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 브레송(Robert Bresson)의 영화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Journal D'un Cure de Compagne)』(1951) 는 신과 신앙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가 강렬하게 표현되어 있다. 작품의 형식은 제목 그대로 간략한 형태의 일기들로 꾸며져 있다. 한 젊은 신부가 시골 교구로 부임을 한 후에 거기서 위암으로 죽을 때까지 얼마간의 삶이 그 일기에 적혀있는데, 내용은 주로 자신의 신앙심에 대한 반성, 아니면 신에 대한 단편적인 생각,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구 사람들과 지낸 짧은 에피소드들이다.

 

그는 마을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가지지 못했다. 다소 경직되어 보이는 그의 경건한 태도 때문인지, 아니면 사람들의 부족한 신앙심 때문인지, 사람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진흙 속으로 그를 끌어들여 함께 뒹굴며 그를 망가뜨리고 싶어 했다. 그는 자신의 의무를 져버리지 않기 위해 사람들의 갈등과 고통을 함께 고민하고 기도했다. 고통 그 자체인 삶 속에서 신의 은총을 설교하고, 젊음을 잃어가며 그것의 존재함을 증명하고자 애썼다. 때로는 그것이 그들에게는 지나친 간섭처럼 보였고, 때로는 교회가 그렇듯이 신의 이름으로 그들의 사적인 삶을 제한하려는 의도처럼 보였다. 오해와 불신의 화신처럼 보이는 이 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는 오로지 침묵하는 것만이 평온해지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불신과 오해는 더 커져갔다. 오해는 주로 사람들 자신의 상상 속에서, 자신들이 꿈꾸고 욕망해왔던 것과 똑같은 그림들을 그에게 되비추면서 생겨났다. 그가 술을 마신다든지, 자살을 부추겼다든지, 남의 비밀을 엿본다든지 하는 식으로. 그는 더욱 더 침묵했고, 자신에 대한 판단을 그들에게 완전히 내던져버리고 말았다. 또 그것 외에는 길이 없었다. 외딴 방에서 혼자 지내는 밤의 공포는 점점 심해졌고, 잠에 빠지는 것은 대낮의 모든 고통을 한꺼번에 끌어안은 채 자신의 베개 밑으로 침수하는 것 같았다. 신에 대한 그의 신앙심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결핵인줄 알았던 병세가 위암으로 판정되고, 그는 침묵조차도 견딜 수 없을 만큼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오래 전 신부 수업을 함께 받던 친구가 신의 의무를 저버린 자신의 과오를 고백하자, 그는 숨을 거두며, 어쩌면 신께로 돌아가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무슨 상관인가? 모든 것이 은총인데!"

Posted by huun

사람들은 사진과 영화를 구분해주는 형식을 흔히 운동에서 찾는다. 잘못된 통찰은 아니지만, 근본적인 것은 아니다.  저 두 매체를 본성적으로 다르게 하는 형식은 다름 아닌 바로 시간이다. 영화에서 운동과 시간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질문할지 모르겠지만,  그 둘은 분명히 구별된다. 운동체가 사라져도, 그 공간적 그리고 물질적 실체가 사라져도 여전히 남아 있는, 모든 변화에 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자신은 불변하는, 변질의 순수한 형식! 칸트적인 의미에서의 개념적 형식과도 근본적으로 다른! 들뢰즈의 말마따나, 그것은 마치 오즈 야스지로(Ozu Yasuziro)의 영화에 등장하는 잠깐 동안의 "정물들"이라든가, 결혼을 앞둔 딸이 잠든 홀 아버지를 바라보며 머금고 있는 "미소와 복받치는 눈물" 사이에 한 자락의 베게처럼 삽입된 꽃병의 이미지라든가, 특히 그 고유한 공간적 본질(기능)이 무력화된 운동체로서, "담장에 기대어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자전거"와도 같은 것이다. 물론 사진에도 시간이 없다고 볼 수는 없다. 제한적이지만, 사진은 운동을 표현함으로써(가령, 형상의 윤곽선을 흩트림으로써) 그것을 간접적으로나마 보여주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사진은 그 자체로 직접적인 시간의 이미지는 아니다. 아마도 사진이었다면, 그것을 조용히 바라보고 읽어가며 사유하고 있는 주체에 의해서만 떠올려지게 될, 그래서 어쩌면 그가 싫증이나서 집으로 가버린다든가 죽어버린다면 사라져버릴 수도 있을, 그렇게 사진 속에서는 다만 간접적으로만 드러나게 될, 단지 영화만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잠재적 실재의 지속의 이미지! 브레송(Henri Carttier Bresson)의 "결정적 순간"을 돌연 무한히 이완시켜, 거기에 어떤 두께라든가, 부피라든가, 용적을 부여하는 이미지! 사진과 영화를 근본적으로 다르게 해주는 것, 즉 진정한 시간, 참된 시간의 이미지!

운동-이미지, 지각-이미지, 감정-이미지, 충동-이미지, 행동-이미지, 시간-이미지, . . . 들뢰즈는 왜 자꾸만 참된 이미지나 고유의 이미지를 찾아, 나아가 참된 존재, 고유의 실존을 찾아, 그 목록을 작성하고 있는 것일까? 운동-실존, 지각-실존, 감정-실존, 충동-실존, 행동-실존, 시간-실존, . . .

이미 고대의 인간이 고민했던 "운동의 일탈성"(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즉 운동 그 자체가 가지는 탈중심성, 수적인 관계로부터 빠져나가는 것으로서의 일탈적 운동에 대한 통찰은, "운동을 간접적으로 재현하는 것으로서의 시간", 혹은 운동을 측정하는 "수치로서의 시간", 다시 말해 운동에 종속된 것으로서의 시간(영화에서는 이를 몽따쥬와의 관계속에서, 몽따쥬에 의해 드러나는 것으로 파악)이라는 지위에 의문을 제기하게 됨 . . . (80쪽) . . . 등등에 관한 이런저런 예들 . . .

그리고는, 장-루이 셰페르의 논의를 끌어들여, 들뢰즈는 이렇게 말한다. ". . . 영화 이미지에 고유한 운동의 일탈성은 시간을 모든 연쇄로부터 해방하고, 시간이 정상적인 운동과 맺었던 종속관계를 전복시키면서 시간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는 것이다. '영화는 내게 시간이 마치 하나의 지각처럼 주어지는 유일한 경험이다.' "(82쪽) . . . 셰페르의 말을 다시 말한다면: 영화! 시간의 지각. 

이렇게 해서 들뢰즈의 결론: "시간이란 필연적으로 모든 행동의 규범화된 전개 이전에 존재하는 것이어야 하고, '완전히 운동 기능성의 경험에 연결되지 않은 세계의 탄생'이어야 하며, 또한 '가장 오랜 이미지의 회상은 물질들의 모든 운동으로부터 분리된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정상적 운동이 그 간접적 재현으로서의 시간을 종속시키는 것이라 한다면, 일탈적 운동이란 모든 층위의 불균형의 기저, 중심의 이산, 이미지 자신의 거짓 매치(faux raccord)로부터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시간의 선행성을 증언하는 것이다." 들뢰즈의 이 말을 다시 말해, 물질과 운동으로부터 분리되어 그 고유의 존재성을 갖는 순수-회상, 모든 종속상태로부터 해방된 참된 시간!

그렇다면 영화의 경우는? 고다르의 입을 빌어, 좋은 영화와 나쁜 영화를 선별하는 기준 . . .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서로 뒤섞여 복합물을 이루고 있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에 사로잡혀 있으며, 과거란 그 전에는 현재였으며, 현재가 지나간 이후이다. 미래 역시 다가올 현재이다. 이들은 복합물을 이루며 공존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이미지와 공존하는 이 과거와 미래를 포착하는 것이야말로 영화에 속한 것이다. 이전인 것과 이후인 것을 영화화 할 것 . . . . 어쩌면 이 현재들의 사슬로부터 빠져나가기 위해 영화 내부에, 영화 이전에 존재하는 것과 이후에 존재하는 것이 지나가도록 해야할 것이다."(83쪽) . . . 고다르의 말을 인용: "영화란 바로 이런 것이다. 현재란 나쁜 영화를 제외하고는 결코 영화에 존재하지 않는다." . . . 고다르의 이 구절에 관한 잠정적 해석: 영화 이전이란 실재적인 것일테고, 그 이후란 실재의 질적 변화, 즉 비젼이 낳은 변형, 생성이 아닐까? 영화는 그것을 가능케 해야 할 것이다. 즉, 영화는 즉자적이고 현재적인 순간성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잠재적 실재(과거)와 비젼(미래적 현실화)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 따라서 이것은 앙드레 바쟁이 말했던 바처럼, 단순히 "날것 상태의 현실을 구하기 위해 픽션을 제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가"  않은 것이다.

한가지만 덧붙이자면, 여기서 더 중요한 말이 나온다. "이미지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적인 것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와 공존하고 그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그 자체로서의 이전이후에 도달할 것. . . . 즉 시간의 직접적 현시에 이를 것"(84쪽) . . . 왜, 이미지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가 아니라(리얼리즘이 그랬듯이, 예술과 현실이 혼동되는), 이미지와 공존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현존을 드러내야 한다고 했을까?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복합물과 고립되어 따로 존재하는 현존이 아니라, 복합물 속에 내재된 현존을 드러내는 문제! 다시 말해, 영화 뿐만 아니라 존재는 자기자신을 극복할 내재적 현존을, 그 자신의 외부에서가 아니라, 다름 아닌 바로 자신 안에서 드러내야 한다는 것!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