을 반사하는 이 특별한 이미지가 바로 신체(두뇌)이다. 나의 신체는 운동을 주고받는 물질 세계 속의 다른 모든 이미지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이미지이다: "우주 일반을 이루고 있는 이미지들이 있고, 내 육체에 근접한 이미지들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내 육체 자체의 이미지가 있다. . . . 나는 물질을 이미지들의 총체라고 부른다. 그리고, 물질의 지각은 이와 동일한 이미지인데, 이것은 내 육체라고 불리는 특별한 이미지의 실제적인 행위에 속한다"(Bergson Matter and Memory 7-8).

운동-이미지가 육체와 관계함으로써 그 운동의 양태는 달라질 것이다. 이들은 우선 육체에 수용되어 육체를 중심으로 상대적인 운동에 들어간다. 육체를 싸고 있는 표면과 관계된 분자운동은 구심신경을 통해 다양한 진동으로 전달되어 중추계로 집결되고, 혹은 두뇌에 도달한 진동은 이런 저런 방식에 의해 원심신경으로, 그리고 다시 각 감각기관 혹은 근육으로 전달될 것이다. 중심을 가지지 않는 이미지의 운동은 중심을 갖는 육체 이미지의 내적인 운동으로 변조를 이룬다. 자신의 고유한 법칙으로 운동하던 이미지들은 나의 육체가 그것에 접근하거나 그것으로부터 멀어지는 정도에 따라, 색, 모양 뿐 아니라 심지어 모든 특질들이 변한다. 지각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러한 분자운동의 내적 이행들 속에서 육체-이미지를 중심으로 배열되고 통과하면서, 내 육체의 위치들을 나타내고 지시하는 일종의 분자운동의 한 기능이다: "이 [내적] 운동은 처음부터 내 육체 안에서 외부 대상의 작용에 대한 내 육체의 반응을 준비하도록 의도된 운동들이다. 육체-이미지는 다만 매 순간 마다 움직이고 있는, 나침반처럼 주어진 특정한 이미지, 즉 주위의 다른 이미지들과의 관계 속에서의 내 육체의 위치를 지시할 뿐이다. . . . 그렇다면 두뇌의 지각 기능이라고 불리는 것과 척수의 반사 기능은 본성상의 차이가 아닌 정도상의 차이만 있을 따름이다. 척수는 수용된 자극을 운동으로 변형한다; 두뇌는 그것을 단순히 초보적인 반응으로 연기시킨다"(Bergson Matter and Memory 8). 따라서 (두뇌의)지각은 정신의 비물질적 표상이 아니라, 물질-이미지의 직접적 운동과 관계한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지각은 분자운동들을 번역한다. 마찬가지로 지각은 물질-운동과 동일한 위상에 있다.

이와 같은 두 방향에서의 논거들은 이미지에 관한 이례적인 진술을 도출해 내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이미지가 취하고 있는 이중적 체계이다. 동일한 하나의 이미지는 두 방향의 지시체계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각 이미지가 스스로 다양해지고, 모든 이미지들이 서로간의 기능으로서, 그들의 모든 면들 위에서 그리고 모든 부분들 속에서, 작용과 반응을 일으키는 하나의 체계가 있다"(Deleuze 62). 우리는 이를 편의상 물적 상태의 이미지, 다시 말해 운동-이미지라고 부른다. 물적 상태는 중심에 의해 가변적인 상대적 변화가 아니라, 그 자신만의 고유한 운동 법칙에 따라 절대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체계를 이룬다. 중심이 없이 부분들 그 자체로 존재하는 체계. 유물론자들에게 있어 이것은 딱딱하고 고집스러우며 포착이 불가능한 물질-신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미지는 또 하나의 지시 체계를 가지고 있다. 모든 이미지 혹은 그 부분들이 "기본적으로 하나의 이미지를 위해 다양해지고, 다른 이미지들의 작용을 그 면들 중 하나에 수용하며, 또 다른 하나의 면 위에서 그 이미지들에 반응하는 체계"이다(Deleuze 62). 이 하나의 특별한 이미지는 바로 육체, 혹은 그로부터 나오게될 지각이다. 육체라는 중심을 갖는 이미지의 체계. 그리고 이 중심의 작은 변화에도 말랑거리고 변덕스러운 이미지의 체계. 우리는 이를 편의상 지각-이미지라고 부른다(이미지의 두 체계에 대해서는 Bergson의 Matter and Memory 12-16쪽을 참고하라). 베르그송은 유물론이 이미지의 첫 번째 체계를 통해 두 번째 체계를 결정했으며, 관념론은 두 번째 체계로써 첫 번째 체계를 정립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두 체계가 어떻게 동일한 실재성으로 관계를 갖는지 설명하기 위해, 이 두 입장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면, 즉 내재적 표면으로서 운동-이미지를 상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세계 일반을 이루고 있는 이미지가 있으며, 이 이미지의 한편에는 물질-운동의 체계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지각-운동의 체계가 있다: "사물과 그 사물에 대한 지각은 동일한 하나의 사물이며, 동시에 동일한 이미지이다. 그러나 이 동일한 이미지는 서로 다른 체계와 관계한다. (1) 사물은 그 자신 안에 존재하는 즉자적인 이미지이며, 다른 모든 이미지들과 작용하고 반응하면서, 서로 완전한 관계를 맺고 있다. (2) 그러나 사물에 대한 지각은 그 사물의 이미지에 틀을 설정하고 초점을 맞추는 또 다른 특별한 이미지[육체]에 관계하면서, 그 사물의 이미지로부터 부분적인 작용만을 수용하고, 간접적으로만 반응한다"(Deleuze 63).

그러므로 물질과 지각은 서로 양적인 차이만을 갖는다. 지각은 물질-운동으로부터 필요에 따라 이러저러한 물질의 면과 선들을 선택한다. 우리는 사물들을 지각하면서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은 이미지들을 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지각은 주관성의 최초의 물질적 상태를 정의하는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각은 이미지들의 집합 중에서 육체가 요구하는 것을 선별하고 그 나머지는 감산한다. 그러나 지각이 사물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이미지라면 사물 역시 지각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물질-운동의 체계 속에서 중심을 갖지 않는 이미지는 다른 이미지들의 면과 선에 작용하거나 반응하면서 그들을 지각한다. 오히려 우리의 지각보다 더 많은 것들을 지각한다. "하나의 원자는 . . . 우리보다 무한히 더 많은 것들을 지각한다. 그리고 그 자신의 한계에서, 최초의 작용들이 일어나는 지점에서, 그 반응들이 도달하는 한계까지, 우주 전체를 지각한다. 사물과 그 지각은 한마디로 말해 포착(prehension)이다. 그러나 사물들은 객관적이고 총체적인 포착이며, 지각은 부분적이며 편파적이며 주관적인 포착이다"(Deleuze 63-64).

바로 이점에서 베르그송은 현상학과 구별된다. 현상학에서 자연적 지각은 세계 내에 위치한 주체의 의식의 열림으로 간주된다("의식은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이다"). 따라서 자연적 지각은 운동-이미지와 본성적으로 차이나는 것으로 간주된 의식이 어떻게 운동-이미지와 관계하는가의 난제를 해결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현상학에서 자연적 지각은 의식의 열림이지 물질의 표면은 아니다. 현상학은 여전히 의식과 물질의 이행을 외재적(초월적) 방식으로 이해했으며, 운동을 포즈(pose)와 연결 지어 생각했다. 베르그송은 유물론과 관념론이 물질과 표상을 서로 대립적인 관점에서 논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간에는 이례적으로 한가지 공통된 가정이 있다고 지적한 바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들이 지각을 순수한 인식의 문제로 간주하고 있다는 점에서였다(Bergson Matter and Memory 17). 이런 의미에서 현상학은 관념론이나 유물론과 마찬가지로 지각을 주관성의 계열에 놓음으로써 여전히 전통적 방법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Deleuze 60). 반면에 베르그송에게 있어 지각은 의식의 열림이기 이전에 이미 물질-운동과 동일한 이미지이다("의식은 어떤 것이다"). 이것은 의식과 사물 나아가 존재에 관한 보다 근본적인 차이를 수반할 것이다. 현상학의 경우 이미지와 운동은 동일한 것이 아니며, 동일한 내재적 평면을 이루고 있지도 않다. 다만 이 두 심층이 서로 열려있기는 하다. 베르그송의 경우 이미지와 운동은 동일한 것이며, 동일한 평면 위에 내재하고 있는 동일한 실재이다. 이미지는 운동이며 그 자체로 하나의 이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운동-이미지는 의식과 물질의 이행을, 나아가 운동일반을 내재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내재성의 면이란 바로 이런 의미이다. 다만 육체와 관계하는 한에서 운동-이미지는 그 양태가 달라질 것이다(들뢰즈는 나중에 이를 지각-이미지, 행동-이미지, 감정-이미지 등으로 분류하였다). 따라서 운동-이미지의 한편에는 지각이 다른 한편에는 물질의 운동이 동시에 내포되어 있다. 운동-이미지는 주관성의 물질적 순간이며 동시에 객관성의 정신적 순간이다. 그것은 그 자체 하나의 이행이다. 주관성과 객관성은 운동-이미지라는 동일한 평면 위에서 하나의 표면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와 관련하여 이 모든 것들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영화의 역사를 훑어보면 사진의 단절과 연속을 포함하는 이미지의 운동이 주요한 관건으로 등장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리피스 이후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영화의 언어 역시 이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운동-이미지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강렬한 효과에 집중하는 것이든, 아니면 표현된 의미에 집중하는 것이든 간에, 이것이 영화적 편집(montage)의 근본적인 질문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영화의 형식뿐 아니라 내용을 이루고 있는 것, 즉 영화의 물질성에 대한 문제가 될 것이다. 우리는 운동-이미지를 물질-운동과 동일한 것이라고 언급해왔다. 그러나 더 구체적으로 혹은 영화적으로 말한다면 운동-이미지는 빛의 운동이 아닌가? 사진으로 되돌아가 말해보자: 피사체의 이미지가 어떻게 감광판에 투사되는가? 지각과 이미지를 의식의 영역으로 제한하는 이론은 언제든지 이 문제를 두뇌의 기적적인 권능에 의해서만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투사된 그 이미지가 실제의 피사체와는 다른 본질(실재성)을 갖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베르그송이 말했던 운동과 지각의 동일한 실재 때문이기 이전에, 이미 우리는 그렇게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물의 표면이 빛을 발하면서 나의 각막이나 피부로 다가온다. 나의 신체로 다가오는 그 운동-이미지를 우리는 빛의 운동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내재성의 면은 모두가 빛이다. 운동, 작용, 반응들의 집합은 여기저기에 편재하는, 저항 없이, 손실 없이 퍼져나가는 빛이다. 이미지와 운동의 동일함은 곧 물질과 빛의 동일함과 다르지 않다. 물질이 빛인 것처럼 이미지는 운동이다. . . . 베르그송이 원했던 것은 . . . 내재성의 면 전체 위에서 발생하는 빛의 분산 혹은 확산의 긍정이다. 운동-이미지에서는 아직 실체나 단단한 선들은 없고 오로지 빛의 선들 혹은 형상들만 있다. 시간-공간의 블록들은 바로 그런 형상들이다. 그것은 즉자적인 이미지들이다. 그것이 누군가에게, 즉 눈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것은 빛이 아직 반사되거나 정지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계속 퍼져 나가지만 결코 드러나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눈은 [의식, 주관이 아닌]사물들 속에, 빛나는 이미지들 자체 속에 있다. 사진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사물들의 내부 자체 안에, 공간의 모든 지점에서 이미 포착되어 있으며 촬영되어 있다"(Deleuze 60). 따라서 우리는 영화의 역사에 있어 영화의 내용을 이루고 있는 문제가 다름 아닌 빛의 문제, 더 심오하게는 어둠의 문제였음을 알게된다. 초창기의 환등(magic lantern)은 촛불과 같은 인공적인 빛을 모으면서 시작되었다. 후에 석회를 백열하는 상태까지 가열시켜서 만든 회광등(limelight)에 의해 전기가 촛불을 대신하게 되었다. 회전 요지경(thaumatrope)은 지각을 왜곡시키는 빛의 잔상효과를 이용해 만들어졌다. 페나키스티스코프(Phenakistiscope), 죠트로프(Zoetrope), 프락시노스코프(Praxinoscope)와 같은 영상장치들은 작은 구멍을 통해 빛을 배열, 분산, 연속, 단절시키는 문제로 집약될 수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사진은 빛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물질을 이용한 것이다.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가 나온 이후, 아크등(arc light)과 렌즈가 추가되었으며, 노출 때보다 더 많은 빛을 모으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 계산되기 시작했다. 에디슨의 약한 확산광을 수정한 것이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래프(Cine'matographe)이다. 영화의 물리적 조건에만 빛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편집과 같은 언어 예술적 측면에서도 그랬다. 예를 들어, 에이젠슈타인은 감각의 몽따쥬를 통해(공감각) 모든 물질-운동을 빛의 형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표현주의자들은 열정의 강렬함을 바로 빛과 어둠의 대위법으로 구성했다. 이뿐만이 아닐 것이다. 영화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운동뿐 아니라, 우선적으로 빛의 물리학으로부터 빛의 예술로 진화한다.

우리가 만일 지각과 운동에 대한 현상학의 논의를 수용한다면 영화가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현상학자들에 따르면 영화는 일종의 의식의 파노라마이다. 영화는 우리가 꿈을 꾸든지 혹은 상상을 하든지, 지각에 의해 포착된 이미지 단편들을 의식 안에서 외부로 풀어내고 있는 일종의 이야기 형식으로서의 릴이다. 그런데 베르그송이 운동과 관련하여 영화를 비난했던 것은 정확히 바로 이것이 아닌가? 운동은 우선적으로 빛과 관련되는데, 의식의 파노라마란 말하자면 사물에 투사되고 있는 의식의 빛이 아닌가? 이에 따르면 물질은 애초에 어둠의 상태였다. 그 존재는 마치 검은 벽에 환등기의 빛이 영사되어 윤곽이 드러나듯이, 의식의 빛에 의해서만 현존하게될 것이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우리는 영사기-의식과 스크린-물질이라는 상보적인 두 개의 항을 도출하게 된다. 영화와 관련하여 누가 보고 누가 지각하고 있는가를 질문한다면, 현상학은 의식의 눈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러한 대답은 사물의 운동에도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베르그송은 이와는 반대이다. 그에 따르면 빛은 의식이 아니라 이미 사물 그 자체 내에서 발하고 있는 것이다. 사물은 조명 빛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빛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영화만큼 잘 보여주는 것이 또 있을까? 마찬가지로 존재의 빛이 아니었더라면 영화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베르그송의 의도는 한마디로 의식의 눈이 아니라 물질의 눈에 있었을 것이다. 들뢰즈는 영화가 "운동-이미지의 첫 번째 체계인 보편적 변이, 총체적이고 객관적이며 모호한 지각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Deleuze 64). 베르그송에 의하면 이 모호한 지각이란 운동-이미지와 관계하는 지각, 엄밀히 말해 아직 기억이 스며들지 않은 의식적 지각 이전의 순수지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영화는 인간의 눈이 아니라, 순전히 기계의 눈 혹은 물질의 눈에 의해 포착된 이미지를 보여준다. 물론 하나의 쇼트에는 아주 많은 주관성의 징후들이 투사되어 있다. 앙드레 바쟁은 하나의 쇼트 내에서도 몽따쥬가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시적 영화(cine'ma de poe'sie)를 언급하면서 파졸리니는 자율적인 주체가 되어버린 카메라가 자의식을 갖게되면서 자유간접적인 주관성을 획득하게 된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하나의 프레임은 이미 주관적 배열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소련의 몽따쥬 대가들, 즉 쿨레쇼프나 푸도프킨 심지어는 에이젠슈타인조차도 주관성의 구성적 효과에 주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쇼트에는 기억이나 사유가 개입될 수 없는 순수지각의 층위가 여기저기에 편재되어 있다. 공중을 활공하는 카메라(예로, 크레인 쇼트)를 보면서, 우리는 어디서든지 사진이 찍히고 있으며, 의식은 어떤 것에 대한 의식이 아니라, 바로 그 자체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지가 베르토프가 선언(Kinoki)했던 골자일 것이다. 따라서 영사기-의식과 스크린-물질이 아니라 영사기-물질과 스크린-의식이라고 해야 옳다. 어떠한 저항도 받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는 운동-이미지 혹은 빛-운동은 단단한 실체로서 밀도 높은 그러나 불투명한 벽에 부딪히면서 그 자신의 이미지를 반사시킨다. 이것이 사진 뿐 아니라 영화의 존재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우주 어디에서든 촬영되고 영사되고 있는 것이다: "그 자체 영화로서의 우주, 메타시네마"(Deleuze 59).

따라서 한 장의 사진이 운동과 시간의 한 점, 즉 화석의 이미지라고 말할 수 있다면, 영화는 면, 그것도 운동하고 있는 면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영화는 화석의 진화, 즉 진화하고 있는 화석 그 자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나의 눈과 그 눈이 바라보고 있는 저 사물 사이에 아무것도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텅 빈 기하학적 공간은 영화에 대해 어떠한 설명도 할 수 없게 만든다. 내 눈과 저 사물 사이에는 무수한 이미지들, 즉 물질-빛-운동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 눈이 혹은 저 사물이 조금만이라도 움직이거나 달라진다면, 눈과 사물간에 놓여있는 꽉 찬 공간 전체의 크고 작은 굴곡이 일어날 것이다. 아킬레스가 거북을 추월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의 눈과 사물 사이의 공간을 냉각시키고 정지시켜 보라. 그리고 거기서 임의의 한 점 혹은 단면을 잘라내어 보라. 아마도 빛의 화석이 고스란히 담겨있을 것이다. 그것은 검은 감광판에 의식을 영사한 것이 아니라, 중심이 없으며 앞-뒤가 모호한 셀룰로이드 판과 같이 그 자체 빛을 내는 투명한 사진이 될 것이다. 사진은 순수지각의 임의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번엔 그 단면을 녹여 보라. 그 투명한 사진은 곧바로 빛-운동, 물질-운동의 집합, 즉 운동-이미지가 될 것이다. 베르그송에게 영화는 잘못된 운동의 전형이 아니라 가장 적절하게 운동-이미지의 예가 되고 있는 것이다.

베르그송이 제기한(오히려 이것은 발명이라고 해야한다) 이미지는, 순간으로 추상화되어 움직이지 않고 고정된 단편이 아니라, 움직이고 활동하고 있는 실질적인 단편으로서의 이미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이것은 보다 심오한 차원에서 시간의 단편이 아니겠는가? 운동-이미지는 보다 심오한 의미에서 시간-이미지와 관계하게 될 것이다. 시간의 실질적 부피는 아무리 잘게 잘라도 수학적 점의 상태로 환원할 수 없는 면이며 덩어리이다(그래서 거기에는 또한 모종의 간극 또는 거리가 내재하고 있다. 이 간극과 거리는 또한 생-이미지를 발생케 하는 조건이 될 것이다. 생명이 결정론으로부터 유일하게 벗어날 수 있는 지점은, 간격이나 거리로 가늠될 수 있는 망설임과 선택의 순간에 깃 든 긴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에 대해서는 Deleuze 62를 참조하라). 그가 제시한 이미지는 지성의 사유에 의해 유추된 부동의 단편적 이미지가 아니다. 그는 이미지로부터 운동과 시간을 배제하지 않았으며, 거기에는 쪼갤 수 없는 공백, 두께 혹은 꽉 들어찬 지속이 스며들어 있다. 이미 우리는 그로부터 정신과 물질의 동시성을 포함하고 있는 부피-이미지를 본 셈이다.

참고문헌

Bergson, Henri. Creative Evolution. trans. Arthur Mitchell (New York: Random House, 1944).

_____________ . Matter and Memory. trans. Nancy Margaret Paul & W. Scott Palmer (London: George Allen & Unwin LTD, 1950).

Deleuze, Gilles. Cinema I: The Movement-Image. trans. Hugh Tomlinson & Robert Galeta.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6.

Pudovkin, V. I. Film Technique and Film Acting. Trans. and Ed. Ivor Montagu. New York: Grove, 1970.

Posted by huun

사진이 표상 예술(회화나 문학과 같은)과 구별되는 요소를 지적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관계하고 있는 재료, 즉 이미지만을 검토해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우선 사진에 사영(寫影)된 사물의 형상은 주관적 의식에 의해 자율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카메라는 빛의 흡수와 반사를 통해 사물의 표면을 복사한다. 빛의 연속 운동은 카메라에 의해 특정한 구역이 절단되고, 이 단편이 일으킨 화학작용으로 인해 하나의 형상이 만들어진다. 빛을 이루고 있는 다수의 질점은 감강판의 특정한 영역으로 이동하고, 이로써 사물과 (사진)이미지의 관계는 기계적 대응이라는 함수를 이룬다. 사진 속에서는 “빛=사물의 표면”이라는 공식이 성립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진을 통해 “빛은 물질의 피부”라는 표현을 비유로서가 아니라 실재로서 대면하게 된다. 어느 모로 보나 사진의 형상(形象)을 이루고 있는 이미지는 의식적 기억이나 사유와 같은 주관성의 자율적 체계에 속하지 않는다. 들뢰즈(G. Deleuze)는 베르그송(H. Bergson)이 『물질과 기억(Matter and Memory)』에서 연역해낸 이미지의 개념을 바로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해석하였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이미지란 물질과 동일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어떻게 지각된 대상을 실제의 사물이며 세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미지에 대한 이 개념은 심리학의 역사에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는데, 즉 이것은 이미지가 더 이상 의식 안에 존재하고 있는 비연장적인 표상이 아니며, 물질 역시 의식적 표상으로서의 이미지와 근본적으로 구분되어 주관성으로부터 초월적인 신비물이 아님을 함축한다.1) 들뢰즈에 따르면 베르그송은 이미지를 빛-물질과 동일한 것으로 정립함으로써, 의식(사유)과 물질(운동)의 이행, 즉 물질이 의식의 표상으로 이행하거나 혹은 의식의 표상이 (행동과 같이) 물질로 이행하는 관계를, 순전히 사진적 의미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진에 포착된 사물은 그림이나 이야기로 투사된 의식의 빛 이전에, 주관적 표상(이미지)의 개입 없이도 그 자신 안에 존재하는 물질로서의 빛 그 자체이다.

사진이 물질의 표면을 기계적 함수로 처리함으로써 형상을 재현했다면, 영화는 거기에 운동과 시간의 형식을 덧붙여 실재의 재현을 완성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꽤 복잡한 설명을 필요로 하는 이 명제는 베르그송의 운동 개념을 통해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베르그송은 운동의 두 수준을 구분하였다. 하나는 운동하는 물체와 그것이 지나간 공간, 그리고 다른 하나는 순수한 질적 강도로서의 운동성 그 자체이다. 고대철학은 운동하는 물체가 지나간 공간과 운동성 그 자체를 혼동함으로써, 운동의 질을 양적인 것으로 대체하여, 실질적인 운동을 동질적 공간 속에서의 물체의 위치 이동으로 바꾸어 놓았다. 예를 들어, 아킬레스는 특정한 위치로부터 출발하여 또 다른 특정한 위치로 이동하고, 다시 특정한 위치에 직면하게 될 것이며, 이는 무한히 계속될 것이다. 운동을 위치의 이동으로 이해하는 순간, 아킬레스는 결코 거북을 추월할 수 없을 것이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고대철학이 아킬레스와 거북의 운동을 결코 해소할 수 없는 심연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서로 질적으로 다른 아킬레스와 거북의 운동성을 단순히 좌표 위에서의 점들의 이동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베르그송은 『창조적 진화』의 제4장 전체에 걸쳐, 영화적 환영(cinematographic illusion)이라는 이름 아래, 영화를 잘못된 운동의 전형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영화를 사진들의 결합이라고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사진들을 결합하고 이를 하나의 운동으로 만드는 장치와 영화를 혼동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영화는 고대철학이 했던 운동의 주관적 재구성을 기계의 양적 이동을 통해(기계론적 착각) 똑같이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는 움직이는 사물로부터 운동성 그 자체는 제거하고, 순전히 기계적인 장치에 의해, 정지된 형상(사진)들의 추상적이고도 양적인 결합만을 유도한다고 간주했던 것이다. 그에 따르면 영화는 실제의 운동이 아니라 장치들의 공간적 위치 이동, 더 정확히는 정신적 추상과 동일한 방식에 의해 재구성된 운동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오히려 영화는 사물들로부터 운동성 그 자체만을 증류해낸 것이 아닌가? 물론 영화가 기계장치의 반복적인 메카니즘으로 작동하는 것은 사실이다. 예로, 운동의 양적인 일관성을 보존하기 위해 필름에 동일한 길이의 구멍을 뚫는다. 그렇게 해서 영화 이미지는 필름조각들을 균등하게 분할된 속도에 따라 처리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영화 이미지에서 운동성의 본질은 필름조각 자체가 아니라, 필름조각들간의 대체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아닌가? 영화에 있어 이미지의 운동성은 움직이지 않는 추상적 점들간의 단순한 위치 이동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속이 공간들 사이에서 발생한다고 말했던 베르그송의 운동개념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 이미지의 운동성이 정신적 추상이 아닌 물질적 분석에 의해 수행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미 사진적 의미에서의 이미지를 언급했던 베르그송이 잘 설명하고 있다. 사진은 운동을 초월적 추상으로 요약한 포즈들의 결합(정신적 결합)이 아니라, 물질-빛의 구역, 즉 운동성의 블록을 보여주고 있다. 사유에 의해 조명된 빛이 아닌 물질-빛 그 자체의 기계적 운동. 이 운동과 지각의 동일성은, 지각=물질=빛의 내재적 관계들을 이루면서, 운동 중에 있는 지속의 부피 자체를 보존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 영화는 실제의 운동(물질)에 대한 분석적 냉각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기계장치가 필름조각들의 시간적 균등분할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가능한 말이다. 사진의 물질성은 곧바로 영화의 운동성으로 확대된다. 그리하여 영화에 있어 이미지의 운동이란 신체나 공간과 같은 다른 모든 부수적인 것들을 제거하고, 순수한 의미에서의 운동성 그 자체만을 고스란히 남긴 이미지이다. 예를 들어, 미소짓고 있는 고양이로부터 고양이는 빼고 미소만을 남기는 것이다. 비록 영화의 재현성이라는 개념으로 오해하기는 했지만, 바쟁(Andre' Bazin)이 영화를 사진적 의미에서 그 고유한 존재론적 위상을 확인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런 의미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영화가 표상예술과 구별되는 점은 영화 그 자체의 존재론 속에서, 그 고유의 존재 속에서 발견되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운동과 물질의 내재적 관계로부터 확립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닌가? 영화는 베르그송적인 의미에서 물질과 동일한 외연을 갖는 이미지이며, 동시에 운동성을 증류해 낸 것으로서의 운동 그 자체이다. 들뢰즈가 영화의 존재론적 위상을 분명히 하기 위해 조합해낸 “운동-이미지”의 개념은 바로 이런 의미이다.

사진과 영화는 유물론적 토대 위에서만 성립 가능하며, 그 자체로 유물론을 예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를 기계 테크놀러지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 토대에 기인한다. 우리의 정신은 테크놀러지를 통해서만 물질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진과 영화에도 회화나 문학에서 볼 수 있는 주관적 요소들이 풍부하게 들어있다. 무대 배치나 조명과 같은 화면의 조형성이 아니었다면 영화는 예술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야기의 형식이 아니었다면 영화는 시간 속에서 체험되는 삶과는 무관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심지어 객관적인 르포르타주에도 이야기는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영화에 있어 근본적인 것은 인간적 의식 이전에 존재하는, 심지어는 주관성의 조건이 되는 물질(의 운동과 시간)일 것이다. 아무 움직임도 없는 하나의 정지된 쇼트를 진정한 회화적 의미에서의 그림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면 거기에는 근본적으로 운동과 시간, 즉 배치된 요소들(인물이나 사물)의 움직임이 배제되는 경우에도 지각을 초과하여 흐르고 있는 모종의 굴곡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스크린의 시간이란, 아킬레스의 한 발이 의미하는 것과 정확히 같은 수준에서, 화면 자체가 이미 우주 전체의 변화를 야기하는, 미세하지만 거대한 파동을 의미한다. 제 아무리 근사한 기획에 의해 가공된 화면구성이라 해도, 또 상상력의 빛이 아무리 찬란하다 해도, 스크린 표면에서 움직이고 있는 저 피사체들과 그 주위를 둘러싼 파동은 마음대로 생략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실재이다. 몽따쥬와 같은 문학적 장치를 통한 허구적 효과 역시 영화의 관점에서는 다른 문제일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영화는 종합 이전에 발생하는 기계적 사영(寫影)의 문제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일찍이 소련의 몽따쥬 유파들―예로, 쿨레쇼프나 푸도푸킨―의 실험들(모주킨 효과나 벽돌쌓기와 같은)은 엄밀한 의미에서 영화적 실험이기보다는 회화적 혹은 문학적 실험이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사영된 피사체들은 실제로 거기에 있었으며, 관객은 그 근원적 시간에 압도되지 않을 수 없다. 영화의 탄생 혹은 진화와 관련하여 초기의 역사를 훑어보면, 한결같이 물질의 제약을 뛰어넘으려는 표현의 방법론적 노력을 발견할 수가 있다. 예술이 직접적으로 물질적 제약에 직면한 예는 아마도 영화(사진적 의미에서)가 초유의 일일 것이다. 영화는 예술이기 이전에 일종의 (빛의)물리학이었던 셈이다.


사유의 측면에서 볼 때, 운동-이미지에 대한 논의는 백지상태로 되돌아가려는 노력의 과정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무것도 쓰여지지 않은 빛의 착란 상태 (지각의 소거로 돌아가려는 베케트에 관한 부분을 들뢰즈가 말한 것 설명해본다) . . . 그런데 왜 이러한 회귀를 언급해야만 하는가? 그 유용성은 어디에 있는가? 사유의 측면이 아니라 실천적 측면에서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 . . (베르그송의 제임스 논문에서 과잉실재가 중요한 이유 . . 표면화 . . ., 미리결정된 것의 소거 . . .등으로 가기위해)/// (그런데 왜 잉여실재를 말하는가? ⇒ 열린 우주를 말하기 위해 . . . 영화가 재현하는 실재는 미리결정된 사유에 의해 구성된 것이 아님을 말하기 위해 . . . 그 순수한 의미에서의 베르그송적인 영화는 이미 베르그송이 비난했던 그 자리에서 생겨나고 있었으며, 그의 생각(창조적 진화)을 가장 잘 보여주는 하나의 예증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바로 주관적 구성에 의해서가 아닐까?)


1) 이에 관한 더 자세한 논의는 Bergson, Matter and Memory의 1장 특히 서문과 Deleuze의 Cinema I p.56-61을 참고하라.

Posted by huun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1.

인간의 내면은 웃음이나 폭소와 같은 비 논리적 표현에 의해 파괴적 계기를 갖는다. 자아의 현실원칙 아래에 구조화된 내면성의 질서들은 인간 본성의 극단적 형태의 분출을 통해 확립된 질서가 파괴되고 새로운 질서로 나아가는 것이다. 울음이나 분노 열정 등과 마찬가지로 웃음과 폭소는 한편으로는 파괴적 본질이 있지만, 다른 한편에는 형성적 힘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파괴적 본성과 생산적 힘이라는 두 극단적 계기가 동시적으로 공존하는 웃음과 폭소는 일종의 변태성(perversity)의 징후라고 할 수 있다. 존재의 의미와 본질에 집중하기보다는 새로운 것이 어떻게 발생하는가에 관심을 두었던 베르그송(H. Bergson)은 웃음이라는 변태성을 선택하여 이 과정을 논의했으며,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바흐친(M. Bakhtin)은 소설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웃음에 대한 짧은 견해를 언급한다. 바흐친의 경우 소설은 특정한 양식으로 정리된 장르이기보다는 무정형적 특성으로서 구 장르의 파괴와 새로운 장르의 생산이 가능해지는 계기로서 논의된다. 그렇다면 확립된 질서에 의해 구조화된 내면성을 파괴하는 계기로서 비논리적인 웃음의 열정과 변태성 속에 내재하는 일반적 구조와 법칙은 없는 것일까?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이것이 이 글이 질문하는 바이다. 따라서 이 글은 표면적으로는 웃음과 그것의 발생적 구조 또는 효과에 관한 논의이지만, 보다 심층적으로는 파괴적 계기와 생산적 계기를 동시에 갖춘 잠재태로서 변태성의 일반적 구조에 관한 논의라고 할 수 있다.


2.

희극성에 관한 독특한 한 논문에서, 베르그송은 웃음에 관계하는 몇 가지 요소들을 제시했는데, 이에 따르면 웃음은 자아의 반성적 기제로서(웃음은 반성으로부터 발생하기도 하며 또한 반성하게 한다), 그리고 무감동(insensibilite')으로부터 환기되는 효과로서, 그리고 사회적 양태로서 공범의식(웃음은 일정한 사회적 코드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을 갖는 등 여러 가지 요소들로 구성된다. 그런데 이 구성 요소들 중 우리의 관심을 끄는 대목은, 웃음이 무감동으로부터 출현한다는 점이다.


베르그송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웃음에 통상 수반되는 무감동에 주의를 환기해야 한다. . . . 무관심은 희극성을 감지할 수 있는 천연의 장소이다. 웃음에서 감정보다 더 큰 적(敵)은 없다. . . . 감수성이 예민하고, 삶과 자신을 일치시키면, 희극성이 사라진다. . . . 공감의 최대화는 모든 것을 중요하게 여기게 하며, 모든 것이 준엄한 색채로 보이며, . . . 무관심한 관객의 입장으로 삶을 보면 . . . 모든 것이 희극적이다. . . . 장중함으로부터 익살스러운 것으로의 이행 . . . 희극성은 순수한 지성에 호소 . . ."(베르그송 14).


무관심은 자아가 대상에 대해 혹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갖는 거리(distance)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내적 거리이기도 하며 외적인 거리이다. 따라서 희극성은 자아와 관련된 의식과 지성에서 나오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은 자기 반성적인 거리를 취함을 의미한다. 웃음은 한마디로 말해 자아가 자기자신(혹은 대상)으로부터 멀어지면서 가능해진다.


베르그송이 웃음의 구조를 정식화하면서 한결같이 두 차원의 존재양식(기계적인 것/영혼적인 것, 경직된 것/유연한 것, 반복적인 것/변화하는 것, 지속/물질, 질료/형상 등)을 구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복에 의해 뻣뻣해진 육체의 경직성과 유연성을 요구하는 상황의 불일치의 경우(17), 곱사등이처럼 신체의 고질이 되어 습관화된 모양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의 경우(28), 감지되기 힘든 움직임을 파악하여 확대함으로써 "형태의 표면적인 조화 아래에 숨겨져 있는 물질의 깊은 반항을 간파해 내고 . . . 여러 형태의 부조화와 변형들을 현실화하는" 풍자화가의 경우(30), 옷과 몸의 부자연스러운 조화 아래에 잠재해 있는 딱딱한 옷과 유연한 신체의 불일치와 대조(39), 움직임과 변화를 계속하면서 유연함을 추구하는 사회와 기존 질서의 판에 박힌 상투적 의례들 간의 충돌과 단절의 경우(44) 등의 예들은 모두가 질료적인 것과 형식적인 것의 불일치, 그리고 유연한 것과 경직된 것의 조화롭지 않음에서 비롯되는 웃음의 근거들이다(주1). 그리고 웃음을 유발하는 이 불일치와 부조화의 근간에는 자아가 세계로부터 거리를 두거나,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두면서 분열된 양상을 띠게 됨을 보게 된다.


3.

베르그송의 논의에서 보게 된 두 차원의 존재양식으로 구성된 웃음의 구조를 종합해 보면 심층과 표층이라는 범주로 요약할 수 있다. 심층은 물질의 깊은 심연에서 정체되어 하나의 구조와 본질을 이루고 있는 반면, 표층은 물질의 표면에서 우연적이고 유동적인 현상을 이루고 있다. 베르그송은 이와 같은 존재의 두 차원을 정신과 물질로 치환해서 이해한다. 구조와 본질을 이루는 심층은 주관적 관념의 양태이며, 우연적 현상을 이루는 표층은 물질의 양태인 셈이다(물론 이 둘의 대당 항을 바꾸어서 묘사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따라서 한 편에는 시간이 정지되어 규칙적인 패턴의 반복이 있으며, 다른 한편에는 끊임없이 흐르며 매 순간 차이나는 지속(duration)이 있다. 이들은 시간의 두 차원으로서, 전자의 경우 주관적 형식의 범주로서, 후자의 경우 물질의 양태로서 시간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물들은 주관적 관념의 형식에 의해 공간적 범주에 고착되기도 하며(뻣뻣이 경화되어 반복적인 패턴을 이루는 것들은 운동의 형식이 공간화된 시간에 고착된 예이다), 물질의 양태로서 변화하는 경험적 시간 속에서 무정형적 성질을 띠기도 하는 것이다(이때에 시간은 변화하는 상황에 의해 체험된 시간이다). 심리적 측면에서 볼 때 심층과 표층의 두 분리된 시간은, 심층의 경우 의도되거나 기억된 내용을 이루며, 표층의 경우 주체의 의도와 기억과는 단절되어 물질의 내용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위에서 언급한 두 존재양식의 불일치에서 비롯되는 웃음은 주관적 관념과 물질의 지속간에 일어나는 충돌과 관계가 깊다. 기계적으로 뻣뻣하게 경화되어 습관화된 외양과 몸짓 등이, 그 반대적인 것으로서 유연하고 자유로운 운동이나 변형과 부딪치면서 발생하는 부자연스러움은 어느 것이든지 우리로 하여금 웃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정신과 물질의 독특한 관계가 출현한다. 우리는 흔히 정신과 물질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정신적인 것은 생명이 없는 물질과는 연결될 수 없다고 믿는다. 자유로운 정신과 그렇지 않은 물질의 분리된 관계는 우리의 관념이 고안해낸 기본적인 이분법적 구조이다. 그러다 보니 둘로 분할 된 두 차원의 존재양식은 안정적 구조 속에 자리를 잡고 각각 자연스러운 영역에 위치하게 된 셈이다. 분리된 관계에 대한 생각 때문에 정신과 사물은 서로를 침해하지 않고 자신만의 고유한 영역을 유지하면서 안정된 구조에 고착된다. 그런데 웃음이 발생하는 순간 이와 같은 안정된 구조는 즉시 파괴되어 버린다. 오히려 정신과 물질이 분리되어 안정된 구조가 파괴되면서 웃음이 발생한다고 말할 수 있다.


두 양식의 충돌로부터 발생하는 부자연스러움은 우리가 믿고 있거나 의도하고 있는 안정된 구조가 파괴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인 것이다. 분리되어 있다고 믿었던 정신과 물질 혹은 생명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의 단절된 관계가 파괴되면서 웃음이 나온다. 다시 말해 웃음은 우리가 믿고 있었던 관념(정신과 물질의 분리된 관계)이 그것에 반(反)하는 이질적인 양태(부조화로부터 나오는 우스꽝스러움)에 의해 도전을 받으면서 나오는 것이다. 좀 더 나아가 우리의 신념은 부지불식간에 물질의 변화와 변형으로부터 파괴되면서, 한편으로는 웃음을 통해 새로운 계기를 긍정하게 되는 계기를 맞게 된다. 의도된 것이 뒤집혀 지거나 우연한 파격(solecism)에 의해 웃음이 발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질은 우리의 사유에 의해 조화로운 질서를 띠게 된다. 주체의 이상과 신념은 무질서한 물질의 세계에 특정한 형식을 부여하면서 의미를 생산한다. 그러나 이 형식이 특정한 계기를 통해 물질의 반항과 충돌하게 되는데, 이 때에 우리는 정신과 물질의 불일치와 부조화를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이 부조화의 순간이 바로 정신의 반성적 계기이다. 반성적 계기를 통해 정신은 세계에 부여하였던 주관적 형식의 실패와 파괴를 경험한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볼 때 주체의 역사는 이상적 망상과 이 망상의 파괴라는 패턴이 진행되면서 자아와 세계와의 관계가 여러 다양한 형태로 증식되거나 변형된다.


이와 같은 두 계기들이 나타났다가 파괴되는 과정의 사이사이에 바로 반성적 계기들이 출현하는 것인데,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반성적 계기의 두 가지 경우가 아이러니와 유머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두 반성적 기제로서 아이러니와 유머는 서로 유사한 발생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아이러니와 유머를 자세히 관찰해보면 언제나 심층적인 것(신념, 의도, 이상 등)과 표층적인 것(물질, 현실, 현상, 리얼리티 등)의 단면화된 불일치를 보게 된다(주2). 따라서 문제는 주체의 관념에서 일어나는 망상과 망상의 실패를 경험하는 반복적인 패턴과 이 연속적 패턴의 단절의 순간에 있다. 웃음이 유발되는 조건으로서 반성적 계기는 이상과 신념에 도취된 자아가 자신으로부터 단절하는 순간에 있는 것이다. 이때에 정신은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필요로 한다. 웃음이 유발되는 구조적 조건으로서 정신과 물질의 불일치 관계를 가능케 하는 정신적 조건이 바로 이 거리이다.


현상들이 불일치하거나 조화롭지 않은 면모를 보면서 그것의 우스꽝스러움을 간파해 내고 웃는다는 것은, 그 현상들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음을 뜻한다. 왜냐하면 서로 모순적이고 대립적인 두 양태 모두를 종합적으로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웃음을 아는 존재는 자아를(혹은 자아가 바라보는 대상은 물론이고) 저 편에서 볼 줄 아는 존재이다. 예술에서 감정이입은 거리를 최소화함으로써 자아가 획득하는 지고한 감정의 나르시스적 순화인 반면에, 웃음은 거리의 최대화를 통해 대상을 포함해서 자아가 자신으로부터 비판적으로 결별하는 통찰이다.


4.

그런데 우리는 소설에 관한 바흐친의 매우 긴 에세이에서, 웃음에 대해 베르그송과는 전혀 다른 논의를 보게 된다. 여기에 그 긴 인용문을 한번 옮겨보자:

    ". . . 이 장르[소설]들에서 웃음이 유발되는 기원은 거리를 없애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특별한 의미에 있다: 이들은 민중적인(대중적 웃음) 것으로부터 발생한다. 그것은 정확히 말해 서사시적인 것을 파괴하는 웃음이며, 모든 위계적인 거리(거리를 둠으로써 고착시키기)를 파괴하는 웃음이다. 하나의 주제가 거리를 갖는 이미지로 등장하면 웃을 수가 없다; 웃기려면, 가까워져야 한다. 우리를 웃게 하는 모든 것은 우리 옆에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하며, 모든 희극적인 창작물들은 최대한 근접한 지역 내에 있어야 한다. 웃음은 대상을 가깝게 만들고, 인위적이지 않은 접촉의 지대로 끌어들이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거기서 우리는 그 대상의 모든 면을 친근하게 만지작거릴 수 있으며, 앞뒤로 뒤집어 볼 수도 있으며, 위 아래로 벗겨보기도 하며, 외부의 껍데기를 열어볼 수도, 중심을 볼 수도, 의심을 해볼 수도, 거리를 둘 수도, 외면할 수도, 발가벗길 수도, 노출시켜 볼 수도, 자유롭게 검토하고 실험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웃음은 대상과 세계에 대한 공포와 신성함을 없앤다. . . . 웃음은 공포를 없애기 위해 필요한 '깔보기'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이것이 없다면 아마도 세계를 있는 그대로(realistically) 접근하기 어려울 것이다. . . . 웃음은 대상을 탐색하고 실험해 볼 수 있도록(과학적이든 예술적이든), 그리고 자유롭게 실제로 다루어 볼 수 있다는 환상을 갖도록, 두려움이 없어진 가까운 곳에 대상을 데려다 준다. 웃음과 대중적인 언어를 통해 세계와 친근해지게 된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 이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는 필수적인 단계이다. 그 때문에 아마도 또한 과학적 지식을 가질 수 있으며 생생한 예술적 창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 . ."(Bakhtin 23).


바흐친에 따르면 '거리'는 코믹한 문학에 방해가 된다. 베르그송과 비교해 볼 때 이 논의는 거리에 대한 전혀 다른 시각이 아닐 수 없다. 바흐친이 의미하는 문학에 있어 거리는, 대상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게 하는 조건이 아니라,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상정함으로써, 그것으로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주관적이고 심미적인 거리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전통과 후광(Aura)을 만들어내는 거리이다. 이러한 거리는 시간을 "절대적인 과거(absolute past)"로 고착시키고, 세계가 현재화되는 것을 거부한다. 진지하고 숭고한 예술(장르로서 양식화된 예술)의 심층에는 언제나 근접할 수 없는 시간으로서 이 절대적 과거가 스며들어 있으며, 개입할 수 없는 위계적 구조로서 작품의 요소들을 지배하고 있는 거리가 내재한다.


서사시나 비극의 심층을 이루는 충동이 언제나 기억(전통이나 영웅에 대한)으로 구성되고, 이들의 심층적 언어가 죽음의 이미지로 짜여진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예술 안에는 웃음이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예술에서 자아와 세계는 분리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아 자체도 분열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서사시적 의미에서 기억은 자아의 환상 안으로 시간을 끌어들이는 기능을 갖는다. 기억 속에서 과거의 시간들은 현재적 의미로만 구성되고, 주체는 기억을 통해 과거의 시간을 현재적 신념과 기대 속에 재구성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자아는 시간과 관련해 자기 동일적 본성을 띠게 된다. 자아의 자기 동일성이 가장 고양된 형태로 나타나는 시간은 신에 대한 신념일 것이다. 자아에게 있어 신은 가장 먼 존재이다.


5.

이런 의미에서 바흐친의 웃음에 대한 논의는 베르그송의 그것보다 더 나아간 듯 보인다. 그의 논의에서는 웃음의 순수 구조뿐 아니라, 그로부터 파생되는 효과와 웃음의 결과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웃음과 관계하는 거리에 대한 논의는 베르그송과 견해를 달리하면서 그렇게 나아간 듯 보인다. 우선 그에게 있어 웃음의 발생적 기원으로서, 그리고 친숙함과 민중적인 웃음을 가능케 하는, 위계적 거리의 파괴는 고착된 시간(과거)을 살아있는 현재로 끌어들이는 과정을 의미한다. 위계적 거리란 자아와 세계의 단절과 자아 자신의 분열된 양상 속에서 보게 되는 상대적이고 공간화된 거리이기보다는 도달할 수 없는 불가역적인 시간이다. 이런 의미에서 절대적 과거란 주체뿐 아니라 어느 것도 침범할 수 없는 심층적 시간을 말한다.


따라서 바흐친에게 거리를 제거하는 문제는, 심층과 표층이라는 위계적 질서를 새로운 동 시간적 평면 위에 위치시킴으로써, 더렵혀지지 않은 순수한 시간으로서 심층을 다른 이질적인 표층들과 동일한 수준에서 다루고자 하는 노력의 산물인 것이다. 거리가 제거된 지형 위에서 순수한 심층은 어디에도 없으며, 이것은 다른 이질적인 목소리들에 의해 손때가 묻는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은 철학적 사유의 논의이기보다는 정치적 힘의 관계에 더 가깝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주체와 외부세계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웃음의 발생적 구조의 문제보다는, 위계적 거리가 제거됨으로써 발생하는 효과로서 웃음에 관한 논의가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그의 논의는 웃음이 왜 발생하는가 혹은 웃음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하는 본원적인 질문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이 보인다. 오히려 웃음에 관한 그의 논의는 그것이 무엇을 발생케 하는가 혹은 어떠한 의미를 생산하는가에 집중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글에서는 주체가 세계와 가지게 되는 망상적 관계에 대한 논의라든지, 내면성을 회복하는 과정으로서 상실된 고향의 주제(루카치의 경우처럼)를 찾기가 힘들다.


예술에서 웃음이 나오려면 모든 예술적 요소들이 동 시간적 지대에 집결되어야 한다. 즉 시간적 배경뿐 아니라 작품이 형상화되기 위해 참여하고 있는 인물들, 언어, 스타일 등 모든 예술적 요소들은 현재화되면서 우리와 친숙한 주제가 되어야 한다. 접근할 수도 개입할 수도 없었던 절대적 시간으로서 전통이나 과거를 현재 속에 위치시킴으로서, 진지함이나 권위와 같은 위계적 거리들이 파괴되면서, 비로소 웃음이 가능해 진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웃음은 이러한 거리들을 파괴한다. 그런 식으로 웃음은 심층 깊숙한 곳에 은폐된 시간과 공간을 밝은 표면으로 끄집어낸다. 들뢰즈(G. Deleuze)는 유머를 "표층의 예술"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모든 사물을(심지어는 정신까지도) 동일한 평면 위에 끌어올림으로써, 그리고 이들을 가까운 곳에 위치시킴으로써, 이제 그들에 대한 신비적인 공포가 사라지고 그들의 신성함이 제거된다. 접근할 수 없었던 가장 먼 존재로서 신은, 이제 두려운 존재로서 그 신성함이 사라지고 살아있는 현재의 이차적 자연 안으로 끌어내려지면서 표면화된다.


6.

거리에 관해 베르그송과 바흐친은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는 듯 했다. 그것은 웃음과 관계하는 거리의 의미에 관한 해석에 있었다. 베르그송의 경우 웃음은 거리를 필요로 한다. 열정과 신념이 강렬한 존재는 웃을 수 없다. 반면 바흐친의 경우 웃음은 거리가 사라짐으로써 발생하고 동시에 이 거리를 제거한다. 웃음과 거리에 대한 모순적인 이 두 관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웃음과 관련된 거리의 문제에 대해 베르그송과 바흐친은 다음과 같은 차이를 갖는다: 1) 베르그송의 경우 거리는 웃음을 유발하는 발생적 구조이다. 이 구조는 웃음의 조건이기도 하며 요인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에게 거리는 심층적 관념에 몰입되어 사물을 이해하는 환영으로부터 벗어나 반성적이고 비판적인 계기를 가능케 하는 정신적 조건으로서 상대적 거리를 의미한다. 2) 바흐친의 경우 웃음과 관련하여 거리의 문제는 좀 복잡한데, 그것은 우선 웃음을 유발하는 발생적 구조의 효과와 관련되며, 다음으로 웃음의 결과와 관련된다. 물론 두 경우 모두에서 거리는 제거된다. 여기서 웃음이 발생하기 위해 제거되어야 할 거리는 접근할 수 없는 순수한 심층으로서 절대적 거리를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웃음의 발생적 구조의 효과에 의해 거리가 사라지며, 동시에 웃음의 결과로 인해 거리가 제거된다. 베르그송과 마찬가지로 심층적인 것과 표층적인 것이 동 시간적 지형 위에 단면화됨으로써 심층의 신비주의가 사라지고 공포가 제거되며, 사물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자유자재로 다루어질 수 있으며, 이것은 곧 주체가 열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짐으로써 가능해지는 비판적 계기(베르그송의 경우)에 의해 도달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그렇게 됨으로써 대상은 매우 가깝고도 친숙한 것이 될 수 있다. 바흐친에게 있어 친근하게 되고, 대상의 권위가 사라지고, 심층적인 것이 파괴되는 것은 웃음의 구조의 효과이며 동시에 웃음의 결과인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거리의 이중적인 본질을 보게 된다. 하나는 비판적이고 객관적인 기제로서 거리이고(베르그송), 다른 하나는 주관적이고 신비적인 효과로서 거리이다(바흐친). 따라서 베르그송과 바흐친은 모순적인 논의를 한 것이 아니라, 서로 같은 내용을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 두 사람에게 웃음은 거의 동일한 의미에서 논의되고 있지만, 웃음과 관계하는 거리의 의미는 서로 완전히 반대적이다. 이로써 웃음은 두 방향을 갖게 되는데, 한편에는 사물로부터 거리를 둠으로써 그에 대해 비판적 성찰을 할 수 있는 기제로서 웃음이 있으며, 다른 한편에는 접근할 수 없는 거리를 제거하는 기능뿐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절대적 과거를 공시적 평면 위에 위치시키면서 과거와 기억을 현재적 관계들로 끌어들임으로써 유발되는 웃음이 있다.


7.

지금까지 논의된 내용을 정리해보자: 베르그송은 웃음의 발생적 구조에 집중한다. 유동적이고 자유로운 것과 경화되고 뻣뻣한 것의 충돌. 이것이 웃음의 발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구조적 조건이다. 따라서 웃음의 구조적 요인은 거리이다. 왜냐하면 충돌과 부조화를 볼 수 있는 반성적이고 비판적 시선은 종합적 판단에 의존하기 때문이며, 이러한 판단은 거리를 둠으로써만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베르그송의 논의들 속에서 아이러니와 유사한 구조를 발견하게 된다. 웃음은 주체가 대상으로부터 일정한 간격과 거리를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웃음은 거리가 없는 관계 속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웃음 속에 이미 대상에 대한(심지어는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적 본성이 내재해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웃음은 대상을 맹목적으로 신뢰하는 것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행위이며, 웃음은 열정과 신념을 가진 모든 존재에 대한 비판이며, 나아가 그것은 관념에 몰두하는 망상적 자아에 관한 자기비판이 된다. 이것은 정신과 물질이 분리되었다고 믿었던 신념이 파괴되면서 나오는 비판이기도 하며, 심층과 표층이 심연에 가로놓여 순수 영역을 고수하고 있다고 믿는 신념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따라서 웃음은 이성을 가진 존재에게 있어 가장 강렬한 형태의 분열증적 표현이다.


그러나 바흐친에게 웃음은 거리가 제거됨으로써만 가능하다. 웃음의 대상은 환원할 수 없는 절대적 과거 속에 위치하여 광채를 발하는 접근 불가능한 대상이 아니라, 언제든지 내가 접촉하고 만지고 볼 수 있는, 무게를 가지지 않는 존재이다. 웃음 속에서 모든 존재는 그 권위를 박탈당하게 되는 것이다. 웃음 속에는 거리가 없으며, 권위가 없으며, 세계는 웃는 주체와 동일한 평면과 시간 속에 위치한다. 고귀한 존재는 웃음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웃음은 그 자체로 대상을 심층으로부터 현재적 표면으로 완전히 끌어올림을 의미한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조차도 표면 위에 드러나 스스로 분열한다. 웃음 속에서 주체는 대상과 거리를 가지지 않으며, 자기자신을 지고한 절대적 시간 속에 고양시키지 않는다.


베르그송은 웃음의 구조와 그 요인에 대한 중요한 연구를 했으며, 바흐친은 웃음의 정치학적 효과와 결과에 집중한다. 이 두 연구자들은 서로 웃음에 대해 동일한 입장을 가지지만, 웃음의 요소를 대립적인 관점에서 논의한다. 이 둘은 상호 보완적인 관계 속에서 정립될 수 있을 것이다. 웃음의 발생적 요인과 그것의 정치적 효과. 이 둘을 종합하면 웃음의 아이러니컬한 특성이 드러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웃음은 거리를 만듦으로써 거리를 없앤다.



주1)
예를 들어, 자연스럽게 걸어가던 사람이 갑자기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상황을 연상해보자. 장애물의 출현은 상황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며, 따라서 자연스러운 걸음걸이가 유지되려면 장애물을 피해야 한다. 그런데 이 걸음걸이가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패턴이 되면서, 변화된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했을 때, 장애물에 걸려(즉 변화된 상황과 충돌)넘어진다. 웃음을 유발하는 우스꽝스러움은 새로운 상황과 부딪치면서, 유연했던 걸음걸이가 기계적인 자동화로 치환되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이런 의미에서 웃음은 가볍고 유연한 것과 기계적이고 뻣뻣한 것과 충돌하면서 나오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주2)
아이러니와 유머는 동일한 구조를 가지면서도 각각 다른 본질을 띠고 있다. 아이러니의 경우 자아의 반성적 계기는 세계를 부정적으로 사유하는 기제인 반면, 유머의 경우는 긍정적으로 사유한다. 그래서 아이러니의 어조는 주로 짜증과 조소로 점철되는 경향이 있다. 아이러니는 주체의 신념이 물질의 반항과 맞서면서 실패할 운명에 처해있음에 대한 통찰인 반면 이 통찰로부터 고통과 괴로움을 경험하는 정신적 기제이다. 그러나 유머의 경우 이러한 통찰을 긍정한다. 신념과 이상의 불완전성에 대한 부정과 긍정의 사유가 아이러니와 유머의 차이인 것이다. 물론 아이러니에도 유머러스한 측면이 눈에 띠지만, 이때의 웃음은 주로 쓴웃음의 형태를 띤다.


참고문헌

Bakhtin, M. M. The Dialogic Imagination: Four Essays. Trans by Caryl Emerson and Michael Holquist. Austin: University of Texas Press. 1982.

앙리 베르그송. 『웃음: 희극성의 의미에 관한 시론』. 정연복 옮김. 세계사. 1992.

Posted by huun

들뢰즈가 "독특한 일원론"이라고 불렀던 베르그송의 "흐름들의 동시성"이라는 개념. 혹은 본성적으로 다른 단성태(singularity)들의 일원론. 즉 『영화 I』에서 "Dividual" 이라고 명명했던 것. 그리고 베르그송을 해석하면서 "회상의 내재적 판(immanent plane)" 개념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잠재적 실재의 총체. 이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이미지 하나를 제시한다면 아마도 플로베르(Flaubert)가 『보봐리 부인(Madame Bovary)』에서 Emma의 눈을 통해 묘사했던 바로 그 장면이 아닐까? 샤를르 보봐리(Charles Bovary)는 그냥 '수줍은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엠마의 눈은 "갈색이었고, 그러나 그 긴 속눈썹 아래에는 흑빛이 감도는 듯 했다. 그녀는 눈을 활짝 뜨고 있었기 때문에, 바라보는 누구든지 그 두려움없는 솔직함을 볼 수가 있었다." 그녀의 눈은 하나의 커다랗고도 단일한 흐름이다. 그 눈 뿐만 아니라 그녀 자신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단일한 시간이며, 그 시간은 또한 휘트먼(Walt Whitman)의 "열린개체"처럼, 그녀를 포함하고 있는 우주 전체로 열려져 있다. 플로베르는 엠마의 눈 속에 깃든 그 다채로운 색채들을 통해 깊이를 탐구한다: "아주 가까이서 바라보면, 그녀의 눈은 인생보다도 더 커보였다. 특히나 무엇인가에 깨어나 그 눈꺼풀을 여러 차례 열었다가 닫았다가 할 때에는 더욱 그랬다: 그늘 속에서 바라보면 흑빛이었고, 밝은 빛 속에서는 진푸른빛이었다. 그 눈은 마치 색채들의 층 위에 또 다른 색채들의 층이 뒤덮힌 듯 했고, 그 아래에는 두텁고도 희미한 층이 놓여있었으나, 그 광채나는 표면으로 나아갈 수록 더 밝고 더 투명해졌다."(Gustave Flaubert, Madame Bovary, trans. Francis Steegmuller (Vintage: New York, 1957, reprinted 1992), pp. 3, 39) 우주는 거대한 하나의 단일체이다. 그러나 그 단일성이란 본성적으로 다른 부스러기들, 다양한 흐름들의 집합체로 이루어져 있다. 마치 엠마의 커다란 눈처럼. 그러나 그 각각의 층위는 엠마가 소유하고 있는 본성적으로 다른 개별적인 시간들의 중첩을 이루고, 그 눈의 깊이와 다양성 그리고 단성적인 것들의 분해할 수 없는 결합은 그녀의 온 생애에 걸쳐 내면화된 열정과 그 신비로움을 반영한다. 다양성의 중첩이라고 하는 이 막대한 시간이 바로 결혼 생활 전체를 통해 남편 샤를르를 괴롭히게 될 고난의 징후인 것이다. 그녀의 눈 속에 겹쳐있는 그 층위들은 한 명의 순진한 의사의 통찰로는 결코 헤아릴 수 없는 감정의 두께였으며, 그의 능력으로는 절대로 만족시킬 수 없는 변덕스러운 욕망이었다--우리를 따돌리는 저 가혹하기 그지없는 뒷모습!

그녀의 눈 뿐만 아니라, 만물은 서로 단일한 시간 속에 참여하고 있지만, 또한 그들은 제각각이 본성적으로 다르다. 이것은 모순이 아니라 실재의 다양성과 단일성의 이질적 통일이다: 주관적 객관성, 잠재적 단일성, 경험적 이성, 내재적 초월, 다원론적 일원론, . . . 나아가 그 윤리적 용어: 시멘트를 바르지 않은 돌담! 그 눈을 바라보고 그 깊이를 꿰뚫을 수 있는 능력은 샤를르와 같은 의사가 갖춘 물질적 객관능력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시인이라든가 예술가가 갖춘 직관능력, 들뢰즈의 용어로 "증후학(symptomatology)"을 통해 완성 될 것이다.

Posted by huun

베르그송은 생명의 미시적 운동이 전체 진화과정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결정일 수 있는가를 한 가지 예를 통해 이론적으로 논증하였다. 물론 그는 실제의 운동이 양적으로 추상화됨으로써 어떻게 왜곡되는가를 설명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논의에는 그 이상의 것이 있다.


아킬레스는 실제로 어떻게 거북이를 추월할 수가 있는가? 사물의 운동을 공간화해서 이해하는 수학적 방식은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운동을 직선 위의 무수한 점들의 통과와 이행으로 이해한다면(우리는 실제로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 운동하는 사물은 직선 위의 무한수의 점들에 직면하게 되고, 따라서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의 실제적인 이동은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쏜 화살은 과녁에 도달 할 수 없으며, 아킬레스는 거북을 추월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은 이와는 반대가 아닌가? 우리는 실제로 과녁에 도달하는 화살을 본 바가 있으며,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의 완전한 이행 또한 경험한 바가 있으며, 거북을 추월하는 아킬레스를 보지 않는가? 이론과 경험 사이의 이러한 간극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이것이 바로 베르그송이 『창조적 진화』에서 고대철학과 근대철학을 그리고 나아가 사유의 양(量)적인 메커니즘을 비판하기 위해 제기했던 질문이다. 실제의 경험에 대해 이론적 한계에 직면할 때, 필요해지는 것은 그 경험을 설명해줄 하나의 연역이다. 이 부분에서 베르그송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했던 내용은 존재의 생성(진화)과 지속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 골자는 다음과 같다: 운동에는 구별되어야 할 두 수준이 내재되어 있다. 한편에는 양적으로 분할 할 수 없는 운동 그 자체(운동성)가 있으며, 다른 한편에는 운동하고 있는 물체가 지나간 공간이 있다. 운동성이란 순수한 질 혹은 강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데, 그럼에도 우리는 이를 측정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운동하고 있는 물체가 지나간 공간(궤적)을 운동 그 자체와 혼동한다. 여기에 바로 엘레아 학파의 오류가 있다. 그들은 운동하는 아킬레스로부터 질적 운동성을 제거하고 아킬레스와 거북이 지나간 궤적을 운동 자체와 혼동함으로써, 아킬레스와 거북의 서로 다른 질적 운동을 동질적인 공간에서의 동질적 운동으로 이해한 것이다. 운동 중에 있는 물체를 상상적으로 정지(imaginary stop)시켜놓고 보면, 그 물체가 지나간 공간(거리)를 운동과 동일한 외연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아킬레스의 운동은 동질적인 공간 속에서 앞서가고 있는 거북의 운동과 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따라서 한 점과 다른 점의 거리를 균등 분할하여 측정할 수 있듯이, 운동 역시 그것이 지나간 좌표의 점들의 이행으로 환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엘레아 학파] 아킬레스 전체의 운동을 아킬레스의 운동이 아니라 거북의 운동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거북을 쫓고 있는 아킬레스가 아니라, 동일한 종류의 발걸음으로 동시적으로 행위하고 있는 두 마리의 거북을 설정하였기 때문에 이 둘은 절대로 만날 수가 없다."(Henri Bergson.
Time and Free Will. Eng trans by F. L. Pogson. New York, 1921. p. 113)


실제의 운동은 좌표 위에 결정되어 있는 수학적 의미의 점과는 다르다. 하나의 순간으로 즉 움직이지 않는 점으로 파악되는 운동은 우리의 지성이 재구성한 결과이지, 단숨에 일어나는 실제의 운동은 아니다. 아킬레스를 추상적 존재로 파악할 때, 즉 부동하는 점들을 소극적으로 통과하고 있는 수학적 존재로 이해할 때, 우리는 아킬레스를 거북과 동일한 방식의 걸음을 반복적으로 내딛고 있는 존재로 이해한 것이다. 두 마리의 거북이란 그런 의미이다. 존재들의 운동이 동질적인 것으로 간주됨으로써, 아킬레스와 거북은 정도상의 차이만을 갖는 동일한 본질이 된다. 그러나 실질적 존재로서의 아킬레스는 거북을 추월하기 위해 매번 새로운 방식의 적극적인 노력, 직선 위의 점들을 통과하는 것과는 본성적으로 다른 노력을 취하지 않겠는가? 이 노력이란 거북과는 질적으로 다른 아킬레스 자신만의 독자적인 발걸음으로 구성되지 않겠는가? 그러니 그들은 동일한 공간에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수준의 공간(과 시간)에서 서로 다른 운동을 취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아킬레스와 거북의 한 발 한 발은 동일한 공간 안에서의 점들간의 이동을 의미하지 않는다. 운동이 공간의 이동으로 환원되고 나면, 실제적인 운동은 일어나지 않는다. 보다 더 근본적인 의미에서, 실제의 운동이란 매순간 이루어지고 있는 끊임없는 이행과 생성일 것이다. 그것은 운동체만의 이행과 생성일 뿐만 아니라, 운동체를 포함하고 있는 공간 전체의 이행과 생성이다. 그래서 그 한 발은 아킬레스와 거북 사이에 놓인 장(field), 즉 공간 뿐 아니라 시간을 포함하는 그들간의 관계 전체의 변화를 의미한다. 물론 그 변화란 그들의 의식을 넘어서 있다. 나아가 이것은 이들을 포함하고 있는 우주 전체의 변화를 야기하지 않겠는가? 이는 공간적 운동에만 관련되지 않는다. 유년기에서 청년기 혹은 성년기로의 성장과 같은 존재의 질적 변화에도 동일한 공식을 쉽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베르그송의 말을 들어보자: "하나의 운동에는 운동하는 사물이 연속하여 지나온 각각의 위치 이상의 것이 있으며, 하나의 생성에는 순간 순간 통과하였던 (정태적인)형상보다 더 한 이상의 것이 있으며, 형태의 진화 또한 하나의 형태에서 다른 하나의 형태로 잇따르는 것 이상의 것이 있다."(Henri, Bergson.
Creative Evolution. Eng trans by Arthur Mitchell (New York: Random House, 1944). p. 343.)


위의 논거를 약간 변형시켜 보면, 우리는 베르그송과 맑스의 놀라운 유사성을 발견하게 된다: 추상은 우리의 무능력을 예증한다. 추상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볼 수 있는지, 심지어는 우리 앞에 놓인 대상이 무엇인지 조차 알지 못한다. 우선 추상은 존재를 정지된 것으로 이해하고 이를 고립시켜 놓으면서 출발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정지된 존재의 실제적인 이행과 성장을 설명하기 위해, 그 존재 외부의 원인으로서의 초월적 실체를 가정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존재를 부정(negativity)으로 결정하는 추상은 바로 노예상태를 전제로 한다(맑스는 이를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두 원자론의 차이로 설명한 바가 있다. 참고로, 칸트나 버크(Edmund Burke) 그리고 료따르나 들뢰즈가 논의했던 숭고미와 추상충동에 대한 문제는 좀 다른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구체적이고도 실질적인 존재란 바로 (실제로 운동하는 아킬레스처럼) 그 자신 안에서 그 자신에 의해 그 자신의 고유한 역사를 쓰는 존재이다. 인간의 노예성으로부터의 해방을 실현하기 위해, 이미 맑스가 역사적 수준에서 정식화했던 이 내재성의 문제를, 베르그송은 더 근본적인 수준 즉 생명의 진화의 문제로 파고들었다.

<문예 노트>
Posted by huun

우리는 매 순간 현실의 다양성에 직면한다. 가령, 아무데에나 카메라를 들이대고 셔터를 눌러보라. 그 안에 찍힌 현실의 다양성에 놀라게 될 것이다. 두 사람이 지나가고 있다. 그 아래에 강아지 한 마리도. 강아지는 보도 블럭 위에 흩어져있는 수 많은 서로 다른 낙엽들을 밟아가고 있다. 그들이 지나가는 곳에는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줄지어 있으며, 바람 때문인지 가지들이 한 곳으로 쏠려 있다. 나뭇잎의 색을 보니 가을이다. 청명하지만 싸늘해 보이는 날씨이다. 그 두 사람은 대화를 하고 있다. 한 사람은 열심이 말을 하고, 한 사람은 화가 나 있는 듯, . . . 이 사물들 뿐만 아니라 그 사물들에 깃든 감정들, 정서들, 힘, 특질, . . . 한이 없다.


그 사진 안에는 무하하게 많은 존재들이 들어가 있으며, 그것들을 셈하려면 평생이 걸릴지도 모를 일이다. 현실은 너무나 다양해서, 그 어떤 것도 똑같은 것이 없으며, 그 어떤 것으로도 한정할 수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그 다양한 현실 중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만을 선택하여 사물들을 지각한다. 그 두 사람과 강아지 그리고 그 주변에 펼쳐진 무수한 존재들은 엄연히 내 앞에 있는 것이지만, 나 자신과 무관하다면 나는 그들을 알 수가 없으며 알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우리는 단지 우리 자신의 필요에 따라 저들의 외형만을 알 뿐이다. 우리의 지각과 그 지각기능이 만들어 놓은 지식이란, 다양한 현실 중에서 어떤 특정 부분, 그것도 나를 위해 필요하다고 가정된 잘려진 조각만을 취하고, 나머지는 팽개쳐 버린다. 우리는 현실을 그 자체로 보지 못하고, 삶이 요구하는, 그리고 신체의 한계가 요구하는 고정된 관점으로 변형된 일부만을 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비극이다. 무식하고 편협하게도 우리는 무한하게 변하고 움직이고 있는 삶 그 자체를 자의적으로 잘라서 박제시켜 놓고 바라보고 있다는 것. 삶 그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오해에 기인하고 있다는 것.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의 지각 능력, 감각 능력, 오성 능력, 이성 능력, . . . 이들을 보다 많은 것으로, 보다 높은 것으로, 보다 탁월한 것으로 확장시켜야만 한다. 카메라가 포착하는 것 보다도 더 많은 실재를 지각하고 느끼도록 노력하고 훈련해야만 한다. 그 전문가들이 바로 예술가들이다. 삶의 요구로부터 자유로운 그들의 놀라운 지각능력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예술가들만큼 현실적으로 중요한 사람들이 또 있을까?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의 역설처럼 다가온다: 예술가들은 삶으로부터 초연해지면서, 비로소 삶과 직접적 관계를 갖는다. 베르그송(Henri Bergson)은 이 문제에 대해 짧지만 매우 아름다운 구절들로 표현하고 있다.

". . . 그러나 우리의 실제적 관심이 그것을 옆으로 치워놓는다. . . . 현재의 생활을 유용하게 조명하고 완성시키는 부분만을 인정하는 것이다 . . . 이러한 선택을 유발시키는 데 한 몫을 하는 것이 두뇌이다. 두뇌는 유용한 기억을 현실화시키고 쓸모없는 기억들은 의식의 보다 낮은 층 속에 간직한다. 지각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행위의 보조수단인 지각은 실재 전체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부분을 분리시켜낸다. 지각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부분이다. 지각은 미리 분류하고 미리 명칭을 붙인다. 우리는 거의 대상을 보지 않는다. 단지 그 대상이 어느 범주에 속하는가를 알면 족하다. 그러나 때때로 다행스럽게도 그 감각과 의식이 생활과 보다 덜 밀착해 있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자연은 그들의 지각기능을 그들의 행위 기능에 덧붙이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들은 사물을 볼 때, 그 사물 자체로 보며 자신들을 통해서 보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행위를 목적으로 지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각하기 위해 지각한다―다른 목적은 없다. 오직 즐거움을 위해서다. 그들 자신의 어떤 측면을 통해서, 즉 의식을 통해서건 아니면 감각을 통해서건 그들은 초연히 태어난다. 그 초탈이 어떤 감각의 초탈인가 아니면 의식의 초탈인가에 따라, 그들은 각각 화가가 되고 조각가가 되며, 음악가가 되고 시인이 된다. 따라서 우리가 여러 예술에서 보는 것은 좀더 직접적인 실재의 상(像)이다. 그리고 예술가가 더 많은 수의 사물을 보는 이유도 그가 자기의 지각을 이용하는 데 관심을 보다 덜 갖기 때문이다."(앙리 베르그송, 『사유와 운동』, 문예출판사, 2001. pp. 165-167)

<문예 노트>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