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leuze'에 해당되는 글 39건

  1. 2012/01/15 권력의지 (4)
  2. 2009/05/10 잠재 이미지: 지각의 중화 혹은 이행
  3. 2008/07/21 긴 긴 다리 위에 저녁 해 걸릴 때면 (3)
  4. 2008/01/09 수축과 이완 (2)
  5. 2007/09/11 나의 선인장!
  6. 2007/06/12 사랑의 풍경들
  7. 2007/05/31 우정과 진실
  8. 2007/05/30 징후와 고통 그리고 진실
  9. 2007/02/03 문학(예술)에서 본질과 표현: 전체성의 새로운 모델
  10. 2007/01/19 [연구노트 및 주석] Gilles Deleuze의 Cinema (8)
  11. 2006/12/29 이미지 존재론: 물질의 운동과 영화 이미지
  12. 2006/12/29 사진과 영화의 존재론적 위상
  13. 2006/12/22 들뢰즈의 예술론(14): 다양성의 긍정(지속에서의 공존 혹은 보존)
  14. 2006/12/22 들뢰즈의 예술론(12): 다양성의 두 측면(양적 다양성/질적 다양성)
  15. 2006/12/22 들뢰즈의 예술론(11): 복합물로서의 운동의 나눔
  16. 2006/12/22 들뢰즈의 예술론(10): 주관적 계열과 객관적 계열로의 나눔
  17. 2006/12/22 들뢰즈의 예술론(9): 직관의 나눔은 본성상의 차이의 발견
  18. 2006/12/22 들뢰즈의 예술론(8): 인간적 조건 하에서의 진리란 그 자체 기만적인 것이다
  19. 2006/12/22 들뢰즈의 예술론(7): 다양성 개념을 통한 변증법 비판
  20. 2006/12/22 들뢰즈의 예술론(6): 부정과 일반관념 비판 (퇴행과 무능력)
  21. 2006/12/22 들뢰즈의 예술론(5): 근본적 환상에 대하여
  22. 2006/12/22 들뢰즈의 예술론(3): 직관에 관한 잘못된 오해
  23. 2006/12/22 들뢰즈의 예술론(2): 직관의 비판능력
  24. 2006/12/22 들뢰즈의 예술론(1): 베르그송 요약의 개요
  25. 2006/12/02 [연구노트 및 주석] Gilles Deleuze의 Cinema (7)
  26. 2006/12/02 [연구노트 및 주석] Gilles Deleuze의 Cinema (6)
  27. 2006/12/02 [연구노트 및 주석] Gilles Deleuze의 Cinema (5)
  28. 2006/12/02 [연구노트 및 주석] Gilles Deleuze의 Cinema (4)
  29. 2006/12/02 [연구노트 및 주석] Gilles Deleuze의 Cinema (3)
  30. 2006/12/02 [연구노트 및 주석] Gilles Deleuze의 Cinema (2)
노예들이 생각할 때, 주인은 노예로부터 자신이 주인임을 인정받기를 원한다. 즉 주인은 지배자로 인정받기 위해 지배를 욕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니체에 의하면 이것은 노예가 생각하는 지배욕구이다. 권력(능력)을 갖지 못하고 비굴한 자만이 지배와 권력을 욕구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능력과 분리되어 비굴함에 머물러 있는 노예만이 지배하고 싶어하며 타인들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권력을 쟁취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그것을 탐을 내고 아쉬워하는 자는 주인이 아니라 다름 아닌 노예이다. 권력의 공허한 메아리를 자신에게 투사한 이미지 속에서 발견하는 권력의지는 가장 낮은 정도의 저열한 권력의지일 뿐이다. 가장 고귀한 정도에 이른 권력의지는 탐을 내는 것이 아니며 가지거나 취할 수 없는 것이다. 노예와는 반대로 주인은 이미 지배자이다. 주인은 노예를 지배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배한다. 주인은 자신의 능력과 분리되어 있지 않고, 행동과 판단과 사유에 대하여 바로 자기 자신이 원인이고 지배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권력을 욕구하지 않는다. 이들은 권력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실현하고 살아갈 뿐이다. 주인에게 있어 권력은 관심의 대상도, 욕구의 대상도 아니다. 권력은 대상조차 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권력은 다름 아닌 바로 그에게 속한다. 니체의 위대한 아포리즘: "약자들을 지키듯이 우리는 언제나 그렇게 강자들을 지켜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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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홍상수 영상의 중요한 요소인 과잉실재는, 세계를 요약하여 그 힘을 최대화하는 표현(주의)적 경제성과 대립하고 있다. 그 형식적인 예는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예를 들어, 클로즈업의 사용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든지, 혹은 그 고유한 의미에서의 몽따쥬의 사용도 보이지 않는다든지, 혹은 카메라가 특정 인물이나 상황을 전경화하기 위해 그들을 따라다니는 일이 두드러지지 않는다든지(카메라가 인물들을 따라다니는 경우가 있지만, 인물들은 프레임의 다른 모든 요소들 속에 묻혀있을 뿐이다), 혹은 빛과 색채를 회화적으로 사용하여 그들의 과도한 대립이나 강조를 뚜렷이 하는 일이 없다든지, 그리고 화면 구성에 있어서도 역시 의식적 배치가 두드러지지 않는다든지 혹은 숨긴다든지 하는 점이 그것이다. 또한 문학적 주제를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물론 사랑하는 연인들과 이들의 관계 그리고 욕망이나 배신 혹은 권력과 같은 소재들이 있다. 그러나 그의 영화 전체를 자세히 훑어보면, 그러한 소재들이 담론으로 다루어지거나, 서사적 의미작용을 일으키는 메커니즘은 발견되지 않는다. 단지 그 소재들을 둘러싸고 있는 정당화할 수 없는 동작들만 있을 뿐이다. 한마디로 말해 근원적 기원이나 최종적 결론이 없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동작들과 언어는 중심을 가지지 않으며, 따라서 요약되지도 않으며, 그 힘을 최대화할 수도 없다. 홍상수 영화에 있어 유일하게 스며있는 문학적 요소―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는 산만한 실재 그 자체에 대한 이름 모를 의식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 보인다. 그래서 모든 문제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행동주의적 사실들로부터 파생된다. 또한 이것이 바로 제임스(William James)를 위시하여 몇 몇 화용론자(pragmatists)들이 생각했던 실재이다. 이들이 생각했던 실재란 바로 의미가 결정되지 않은 세계, 미리 결정된 중심을 가지지 않는 세계, 인간적 지각 이전에 존재하는 (지각이)소거된 상태의 세계이다. 그것은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상태들 간의 이행, 나아가 지각의 이행 그 자체가 아닐까? 이를 명시적으로 예증할 수 있는 좋은 이미지가 하나 있다.

홍상수의 두 번째 영화인 <오! 수정>은 개인적으로나 사무적으로나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세 사람―영화 감독인 영수, 작가인 수정, 그리고 영수의 돈 많은 후배 재훈―의 사랑 이야기를 몇 편의 에피소드로 꾸며놓았다. 그런데 각각의 에피소드는 동일한 사실에 대해 세 사람 각자의 관점과 기억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까 하나의 사건이 각 에피소드에 따라 두 번 혹은 세 번 이상 반복되어 제시되지만, 카메라의 위치나 사건의 내용은 매번 약간씩 다르게 편집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의 화법은 개인들의 서로 다른 기억과 그 재구성에 의존하고 있지만, 전체 내용을 이루고 있는 형식은 개인들간의 상호 주관적 관계로부터 비롯된다. 이 작품에는 매우 독특한 장면 하나가 있다.

영수는 운전기사와 전화통화 중에 기사에게 모욕적인 발언을 한다. 화가 난 기사는 지금 당장 사무실에 갈 테니 그 자리에 있으라고 경고한 뒤에 전화를 끊는다. 그리고 나서 운전기사와 영수가 사무실에서 맞대면하는 장면이 두 번 등장한다. 이 두 장면은 하나의 사건(두 사람의 대면)을 두 개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다. 첫 번째로 제시된 장면은 영수의 점잖은 사과로 별일 없이 화해하는 것으로 끝난다. 우리는 이 장면이 영수의 기억으로 재구성된 것인지 아니면 객관적 사실로 제시된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그 장면에서 제시된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러나 나중에 다시 등장하는 두 번째 장면은 첫 번째와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영수는 운전기사의 폭언과 폭력에 의해 따귀까지 맞으며 모욕을 당한다. 이 장면은 첫 번째 제시되었던 사실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 객관성이란 상대적인 한에서만 가능한 것이므로, 어떤 쇼트가 객관적 관점의 위상을 가지려면, 그것이 다른 장면을 교정하거나 대체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두 번째 장면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처음의 점잖은 사과와 화해가 영수의 주관적이고도 자의적인 기억이었다고 확신하게 된다. 이 두 번째 쇼트는 최초의 화해 사실을 교정하면서, 그 쇼트를 (영수의) 주관적 관점으로 변형시키고, 그 자신이 스스로 객관적 관점의 위상을 취한다. 그런데 이 두 번째 장면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장면이 잠시 지속되다가 카메라는 서서히 왼쪽으로 패닝하여 그 수치스러운 장면을 숨어서 바라보는 수정을 담는다. 따라서 첫 번째 제시된 장면을 교정하여 객관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이 두 번째 장면은, 사실은 수정의 주관성에 의해 교정된 또 하나의 주관적 이미지였음이 드러난다. 이 두 번째 쇼트에는 아주 복잡한 문제가 있다.

우리는 흔히 영화적 지각의 두 형태(주관적 지각과 객관적 지각)를 말한다. 주관적 지각은 하나의 장면 안에서 부분을 이루고 있는 인물이나 사물에 의해 포착된 지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들뢰즈(G. Deleuze)는 이를 대체로 세 가지로 분류했는데, 우선 눈이 부상당한 사람이 자신의 파이프를 보고 있는 경우에, 이를 흐린 초점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 감각적 주관성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카메라의 지각은 부상당한 그 사람의 주관적 감각과 동일한 것이 되어 있다. 다음으로는 춤이나 축제의 풍경이 그 안에 참석하고 있는 어떤 인물에 의해 보여지는 경우이다. 이를 행동적 주관성이라고 부른다. 움직이고 있는 인물이 어떤 대상을 볼 때에는, 그 자신의 움직이는 방식에 따라 풍경이 보이므로(흔들거리거나 빙빙 돌거나), 행동 중에 있는 경우라도 주관적 형식을 띠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감정적 주관성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다. 예로, 어떤 여자가 칭찬하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이 마치 거대한 나무 위에 군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이다. 사실은 땅 위에서 단지 시이소 놀이를 하고 있을 뿐이었지만, 카메라는 그 여자의 감정이 투사된 주관성으로 그 주인공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들뢰즈의 지각-이미지에 대한 이 예들은 그의 책 Cinema I (Minneapolice, 1986)에서 p.71쪽을 참고). 이 이미지들이 주관적 특질을 띠고 있다고 간주될 수 있는 것은, 이 장면이 나오기 이전에 혹은 그 이후에 등장하는 다른 이미지들과의 비교를 통해 교정되기 때문이다. 거대한 나무 위에 군림하는 것처럼 보이던 그 인물은 나중에 가서야 시이소에서 내려오는데, 그 때서야 비로소 관객은 그때의 장면이 여자의 주관적 지각이었음을 알게 된다. 또한 이미 관객은 눈이 부상당한 한 남자와 그의 파이프를 본 바가 있기 때문에, 흐릿하게 처리된 그 파이프의 이미지가 그 남자의 주관적 지각이었음을 알게된다. 이렇게 본다면 영화에 있어 주관적 이미지는 다른 이미지와의 비교에 의해서만 판단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객관적 지각이라고 불리는 것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객관적 지각은 흔히 특정한 화면 외부에 있는 누군가의 관점을 통해 보여진 사물이나 풍경을 지칭한다. 확실히 영화에서는 주어진 화면에 속하지 않는 다른 인물이나 사물의 관점에 의해 포착된 지각이 많이 등장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객관적 지각 역시 상대적으로 혹은 비교에 의해서만 정의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화면 외부에 있다고 간주된 관점은 언제든지 화면 내부의 요소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 지적했듯이 우리는 영수와 운전기사의 대면을 담은 첫 번째 쇼트를 객관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객관성은 영수가 기사에게 모욕을 당하는 두 번째 쇼트에 의해 교정되어, 이전에 보았던 점잖은 화해가 사실은 (영수의) 주관적 기억을 암시하는 이미지로 대체되었다. 두 번째 장면 역시 마찬가지이다. 관객은 지금 목격하고 있는 수치스런 장면이 객관적인 것이라고 간주하지만, 곧 이어 수정이 목격하는 장면이 등장하면서 그 객관적 이미지는 수정의 주관성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영화에 있어 객관적 지각이란 다른 지각을 수정하고 대체하거나 밀어내면서 나오는 것 같다.

따라서 영화적 지각을 주관성과 객관성으로 뚜렷이 구분하는 것은 명목상으로만 가능할 것이다. 베르그송은 지각에 있어 주관적 지각과 객관적 지각을 뚜렷이 구분하는 것은 이론상의 추론일 뿐임을 분명히 한 적이 있다. 실제의 지각이란 그 두 이미지가 혼동되어 있는 상태일 것이다. 특히 영화에 있어 이미지의 객관성과 주관성은 상대적으로만 파악할 수 있다. 특정한 대상을 선택하여 본다는 것 자체가 이미 주관적 이미지의 투사가 없이는 불가능하며, 또한 주관적 이미지란 이미 특정한 대상이 객관적으로 보여진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양방향 화면(shot-reverse shot)에 있어 관찰자와 관찰대상의 상호보완적 기능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양방향 화면에서의 관찰자와 관찰대상은 서로 교차하면서, 하나가 다른 하나의 관점에 의해 포착되고, 또 그 반대의 관점에 의해 다른 하나가 포착된다. 예컨대, 무엇인가를 바라보고 있는 인물을 보여주고, 이번엔 그가 바라보는 대상을 보여준다. 이때 우리는 전자를 객관적 이미지로, 후자를 주관적 이미지로 결정할 수가 없다. 이미 전자는 모종의 주관성에 의해 포착된 지각일 수 있으며, 반대로 후자 역시 전자의 주관적 지각이 아닌 그 자체 드러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소설에 있어 비 초점화(zero focalization) 형식을 보면 서술자는 인물의 내부와 외부를 자유롭게 왕래하는데, 이것은 객관성을 추구하려는 노력이기보다는, '서술자=신'의 등식을 정당화하기 위한 형식의 최대화라고 말할 수 있다. 모더니스트 소설가들의 양식을 관류하고 있는 '저자의 사라짐'이나 '몰 개성' 혹은 '비 매개'와 같은 개념들 속에는 저자의 신(神)적인 망상의 결과라는 역설이 숨어있다. 저자는 (전통 소설에서처럼)스스로 등장하거나 지시되면서 세계의 일부가 되기를 그치고, 사라짐으로써 오히려 세계에 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식된 신이 아니라 매순간 '느껴지는 신'이 된다(Francis Streegmuller, ed. and tr. The Selected Letters of Gustave Flaubert (N.Y., 1957) p.127.). 조이스(James Joyce)는 『율리시스(Ulysses)』에서 서술자의 위상을 범신론적 신으로까지 고양시키고 있는데, 예를 들어, 우선 한 인물이 속해있는 방안의 풍경을 객관적으로 묘사한다. 그리고는 점점 그 인물의 외양으로 묘사가 집중되면서 그 인물 쪽으로 다가간다. 이제 화자와 인물은 너무 가까워져서 거의 구분할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하고, 급기야는 그 인물이 보는 방식에 따라 방안과 창문 밖에 펼쳐진 바다를 묘사하기 시작한다. 그 인물 속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이것은 마텔로 탑에서 친구들과 살고 있는 스티븐(Stephen Dedalus)을 묘사하는 장면을 참고. James Joyce. Ulysses. (Oxford, 1998). pp. 3-9). 조이스는 이를 더 밀고 나간다. 우리에게는 '촬스 삼촌의 원리'로 잘 알려진 자유간접화법이 그 예이다. 어떤 인물을 묘사하기 위해 그 인물의 고유의 어조를 사용하거나, 그 인물의 내적인 상태를 통해 그의 외관을 묘사하는 것이다. 이것은 더 이상 내부와 외부를 순차적으로 왕래하거나 교차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두 체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방식이다: "He[Bloom] foresaw his pale body reclined in it at full, naked, in a womb of warmth, oiled by scented melting soap, softly laved."(James Joyce. Ulysses (Oxford, 1998). p. 83) 이 예는 목욕탕에서 자신의 몸을 들여다보는 장면을 블룸(Leopold Bloom) 자신의 감각적 주관성("a womb of warmth", "scented melting soap", "softly laved")을 통해 객관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서술자는 인물의 주관성이나 스타일로부터 '감염(contagion)'되어, 내부에 있는 것도 외부에 있는 것도 아니다. 이와 유사하게 영화에서는 양방향 화면의 "극단적인 수축"이 일어나기도 한다. L'Herbier의 El Dorado에 좋은 예가 있는데, 미친 여자의 모습을 (객관적 관점으로)제시하고 난 다음에, 그 여자의 관점에서 그녀가 보고 있는 대상을 흐린 초점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 두 화면을 결합하여, 무엇인가를 바라보고 있는 미친 여자가 이미 한 화면 안에 흐린 초점으로 제시되는 것이다(이 예는 Deleuze의 Cinema I (Minneapolis, 1986)에서 p. 72를 참고). 이것은 그 여인의 주관적 상태를 통해 포착한 그녀 자신의 객관적 이미지이다. 여기서 객관적 지각과 주관적 지각은 서로 엉키고 수축되어 동시에 펼쳐진다.

물론, 홍상수의 저 장면에는 자유간접 화용법을 직접적으로 사용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양방향 화면을 역순으로 진행하면서(즉, 관찰자를 보여주고 다음에 관찰대상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관찰대상을 보여주고 관찰자가 나온다), 카메라는 시종일관 외부에 머물러 있다. 만일 수정이 목격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다음으로 영수가 모욕을 당하는 장면이 나왔다면, 문제는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또한 그 장면 어디에도 수정의 주관적 관점을 예시하는 요소를 찾아 볼 수가 없다. 흐린 초점도 사용하지 않았으며, 수정에게서만 포착할 수 있는 고유한 어조 또한 발견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수정을 객관적으로 보여줄 뿐이었다. 그런데도 어느새 우리는 영수가 모욕을 당하는 장면까지 포함하여 그 장면 전체를 수정의 주관적 포착으로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 장면에서 왼쪽(수정쪽)으로 서서히 이동하는 패닝 과정에서 어떤 알 수 없는 마술이 작용한 것일까? 여기서 패닝의 중요성은 사건의 모든 광경을 하나의 이미지로 보여주기 위해 프레임의 물리적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노력으로 국한되거나, 또한 그것이 단순히 풍경의 흐름을 통해 하나의 지각을 다른 하나의 지각으로 교정했거나 대체했기 때문이 아니다. 여기서 패닝의 더 근본적인 중요성은 카메라가 서서히 이동하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특정한 지각의 체계가 구분될 수 없는 흐름으로 변질되고 있는 이미지를 보여주었다는데 있다. 이것이 바로 베르그송이 말했던 실제의 지각 속에 깃 든 비결정성이다. 규정할 수 없는 실제의 지각 속에서 물질은 정신적 순간의 최초의 결정이 되고, 마찬가지로 정신은 물질적 순간의 최초의 결정이 될 것이다. 그것은 마치 빛의 굴곡이 점점 내 곁으로 나가오더니, 어느새 갑자기 나도 모르게 나의 의식이 되어버리는 사건과도 같다. 사건이 있고 그 사건의 당사자들이 있고 또 그 사건을 외부에서 바라보는 객관적 인물이 있고 그 인물을 다시 화면 안으로 끌어들이는 카메라가 있다. 이들은 모두가 뚜렷이 구분되지 않은 채 서로 엉켜 붙어, 하나가 다른 하나를 교정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변질되고 흐르면서 상관적 관계를 이루고 있다. 이것이 바로 지각의 중화된 이미지일 뿐 아니라, 지각의 흐름이며 상태들간의 이행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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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서야 수 년 동안 계획하고 써 왔던 논문을 끝냈다. 350여쪽 분량의 두터운 책이 쓰여진 것이다. 시간이 급해 마지막 마무리가 좀 성에 안 차지만, 단행본으로 나올 때 보완 할 것을 감안한 것이니 문제될 것이 없다. 지겹고, 힘겹고, 두렵고, . . . 뭐 그런 막대한 경험들을 맛 본 시간이었다. 들뢰즈(Gilles Deleuze)의 이론과 예술론을 결합하여 구성한 연구서 혹은 주석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중간에 프레드릭 제이미슨(Fredric Jameson)을 번역 하느라고 거의 1년여간을 중단했었다. 완전히 중단한 것은 아니었고 잠재적 휴지상태 정도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게 실수였던 것 같다(좋은 점도 있었지만). 중단했던 프로젝트를 다시 재개하는 것은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는 일 만큼이나 힘든 일이었다.

수 개월 동안 <문예노트>를 돌보지 못해 거미줄이 끼어 있는 것 같았다. 가뜩이나 이전의 호스팅 회사가 불성실하고 문제가 많아, 다른 회사로 옮기려고 마음먹고 있던 터라, 손도 대고 싶지 않았다. 계약 만료가 원래는 8월중이어서 남은 기간이 한 달이나 남았음에도, 논문을 끝내고 바로 옮겨 버렸다. 서버 시스템상의 불일치 문제로 중간에 약간의 문제가 있었지만, 이제는 바로잡았다. 그럭저럭 잘 돌아가는 것 같다. 홀가분하다.

그동안 이론을 너무 강박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자유로와지기 위해 시작했는데, 오히려 또 다른 차원에 구속되었던 것이다. 강박적 영혼에는 많든 적든 위선 같은 것이 있는 것 같다. 자유로워진다는 것, 자기 자신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바로 그것으로부터 결별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려면 아마도 더욱 더 나 자신을 위해 글을 써야겠지.

개인적으로 조동진의 노래를 아주 좋아한다. 흔히 잘 알려진 곡들만 듣기 때문에, 그의 노래의 깊이가 많이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앨범들 전체를 들어보면 훌륭한 가수라고 생각한다. 음악 자체뿐만 아니라, 음악 활동에 있어서도 그는 많은 것을 시사해주는 가수이다. 대중가요는 그 대중적 태생과 성격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상업 시스템이나 어떤 경우에는 이데올로기 선전 수단에 종속되기 일쑤이다. 그래서 천박함이나 정치적 진부함을 피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조동진의 차분하고도 요란하지 않은 음악과 음악 활동은, 저러한 시류들로부터 어떻게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는지, 또 대단한 예술적 경지까지는 아니더라도, 대중 가수가 어떻게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한 동안 음악을 듣지 못했는데, 비교적 여유로와진 이 마당에, 조동진의 깔끔한 한 곡을 들어본다.

(노래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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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는 베르그송의 '지속(dureé)' 개념을 설명하는 가운데,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적 일원론"에 관한 아름다운 구절들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정신과 물질은 전혀 다른 두 세계 같지만, 실은 하나의 세계가 수축하거나 이완되어 여럿으로 다양하게 공존하는 결과이다. 가령, 정신의 무한한 이완 상태는 회상과 꿈(무의식)이 될 것이고, 그것이 점점 수축되어 지각(perception)이 되다가, 곧 수축된 지각은 점차 물질이 되었다가, 또 더 나아가면 연기라든가 공허와 같은 물질적 이완상태가 무한하게 연장되어 점차 우주론적으로 팽창하게 된다는 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 속에는 물질의 표상이, 물질 안에는 정신의 형식이, 또 수축 속에는 이완이, 이완 속에는 수축이 내재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실이란 꿈의 수축상태이고, 꿈이란 현실의 이완상태인 셈이다. 이것이 베르그송주의의 심오한 "이원론적 일원론"이며, 그 안에서 모든 존재는 수축과 이완의 정도들의 공존이라는 것이다.


웃을지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활의 측면에서 볼 때, 거지라든가 예술가들은 현실적 필요 즉 수축상태를 상실하고 무한한 이완상태의 현실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고, 생활의 필요에 종속되어 부지런한 노동 속에서 긴장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수축상태의 현실을 사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공부를 잘하고 출세를 하려면 수축해야 하고, 넓은 시야를 가지려면 이완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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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학에서는 인과관계나 모순관계를 나타내는 접속사들―그러나, 그러므로 등―을 사용한다. 이 접속사들은 항들의 관계를 종속적인 것으로, 즉 관계의 원인을 항들 내부 속에서 찾는다. 가령, “A 그러므로 B”에서는 A가 B의 원인이 된다든지, “A 그러나 B”에서는 두 항이 투쟁하여 하나를 제거하려는 경향이 있다든지, 아니면 B가 A를 근거로 새로운 관점으로 이탈하거나 반대한다든지 하는 식이다. 어느 모로 보나 두 항의 관계의 원인은 둘 내부―두 항들 중 하나―에 있고, 힘의 관계가 권력적이거나 종속적인 구조를 갖는다. 들뢰즈(Gilles Deleuze)는 유럽식 특히 프랑스식 사유를 "하나의 점을 찍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가령, 우리는 "비가 내린다" 혹은 "태양이 이글거린다"라고 말함으로써, 마치 "비"라든가, "태양"과 같은 하나의 점이 미리 존재하고, 그 점이 부슬부슬 내리거나 이글거리는 속성들을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마치 손을 뻗으면 당장에라도 만질 수 있기라도 하듯. 선분은 점들의 집합이라고 생각하듯이 말이다. 그런 식으로 점을 찍고 나면 모든 술어적 관계들이 종속적으로 배열되어, 근원 또는 기원이 생기고, 제1원인이 탄생한다. 문장에서 주어가 술어들의 주체이고 세대주가 되듯이 말이다. 다수의 실질적 원인들을 거꾸로 뒤집어서, 그 결과를 맨 앞에 세우고는, 마치 그 결과가 원인인냥, 주인인냥, 전도된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거꾸로 내리는 비 혹은 타들어가는 태양이라도 된다는 듯이. 존재란 무엇인가? 자아인가? 감각인가? 물인가? 흙인가? 들뢰즈는 바로 이러한 종속적 사유를 관계판단의 논리로 은폐하는 영역이 바로 논리학이라고 말한다. 관계의 원인이 항들 내부에 배열되어, 하나가 다른 하나를 주관하거나, 제1의 원리가 되는 방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들뢰즈는 이러한 구조적 논리학을 넘어서 진정한 관계의 아상블라주를 위해 "등위접속사(그리고)"를 사용하라고 권한다. 등위접속사는 항들을 종속시키지 않고, 동등한 관계에서 공존하게 한다. 그것은 구조적 종속으로 관계를 판단하는 접속사가 아니라 파편들을 긍정하는 접속사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새롭게 등장하는 항들을 이전의 항에 대한(~ 에 의한, ~의) 관계로 배열하지 않기 때문이다. "A 그리고 B"에서는 관계의 원인이 항들 속에 있지 않다. 그 어느 누구도 제1원인이 되지 못하며, 다만 선후 관계 속에서 어느 것도 훼손시키지 않고, 공존 속에서 관계를 만들어낼 뿐이다. 그들의 관계는 관계하고 있는 항들 밖에 존재한다. 등위접속사 "그리고"는 미리 기획된 전체도 가지지 않고, 관계하고 있는 존재들을 종속시키지도 않고, 그들이 근접해 있거나, 그들 간에 선분이 그어짐으로써, 어떤 효과로서 전체가 발생한다. 이것이 바로 휘트먼(Walt Whiteman)의 "카탈로그"나 "행렬문장"과 같은 파편적 글쓰기가 예증해주고 있는 아상블라주(assemblage)이다. 그것은 하나이면서도 다수이고 다수이면서도 하나인, 결코 하나로 붙일 수 없는 것임에도 하나의 효과를 내고 있는 엠마(Emma)의 눈과도 같다.

그건 그렇다치고, 언젠가 내가 노트에 메모한 내용 중에, 바로 저 등위접속사를 "긍정의 접속사"라고 적으며, 그 예로 괄호 속에 이렇게 적은 것이 눈에 띄었다: "나 그리고 선인장!, 나의 선인장!" . . . 앞에 것은 이해가 되는데, "나의 선인장"은 왜 적었을까? 소유격 아닌가? 선인장은 나의 소유물이고, 나는 선인장의 주인이 아닌가? 긍정적 관계가 아니지 않은가?

지금 생각해보니, 아마도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저 메모를 했을 것 같다. 나는 물론 선인장을 소유하고 있다. 내가(더 정확히는 친구가) 비용을 지불하고 사들였기 때문에, 저 선인장은 내 소유로 된 방에 귀속되어 있고, 우리는 법적인 질서 혹은 여타 형태의 사회적 질서 속에서 소유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선인장의 존재의 원인은 아니지 않은가? 물이 컵에 담겨 있다고 해서, 컵이 물의 존재의 원인이 아니듯, 관계의 위계를 표상(representation)하는 종속이나 소유 형식이 관계 자체의 본질은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자연 안의 모든 관계는 본질적으로 이미 긍정의 접속사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스피노자의 능산적 자연처럼, 자연은 다수의 종속적 관계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의 공존의 관계가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나의 선인장"은 "나 그리고 선인장"이라는 긍정의 관계 위에서만 성립가능한 표상적 관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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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나 사물에는 변하지 않는 하나의 모습이 있다고들 한다. 영원히 같은 모습의 정체성 혹은 본질이 있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조금만 더 냉정하게 세계를 바라본다면 삽시간에 허공으로 꺼져버릴 만큼 근거가 빈약한 믿음이다. 사물을 바라보고 대하는 우리의 변덕스러운 모습만 보더라도 이 말을 쉽게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친한 사람, 사랑하는 사람, 애뜻한 사람, 미운 사람, 혐오스러운 사람, . . . 그들의 정체성 때문에 그러한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체성에 대한 우리의 믿음 때문에, 우리는 아주 많은 가능성들을 스스로 포기한다. 그들로부터 우리는 풍경들을 바라보고, 그들 중 어느 하나의 풍경이 우리를 만나게 한다. 풍경이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만일에 우리가 사랑하게 된다면, 그것은 단지 하나의 행운일 것이다.

나의 변덕은 내 앞에 펼쳐진 모든 것들의 변화와 다양성을 말해준다. 가령, 하늘을 보라. 그리고 하늘이 무엇인가? 혹은 하늘은 무슨 색인가? 라고 질문을 해보라. 우리는 쉽게 대답할 수가 없다. 우리가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대답할 수 없음 자체가 하늘이기 때문이다. 바다는 또 무엇인가? 바다는 무슨 색인가? 이 또한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 대답없음 자체가 바로 바다이기 때문이다. 그들에 대해 대답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들을 제대로 본 것이다. 하늘, 바다, 노을, 뿐만 아니라 내 작은 방 창틈으로 새어들어오는 자그마한 빛, . . . 그들은 본성이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것들을 '하늘', '바다', '노을', '빛' 이라고 부르고, 그들을 식별해 내는 것은, 단지 우리의 어림짐작으로, 우리의 무딘 지각이 뭉뚱그려 놓은 통계 때문이다. 현실이란 잡히지 않는 기체-연기가 무리를 이루며 모인, 혹은 우리가 뭉뚱그려 놓은 여럿의 덩어리-몸둥이들의 집합이다. 현실은 한 두가지의 통계일 뿐이다. 사랑은 또 어떤가? 우리는 사랑이 하나의 감정 상태인 것처럼 믿고 열광한다. 하지만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랑의 대상들, 애인들의 수 만큼이나 많은 사랑이 있으며, 뿐만 아니라 한명의 애인에게 조차 매순간의 서로 다른 사랑과 질투와 고통이 있다. 그 감정들은 서로 뒤섞이지 않으며, 각각의 세계와 각각의 풍경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한 사랑을 다른 한 사랑과 혼동하지 않고, 그 사랑을 다른 사랑과 대체하거나 교환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태만과 무성의는, 바꿀 수 없고 대체할 수 없는 그 각각의 사랑을 마치 하나의 감정이라도 되듯 뭉뚱그려 뒤섞는다.

현실을 이루고 있는 것이 그 덩어리-몸둥이라고 해서, 하나의 현실, 하나의 본질이 있다고 믿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 몸둥이에는 아주 많은 주름들이 나 있고, 그 몸둥이의 실상은 바로 그 주름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가 평생을 찾아 헤매던 풍경: "어머니가 아들에게서 보는 것, 예술가가 장미에게서 보는 것, 수녀가 마리아 상에서 보는 것!" 주름이 만들어 놓은 각각의 풍경들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그 각각의 풍경에 맞는 전혀 다른 광학 도구들을 필요로 한다. 사랑의 주름을 생각해보라.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뒤척일 때마다, 웃을 때마다, 담요에서 먼지가 일어나듯, 그녀의 주름들 속에 숨어있던 어떤 미지의 영혼들이 작은 몸짓과 뒤척임 속에서 퍼져나와, 방금전에 내가 보았던 그녀의 풍경을 지워버리고, 전혀 다른 풍경을 펼쳐놓는 바람에, 나는 새로운 돋보기로 그것을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들여다보다가 내 스스로 웃기도 하고 찌푸리기도 하며 진풍경을 자아낸다. 그 하나의 풍경은 내가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이고, 다른 여인과 구별되는 바로 그녀(전체)는 그 관점들의 통계이다. 그녀가 퍼뜨리는 풍경과 관점들이 요술을 부려, 내가 믿었던 그녀가 아님을 보게 되었을 때, 알 수 없고 소유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 풍경 속에 내가 없을 때, 그 저주같은 풍경들이 점점 내 눈에서 증식하여, 그녀를 사랑하는 내게 되려 적이되어 몰려올 때, 나는 배신감과 질투의 포로가 될 것이다. 그 관점과 풍경들은 마치 기차여행에서 보게되는 창문의 풍경처럼, 이리로 갔다가 저리로 갔다가 종잡을 수 없는 부스러기와 조각들로 펼쳐져, 내가 믿고 있었던 그녀의 본질을 해체한다. 나는 더 이상 어제의 그녀를 찾을 수 없으며, 내일의 그녀를 예측할 수가 없다.

하늘을 바라보며 발견하게 되는 그 무수한 관점들의 수 만큼이나 많은 우리의 자아가 있다. 창틈으로 새어 나오는 빛과 세상의 모든 빛의 수 만큼이나 많은 우리의 영혼이 있다. 사랑하는 애인의 그 복잡한 모습 만큼이나 많은 자아와 관점이 우리를 사로 잡고 있다. 푸르스트(Marcel Proust)는 이렇게 말한다. 애인이 떠났을 때, 그녀를 상대했던 내 안의 수많은 자아들 모두에게, 그녀가 떠났음을 각각 알려주어야 한다고.

우리는 사랑하며 잠에 빠진다. 잠 속에서 보게 되는 그 많은 풍경의 방들을 돌아다니듯, 각각 밀폐된 방안으로 연기처럼 스며들듯, 사랑은 우리를 이방 저방을 옮겨다니게 하고, 애인이 내뿜는 풍경에 길을 잃고 방황하게 한다. 잠과 마찬가지로, 사랑에서 깨어난다는 것은, 그 많은 풍경들로부터, 그 풍경의 방들 속에서 펼쳐지는 것들로부터, 내가 지금 앉아있거나 서 있는 이 현실의 방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다. 혹은 그 많은 풍경들에 빠지기 전의 자아, 단 하나의 풍경에 고착된 허전한 자아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결국, 잠과 마찬가지로, 사랑에서 깨어난다는 것은 그 아름다운 풍경들을 져버리고, 잠에서 깨어나 내가 누군지 여기가 어딘지를 정신없이 서둘러 선택하듯이, 불안 때문에 아니면 두려움 때문에, 단단하게 마련된 사슬들을 몸에감고, 덩어리-몸둥이가 되어 스스로 한 곳에 묶여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찬란한 순간들을 포기한 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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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은 눈을 감아주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서로의 결점과 오류들을 이해해 준다. 친구는 내가 보고 싶지 않고 듣고 싶지 않은 나 자신의 실상을 들추어내거나 따져 묻지 않는 자이다. 그는 나를 덮어주고, 망을 보아주고, 곁에서 시름과 고통의 위안이 되어주며, 나를 편안하게 해주는 고마운 사람이다. 우정은 사랑처럼 나를 특별한 존재로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아니 오히려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을 싫어하지만, 사랑의 고통을 견딜 수 없을 때, 위안을 받기 위해 찾아가는 환상의 귀의처이다. 그리하여 우정은 우리를 고립되지 않은 존재, 고독감을 떨쳐버리게 해줄 존재, 대면하고 싶지 않은 나 자신의 가장 무시무시한 상태와 맞닥뜨리지 않아도 세상 사는데 별 문제가 없음을 일깨워주는 존재, 우리를 사회적 존재이게끔 해준다. 그리하여 사회 속에서, 사회인으로서, 섬이 되지 않고, 잘 어울릴 수 있도록 도와준다. 우정은 우리의 고립과 외로움을 편안한 관용으로 덮어준다. 그러나 이렇게 형성된 진실이란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인가? 우리의 사이좋은 우정과 조화로운 통일로 만들어진 진실이 도대체 무슨 효력이 있단 말인가? 나의 무능력을 치유하고 위로해줄 친구의 그 칭찬 한마디는 나를 더욱더 화나게 할 뿐이다. 그의 위로가 실연의 고통을 잊게 해주지는 못한다. 그렇게 마련된 진실이라면 너무나 초라하고도 왜소하지 않은가? 들뢰즈에 따르면 우정의 철학이란 바로 협잡과 합의의 철학이다. 그것은 진실을 제대로 보지 않고, 애써서 그것을 외면하는 길임을 뜻한다. 진실은 가혹하지만 엄밀한 어떤 것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우리는 그 무엇도 걸치지 않고, 맨몸으로 나가야할 시간을 피할 수 없다. 이것이 베르그송이 직관의 비판능력이라고 말했던, 소크라테스의 신 다이몬이 귓가에 속삭이며, 우리를 아포리아(aporia)의 상태 속으로 밀어 넣는 무시무시한 시간이다. 실재는 난입하는 그 무엇이다. 그것은 우리의 지성을 강요하고, 지성의 잘못을 질책함으로써, 지성의 굳은 몸체들을 대기 속으로 흩뿌리는 그 무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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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찾아 나서는 자는 철학자보다는 오히려 "애인의 거짓말 때문에 고통 받는 질투에 빠진 남자", "찾기를 강요하고 우리에게서 평화를 빼앗아가는 어떤 징후의 폭력"에 맞닥뜨린 사람이라고 Deleuze(혹은 Proust)는 말했다. 지적이고 분별이 있는 사람은 언제나 명확하고 객관적인 의미를 제시한다. 또한 자연으로부터 윤곽선이 뚜렷한 형태들을 자신의 지식으로 취한다. 그들은 쓰여진 책을 통해 진실을 찾아나서길 좋아하는 모범생이다. 하지만 지식이 만들어지는 것은 그러한 길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와 같은 지성이 만들어 낸 진리 말고도, 우리는 다른 풍요로운 방식으로, 즉 사물의 징후로부터 출발하여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 지적이거나 위대한 사람보다는, 평범하거나 결점이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은 징후를 가지고 있고, 그것이 그의 존재를 더욱 풍요롭게 해준다. 그것은 예술가들을 풍족하게 해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성의 노동과 임무를 가지고 세계에 뛰어들어 노력하는 학자들보다는,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며 인생을 보내는 사람들, 직업도 없이, 그렇다고 예술을 할 만큼 능력도 없는 실망스러운 인간”들이 더욱 더 징후에 있어 풍요로운 진실에 도달할 수가 있다. 가령,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이란 바로 허송세월을 보낸 시간을 의미한다. 그러나 쓸모없이 보내버린 시간, 즉 훌륭한 사람을 만나 진지한 대화를 하거나 지적인 모임에 나가 무엇인가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교계에 드나들며 사람들과 노닥거리고, 여인들과 사랑에 빠지고, 감각적 경험에 사로잡혀 봄으로써, 오히려 우리는 사람들과 풍경과 이 세계에 대한 진실을 배울 수가 있다. 우리는 완전한 이상적 대상에서 보다는, 불완전한 인간들과 비틀린 물질적 감각에 쉽게 매료된다. 또 결함 없는 위대한 한 인물 보다는 평범한 여인을 통해 인간과 세계의 근원적 진실에 도달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 사유의 지적인 활동이 강렬하게 활동하여, 대상들로부터 본질을 발견하고, 세계의 진실에 도달하게끔 하는 것은, 그 비틀린 경험과 비균형적 경험 속에서 규정하기 어려운 징후들의 난입을 직면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재와 그 징후가 우리에게 직접 던져주는 것으로, 우리가 직접 풀어내고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이다. 그것은 친구들이 모여 합의한 해답과는 판이하게 다른 해답을 도출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어떤 여인과 사랑에 빠지고, 그 여인에게서 어떤 진실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녀와 매끈한 소통을 하거나, 합의된 대화에 이르렀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 의미가 무엇인지, 그 진실이 어디에 감추어져 있는지 알지 못한 채, 그녀가 발산하는 낯선 징후들을 해석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잃어가며, 시간을 낭비해가며 알몸으로 달려드는 직관능력 덕분일 것이다. 선생님이 제시한 문제들 속에서는 그 무엇도 배울 수가 없다. 그렇게 의무와 노동에 사로잡힌 배움을 통해 얻은 진실은 “필연성이 결여”되어 있다. 억압적이고 부정적인 반성적 노동이 만들어낸 진실은 추상적이고 인위적일 뿐이다. 그 진실은 그것을 배우는 나 자신과는 무관한 진실이며, 따라서 이렇게 말해도 저렇게 말해도 되었을 법한 임의적 진실에 불과하다.

진실이란 정다운 대화 속에서가 아니라 참을 수 없는 폭력 속에서 피어난다. 우리는 고통을 겪음으로써만, 통증이나 갈증이나 제지된 욕구를 통해서만, 그 추동적 힘에 직면해서만 비로소 의미와 진실을 찾으려 한다. 진리를 사랑한답시고 고통도 없이 달려드는 얼뜨기 속물 학자로부터는 그 무엇도 배울 것이 없다. 그 보다는 오히려 애인의 얼굴에서 거짓말의 징후를 간파하고 질투에 빠진 남자가 참된 것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그 속물 학자로서는 결코 자신에게 가해오는 인상들에 아프지도 않고, 그것을 해석해야할 어떠한 필연적 운명적 책임도 느끼지 못하는 반면, 질투에 빠진 남자는 인상과 징후들의 폭력에 맞서 그 누구보다도 민감해지기 때문이다. 질투의 고통만이 애인의 거짓말과 사랑의 진실을 찾는다. 진실이란 사회 속에서가 아니라 근원적인 것에 대한 질문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회의 지배계급은 그 사회의 진실에 접근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떤 놀라운 경험 때문에 우리의 기억이 작동하듯이, 고통은 지성으로 하여금 진리와 의미를 찾도록 강요한다. 필연적 진실이 태어나려면, 우선 실재가 뿜어내는 징후의 폭력에 직면해야만 한다. 지성은 실재의 징후들로부터 어떤 강요를 받아야만 하고, 이것인가 저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빼앗긴 채, 모든 도구와 무기와 갑옷을 벗은 맨 몸으로 실재를 대면해야만 한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지성은 등장하게 될 것이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낌으로써만, 그 징후들의 의미와 본질을 찾아내고 진실의 근처로 다가갈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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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본질적인가? 문학(예술)과 관련하여 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또한 문학에서 본질은 스타일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문학작품에서 관점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철학에서 전체화(부분과 전체의 관계)의 문제가 문학(예술)에서 어떻게 논의될 수 있는가? 전체화에 관련해 문학(예술)적 모델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형태인가? 이 글은 이 질문들에 대한 탐구와 해석으로 구성되었다.

I.

사물의 본질에 관한 니체(F. Nietzsche)의 질문방식을 들뢰즈(G. Deleuze)는 "극화"라는 용어로 개념화했다("Nietzsche" 75∼79). 이 논의는 플라톤과 대립적인 쌍으로 진행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본질의 정의와 관련하여 플라톤이 질문하는 방식은 실재하는 사물의 상위원리를 결정하면서 시작된다. 즉 큰 것과 작은 것의 본질은 각각 '큼'과 '작음'이라는 근원적인 기원(개념)에 의해 정립되는 것이다. 이것이 사유의 출발점이며 동시에 세계의 시작이다. 이 방식은 사물의 외부에서 그 본질을 규정하는 원리이다. 따라서 자연의 각각의 사물들은 하나의 본질 아래 배열되고 분배된다. 만일 운동과 관련하여 자연을 정의할 수 있다면, 개별적인 것으로서 자연의 운동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원인에 의해 발생하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힘은 주어지는 것이다. 자연은 언제나 자신을 분배하고 지시하는 기원적인 제3의 원리에 관계하는 한에서만 증명될 뿐이다. 소크라테스가 보여주는 아이러니가 언제나 승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자는 대화에서 미리 결정된 해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해답은 드러나지 않는 심층적 의미로서, 그러나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하나의 본질로서 자연을 초월한다. 변증법은 대화의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교설의 위장일 뿐이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에게 대화는 탐구의 과정이 아니라 준비된 정답에 도달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자연을 따르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정의할 대전제를 재현하고 확인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마련된 그 해답이다. 그것은 경험적인 것 이전에 미리 결정되어 모든 사물들 위로 부지불식간에 도약을 해버린 임의적 관념이기 때문이다. 우연적이고 임의적인 관념. 한 번도 그 발생적 원인을 확인하지 못한 채, 아름다움-큼-작음이 어째서 필연적으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대답은 미루어진 채, 법과 도덕의 원천이 되어버린 이데아. 이것은 사물의 본질이 아니라 의식의 본질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데아 아래에서 개별자들은 서로 불연속하면서 오로지 그 관념과의 관계만을 유지할 따름이다. 자연 안의 모든 사물들은 종적(縱的)인 관계들로만 채워질 것이다. 이로써 개별적인 것들과 이들을 하나의 본질로 꿰뚫는 기원적인 것 혹은 전체적인 것과의 관계는 마름질 잘된 하나의 체계를 구성하게 된다. 이 체계 아래에서 부분은 전체와 기원에 정체된다. 또한 이 체계 내에서 우리는 파편적인 것들을 끌어 모아 하나의 전체를 구성할 수 있거나, 혹은 그 각각의 부스러기를 통해 전체를 이해할 수 있으며, 심지어는 실재의 근원적 기원을 단편화된 부분들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우주 전체가 이미 부스러기 안에 들어있다는 생각이 가능한 이유이다.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그 반대 역시 얼마든지 가능해진다. 그러나 우리가 실재하는 사물들로 눈을 돌려보면 혼란스러워 진다. 개별적인 것들의 상대적 가치들 속에서 사물들의 아름다움과 크고 작은 성질들은 혼합되어 있음을 보기 때문이다. 사물들 자체는 크고 동시에 작다. 심지어는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추하다.

이런 이유에서 니체의 질문은 사물들 안으로 그리고 이 사물들이 직접 참여하고 있는 관계들 속으로 파고든다. 그는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라고 질문하지 않고, 오히려 "무엇이 아름다운가?"라고 질문한다. 이 질문은 소크라테스의 심층적인 사유아래 포섭된 개별적이고 가변적인 것들에 대한 단순한 물음이 아니다. 사물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한 이러한 질문은 더 이상 개별적인 것들을 근원적인 상위의 원리에 환원하지 않기 위함 이었다. 따라서 본질은 부스러기들간의 관계들 속에서, 횡단하고 있는 부분적인 대상들간의 힘의 관계들 속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 이었다(주1). 니체에 의하면 본질은 그것을 담고 있는 대상 혹은 주체로부터 초월해있지 않다. "왜냐하면 본질은 단지 사물의 의미와 가치이기 때문이다; 본질은 사물을 향한 친화력을 가진 힘들에 의해 그리고 그 힘들을 향한 친화성을 가진 의지에 의해 결정된다"(Deleuze, 같은 책 77). 누가 보는가? 무엇을 보는가? 어디에서? 그리고 언제? 등을 질문하지 않고는 더 이상 본질과 의미에 관한 맑은 대답을 기대할 수가 없다. 본질은 관점의 현실화(구체화)이기 때문이며, 관점은 일자(一者)로서 이데아가 아니기 때문이다. 관점은 오히려 니체 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힘에 가깝다. 따라서 하나의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본질들이 있다. 이것은 하나의 사물과 대상에 관련될 때에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본질을 힘과 복수적인 관점으로 설명하는 방식은 더 이상 본질과 의미를 이미 준비된 단일한 개념으로 사유하지 않겠다는 것을 뜻한다. 본질과 관련하여 모든 질문과 해답을 임의적이고 우연적으로 결정된 사유의 체계로 환원하지 않는 방식. 따라서 사물의 본질은 그것을 명령하고 지시하는 외부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그들간의 연속적인 관계들 속에서 그리고 그의 내부에서 생성하는 힘들 속에서 발생한다. 이것이 소피스트가 보여주었던 "경험적이고 복수적인 기술(art)"로서 니체가 이해한 비극적 질문방식이다(Deleuze 같은 책 76).

본질에 관한 두 가지 방향이 있는데, 하나는 대상을 그것의 본질로부터 떼어놓고, 이 대상을 본질로부터 파생된 실재(파생실재)로 정의하면서, 이들을 기원과 전체로서 본질에 포섭하는 방향이다. 이때 본질이란 전체와 기원의 다른 말이다. 다른 하나는 실재하는 것들의 본질을 단일한 전체나 기원으로 환원하지 않으면서, 실재하는 것들간의 운동과 힘들의 관계들로 복수화한다. 본질은 이 관계들 속에서 발생하는 가치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두 번째의 방향이 니체가 의미한 극화의 방향이며 비극적 방향이다. 비극적 세계 내의 존재는 시간적 존재로서 무수한 관점들과 함께 운동한다.

 

II.

의미는 해석하는 주체나 해석하는 활동에 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주체에게 사물은 관찰하고 해석하는 방식으로만 현존한다. 이는 해석이 객관적 대상과의 필연적인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도 그렇다. 세계는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고 그것에 대해 요구하는 방식으로만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러므로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은 대상 자체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또한 주체 내부의 관념적 연상에 의존하지도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세계에 대한 이해의 두 방향(1. 대상에 집중하는 방향(객관주의) 2. 주관적 연상으로 환원하는 방향(심리적 주관주의))은 해석의 활동이 무엇과 관계하면서 시작되는지를 혼동하면서 나오게 된 결과이다. 우리는 주관에 외재적인 대상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보여주는 징후들과 관계하면서 만 활동한다. 따라서 이 징후들을 대상과 동일한 것으로 혼동하면서, 대상의 면밀한 관찰이 우리로 하여금 궁극적인 이해를 가져다 준다고 믿음으로써, 우리는 한없는 실망만을 경험하게 된다. 이 방향에서는 관찰대상이 선재된 소여(所與)로 주어지며, 해석활동의 모든 양상은 이 소여된 대상에 정체된다. 따라서 해석하는 활동의 주체들인 심성능력들 역시 정향된다. 여기서 오게 되는 실망은 두 측면에서 우리를 좌절하게 하는데, 하나는 완전한 리얼리티를 재현할 수 없으며 심지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좌절이고. 다른 하나는 이 재현불가능성의 결과로서 우리의 무능력에 관한 좌절이다. 해석의 두 번째 방향의 경우는 의미를 주체의 주관적인 해석이나 심리적 연상에 의존하는 문제로 환원하는 경우이다. 이것은 사물의 의미를 연상 메커니즘의 연쇄고리로써 이해하는 방향이다. 그러나 이는 대상이 나타내는 징후들과 그 대상을 동일하게 생각하여, 대상에 대한 관찰과 증언들만으로도 충분히 대상의 본질을 꿰뚫을 수 있다고 믿는 것만큼이나 임의적이다. 따라서 이 방향은 사물들이 본질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구별하지 못한다. 연상 작용은 사물과의 필연적 관계를 맺지 못하고 우연적이며, 그 연상의 메커니즘 안에서 사물들은 양적으로만 분할 될 뿐이다. 이것이 바로 주관적 연상주의나 심리주의가 공허한 이유이다. 이 두 방향은 물질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한다. 이들은 우리로 하여금 좌절케 하거나 혹은 허기를 느끼게 한다.

사물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은 사물이 소유하고 있는 징후들과 관계하지만 사물 자체로부터는 거리를 갖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물과 완전히 단절되어 주체로 환원되지도 않는다. 이런 이유에서 의미와 본질은 인식의 대상 자체와 동일하지 않으며, 또한 그 만큼 인식의 주체와도 구별된다. 그렇다면 의미(본질)는 무엇인가? 그것은 존재가 궁극적으로 자기자신을 드러내는 최종적인 성질이다. 그래서 본질은 차이가 남으로써만 현실화한다. 이것은 외재적인 차이일 뿐 아니라 내적인 차이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우리가 경험적으로 파악 가능한 대상들 간의 차이 뿐 아니라 대상과 주체의 차이이며 주체 자신의 차이이다. 본질은 대상으로서 지시된 특정한 내용이 아니다. 그것은 사물들이 시간의 계기와 운동의 지속 안에서 긍극적으로 특별하게 그리고 개별화되어 드러나는 일종의 형식이다. 본질은 다수의 내용들로 이루어져 차라리 그것은 내용이 없다고 말해야 한다. 본질은 실질적이고 근본적인 차이이지만 또한 형식으로서 드러난다. 이것이 바로 본질이 예술에서 에피파니의 형식으로만 드러나는 이유이며, 물질의 거추장스러움을 벗어버리고 순수한 정신적 계기들 속에서 나타나는 이유이다. 본질은 확실히 주관성의 한 영역에 속하지만 일단 그것이 표현되고 나면 마치 독립된 실재처럼 주관성의 영역을 넘어버린다. 따라서 해석되고 표현된 본질은 주체 자체의 본질이기보다는 차라리 하나의 세계의 본질이다.

차이는 그 자체 어느 것으로도 환원되거나 치환할 수 없는 유일하고 독특한 존재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양적으로(개념적으로) 구분된 두 대상들간의 비교를 통해서는 나타나지 않으며, 시간 속에서 발생하는 그 자체 본성적인 성질을 통해 나타난다. 그것은 다른 것과 비교될 수 없는 궁극적(순수한) 차이이다. 이런 의미에서 징후들과 인상들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본질이 드러나는 문제는, 대상이나 주체로 환원되지 않는 즉자적 존재, 진정한 타자를 발견하는 문제이다(주2). 프루스트(M. Proust)는 이것을 "질적인 차이"라고 말했으며, 헨리 제임스(Henry James)는 이를 "상상적 해석"에 의해서만 얻게 되는 어떤 것이라고 했다. 질적인 차이는 관점들의 차이이기도 하며 관점 그 자체의 차이이다. 이런 식으로 본질은 질적 차이의 문제로부터 시작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더 이상 드라마적으로 주인공에 정체된, 혹은 주체의 자기의식에 사로잡힌 그런 타자가 아니라, 그 자체 실재하는 환원 불가능한 즉자적 타자를 발견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질은 순전히 정신적인 계기들을 통해서만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우선 물질 즉 질료들과 관계하면서 출현한다. 프루스트의 무의식적 기억이 이를 예증하고 있다.

하나의 관점은 하나의 세계를 표현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체는 각각 하나의 관점으로 자신들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이 세계는 다른 세계와 본질적으로 다르며, 시간의 지속 안에서 그 자체  차이나는 그런 세계이다. 내재적으로 차이나는 세계. 따라서 각각의 주체는 자신만의 세계를 표현하며, 이 세계들은 예술 안에서 발생한다. 예술에서는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세계들이 있으며, 주체 자신만의 세계가 아니라 본질의 세계, 다시 말해 즉자적인 타자가 공존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니체는 철학의 질문이 아닌 비극적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극화의 형식은 세계를 용해하는 본질의 이데아를 관점의 복수주의로 치환해 버렸다. 헨리 제임스는 어째서 소설에 있어 관점의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했을까? 그가 이해한 도덕적 상상력은 관점의 테마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매기와 아담의 단편적 이미지(주3)의 예를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매기가 감싸고 있는 본질의 환원불가능성, 절대적 차이, 질적이고 본성적 차이일 것이다.

사랑은 고통을 수반하게 마련인데, 이는 사랑하는 연인에 대한 해석이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즉 사랑한다는 것은 연인이 뿜어내는 징후들과 인상들을 개별화하는 것이며 이들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연인이 함축하고 있는 세계를 발견하고, 자신의 내면적 세계를 펼치려는 노력 속에서 전개된다. 사랑은 현실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그러나 실재하는 어떠한 세계를 표현하고자 한다. 그것은 연인이 감싸고 있는 세계의 발견이며 동시에 자신 속에 감싸인 세계의 전개이다. 그러나 이 펼치고 전개하는 과정은 또한 끊임없이 질투를 생산한다. 해석의 과정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경험하는 것은 언제나 타자이기 때문이다. 해석은 자기자신을 타자로 만들어야 할 뿐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타자를 경험한다. 어떤 것으로도 담아 내거나 잴 수 없는 궁극적 차이. 사랑이 고통스러운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해석하는 과정 속에서 깨닫게 되는 대상의 즉자적 존재. 이것은 한없이 자신을 배제하고 연인의 세계로부터 그를 쫓아내어 버리는 그런 세계이며, 주체의 주관적이고 자발적인 연상으로는 절대로 나오지 않는, 심지어는 주체 안에 스며들어 본성적으로 다른 존재이게끔 하는 그런 세계이다. 질투는 이러한 세계를 발견하게 되면서 나오게 된다. 사랑의 징후들을 해석하려는 노력, 연인의 몸 속에 감싸인 영혼과 본질의 세계를 발견하고 찾아내려는 노력은 언제나 사랑하는 사람을 배제함으로써 좌절하게 한다. 사랑은 좌절의 과정이다. 매기가 발산하는 이미지들을 통해 아담이 깨달은 것은, 자신이 완전히 소유할 수 없는 그 자체 빛을 지닌 그런 존재를 매기로부터 발견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더 이상 매기는 제도가 부여한 역할로서, 소유된 존재로서 딸이 아니라 타자가 되어 버렸다. 이것은 마르셀(Marcel)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알베르틴(Albertine)과의 이별에서 경험한 충격은, 자신의 주관적 메커니즘으로는 절대로 소유할 수 없는 즉자적 존재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갑자기 들이닥쳤다는 사건에 기인한다(주4).

그러나 거기서 나오는 고통은 본질과 의미가 비자발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출현하면서 경험된 것이다. 마르셀에게 그것은 하나의 폭력으로 난입한 것이다. 본질은 모든 존재를 의식의 메커니즘 안으로 흡수하는 개념적 활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지불식간에 출현한다는 것. 즉자적 존재는 주관적이고 논리적인 연쇄로 연결되는 고리가 아니라, 그 자체 실재하는 타자이기 때문에, 이것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순간적으로 도약을 해야 한다. 그것은 자발적인 기억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에서 시간조차도 존재의 층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관념의 산물이 아니라 존재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이미 펼쳐져서 그 지형 안에 사물들이 적절히 배열되거나 좌표들로 위치를 점하는 공간화 된 범주가 아니라, 차라리 모든 존재들 속으로 스며들어가 이들의 본질이 표현되길 기다리고 있는 주름과도 같다. 그것은 실재하는 것들 속으로 들어가면서 서서히 물 속에서 퍼지는 "일본종이"처럼 펼쳐지기 시작한다. 프루스트가 말한 "무의식적 기억"은 정신과 사유 안에 포로가 된 양적 차이의 세계가 아니라, 전혀 이질적이며 시간에 있어 완전히 질적 차이를 갖는 세계로 도약하게 한다. 우리는 특정한 감각적 성질들을 경험하면서, "무의식적 기억"을 통해 과거의 세계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 세계는 마치 물질의 단절과도 같아서, 도저히 개념적 연상이나 논리적 인과관계로는 설명하기 힘든, 그러나 허구로서가 아닌 잠재적 실재로서 타자를 구성한다. 진정한 타자성의 세계. 따라서 이것이 갑자기 우리의 신체로 난입해 들어올 때, 우리는 고통을 느끼며 불현듯 경련을 일으킨다. 왜냐하면 질적으로 차이나는 존재의 발견과 해석을 제대로 하려면 응고된 주체와 개인성이 파괴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고통은 에피파니의 징후인 것이다. 소유로써 사유하는 응고된 주체에게 타자의 출현은 우연적이며, 주체는 수동적이어야 하며, 따라서 그것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주5).

 

III.

근원적 시간과 본질로서 차이는 어떻게 육화 하는가? 그것은 우선 물질적인 것들을 통해 나타난다. 개념적 사유가 제공해주는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이차원적 이미지들간의 텅 빈 차이들일 뿐이라면, 그래서 존재들 간에 그리고 그들 자체 내에서 발생하는 본성적 차이가 관념의 연쇄들로는 나타나지 않는다면, 질적 차이는 우선 질료적으로 출현할 것이다. 본질적 차이는 존재가 소유하고 있거나, 주체가 자신의 신체 안에 비밀스럽게 감싸고 있는 무한한 성질들, 즉 무형의 질료들을 통해서만 나타난다.

아담이 매기로부터 발견한 그 심오한 이미지는 그의 의식 속에서 개념화되고, 균등한 분할구조로 분류된 개인으로서의 매기가 아니었다. 그가 포착한 그 이미지는 오히려 매기 자체가 아니라, 그녀를 구성하고 있으나 그녀 자체는 아닌, 자신의 딸로서, 아메리고의 아내로서 혹은 샤롯테의 친구로서, 기능화된 신체로서가 아닌 그녀의 본질이었다. 이 본질만이 그녀를 다른 존재로 운반해준다. 매기라는 개인은 이 본질이 두드러지면서 바다가 되며, 커다란 산이 되기도, 혹은 아주 작은 하나의 우주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 아담에게는 한 마리의 물고기가 되어 버렸다. 지금 그녀의 어떤 알 수 없는 부분적 대상들이 물고기 쪽으로 운반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매기가 고백하면서 사용했던, 그녀의 입에서 발화되어 분절된, 언어가 지시하는 내용들의 이미지를 통해 그녀를 물고기로 운반한 것은 아니었다. 말의 통사적 구조나 의미론적 담론은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확실히 이 때의 언어는 양화 되어 구조화된 하나의 체계이기 때문이다. 소쉬르(F. Saussure)가 기호를 둘(기표와 기의)로 분할했을 때, 이들을 물질과 연결짓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관심은 어떻게 소리 이미지들이 의식의 영역으로 용해될 수 있을 지에 대한 염원에서 시작된다. 따라서 그에게 말은 소리 자체가 아니라 의식의 이미지들이다: 언어는 구조의 문제이다. 만일 아담이 매기를 통해 본 그 이미지의 본질을 이해하려 한다면, 이런 식의 언어담론에서는 불가능하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녀를 이루고 있는 신체와 색과 어조, 몸짓들과 윤기들, (말의)소리들과 같은 질료의 층위들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를 언어담론의 어떠한 영역으로 정위(正位)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통사론도 의미론도 음운론도 심지어는 음성학도 아니다. 본질적 이미지는 최소한 화용론에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만이 니체의 질문형식에 가장 가까울 것이기 때문이다.

말은 하나의 구조적 체계를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보다 앞서는 더 근본적인 층위로서 질료가 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말을 단순히 분절되어 양적으로 고착된 구조로 파악하는 것은 초보적 단계에서나 가능한 생각이다. 언어는 질료들이 펼쳐지는 과정이라고 이해되어야 한다. 발화된 기호와 분절된 소리가 지시하는 의미체계의 기능으로 언어를 환원해서는 곤란하다. 우리는 마디로 짜여진 소리가 지시하는 기의들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물에 더욱 풍부하게 반응하고 이들을 발산하는 물질, 지시체계를 들락거리고 그 회로의 주위에서 미세하게 흘러 다니는 물질을 통해 소통하는 것이다. 언어의 재료는 통사구조나 기호가 아니다. 제1의 재료들은 기표와 기의를 넘어서는 다른 곳, 바로 질료에 있다: 언어는 질료의 문제이다. 화가에게 색과 선과 면(面)의 덩어리들이 재료이듯이, 음악가에게는 음계나 악보가 아니라 소리이듯이, 발화자의 재료는 분절된 기호들이 아니라 표정이며, 소리이며, 심지어 냄새이다. 언어는 우선적으로 사유와 구조의 문제가 아니라 표현의 문제이며 표현의 층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언어를 최소한 화용론의 영역에 끌어들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볼 때 언어의 의미체계가 양적인 구조를 띠는 것은 사실이다. 작가의 고통은 여기에 기인한다. 무한한 실재들과 내면에 감싸인 무형의 세계를 어떻게 양적으로(그리고 양적인 도구로) 다듬을 것인가? 용기에 담기 위해 그 세계를 깎아야만 하는 고통. 글쓰기는 확실히 사유의 영역과 더욱 밀접한 관계가 있는 듯 하다. 작가는 구조를 통해서만 세계를 창조하게 될 것이다. 글은 말을 못하기 때문이다. 거기엔 표정이 없으며, 색도, 선도, 면도, 소리도 없다.

그러나 작가에게 언어가 재료이고, 그것이 사유의 영역에 더 밀접하다면, 문학작품이 사유의 문제에만 머물러야 할까? 예술작품을 하나의 유기적인 구조이며 견고한 체계라고만 이해해야 할까? 만약에 존재의 본질적 차이가 질적으로만 등장한다면, 문학작품은 사물의 본질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인가? 아담이 포착한 매기의 이미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글 자체가 질료적일 수는 없을까? 그래서 문학작품 자체가 질료의 순간을 드러내도록 하는 특정한 시간의 계기를 가질 수는 없는 것일까? 문학작품으로 하여금 의미체계를 넘어서 질적 차이를 표현하는 질료가 되도록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문체(style)이다. 그러나 이것이 물질 자체라는 의미가 아니라, 질료적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는 의미에서이다. 정신이 질료적인 것과 가장 근접한 순간, 그 두 층위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변형된 순간. 정신이 질료적으로 변형된 것인지, 질료가 정신적으로 변형된 것인지 알 수 없는 그 순간. 문체가 아니라면 문학은 한 번도 이 순간을 맛보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문체를 통해 글 속에서 표정을 읽으며, 소리를 들으며, 심지어는 냄새를 맡는다. 동시에 우리는 어느 것으로도 교환될 수 없는 유일한 존재를 보게 된다. 더 이상 분할 할 수 없는 최종적 양태로서 유일한 존재. 이것이 본질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러한 것들이 바로 문학이 우리를 흥분하게 하는 이유이다. 문체가 아니었다면 문학은 경험의 교본이 되었거나 신체를 길들이는 기구가 되었을 것이다. 억압이란 한마디로 무한한 질료들을 양적 구조에 가두는 과정이며, 또한 같은 말이지만 거기서 나오는 고통이란 즉자적 존재가 중력의 굴레에 붙들리는 아픔이다. 작가에게 글쓰기는 고통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문학(예술)만이 가장 그를 기쁘게 한다. 왜냐하면 그는 문체를 통해서 질적 차이를 실재하는 것들 속에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체에 의해 사물과 존재의 질적 차이가 육화 된다. 언어의 질료적 층위는 바로 스타일을 통해 발생하는 것이다. 문학에서 스타일은 그림에서의 색이며, 발화에서의 표정이며, 소리, 선, 면, 질감의 덩어리라고 말할 수 있다. 본질은 단어들이 배열되는 구조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일단 이것들이 배열되기 시작하면 이들은 서서히 색을 드러내고 부지불식간에 표정을 내 비추며 냄새들을 풍기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들을 발산하는 그 대상에 대해 어느 것으로도 치환할 수 없는 묘한 뉘앙스를 맛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 뉘앙스들로부터 포착한 심오한 이미지들에 대해 기호화된 매체를 가지고 설명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우리는 다만 이와 유사한 본질을 갖거나 동류의 다른 이미지들로 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건 마치 . . . 같아", "이건 저것이야"라고 말하기 시작한다. 매기는 이런 식으로 물고기로 운반되었다. 예술에서 스타일이란 한마디로 메타포이다. 마찬가지로 본질은 은유를 통해 나온다. 사물이 시간 속에서 드러나는 최종적 계시의 양태: 매기(의 본질)는(은) 물고기이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술 어디에도 전체로서 일자(一者)를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은유는 개별적인 하나의 체계가 파편화되고 부스러기들이 되면서 만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매기와 물고기는 각각 조각 나면서 만 결합한다. 이들이 하나의 통계화된 전체로서, 모든 본능들을 흡수하는 자아로서, 하나의 유기적 체계로서 각각 존재한다면, 이 단절된 두 신체가 어떻게 결합할 수 있겠는가? 아담이 매기의 이미지를 통해 이해한 내용은 더 이상 자신의 개념적 연쇄로는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는 시인이나 화가가 되면서 만 이 모든 그림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헨리 제임스에게 그토록 관점의 주제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정한 하나의 관점이 출현하고, 다시 다른 하나의 관점이 도약하고, 그리고 또 다른 관점들이 발생하면서, 또는 이 관점들이 결합하고 공명하면서, 효과들이 발산되면서 세계들이 증식한다. 특정한 하나의 순간. 그리고 하나의 육체에서 다른 하나의 육체로 횡단하는 선분들. 그러나 어떠한 전체도 상정하지 않는 시간. 단일화나 통일을 불허하는 시간. 분할할 수 없는 특권화된 순간. 이것이 바로 관점이다.

이런 이유로 개인들 작가들 독자들 모두는 서로 그 자신으로서, 자아로서 소통하지 않는다. 이들은 서로 차이가 나면서 소통하는데, 이 차이란 아무 것도 대신해주지 않는 고유한 하나의 관점을 의미하며, 또한 이들을 소통하게 해주는 것은 주체가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뿜어내거나 포착하는 특정한 질료의 시간들, 징후들, 그리고 인상들을 통해서이다. 베르그송은 이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을 "도약"이라고 말했으며, 프루스트는 "경련을 일으키는 인상"이라고 불렀다(주6). 여기서 동일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으며, 따라서 표상 된 것 역시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각각 개인들의 육체 속에, 표정 속에, 말들, 심지어 단어들의 배열 속에 담겨져 있지만, 강도 높은 친화력을 가진 그러나 다른 육체에 속한 관점들과 우연한 계기들을 통해 부지불식간에 만난다. 라깡이 개념화했던 부분적 욕망과 부분적 대상간의 관계를 니체식으로 본다면 관점(힘)들 간의 친화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단일한 전체에 의해 강요된 친화성이 아니라는 점이다. 부분적 욕망들은 오로지 부분적 대상들과만 관계할 뿐이다. 마들렌이 꽁부레를 불러들이고, 커피 잔에 온통 발백의 세계가 펼쳐지고, 매기가 물 속에서 놀 듯이 말이다.

 

IV.

생각해보면 문학(작품)에서는 본질을 발견하고 그들을 펼쳐내는 것만큼이나, 이들이 어떻게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가 역시 중요한 문제이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개별적인 작품들을 각각 동일한 그것으로 식별할 수 있겠는가? 부분적인 대상들간에 서로 공명하고 소통하는 테마가 문학작품 전체의 통일성을 설명해준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공명과 소통들은 자기자신의 힘에만 집중할 뿐이지, 자신과 아무 관계도 없는 다른 부분대상들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론 이 테마(부분적 대상들간의 소통)에 의해서만 전체성의 이미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부분적인 것과 전체적인 것의 관계를 검토할 때에 우리는 종종 두려움을 가지는 경향이 있는데, 그 이유는 어느 하나의 층위가 손상되거나 파손될 것이라는 우려에서이다. 확실히 다수적이고 부분적인 것으로서 질료는 단일화된 전체성과의 관계에 의해 환원 불가능한 즉자성을 잃어버리는 듯 보이며, 따라서 형태를 알지 못하는 질료들의 즉자성은 형태를 부여하는 단일한 전체로서 일자를 거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플라톤의 입장에서 볼 때 물질이 포함하고 있는 다수의 질료적 운동은 동일성을 표상하는 형상에 저항하며, 더 나아가 단일한 판단의 준거로서 전체성을 훼손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상대적 가치가 우리에게 주는 공포이다: 어떻게 하나의 사물이 동시에 둘 이상의 시간의 층위에 관여하는가! 어떻게 동일한 존재가 복수적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가! 사물의 크기가 어떻게 동시에 크거나 작을 수 있으며, 아름답고 추함이 어떻게 동시에 가능할 것인가! 한편 이러한 공포는 한 가지 구조적 조건에 의해 생겨나는데, 그것은 두 층위가 서로 대립하고 있다고 간주함으로써 이다. 이것이 바로 관념의 모순적 구조인 셈이다. 관념은 공존의 구조를 곧바로 모순의 구조로 변환시키면서 활동한다. 의식에 있어 변증법의 테마가 부정과 모순의 메커니즘을 통해 발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이를 피하기 위해 에피쿠로스(Epicurus)는 자연학을 윤리학의 토대로 정립하면서, 판단의 규준으로서 모든 감각이 어째서 참인가를 가르쳤던 것이며(에피쿠로스 51∼88.), 니체는 관점의 무수함을 주장했으며, 제임스는 매기와 아담의 분할된 관점을 질료적 언어(서정적 언어)속에 녹아 들게 함으로써 매기의 존재를 잃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프루스트는 식물에게서 배운 한 가지 모델을 통해, 모든 부분적인 것들이 어떻게 횡단하는지를 보여준다(Deleuze, "Proust" 133∼44). 그러나 이들이 그렇게 했던 것은 부분적인 것들을 특화 시키고 전체적인 것을 훼손하여, 그것과 대립적인 위치에 서있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들은 다만 그 공포로부터 벗어나고, 통일성 훼손이라는 죄의식을 없애고자 함이었다.

따라서 개요는 다음과 같다: 부분들을 종합하는 통일성으로서 전체는 다수의 부분들과 대립적이지 않다. 단일한 전체성은 존재한다. 이것은 질료적으로 특화 된 부분적 징후들이 마치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듯 보이는 문학작품을 보아도 금새 알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이 통일성이 없었다면 우리는 제임스의 소설을 프루스트의 그것과 구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차이는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만 특화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차이를 차이이게 하는 원인으로서 전체라는 의미가 아니다. 전체로서 단일자는 차이나는 것들을 손상시키지 않는 한에서만 의미가 있다는 말이다. "다자(多者)들의 통일로서 전체성, 다수성의 통일로서 전체성, 조각들의 통일체로서의 전체성은 존재하며 또 존재해야만 한다. 이때 일자와 전체는 다자와 그 부분들을 주관하는 원리가 아니라, 반대로 이 다자들로부터 생기는 '효과'이다. 일자와 전체는 원리로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효과로서, . . . 작동할 것이다"(Deleuze, 같은 책 163).

여기 하나의 주어가 있으며, 이에 달라붙어 연쇄하는 수많은 술어들이 있다. 복수적으로 따라붙는 이 술어들은 각각이 하나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으며 이 세계들이 하나의 전체를 구성한다. 술어는 각각 자신만의 고유한 고리들을 가지고 세계를 표현할 뿐이다. 우리는 이 각각의 조각 난 세계들을 끌어 모아 하나의 전체를 구성하고 여기에 이름을 부여한다. 의식의 개념적 범주들은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다(칸트의 경우 이 각각의 세계들이 시간과 공간, 그리고 언어의 범주들 안에서 하나의 전체를 구성하고, 나아가 전체의 전체로서, 최종적 단일자로서 신을 정립했듯이). 그러나 이 세계들은 자신들의 외부에 있는 그 단일한 전체의 원리에 의해 표현되지 않는다. 술어의 세계들은 대전제에 정체된 대자적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 본질을 갖는 즉자적 존재이다. 그들은 "조명 속에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들로부터 나오는 빛 속에서 나타난다". 같은 말이지만 주어가 술어들을 주관하지 않는다. 오히려 술어 자체와 술어들간의 효과로서 주어가 나온다. 다만 그것이 말에서 맨 앞에 나오는 이유는 모든 부분들의 원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반대로 맨 나중에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역순으로 자연에 되돌려 주기 위함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문체라고 부르는 것은, 단일한 전체로서, 하나의 기원과 원리로서 개념적으로 미리 정립된 주어를 가지고 술어들을 배분하고 조합하는 문제가 아니라, 반대로 무수하게 산재하는 부스러기들 중에서 (공명하는)어떤 세계들을 끌어 모아 어떻게 순열(permutation)로 배치할 것인가의 문제인 것이다.

Proust가 언급했던 무의식적 기억은 개별화된 존재의 시간 속에서 드러나는 질료적이고 본성적인 차이를 통해 하나의 세계를 다른 세계와 공명하게 한다. 이 세계들간의 공명은 통계적으로 배분되어 일정한 집합을 이루는 분포들이나 전체화된 특정의 개인들(개체들) 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보다 궁극적인, 더 이상 환원할 수 없는 즉자적 차이들이 서로 연결되는 과정에서 드러난다. 이 과정에서 분류체계는 완전히 달라진다. 개체가 감싸고 있는 개별화된 징후들(부분적 대상)은 각각이 특정한 시간을 가지면서, 유일한 차이들을 발산하지만, 동시에 이들은 예술 속에서 은유를 통해 서로 횡단한다. 은유란 징후들의 횡단 그 자체이다. 은유 안에서 부분적 대상들은 서로 일치되지도 전체화되지도 않으면서 서로서로 소통하고 협약하는 것이다. 이들은 충돌하면서 만 연결된다. 이 부분적인 대상들의 불일치와 일치의 메커니즘과 유사한 형태를 띠는 것은 칸트가 발견했던 숭고미와 능력들(이성, 오성, 상상력 들)간의 역설적인 관계일 것이다(주7).

프루스트는 식물의 성(性)을 비유로 자웅동체의 양성애 과정을 이론화했는데, 이 전체과정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성의 횡단(transsexual)"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Deleuze, "Proust" 136). 하나의 개체 안에 공존하는 이질적인 두 성(性)은 각자가 자신의 짝을 찾아 다른 개체들 속으로 파고든다. 이들의 성은 생물학적으로 분류되어 생식의 기능에 따라 구분되는 개체성(남/여)이 아니라 개별화된 징후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하나의 개체(남자 혹은 여자)안에 다수의 성들이 있으며, 이들의 성은 서로 사랑하기 위해 다른 개체 안에 감싸인 다수의 성들과 교차하고 횡단한다. 이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드러내는 몸짓과 표정과 미소들은 남자 안에 숨어버린 여성을, 혹은 여자의 몸 속에 침입한 남성을, 심지어는 이 둘을 하나의 신체 안에서 모두 드러내면서, 서로를 유혹하고 끌어당긴다. 우리가 그것들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서 순간적으로 특별화된 징후들, 개별화된 질료들을 통해서만 접근해야 한다.

그런데 은유가 바로 이 양성애와 닮았다. 하나의 사물 안에서, 서로들 간에는 전혀 소통하지 않던 이질적인 유일한 징후들은, 어떤 특정한 조건들과 시간 속에서, 다른 사물들이 뿜어내는 개별화된 징후들과 공명하는 것이다. 본질은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뛰어든다. 그것은 개인이나 개별자의 본질일 뿐 아니라, 그들과는 구별되는 그러나 그들 안에 이리저리 꽉 들어찬 하나의 혹은 다수의 독립적인 세계와 같다. 개인들 안에 감싸여 있는 본질의 세계(그러나 플라톤의 그것과는 엄연히 구분되는). 그래서 개인으로서 남자와 여자의 사랑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가 감싸고 있는 무한한 질료들 혹은 무수한 세계들의 사랑이라고 해야 옳다. 매 순간 뿜어대는 징후들간의 만남. 이 세계들은 신체의 기관으로서 커다란 눈을 바다가 되게 하며, 뛰는 심장을 대지가 되게 한다. 은유가 이들을 결합하고, 이들은 예술 속에서 서로 횡단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횡단은 서로 다름, 즉 차이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단절된 육체들을 소통하게 한다. 차이나고 단절된 육체들간의 거리를 제거하지 않으면서, 횡단성은 자신만의 독특한 체계를 가지고 서로 다른 두 존재를 결합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체성의 새로운 모델이다. 예술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규약들과 배열과 통계들은 우리가 삶 속에서 지루하게 보았던 그런 규칙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전체성의 이미지로서 동시에 기원의 이미지로서 하나의 이데아가 나오고 나면, 모든 육체들이 강요된 친화력으로 무장해야 하는 과정과는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은유(예술)가 사랑하는 여인의 모습을 바다로 이끌어 물고기를 만들고, 새로운 다른 세계를 불러들였다. 그러나 매기의 존재는 미리 결정된 이데아를 닮기 위해 다치지 않아도 된다. 은유는 본질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포착된 특정한 본질을 표현할 뿐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녀의 몸 주위에 이러저러한 세계들이 하나 둘씩 달라붙어 몸이 불어난다. 그녀의 세계는 물고기뿐 아니라 바다와 산들로 채워지며 세계들이 늘어난다. 이 세계들은 플라톤의 세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세계이다. "예술 덕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단 하나의 세계만을 보지 않고, 세계가 증식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독특한 예술가들의 수만큼이나 많은 세계들을 우리 마음대로 가질 수 있으며, 무한하게 회전하고 있는 세계들보다 더 많은, 각자가 서로 다른 세계들을 가지게 된다"(Deleuze, 같은 책 162; Proust 재인용).

 

V.

우리는 통일성의 새로운 모델을 예술에서 발견하고자 했다. 이는 본질의 결정이 단일한 원리로서 정립되면서, 개별적인 것들을 이 원리 아래 부분으로 포섭하는 전체화의 모델을 지양하기 위함 이었다. 왜냐하면 이 모델은 존재를 부정하고 그것의 본성적 차이를 양적으로 제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질에 관해 다른 방식의 질문이 요구되어, 본질에 관한 새로운 이해로서, 그것을 변화하는 시간과 특수성의 계기들 속으로 끌어내렸다. 존재의 본질은 하나의 원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개별화된 의미와 가치들로 복수화된다. 니체의 경우 이 과정을 힘의 관계들 속에서 설명하고 있으며, 이것이 그가 의미한 바 극화이다.

극화는 문학(예술)적 모델의 다른 말이다. 예술에서 존재들은 질적 차이를 통해서만 현실화하며, 이 때문에 생동하는 즉자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육화 한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예술에서 스타일이라 할 수 있는데, 스타일이란 여기에 없으며 우리의 주관적 사유능력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질적 차이를 현실적인 시간 속에서 경험하게 해준다. 우리는 스타일을 통해, 눈앞에 보이지 않는 대상을 바로 앞에서 만지고, 냄새 맡고, 맛을 보게 된다. 따라서 개념적 연상구조에서는 포착할 수 없는 세계들의 질적 차이를 실질적인 것으로 느낄 수 있게 한다. 이것이 헨리 제임스가 의미하고자 했던 질료의 매개로서 서정적 언어이다. 예술 언어에서 존재는 더 이상 관념의 논리적 연상에 의해 사유되는 이차원적 이미지가 아니다. 그것은 시간의 계기들과 개별화된 운동들 속에서 질적으로 육화 되는 세계들이다.

그런데 예술적 모델에서 존재는 통계적으로 구분되고 분배되는 하나의 전체로서가 아니라 근원적으로 차이나는 부분 대상들로 국소화된다. 또한 이 부분적 대상들은 다른 부분적 대상들과 교차되는 방식으로 공명하는데, 이 공명하는 양상이 문학에서 스타일을 이루는 것이다. 이렇게 개별적인 것들은 하나의 전체 안에서 동일화되거나 부분적 기능을 가지지 않고, 서로 유사한 계기들 속에서 복수화된 관점들로 현현한다. 이때 전체가 구성되는 배열이 달라지는 것이다. 예술에서 통일적 전체는 개별자들의 관계에 따라 체계를 달리한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예술작품의 어느 한 부분만을 떼어내도 전혀 다른 뉘앙스로서 전체를 경험하며 심지어는 완전히 다른 작품을 보게 되는 것이다. 예술적 전체성이란 한마디로 관점들이 무리 짓는 효과로서 등장한다. 이것은 전체화된 하나의 원리(본질)로 존재를 포섭하는 방식과는 반대로, 각각의 관점들 안에서 존재를 표현하는 양식이다. 즉자적 존재는 궁극적인 성질들을 자신 안에서 드러내는 것이다. 예술은 본질을 초월적으로가 아닌 내재적으로 표현한다. 따라서 예술에서 단일한 하나의 전체란 어디에도 없다.

예술에서 부분과 전체의 관계는, 전체의 부분들이 아니라 부분들의 전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전체성은 조합의 메커니즘이 아니라 순열적 배열이다. 우리는 이에 대한 몇 가지 예들을 프루스트와 제임스의 언어들 속에서 살펴보았다. 프루스트에 따르면 예술은 횡단적 통일성이라는  전체화의 새로운 모델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주1) 라깡(J. Lacan)에 따르면 욕망의 흐름은 특정한 형태로 전체화된 대상에 향하지 않는다. 개인은 전체로서 욕망하는 존재가 아니라, 환원할 수 없는 부분적인 욕망들을 포위하고 있는 존재이다. 또한 부분적인 욕망은 부분적인 대상을 취한다. 따라서 어떤 것을 욕망할 때에는 전체로서 대상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시간 속에서 보여지는 특정한 면들에 향해있다. 횡단이란 전체화된 개인들 속의 특정한 면들과 대상의 특정한 면들이 서로 교차되어 연결됨을 의미한다.

 

(주2) 들뢰즈는 베르그송(H. Bergson)과 프루스트 양자의 시간관과 관련하여, 시간의 존재론적인 층위와 심리적인 층위를 구분해서 현재와 과거의 관계들을 논의한다. 이 논의에 따르면, 현재를 중심으로 표상되는 과거는 현재와 질적인 차이를 가지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는 주체의 직관활동을 통해 과거를 재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의 직관이나 지각은 과거의 기억과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과거와 현재가 서로 연쇄적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과거는 존재하지 않으며, 언제나 변하지 않는 현재를 통해서만 표상될 뿐이라는 내용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과거든 미래든 질적인 차이는 없으며, 현재의 주체의 기억은 과거가 되고, 주체의 기대는 미래가 된다. 이 경우 과거는 현재의 의식으로 구성된 이차원적 이미지일 뿐으로 현재의 어느 것으로도 환원 가능하다. 반면에 베르그송과 프루스트는 과거가 현재와는 구별되는 즉자적 존재성을 띤다고 이해한다. 과거는 주체의 현재적 활동의 소산이 아니라, 그 자체 변하지 않는 환원 불가능한 존재론적 시간 속에 있다. 이런 이유로 이들에게 현재와 과거는 사라지거나 현존하는 연속적 관계가 아니라, 각각 동시에 공존하는 시간의 두 차원이라고 말한다. 현재의 경우 활동적인 형식으로, 과거의 경우 활동이 중단되고 보존되는 방식으로. 그래서 주관적 연상의 고리들 속으로 과거(의 존재)를 흡수하는 주체의 현재적 활동으로서, 자발적인 기억이나 의식적인 지각은 존재의 질적 차이를 파악하지 못한다. 반면에 현재의 물질적 경험들(예로, 소리나 맛 색깔 등의 질적 성질의 포착)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과거의 기억(비자발적 기억)은(예를 들어, 그의 작품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은 마들렌 과자의 맛을 통해 최초로 그 맛을 경험했던 과거의 고향 꽁부레를 떠올린다), 주체가 의식의 자발성을 통해 연상한 과거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현재와 불연속하면서 존재론적으로 공존하는 즉자적 존재로서의 과거는 연상의 의식적 고리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비자발적 기억에서처럼 주체의 의식과는 관계없이 부지불식간에 주체의 지각을 자극하고 압도해 버린다. 이렇게 갑자기 침입해오는 존재의 즉자성 앞에서 주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마 "경련(catalepsis)"이외엔 없을 것이다. 시간에 있어 두 차원의 문제와 그와 관련된 프루스트의 비자발적 기억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Deleuze, "Bergsonism" 51∼72, "Proust" 52∼66)를 참조.

 

(주3) 너스바움(M. Nussbaum)은 헨리 제임스의 The Golden Bowl에서 주인공인 매기(Maggie Verver)와 그녀의 아버지 아담(Adam Verver)간의 선택의 딜레마를 욕망과 책임의 두 대립적인 관계로 풀어서 다루면서, 이 부녀의 갈등이 (자발적)희생을 통해 존재를 긍정함으로써 어떻게 서로 상처받지 않고 행복해 질 수 있는가를 이 소설의 한 장면을 제시하면서 전개한다. 이 소설의 주요 모티브는 아담과 그의 딸인 매기의 복잡한 윤리적 관계로 시작된다. 여기서 다루어지는 두 사람의 관계는 아버지와 딸의 제도적 관계를 넘어서는 실존적 인간관계를 의미한다. 처음에 이들은 한 번도 서로(의 관계)에 대해 의심해보지 않았다. 아버지에 대한 딸의 지극한 효성과 딸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 이들은 충만한 부녀관계(제도적 관계) 속에서 언제나 함께 였지만, 제도적 기능을 넘어서는 실존으로서 자신들의 존재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다. 그러나 매기가 남편인 아메리고(Amerigo)에 대한 강렬한 사랑과 아버지에 대한 사랑(효성)이 공존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 후, 그녀는 아버지와의 제도적이고 상상적인 관계 자체를 회의한다. 이제 두 사람은 부녀관계를 넘어서 실존적 관계에 위치한 것이다. 그녀에게 아담의 존재는 무엇인가? 아버지와 딸이 아닌 동등한 인간적 관계에서 이 두 사람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남편에 대한 관능적인 사랑과 아버지에 대한 연민은 어떻게 다르며 또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이러한 고민들 속에서 매기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남편에 대한 관능적 사랑과 아버지에 대한 지고한 사랑을 섬세하고 조심스럽게 고백하게 된다. 그녀는 아버지를 향한 사랑에 대해 "가장 깊은 사랑은 질투를 넘어서며, 모든 것을 초월해 버리므로, 아무 것도 그 사랑을 꺾을 수 없다"(Nussbaum 150; James 재인용)고 말한다. 이때 아담은 딸의 고백을 들으면서 아련히 밀려오는 하나의 이미지를 마음속에 그려본다. 그녀의 자태를 보면서 그는 어느 것으로도 포획할 수 없는 한 마리의 물고기를 연상한다: "찬란한 은빛 바다 속에서 노닐고 있는 자유로운 한 마리의 물고기"(151). 아담은 이 물고기의 비유를 통해 딸이 더 이상 아버지의 보호와 그늘 아래서가 아니라 자기자신에게서 나오는 빛으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실존임을 이해하게 된다. 무엇으로도 교환할 수 없는 그녀 자신만의 존재.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Nussbaum, "Finely Aware" 148∼57)을 참조. 본 논문은 너스바움이 제시한 이 부녀의 장면을 간헐적으로 언급하면서, 너스바움이 전개하고 있는 존재의 긍정의 문제와 환원 불가능한 즉자적 존재성의 논의를 유사한 맥락에서 보여주고 있다.

 

(주4) 너스바움은 또한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인 마르셀과 알베르틴의 이별장면을 통해, (사랑의)인식이 과연 어떠한 조건들(과학적이고 자발적인 지성 혹은 비자발적인 인상들) 속에서 가능해지는가를 논의하고 있다. 이것은 인식 일반에 관한 논의로 확장될 수 있는데, 프루스트에 따르면 본질과 의미에 관한 인식은 과학적이고 자발적인 지성이 아니라, 주체의 의식에서는 예기치 못한 사건과 인상들을 통해 가능해 진다. 마르셀이 알베르틴에 대한 사랑을 깨달은 것은 그녀를 소유하고 있다고 여길 때가 아니라, 반대로 그녀가 이별을 선고함으로써, 마르셀이 그녀를 소유할 수 없는 존재로 깨달은 후이다. 본 논문은 프루스트와 관련된 몇 가지 개념들과 예들이 있으며, 주인공의 이별의 경험을 통해 전개되는 인식의 조건들의 주제 역시 너스바움(프루스트)의 주제와 같은 맥락에서 다루고 있다. 이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Nussbaum 261∼274)를 참조.

 

(주5) 바따이유(G. Bataille)는 헤겔적인 어조로 에로티즘을 정의한다: 그것은 소유하지 못하는 금지된 대상에 대한 강렬한 (위반의)욕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대상은 심지어는 신비롭기까지 하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Bataille, "Share" 51∼8)을 참조.

 

(주6) 들뢰즈는 생명이 분화하는 과정, 즉 새로운 것이 어떻게 발생하는가를 말하기 위해 이와 유사한 이미지를 끌어들인다. 그에 따르면 새로운 것은 필연적 연쇄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연적이고 선택적인 과정 속에서 생긴다. 이 선택의 순간에 망설임이 등장하는데, 이 망설임이 바로 경련의 순간이다. "Biologists, for example, teach us that the development of the body proceeds by fits and starts: a butt of a limb is determined to be a paw before it is determined to be the right paw, etc. It is possible to say that the animal body "hesitates," and that it proceeds by way of dilemmas. Similarly, reasoning proceeds by fits and starts, hesitates and bifurcates at each level."(Deleuze, "Logic" 280) 강조는 필자가 했음.

 

(주7)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숭고미를 개념화하는 가운데, 숭고 체험은 능력들간의 일치된 조화가 파편화되면서 만 가능해진다는 점을 논의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형태를 가늠할 수 없는 무형적이고 기형적인 대상에 직면했을 때, 상상력은 이성이 명령한 이념의 실현, 즉 전체성의 현시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자신의 극한에까지 능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포착과 총괄이라는 자신의 능력들로는 이 대상을 전체화할 수 없음에 대해, 자신의 한계를 이성에게 되돌리면서, 이념의 전체성을 직접 체험하게 된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능력이 하나의 이념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것임을 인정하게 만드는 것이 이성임을 깨닫게 된다." 이때에 숭고미를 체험하게 되는데, 이는 상상력이 전체성의 거대함이나 이념의 막대함을 체험(칸트는 이를 경외심이나 존경과 같은 소극적 방법이라 함)하는 과정에서 나온다. 즉 숭고미는 상상력과 이성이 서로 갈등하면서 체험되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 과정을 능력들이 불일치하면서 일치되는 체험이라고 설명하면서, 『판단력 비판』을 칸트의 작품들 중 가장 훌륭한 저작이라고 언급한다. 숭고미와 능력들의 불일치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Deleuze, "Kant" 50∼52)를 참조.

 

 

참고 문헌

Bataille, Georges. "The History of Eroticism", The Accursed Share: An Essay on General Economy. 2 vols. New York: Zone Books, 1993.

Deleuze, Gilles. Bergsonism. Tr. Hugh Tomlinson and Barbara Habberjam. New York: Zone Books, 1997.

-----. Kant's Critical Philosophy. Tr. Hugh Tomlinson and Barbara Habberijam. London: The Athlone Press, 1995.

-----. The Logic of Sense. Tr. Mark Lester. New York: Columbia UP, 1990.

-----. Nietzsche and Philosophy. Tr. Hugh Tomlinson. London: The Athlone Press, 1983.

-----. Proust & Signs. Tr. Richard Howard. Minneapolis: U of Minnesota P, 2000.

Fink, Bruce. The Lacanian Subject. Princeton: New Jersey, 1995.

Nussbaum, Martha C. Love's Knowledge: Essay on Philosophy and Literature. Oxford: Oxford UP, 1990.

에피쿠로스. 「헤로도투스에게 보내는 편지」.『쾌락』. 오유석 역. 서울: 문학과지성사, 1998.

Posted by hu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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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베르그송: 실제의 운동을 양적으로 재구성하는 환영으로서 영화

우리는 운동을 공간의 이동과 관련지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특정한 물체가 하나의 공간에서 다른 하나의 공간으로 이동하거나, 특정한 공간이 다른 공간들 사이를 주파하거나 겹치고 뒤덮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운동은 공간들의 결합과 위치 이동에 의해 재구성될 수 있는 것으로 정의된다. 예로, 직선상의 점들을 통과하는 것으로 운동이 정의되고 나면, 이제 다시 이 점들의 결합을 상상하거나, 하나의 점에서 다른 하나의 점으로의 이동을 사유함으로써 운동을 재구성할 수 있는 것이다. 이로써 운동과 공간은 양태를 서로 달리하는 동일한 실체가 된다. 운동은 공간의 이동이며, 운동 중에 있는 특정한 순간은 공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움직이지 않는 그 특정한 순간들을 결합하면 최초의 그 운동이 재현될 수 있는 것일까? 베르그송에 따르면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우선, 운동을 공간의 이동과 동일화하는 것은, 움직이지 않는 순간이나 특정한 위치에 추상적인 연속 개념만을 추가한 것일 뿐이다. 연속하지 않는 두 점을 연속하는 것으로 취하기 위해 두 점 사이에 놓여있을 무수한 점들을 설정하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를 위해 연속이라는 개념을 추가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뿐이다. 이 관점에서 운동과 공간은 실질적인 차이가 없다.

운동과 관련하여 베르그송의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그 무수한 직선상의 점들을 실제로 통과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불연속하는 계기들이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연속을 갖기 위해서는 이 계기들간에 존재하는 새로운 양태가 필요하지 않을까? 만일 운동이 움직이지 않는 단편이나 공간화된 위치를 통해 유추된 것이라면, 공간과의 실제적인 차이는 무엇에 근거하는가? 이와 같은 베르그송의 질문은 존재와 관련하여 보다 근원적인 논의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우선적으로 이 질문은 운동과 공간이 실질적인 차이를 갖는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에 따르면 운동은 공간의 이동이 아니라, 공간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운동은 언제나 실제적 지속 안에서만 발생한다. 그리고 이 실제적 지속이 바로 질적 차이를 의미한다. 베르그송은 처음에 매우 단순한 동기에서 시작하였을 것이다. 아킬레스는 어떻게 앞서가고 있는 거북이을 추월할 수 있을까? 철학은 아킬레스의 운동을 무수한 점들의 통과로 이해함으로써, 아킬레스와 거북이 간에 놓여진 거리를 해소할 수 없는 심연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의 경험과 모순적이다. 아킬레스 뿐 아니라 모든 존재들의 거리가 실제로 좁혀져 추월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는 이 모순을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논제를 던진다: 아킬레스의 운동(그리고 거북이의 운동)은 둘 간에 놓여진 공간의 이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과 거북간의 관계 전체, 다시 말해 아킬레스와 거북의 관계를 포함하고 있는 공간적, 시간적, 더 나아가 우주 전체의 변화를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그 운동은 점들의 단순한 통과가 아니라, 점들의 배열 자체, 혹은 이 점들이 포함되어 있는 좌표계 전체의 변화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실질적 차이의 의미이다. 나의 한발의 운동은 나를 둘러싼 우주 전체의 변화이다.

운동은 공간을 지나가면서 매 순간 공간을 감싸고 있으며, 시간적으로 현재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이질적이며 환원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운동은 분리될 수가 없고, 분리하기 위해서는 분할되는 매 순간들의 질적 변형이 요구된다. 반면에 공간은 시간적으로 과거이며, 동질적이다. 따라서 하나의 점과 다른 하나의 점은 질적인 차이가 없고 단선적이다. 공간은 쪼갤 수 있고 분할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운동과 공간의 질적 차이는 다음과 같은 명제를 함축하고 있다: "우리는 공간 속의 위치들(positions) 또는 시간 속의 어떤 순간들을 가지고는 운동 자체를 재구성할 수 없다"(Deleuze 1). 따라서 베르그송에 의하면 운동에 관한 두 가지 공식이 서로 대립을 이루고 있다. (1) 분할할 수 없는 매 순간의 질적 변형으로서 실제적 운동 혹은 지속 (2) 분할 가능하고 불연속하는 단편들의 집합과 사유에 의해 구성된 시간으로 이루어진 공간적 운동.

베르그송에 의하면 우리의 지각은 실제의 흐름이나 운동을 신체의 물리적 장치를 통해(감관, 신경계 등) 혹은 지식의 장치(사유)를 통해 스냅샷을 찍듯이 외부의 자극을 수용한다. 지각은 실제의 운동을 자르고 재연결하는 일련의 메커니즘을 갖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의 운동을 잘못된 형식으로 재현하는 것으로서, 베르그송은 이를 『창조적 진화』에서 영화적 환영(the cinematographic illusion)이라 불렀다. 따라서 영화는 두 수준의 형식적 운동을 통해 구성된다. (1) 이미지라고 불리는 순간적인 파편들이 있으며, 이 파편들은 공간적으로 결정된 움직이지 않는 이미지이다. (2) 이 파편들을 연속하는 것으로 만드는 영화적 장치들의 운동이 있다. 이 운동은 비인간적인 운동이며, 단일하고도 동질적인 운동, 즉 추상화된 운동이다. 따라서 이것은 지각되지 않으며, 지각을 넘어선 형식적 운동이며, 공간화된 시간이다. 예를 들어 장치의 속도의 증감에 따라 이미지들의 연속적 운동의 양태는 전혀 다르게 지각될 것이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영화는 그 자체로 움직이지 않는 단편적인 이미지들을 외적 장치에 의해 연속의 환영을 만들면서 운동을 재구성한다. 그래서 영화는 운동을 직선상의 점들의 통과로 이해하는(제논의 역설) 고대적 사유방식과 다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영화가 재현하는 운동은 잘못된 운동의 전형이다.

2. 운동을 재 구성하는 두 가지 유형

『창조적 진화』에서 베르그송은 운동을 양적으로 재구성하는 두 가지 방식에 대해 언급한다. 이 두 방식 모두 실제의 운동 자체와는 관계가 없다.

(1) 고대철학에서 운동은 지성이 파악할 수 있는 요소들과 관계하면서 나오는데, 이는 사물로부터 초월하여 그 본질을 표현하는 형상이나 이데아의 질서에 의해 가능하다. 예로, 물은 차가운 상태와 뜨거운 상태만이 포착될 뿐이다. 상태들간에 놓여진 무수하고도 실제적인 이행은 지성이 파악할 수 없으므로, 물 온도의 운동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운동은 변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것들의 추상적 종합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형상은 물질의 실제적 흐름과 관계하면서만 현실화되는 것이지만, 지성이 관심을 갖는 것은 실제의 흐름 자체가 아니라, 이들이 본질로서 드러나는 최종적 계기 혹은 특정한 순간(차가운 순간 혹은 뜨거운 순간)이다. 그리고 이 특정 순간들을 이상적으로 종합함으로써, 운동을 변증법적 질서에 따라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운동은 하나의 형상에서 다른 하나의 형상으로 규칙적이고도 단속적인 이행의 형식으로 구성된다. 운동은 물질의 흐름이 아니라, 사유에 의해 연역되어 초월적 질서를 갖는 포즈(pose) 혹은 특정한 순간들의 질서가 되는 것이다.

[고대 철학에서] 형상들 혹은 관념들은 본질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하나의 특정한 순간으로 특징지어진다. 이 순간의 나머지들은 이행으로 채워져 있으며, 형상이나 이데아는 이들의 운동 자체에는 관심이 없고, 다만 하나의 형태에서 다른 하나의 형태로의 이행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는다. [. . .] 따라서 그 순간은 최종적 순간 혹은 정점(telos, akme`)으로 간주되며, 이 정점은 본질적 순간으로 결정된다: 이 순간은 사물의 전체과정을 표현하기 위해 언어에 의해 포착된 순간이다. 또한 과학은 그 순간을 특징짓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 된다(Bergson 359).


실제의 운동을 변증법적 질서로 대체하는 것은, 이행이 완결된 것으로 간주되는 포즈의 이상적 종합이다. 이것은 공간 사이에 추상적 사유의 운동을 추가하는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운동을 재구성하는 고대적 방식은 자연적으로 주어진 지각과 관계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인간화된 관점 속에서만 확립될 수 있다. 지성을 이루고 있는 지각은 실제의 운동을 완전히 포착할 수 없으므로, 개념상 본질적이라고 파악되는 특정한 요소들을 뽑아내어 그 전체를 요약하고 재구성한다. 운동에 관한 고대적 재구성을 추상적 요약 혹은 초월적 종합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2) 현대과학은 이행이 종결된 특정 상태 혹은 본질의 순간을 통해 운동을 이해하지 않는다. 즉 운동은 더 이상 포즈들의 변증법적 종합에 의해 연결되지 않는다. 현대 과학은 자르고 재 연결하는 양적 메커니즘을 통해 운동을 불특정한 순간으로 재구성한다(이것이 테크놀러지의 심화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따져봐야 할 것이다). 물론 이 역시 운동을 양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긴 하지만, 더 이상 형식적이고 초월적인 요소들이 아니라, 물질적 흐름의 내재적 요소들(즉 파편들)로 재구성되는 것이다. 완결된 형상으로서 포즈들이 변증법적으로 구성되기 위해서는 이 포즈들간의 단절된 간극에 외적인 요소들(추상, 관념)을 끌어 들여야 한다. 그러나 현대적 의미에서 파편적인 요소들을 재구성하는 것은 운동 그 자체를 미분하여 축적하려는 노력이다. 즉 운동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순간들(불특정 순간들)을 표현하는 것이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순수)지각은 물질과 동일한 실재성을 갖는다. 또한 지각은 물질의 운동을 그 자체 내에서 전달하고 끊는다.

이런 식으로 하나의 궤도와 그것이 가로지르기 위해 필요한 시간의 관계를 결정함으로써 현대 천문학이 형성되고(Kepler); 떨어지는 물체가 갖는 시간에 뒤덮힌 공간을 연결함으로써 현대 물리학이 형성되고(Galileo); 현대 기하학은 평곡선의 방정식, 즉 움직이는 직선 위의 임의의 한 점의 위치를 [공간과 시간의 함수로]풀어냄으로서 성립된다(Descartes); 그리고 무한히 접근하는 면들을 검토하게 되면서 미적분학이 나온다(Newton과 Leibniz). 어디를 보든지 불특정한 순간들의 기계적 연속이 포즈들의 변증법적 질서를 대체한다: "현대과학은 우선적으로 시간을 독립변수로 간주하려는 열망에 의해 생겨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Deleuze 4). [ ]괄호는 필자


현대적 의미에서 운동은 그 물질적 요소들(감각적 요소와 같은 불특정 순간)의 기계적 연속으로 구성된다. 이에 따르면 운동은 이행하는 임의의 점(편재된 점)들을 감각적으로 포착하여 같은 거리로 균등 분할한 이 요소들을 적분한 총체를 의미한다. 그것은 더 이상 포즈의 종합이 아니다. 현대적 의미의 운동은 자연적 지각과 관계하지 않으며, 따라서 비인간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무차별적인 공간의 분할과 재 연결 혹은 양적인 것들간의 관계의 법칙에 의해 이루어진다. 운동의 현대적 재구성을 감각적 미분 혹은 내재적 분석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운동을 두 방향에서 설명해 왔다: 하나는 지적인 요소들의 개념적 종합으로서 변증법적 방식. 다른 하나는 감각적 혹은 물질적 분석에 의해 즉각적으로 포착된 불특정 순간을 미분하고 적분함으로써 구성하는 해석학적인 방식.

운동을 구성하는 방식에 있어 저 두 번째 방식을 따른 것이 바로 영화이다. 영화는 운동이 완결된 특정 순간이 아니라, 운동 중에 있는 불특정 순간을 잘라낸다. 다시 말해 그것은 시간이 생략된 단편이 아니라, 흐르고 있는 시간에서 임의의 구역을 잘라내는 방식이다. 영화의 결정적인 조건으로서의 스냅 샷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이점에 있어서는 영화와 사진의 근본적인 차이를 발견하기 힘들 것이다. 따라서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운동-이미지의 불특정한 어떤 블록이다. 또한 이 블록에는 실제의(시간의) 부피가 내재해 있으므로, 운동은 그 자체로 내재적 성질을 갖는다. 블록은 하나의 순간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베르그송이 지속(dure'e)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실제의 운동과 시간에 스며들어 있는 부피였다. 그 유명한 Muybridge의 말 촬영에서 하나의 예를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말의 운동을 분석하기 위해, 달리는 말을 동일한 간격의 빛으로 포착함으로써, 운동과 빛의 물질적 함수관계를 시간으로 매핑(mapping)한다(달리는 말은 카메라에 연결된 줄을 끊고, 끊어진 줄은 말의 운동 간격에 따라 카메라의 셔터를 누른다). 이때에 잘려진 단편은 지적인 요소로 추상화된 하나의 상태가 아니라, 물질적 요소들로 채워져 실제의 부피를 갖는 면을 이루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영화는 실제의 운동을 쏙 빼놓은 포즈들의 결합이 아니라, 꽉 들어찬 시간의 어느 한 구역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영화가 근본적으로 유물론에 그 존재론적 토대를 두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운동의 단편에 관한 이 같은 영화적 해석은 운동을 전혀 다른 수준에서 정의하게 한다. 우선 운동을 설명하는 두 유형 중에서 전자의 경우, 즉 고정된 순간이나 그 단편으로부터 설명하는 방식은 운동의 발생 근거를 그 자체에서가 아니라 외부적 결정요인에서 찾는다. 추상적인 하나의 점이 운동성을 갖기 위해서는 다른 형태의 추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즉 시간적 부피나 평면으로부터 설명하는 방식은 운동의 발생 근거를 그 자체 내에서 찾는다. 시간의 부피를 갖는 이 블록들의 간격 사이에는 다른 외재적 힘이 들어갈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운동은 재현되는 순간 전혀 다른 것으로의 질적 변형이 일어나므로, 우리는 그것을 자를 수도 없으며 재현할 수도 없다. 다만 양적인 냉각만이 있을 뿐이다. 운동을 재현하는 두 형식을 다음과 같이 구분해보자: 회화적 방식으로서 초월적 요약. 그리고 영화적 방식으로서 내재적 냉각. 전자의 경우 운동 그 자체는 생략되고, 후자의 경우에는 그 자체로 얼어붙는다.

3. 들뢰즈: 운동-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영화

베르그송이 말했듯이 우리의 지각이 지식이나 신체의 장치를 통해 실제의 운동을 단속적으로 잘라서 이를 재구성하는 것이며, 이를 영화가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눈을 깜빡거리면서 언제나 영화를 찍고 있는 것인가? 혹은 우리가 스크린을 보면서 실제로는 눈앞에서 움직이는 사물의 동작들을 사유하고 있는 것인가? 현상학자들을 모호하게 언급하면서 들뢰즈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영화는 자연적 지각과 두 가지 점에서 다르다. 또한 이 차이는 운동과 관련하여 영화를 새로운 국면에 위치시킨다.

(1) 영화는 운동이 (사유에 의해)부가된 이미지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운동하는 이미지와 운동 그 자체의 이미지를 제시한다. 영화가 단편적인 필름 조각(photogramme)들을 결합하여 일정한 속도(24/sec, 18/sec)를 갖는 장치를 통해 연속의 환영을 만들어내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우리가 영화를 통해 보는 것은 각각의 조각들이 아니다. 우리는 그 조각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이미지를 보는 것이지 그 조각들 자체를 보지는 않는다. 따라서 단편적 조각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운동은 우리의 지각이나 사유를 통해서가 아니라 이미 영화적 장치에 의해 실현되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영화에서의 이미지는 사유에 의해 운동이 추가된 것이 아니라, 이미 운동이 내재하고 있는 이미지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평균 이미지(intermediate image)이며, 이 평균 이미지에 운동이 부가되거나 추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즉각 주어진 것으로서 평균 이미지에 운동이 속하게 된다"(Deleuze 2). 자연적 지각에서 운동은 지각의 대상 뿐 아니라 지각을 가능케 하는 조건들에 의존해 있다. 현상학자들에 따르면 지각의 주체는 이미 세계 안에 존재하고 있는 실존이다. 이것이 바로 주체의 세계-내-존재, 세계에의 정박, 혹은 의식의 열림을 가능케 해주는 실존의 근거들이다. 이로써 지각은 곧 존재를 포함하는 세계를 의미한다. 그러나 영화적 지각에서의 운동은 이 대상들과 조건에 관계없이 그 자체 내부에서 즉각적으로 운동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다시 말해 영화는 주체의 실존적 조건으로서 세계의 지평을 배제함으로써 대상들을 빼고 그들로부터 운동의 순수 이미지만을 추출해 낸다. 이로부터 세계는 그 자신의 이미지가 되거나, 나아가 지각 뿐 아니라 하나의 앎의 형식이 되어 버린다(현상학은 자연적 지각을 우위에 두고 영화적 운동이 자연적 지각의 조건에 맞지 않기 때문에 영화를 비판했다. Deleuze 57을 참조하라). 영화는 우리에게 운동이 부가된 이미지가 아니라 즉각적으로 운동-이미지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연적 지각과 영화적 지각은 질적으로 다르다. 우리가 스크린을 통해 보는 것은 사물의 움직임이 아니라, 이미지의 움직임이며 동시에 움직임의 이미지이다: "영화는 하나의 단편(단면)을 제공하지만, 여기서의 단편은 움직이고 있는 단편이지, 움직이지 않는 단편 + 추상화된 운동이 아니다"(Deleuze 2). 자연적 조건들을 넘어서는 운동-이미지는 영사장치의 속도에 의해 이미지의 운동양태가 달라진다는 점만을 보아도 알 수 있는 문제이다.

(2) 영화는 고정된 관점을 취하는 자연적 지각과는 전혀 다른 메커니즘으로 운동을 생산한다. 물론 영화는 초기에 자연적 지각과 다르지 않았다. 우선 관점(카메라)이 고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때의 쇼트는 그 안에 배열되어 있는 부분 대상들이 점유하고 있는 텅 빈 공간, 혹은 데카르트적 공간처럼 구성된다. 영화 초창기의 프레임은 일종의 좌표계처럼 설정되는데, 따라서 쇼트는 공간적이었고 부동적인 것이었다. 또한 촬영 장치 역시 영사장치와 결합되어 있었으므로, 배치된 사물들을 포함하고 있는 단일한 하나의 추상적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영화의 본질과 그 자신의 고귀함은 카메라가 이동하게 되면서부터 획득하기 시작했다. 카메라의 이동은 고정된 관점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공간의 이동이나 확장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카메라의 이동은 두 차원에서 실행되는데, 하나는 카메라의 실제적인 이동(트래킹 쇼트나 패닝 등)이며, 다른 하나는 쇼트의 편집(몽따쥬)이다. 전자의 경우 운동은 지각과 완전히 분리된 형태는 아니다. 카메라는 마치 우리의 눈이 그렇게 하듯이 사물들을 포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근본적인 수준에서 공간적 범주에 속했던 쇼트가 시간적 범주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선 몽따쥬에 의한 공간적 비약은 (관객의)지각으로 하여금 시간이라는 변수를 개입시키도록 강요한다. 쇼트 A와 쇼트 B의 이질성은 공간 뿐 아니라 시간적 변수에 의해 연속성을 갖게되는 것이다. 또한 몽따쥬는 프레임 안에 위치하고 있는 사물들을 배치하는 좌표계 자체의 이동과 변화를 의미한다. 몽따쥬는 좌표점들간의 공간적 운동이 아니라 좌표계 자체의 운동을 실현하는 것이다. 쇼트 내에서 움직이지 않고 정지해 있는 인물이나 사물을 보여주는 경우에도, 쇼트의 편집은 시간적 변화를 내포하고 있다. 쇼트가 시간적 범주가 됨으로써 영화에서의 운동은 이제 인물이나 사물들간의 이동이나 위치에 종속되거나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들을 운동과 변화 속에 종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영화는 운동의 공간이 아니라 공간의 운동을 생산한다. 몽따쥬는 현실을 하나의 시점에서가 아니라 다양한 관점에서 탐구하는 것인데, 이로부터 시간은 클로즈-업 되어 현실의 심오한 내적 시간이 획득된다. 여기에 "적극적 관찰자(active observer)"(Pudovkin 82)라는 개념을 사용한 푸도프킨의 좋은 예가 있다: 몽따쥬는 거리의 데모를 구경하기 위해 지붕 위에 올라가서, 다시 군중이 들고 가는 플래카드를 읽기 위해 창가로 내려오고, 군중들의 표정을 느끼기 위해 그 속에 섞인다.

베르그송은 존재 일반을 포함하는 단일한 하나의 지속이 아니라 존재들 각자에 스며든 다양한 내적 지속을 주장했는데, 그가 『창조적 기억』에서 언급했듯이 영화는 잘못된 운동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가 주장했던 지속의 다양성을 영화가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4. 운동-이미지란 무엇인가?

시간과 관련하여 사진은 수학적 의미의 점의 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은 시간의 모든 지속을 제거해버린 하나의 추상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화석의 이미지이다. 따라서 사진은 시간의 실질적인 부피나 두께를 가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영화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베르그송이 말했듯이, 영화의 실제적 조건인 스냅사진들의 결합(동일한 간격을 갖는)과 연속은 잘못된 운동을 보여주는 것이므로, 영화 역시 시간이나 운동과 관련하여 화석의 이미지라고 말할 수 있을까? 베르그송이 영화를 추상적 점들의 결합으로, 그리고 운동의 환영으로 이해하면서 이를 비난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영화를 사진과 관련지어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에 대한 이와 같은 형태론적 접근에도 불구하고, 베르그송은 이미 『물질과 기억』에서 사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운동을 구현하고 있는 영화적 운동을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 책 1장에서 사유와 운동의 이원론적 대립의 해소라는 주제를 위해 그가 설정했던 "이미지"의 개념을 영화가 가장 잘 예증해주고 있다.

의식은 공간에 펼쳐지지 않은 질적인 표상이며, 물질은 공간 속에서 양적으로 펼쳐진 운동이다. 이제 의식과 사물 혹은 표상과 운동이라는 서로 다른 두 질서가 마주보고 있다. 적어도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적인 구분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두 질서의 이행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에 있다. 지각에서와 같이 연장성을 갖는 물질의 운동이 어떻게 비연장적인 표상으로 이행할 것인가? 반대로 (가능한)행동에서처럼 표상이 어떻게 운동으로 전환될 것인가? 관념론과 유물론의 해소할 수 없는 이 대립은, 동일한 문제를 서로 다른 방향에서 출발함으로써, 사유의 표상과 물질의 운동을 서로 도달할 수 없는 심연으로 만들어 놓았다. 따라서 유물론은 순수한 물질의 운동을 가지고 의식의 질서를 재구성하고자 한다. 표상은 물질적 운동으로부터 비롯된 비 실재적 효과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지각이 표상한 내용은 물질의 외양에 불과한 것이며, 물질의 심층에는 지각과는 독립하여 질적으로 다른 무엇인가가 존재한다. 반대로 관념론은 의식 안에서의 순수한 이미지들로 우주의 질서를 재구성하고자 한다. 이에 따르면 잠재적 표상 안에 이미 운동이 존재한다. 같은 말이지만 물질은 우리의 지각 안에서 구성되고, 표상은 물질의 본질을 결정하는 것이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관념론과 유물론은 너무 덜 나아갔거나 혹은 너무 나아갔다. 이들은 각각 실재하고 있는 하나의 질서만을 긍정하고, 다른 하나의 질서를 전자의 부정으로서 즉 파생실재로 결정함으로써, 두 질서를 이원론적으로 구성하였다. 이로부터 의식과 사물은 접근할 수 없는 심연을 사이에 두고, 표상은 그 자신의 이미지 안에서 물질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 반대 역시 어떠한 실재로 나아가지 못한다. 우리는 이로부터 물질을 표상으로 망상하거나, 혹은 물질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가 없게 된다. 이렇게 해서 정신은 우리 자신의 영역으로 제한된다: "우리가 취하는 지각으로 물질을 환원하는 것이나, 사물이 그 자체 다른 본성을 갖는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지각 안에서 생산될 수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은 모두 오류"이다(Bergson Matter and Memory xi). 따라서 베르그송은 정신과 물질이 어떻게 접면을 이루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필요했으며, 표상과 운동 그리고 의식과 사물의 이원론을 극복해야만 했을 것이다. 『물질과 기억』의 서문 첫줄에서 베르그송은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정신의 실재와 물질의 실재의 긍정. 그러나 어떻게 서로 다른 심연이 관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실제로 사물들을 접하고 있으며, 우리의 내부에서 이들을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또한 이 둘을 너무 멀리에 놓음으로써 주관적 경험이 객관적 질서와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를 잃어버린 것이 사실이 아닌가?

가설적 이론이 직접적인 체험과 일치하지 않거나 이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게 되었을 때, 필요해지는 것은 경험을 설명해줄 수 있는 새로운 기제를 연역하는 일이다. 표상과 사물의 관계를 분명히 하기 위해, 베르그송은 『물질과 기억』의 1장에서 두 가지 이례적인 이론을 언급하고 있는데, 하나는 이미지에 대한 새로운 가설이며, 다른 하나는 새롭게 정의된 이미지와 관계하는 지각에 대한 가설이다. 이런 점에서 그 책 1장에서의 이론은 문제를 두 방향에서 접근하고 있는 셈이다. 하나는 물질-운동의 관점에서 시작하는 방향이며, 다른 하나는 지각의 관점에서 시작하는 방향이다.

(1) 나타나는 모든 것들의 집합을 이미지라고 부르자. 그에 따르면 이미지는 물질과 동일한 것이다. 물질은 이미지의 집합이며, 반대로 이미지는 물질의 집합이다. 나아가 우리가 우주라고 부르는 것 역시 이미지의 총체로 이루어져 있다. 이미지에 관한 이 정식은 심리학의 역사에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즉 이것은 이미지가 더 이상 의식 안에 존재하고 있는 비연장적인 표상이 아니며, 물질 역시 의식적 표상으로서의 이미지와 근본적으로 구분되어 주관성으로부터 초월적인 신비물이 아님을 함축하고 있다: "물질은 이미지들의 집합이다. 우리가 말하는 이 이미지란 말하자면 관념론자들이 말하는 표상보다는 더한 존재이며, 유물론자들이 말하는 사물보다는 덜 한 존재이다. 즉 그것은 사물과 표상의 중간에 위치한 존재이다. 물질(이미지)에 대한 이 개념은 매우 단순하고 상식적인 것이다"(Bergson Matter and Memory xi). 관념론은 사물을 가깝게 놓기 위해 그것을 정신과 동일시했으며, 유물론은 정신으로부터 독립된 질서 속에 그것을 놓음으로써 우리로부터 너무 먼 곳에 사물을 놓았다. 사물이 우리의 정신 안에만 있는 것이라거나 혹은 우리가 지각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독립된 것이라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그러니 상식의 수준에서 그 사물은 그 자신 안에 존재하며, 반면에 우리가 그것을 지각함에 따라 하나의 이미지가 된다. 따라서 이미지는 의식적 지각 안에 존재하는 표상일 뿐 아니라 사물과 본성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다. 이미지는 우리가 사물을 지각하는 바대로 거기에 혹은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 이미지가 물질과 표상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가 지각하는 대상이 사물이며 세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미지, 즉 물질은 곧 우리의 지각이며, 그 내부에 혹은 그 배후에 어떠한 심층도 내포하고 있지 않다.

우주를 이루고 있는 이미지들 각각은 서로 다른 이미지들에 작용하고 반응한다. 오히려 각각의 이미지는 그 자신이 작용이며 동시에 반응이다. 이들은 서로 주고받는 운동을 통해서 스스로를 변형시키며, 다른 이미지들을 통과시키고 통과한다. 심지어 모든 사물 즉 이미지들은 자신들의 작용이나 반작용과 혼동되어 표면화된 운동을 이루고 있다: "이 모든 이미지들은 그들의 기본적인 부분들 속에서 다른 이미지에 작용하고 반응한다. 이 상호작용은 내가 자연의 법칙이라고 부르는 끊임없는 법칙들에 따라 작용하며, 이미지들의 미래는 그들 현재 안에 포함되어 있으며, 거기에 새로운 어떤 것도 첨가되지 않는다"(Bergson Matter and Memory 1). 또한 이미지는 우리의 외관에 주어진 원자적 실체로서만 정의되지 않는다. 우리의 신체 역시 물질이며 이미지이다. 우리의 두뇌, 신경, 기관, 세포, . . . 이 모든 것들은 이미지이며, 우주를 이루고 있는 이미지 총체의 부분들이다. 따라서 나의 몸은 쉼 없이 증식하고 소멸하며 변형이 이루어지는 분자-이미지와 원자-이미지들의 집합이다: "이것은 보편적 변이의 세계, 보편적 파동, 보편적 물결(파문)의 세계이다: 거기에는 축도, 중심도, 좌/우도, 상/하도 없다. 모든 이미지들의 이와 같은 무한한 집합은 일종의 내재성의 표면(plane of immanence)을 이루고 있다. 이 표면 위에서 이미지는 그 자체로 존재한다. 이러한 이미지의 즉자성. 이것이 바로 물질이다: [물질은] 이미지의 배후에 숨겨진 어떤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이미지와 운동의 절대적 동일성이다. 이미지와 운동이 동일하다고 간주되는 순간 우리는 즉시 운동-이미지와 물질이 동일하다고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 . . 운동-이미지흐름-물질은 분명히 동일한 것이다"(Deleuze 58-59).

(2) 그렇다면 중심이나 심층이 없이 부분적인 이미지들 각각의 고유한 운동 속에서 내재적 표면을 이루는 운동-이미지가 어떻게 하나의 표상으로 혹은 단단한 실체로 구별될 수가 있을까? 또한 물질의 흐름을 누가 구별할 수 있을 것인가? 나의 신체나 두뇌 역시 그 이미지들과 동일한 실재성을 갖는 하나의 이미지가 아닌가? 유물론자들에 대한 베르그송의 비판은 물질이 의식적 표상으로 이행되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으로 집약될 수 있는데, 바로 여기에서 운동-이미지의 또 다른 체계 즉 신체의 지각이 언급되고 있다. 만일 나의 지각이 사라지거나 미약해 졌을 때, 이 이미지-물질의 운동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때 우리는 하나의 특별한 이미지를 보게 된다. 이 이미지는 세계를 이루고 있는 이미지들 중 특정한 유형의 작용을 수용하고, 수용된 이미지들의 운동을 구심신경, 척수, 두뇌, 원심신경, 근육 등과 같은 통로-이미지들을 따라 다시 그 이미지들에게 운동을 되돌려준다. 외부의 이미지들을 선별하고 전달하여 다시 운동을 반사하는 이 특별한 이미지가 바로 신체(두뇌)이다. 나의 신체는 운동을 주고받는 물질 세계 속의 다른 모든 이미지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이미지이다: "우주 일반을 이루고 있는 이미지들이 있고, 내 육체에 근접한 이미지들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내 육체 자체의 이미지가 있다. . . . 나는 물질을 이미지들의 총체라고 부른다. 그리고, 물질의 지각은 이와 동일한 이미지인데, 이것은 내 육체라고 불리는 특별한 이미지의 실제적인 행위에 속한다"(Bergson Matter and Memory 7-8).

운동-이미지가 육체와 관계함으로써 그 운동의 양태는 달라질 것이다. 이들은 우선 육체에 수용되어 육체를 중심으로 상대적인 운동에 들어간다. 육체를 싸고 있는 표면과 관계된 분자운동은 구심신경을 통해 다양한 진동으로 전달되어 중추계로 집결되고, 혹은 두뇌에 도달한 진동은 이런 저런 방식에 의해 원심신경으로, 그리고 다시 각 감각기관 혹은 근육으로 전달될 것이다. 중심을 가지지 않는 이미지의 운동은 중심을 갖는 육체 이미지의 내적인 운동으로 변조를 이룬다. 자신의 고유한 법칙으로 운동하던 이미지들은 나의 육체가 그것에 접근하거나 그것으로부터 멀어지는 정도에 따라, 색, 모양 뿐 아니라 심지어 모든 특질들이 변한다. 지각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러한 분자운동의 내적 이행들 속에서 육체-이미지를 중심으로 배열되고 통과하면서, 내 육체의 위치들을 나타내고 지시하는 일종의 분자운동의 한 기능이다: "이 [내적] 운동은 처음부터 내 육체 안에서 외부 대상의 작용에 대한 내 육체의 반응을 준비하도록 의도된 운동들이다. 육체-이미지는 다만 매 순간 마다 움직이고 있는, 나침반처럼 주어진 특정한 이미지, 즉 주위의 다른 이미지들과의 관계 속에서의 내 육체의 위치를 지시할 뿐이다. . . . 그렇다면 두뇌의 지각 기능이라고 불리는 것과 척수의 반사 기능은 본성상의 차이가 아닌 정도상의 차이만 있을 따름이다. 척수는 수용된 자극을 운동으로 변형한다; 두뇌는 그것을 단순히 초보적인 반응으로 연기시킨다"(Bergson Matter and Memory 8). 따라서 (두뇌의)지각은 정신의 비물질적 표상이 아니라, 물질-이미지의 직접적 운동과 관계한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지각은 분자운동들을 번역한다. 마찬가지로 지각은 물질-운동과 동일한 위상에 있다.

이와 같은 두 방향에서의 논거들은 이미지에 관한 이례적인 진술을 도출해 내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이미지가 취하고 있는 이중적 체계이다. 동일한 하나의 이미지는 두 방향의 지시체계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각 이미지가 스스로 다양해지고, 모든 이미지들이 서로간의 기능으로서, 그들의 모든 면들 위에서 그리고 모든 부분들 속에서, 작용과 반응을 일으키는 하나의 체계가 있다"(Deleuze 62). 우리는 이를 편의상 물적 상태의 이미지, 다시 말해 운동-이미지라고 부른다. 물적 상태는 중심에 의해 가변적인 상대적 변화가 아니라, 그 자신만의 고유한 운동 법칙에 따라 절대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체계를 이룬다. 중심이 없이 부분들 그 자체로 존재하는 체계. 유물론자들에게 있어 이것은 딱딱하고 고집스러우며 포착이 불가능한 물질-신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미지는 또 하나의 지시 체계를 가지고 있다. 모든 이미지 혹은 그 부분들이 "기본적으로 하나의 이미지를 위해 다양해지고, 다른 이미지들의 작용을 그 면들 중 하나에 수용하며, 또 다른 하나의 면 위에서 그 이미지들에 반응하는 체계"이다(Deleuze 62). 이 하나의 특별한 이미지는 바로 육체, 혹은 그로부터 나오게될 지각이다. 육체라는 중심을 갖는 이미지의 체계. 그리고 이 중심의 작은 변화에도 말랑거리고 변덕스러운 이미지의 체계. 우리는 이를 편의상 지각-이미지라고 부른다(이미지의 두 체계에 대해서는 Bergson의 Matter and Memory 12-16쪽을 참고하라). 베르그송은 유물론이 이미지의 첫 번째 체계를 통해 두 번째 체계를 결정했으며, 관념론은 두 번째 체계로써 첫 번째 체계를 정립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두 체계가 어떻게 동일한 실재성으로 관계를 갖는지 설명하기 위해, 이 두 입장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면, 즉 내재적 표면으로서 운동-이미지를 상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세계 일반을 이루고 있는 이미지가 있으며, 이 이미지의 한편에는 물질-운동의 체계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지각-운동의 체계가 있다: "사물과 그 사물에 대한 지각은 동일한 하나의 사물이며, 동시에 동일한 이미지이다. 그러나 이 동일한 이미지는 서로 다른 체계와 관계한다. (1) 사물은 그 자신 안에 존재하는 즉자적인 이미지이며, 다른 모든 이미지들과 작용하고 반응하면서, 서로 완전한 관계를 맺고 있다. (2) 그러나 사물에 대한 지각은 그 사물의 이미지에 틀을 설정하고 초점을 맞추는 또 다른 특별한 이미지[육체]에 관계하면서, 그 사물의 이미지로부터 부분적인 작용만을 수용하고, 간접적으로만 반응한다"(Deleuze 63).

그러므로 물질과 지각은 서로 양적인 차이만을 갖는다. 지각은 물질-운동으로부터 필요에 따라 이러저러한 물질의 면과 선들을 선택한다. 우리는 사물들을 지각하면서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은 이미지들을 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지각은 주관성의 최초의 물질적 상태를 정의하는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각은 이미지들의 집합 중에서 육체가 요구하는 것을 선별하고 그 나머지는 감산한다. 그러나 지각이 사물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이미지라면 사물 역시 지각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물질-운동의 체계 속에서 중심을 갖지 않는 이미지는 다른 이미지들의 면과 선에 작용하거나 반응하면서 그들을 지각한다. 오히려 우리의 지각보다 더 많은 것들을 지각한다. "하나의 원자는 . . . 우리보다 무한히 더 많은 것들을 지각한다. 그리고 그 자신의 한계에서, 최초의 작용들이 일어나는 지점에서, 그 반응들이 도달하는 한계까지, 우주 전체를 지각한다. 사물과 그 지각은 한마디로 말해 포착(prehension)이다. 그러나 사물들은 객관적이고 총체적인 포착이며, 지각은 부분적이며 편파적이며 주관적인 포착이다"(Deleuze 63-64).

바로 이점에서 베르그송은 현상학과 구별된다. 현상학에서 자연적 지각은 세계 내에 위치한 주체의 의식의 열림으로 간주된다("의식은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이다"). 따라서 자연적 지각은 운동-이미지와 본성적으로 차이나는 것으로 간주된 의식이 어떻게 운동-이미지와 관계하는가의 난제를 해결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현상학에서 자연적 지각은 의식의 열림이지 물질의 표면은 아니다. 현상학은 여전히 의식과 물질의 이행을 외재적(초월적) 방식으로 이해했으며, 운동을 포즈(pose)와 연결 지어 생각했다. 베르그송은 유물론과 관념론이 물질과 표상을 서로 대립적인 관점에서 논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간에는 이례적으로 한가지 공통된 가정이 있다고 지적한 바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들이 지각을 순수한 인식의 문제로 간주하고 있다는 점에서였다(Bergson Matter and Memory 17). 이런 의미에서 현상학은 관념론이나 유물론과 마찬가지로 지각을 주관성의 계열에 놓음으로써 여전히 전통적 방법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Deleuze 60). 반면에 베르그송에게 있어 지각은 의식의 열림이기 이전에 이미 물질-운동과 동일한 이미지이다("의식은 어떤 것이다"). 이것은 의식과 사물 나아가 존재에 관한 보다 근본적인 차이를 수반할 것이다. 현상학의 경우 이미지와 운동은 동일한 것이 아니며, 동일한 내재적 평면을 이루고 있지도 않다. 다만 이 두 심층이 서로 열려있기는 하다. 베르그송의 경우 이미지와 운동은 동일한 것이며, 동일한 평면 위에 내재하고 있는 동일한 실재이다. 이미지는 운동이며 그 자체로 하나의 이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운동-이미지는 의식과 물질의 이행을, 나아가 운동일반을 내재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내재성의 면이란 바로 이런 의미이다. 다만 육체와 관계하는 한에서 운동-이미지는 그 양태가 달라질 것이다(들뢰즈는 나중에 이를 지각-이미지, 행동-이미지, 감정-이미지 등으로 분류하였다). 따라서 운동-이미지의 한편에는 지각이 다른 한편에는 물질의 운동이 동시에 내포되어 있다. 운동-이미지는 주관성의 물질적 순간이며 동시에 객관성의 정신적 순간이다. 그것은 그 자체 하나의 이행이다. 주관성과 객관성은 운동-이미지라는 동일한 평면 위에서 하나의 표면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와 관련하여 이 모든 것들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영화의 역사를 훑어보면 사진의 단절과 연속을 포함하는 이미지의 운동이 주요한 관건으로 등장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리피스 이후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영화의 언어 역시 이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운동-이미지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강렬한 효과에 집중하는 것이든, 아니면 표현된 의미에 집중하는 것이든 간에, 이것이 영화적 편집(montage)의 근본적인 질문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영화의 형식뿐 아니라 내용을 이루고 있는 것, 즉 영화의 물질성에 대한 문제가 될 것이다. 우리는 운동-이미지를 물질-운동과 동일한 것이라고 언급해왔다. 그러나 더 구체적으로 혹은 영화적으로 말한다면 운동-이미지는 빛의 운동이 아닌가? 사진으로 되돌아가 말해보자: 피사체의 이미지가 어떻게 감광판에 투사되는가? 지각과 이미지를 의식의 영역으로 제한하는 이론은 언제든지 이 문제를 두뇌의 기적적인 권능에 의해서만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투사된 그 이미지가 실제의 피사체와는 다른 본질(실재성)을 갖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베르그송이 말했던 운동과 지각의 동일한 실재 때문이기 이전에, 이미 우리는 그렇게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물의 표면이 빛을 발하면서 나의 각막이나 피부로 다가온다. 나의 신체로 다가오는 그 운동-이미지를 우리는 빛의 운동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내재성의 면은 모두가 빛이다. 운동, 작용, 반응들의 집합은 여기저기에 편재하는, 저항 없이, 손실 없이 퍼져나가는 빛이다. 이미지와 운동의 동일함은 곧 물질과 빛의 동일함과 다르지 않다. 물질이 빛인 것처럼 이미지는 운동이다. . . . 베르그송이 원했던 것은 . . . 내재성의 면 전체 위에서 발생하는 빛의 분산 혹은 확산의 긍정이다. 운동-이미지에서는 아직 실체나 단단한 선들은 없고 오로지 빛의 선들 혹은 형상들만 있다. 시간-공간의 블록들은 바로 그런 형상들이다. 그것은 즉자적인 이미지들이다. 그것이 누군가에게, 즉 눈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것은 빛이 아직 반사되거나 정지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계속 퍼져 나가지만 결코 드러나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눈은 [의식, 주관이 아닌]사물들 속에, 빛나는 이미지들 자체 속에 있다. 사진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사물들의 내부 자체 안에, 공간의 모든 지점에서 이미 포착되어 있으며 촬영되어 있다"(Deleuze 60). 따라서 우리는 영화의 역사에 있어 영화의 내용을 이루고 있는 문제가 다름 아닌 빛의 문제, 더 심오하게는 어둠의 문제였음을 알게된다. 초창기의 환등(magic lantern)은 촛불과 같은 인공적인 빛을 모으면서 시작되었다. 후에 석회를 백열하는 상태까지 가열시켜서 만든 회광등(limelight)에 의해 전기가 촛불을 대신하게 되었다. 회전 요지경(thaumatrope)은 지각을 왜곡시키는 빛의 잔상효과를 이용해 만들어졌다. 페나키스티스코프(Phenakistiscope), 죠트로프(Zoetrope), 프락시노스코프(Praxinoscope)와 같은 영상장치들은 작은 구멍을 통해 빛을 배열, 분산, 연속, 단절시키는 문제로 집약될 수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사진은 빛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물질을 이용한 것이다.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가 나온 이후, 아크등(arc light)과 렌즈가 추가되었으며, 노출 때보다 더 많은 빛을 모으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 계산되기 시작했다. 에디슨의 약한 확산광을 수정한 것이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래프(Cine'matographe)이다. 영화의 물리적 조건에만 빛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편집과 같은 언어 예술적 측면에서도 그랬다. 예를 들어, 에이젠슈타인은 감각의 몽따쥬를 통해(공감각) 모든 물질-운동을 빛의 형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표현주의자들은 열정의 강렬함을 바로 빛과 어둠의 대위법으로 구성했다. 이뿐만이 아닐 것이다. 영화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운동뿐 아니라, 우선적으로 빛의 물리학으로부터 빛의 예술로 진화한다.

우리가 만일 지각과 운동에 대한 현상학의 논의를 수용한다면 영화가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현상학자들에 따르면 영화는 일종의 의식의 파노라마이다. 영화는 우리가 꿈을 꾸든지 혹은 상상을 하든지, 지각에 의해 포착된 이미지 단편들을 의식 안에서 외부로 풀어내고 있는 일종의 이야기 형식으로서의 릴이다. 그런데 베르그송이 운동과 관련하여 영화를 비난했던 것은 정확히 바로 이것이 아닌가? 운동은 우선적으로 빛과 관련되는데, 의식의 파노라마란 말하자면 사물에 투사되고 있는 의식의 빛이 아닌가? 이에 따르면 물질은 애초에 어둠의 상태였다. 그 존재는 마치 검은 벽에 환등기의 빛이 영사되어 윤곽이 드러나듯이, 의식의 빛에 의해서만 현존하게될 것이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우리는 영사기-의식과 스크린-물질이라는 상보적인 두 개의 항을 도출하게 된다. 영화와 관련하여 누가 보고 누가 지각하고 있는가를 질문한다면, 현상학은 의식의 눈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러한 대답은 사물의 운동에도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베르그송은 이와는 반대이다. 그에 따르면 빛은 의식이 아니라 이미 사물 그 자체 내에서 발하고 있는 것이다. 사물은 조명 빛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빛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영화만큼 잘 보여주는 것이 또 있을까? 마찬가지로 존재의 빛이 아니었더라면 영화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베르그송의 의도는 한마디로 의식의 눈이 아니라 물질의 눈에 있었을 것이다. 들뢰즈는 영화가 "운동-이미지의 첫 번째 체계인 보편적 변이, 총체적이고 객관적이며 모호한 지각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Deleuze 64). 베르그송에 의하면 이 모호한 지각이란 운동-이미지와 관계하는 지각, 엄밀히 말해 아직 기억이 스며들지 않은 의식적 지각 이전의 순수지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영화는 인간의 눈이 아니라, 순전히 기계의 눈 혹은 물질의 눈에 의해 포착된 이미지를 보여준다. 물론 하나의 쇼트에는 아주 많은 주관성의 징후들이 투사되어 있다. 앙드레 바쟁은 하나의 쇼트 내에서도 몽따쥬가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시적 영화(cine'ma de poe'sie)를 언급하면서 파졸리니는 자율적인 주체가 되어버린 카메라가 자의식을 갖게되면서 자유간접적인 주관성을 획득하게 된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하나의 프레임은 이미 주관적 배열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소련의 몽따쥬 대가들, 즉 쿨레쇼프나 푸도프킨 심지어는 에이젠슈타인조차도 주관성의 구성적 효과에 주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쇼트에는 기억이나 사유가 개입될 수 없는 순수지각의 층위가 여기저기에 편재되어 있다. 공중을 활공하는 카메라(예로, 크레인 쇼트)를 보면서, 우리는 어디서든지 사진이 찍히고 있으며, 의식은 어떤 것에 대한 의식이 아니라, 바로 그 자체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지가 베르토프가 선언(Kinoki)했던 골자일 것이다. 따라서 영사기-의식과 스크린-물질이 아니라 영사기-물질과 스크린-의식이라고 해야 옳다. 어떠한 저항도 받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는 운동-이미지 혹은 빛-운동은 단단한 실체로서 밀도 높은 그러나 불투명한 벽에 부딪히면서 그 자신의 이미지를 반사시킨다. 이것이 사진 뿐 아니라 영화의 존재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우주 어디에서든 촬영되고 영사되고 있는 것이다: "그 자체 영화로서의 우주, 메타시네마"(Deleuze 59).

따라서 한 장의 사진이 운동과 시간의 한 점, 즉 화석의 이미지라고 말할 수 있다면, 영화는 면, 그것도 운동하고 있는 면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영화는 화석의 진화, 즉 진화하고 있는 화석 그 자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나의 눈과 그 눈이 바라보고 있는 저 사물 사이에 아무것도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텅 빈 기하학적 공간은 영화에 대해 어떠한 설명도 할 수 없게 만든다. 내 눈과 저 사물 사이에는 무수한 이미지들, 즉 물질-빛-운동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 눈이 혹은 저 사물이 조금만이라도 움직이거나 달라진다면, 눈과 사물간에 놓여있는 꽉 찬 공간 전체의 크고 작은 굴곡이 일어날 것이다. 아킬레스가 거북을 추월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의 눈과 사물 사이의 공간을 냉각시키고 정지시켜 보라. 그리고 거기서 임의의 한 점 혹은 단면을 잘라내어 보라. 아마도 빛의 화석이 고스란히 담겨있을 것이다. 그것은 검은 감광판에 의식을 영사한 것이 아니라, 중심이 없으며 앞-뒤가 모호한 셀룰로이드 판과 같이 그 자체 빛을 내는 투명한 사진이 될 것이다. 사진은 순수지각의 임의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번엔 그 단면을 녹여 보라. 그 투명한 사진은 곧바로 빛-운동, 물질-운동의 집합, 즉 운동-이미지가 될 것이다. 베르그송에게 영화는 잘못된 운동의 전형이 아니라 가장 적절하게 운동-이미지의 예가 되고 있는 것이다.

베르그송이 제기한(오히려 이것은 발명이라고 해야한다) 이미지는, 순간으로 추상화되어 움직이지 않고 고정된 단편이 아니라, 움직이고 활동하고 있는 실질적인 단편으로서의 이미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이것은 보다 심오한 차원에서 시간의 단편이 아니겠는가? 운동-이미지는 보다 심오한 의미에서 시간-이미지와 관계하게 될 것이다. 시간의 실질적 부피는 아무리 잘게 잘라도 수학적 점의 상태로 환원할 수 없는 면이며 덩어리이다(그래서 거기에는 또한 모종의 간극 또는 거리가 내재하고 있다. 이 간극과 거리는 또한 생-이미지를 발생케 하는 조건이 될 것이다. 생명이 결정론으로부터 유일하게 벗어날 수 있는 지점은, 간격이나 거리로 가늠될 수 있는 망설임과 선택의 순간에 깃 든 긴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에 대해서는 Deleuze 62를 참조하라). 그가 제시한 이미지는 지성의 사유에 의해 유추된 부동의 단편적 이미지가 아니다. 그는 이미지로부터 운동과 시간을 배제하지 않았으며, 거기에는 쪼갤 수 없는 공백, 두께 혹은 꽉 들어찬 지속이 스며들어 있다. 이미 우리는 그로부터 정신과 물질의 동시성을 포함하고 있는 부피-이미지를 본 셈이다.

참고문헌

Bergson, Henri. Creative Evolution. trans. Arthur Mitchell (New York: Random House, 1944).

_____________ . Matter and Memory. trans. Nancy Margaret Paul & W. Scott Palmer (London: George Allen & Unwin LTD, 1950).

Deleuze, Gilles. Cinema I: The Movement-Image. trans. Hugh Tomlinson & Robert Galeta.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6.

Pudovkin, V. I. Film Technique and Film Acting. Trans. and Ed. Ivor Montagu. New York: Grove,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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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표상 예술(회화나 문학과 같은)과 구별되는 요소를 지적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관계하고 있는 재료, 즉 이미지만을 검토해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우선 사진에 사영(寫影)된 사물의 형상은 주관적 의식에 의해 자율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카메라는 빛의 흡수와 반사를 통해 사물의 표면을 복사한다. 빛의 연속 운동은 카메라에 의해 특정한 구역이 절단되고, 이 단편이 일으킨 화학작용으로 인해 하나의 형상이 만들어진다. 빛을 이루고 있는 다수의 질점은 감강판의 특정한 영역으로 이동하고, 이로써 사물과 (사진)이미지의 관계는 기계적 대응이라는 함수를 이룬다. 사진 속에서는 “빛=사물의 표면”이라는 공식이 성립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진을 통해 “빛은 물질의 피부”라는 표현을 비유로서가 아니라 실재로서 대면하게 된다. 어느 모로 보나 사진의 형상(形象)을 이루고 있는 이미지는 의식적 기억이나 사유와 같은 주관성의 자율적 체계에 속하지 않는다. 들뢰즈(G. Deleuze)는 베르그송(H. Bergson)이 『물질과 기억(Matter and Memory)』에서 연역해낸 이미지의 개념을 바로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해석하였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이미지란 물질과 동일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어떻게 지각된 대상을 실제의 사물이며 세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미지에 대한 이 개념은 심리학의 역사에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는데, 즉 이것은 이미지가 더 이상 의식 안에 존재하고 있는 비연장적인 표상이 아니며, 물질 역시 의식적 표상으로서의 이미지와 근본적으로 구분되어 주관성으로부터 초월적인 신비물이 아님을 함축한다.1) 들뢰즈에 따르면 베르그송은 이미지를 빛-물질과 동일한 것으로 정립함으로써, 의식(사유)과 물질(운동)의 이행, 즉 물질이 의식의 표상으로 이행하거나 혹은 의식의 표상이 (행동과 같이) 물질로 이행하는 관계를, 순전히 사진적 의미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진에 포착된 사물은 그림이나 이야기로 투사된 의식의 빛 이전에, 주관적 표상(이미지)의 개입 없이도 그 자신 안에 존재하는 물질로서의 빛 그 자체이다.

사진이 물질의 표면을 기계적 함수로 처리함으로써 형상을 재현했다면, 영화는 거기에 운동과 시간의 형식을 덧붙여 실재의 재현을 완성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꽤 복잡한 설명을 필요로 하는 이 명제는 베르그송의 운동 개념을 통해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베르그송은 운동의 두 수준을 구분하였다. 하나는 운동하는 물체와 그것이 지나간 공간, 그리고 다른 하나는 순수한 질적 강도로서의 운동성 그 자체이다. 고대철학은 운동하는 물체가 지나간 공간과 운동성 그 자체를 혼동함으로써, 운동의 질을 양적인 것으로 대체하여, 실질적인 운동을 동질적 공간 속에서의 물체의 위치 이동으로 바꾸어 놓았다. 예를 들어, 아킬레스는 특정한 위치로부터 출발하여 또 다른 특정한 위치로 이동하고, 다시 특정한 위치에 직면하게 될 것이며, 이는 무한히 계속될 것이다. 운동을 위치의 이동으로 이해하는 순간, 아킬레스는 결코 거북을 추월할 수 없을 것이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고대철학이 아킬레스와 거북의 운동을 결코 해소할 수 없는 심연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서로 질적으로 다른 아킬레스와 거북의 운동성을 단순히 좌표 위에서의 점들의 이동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베르그송은 『창조적 진화』의 제4장 전체에 걸쳐, 영화적 환영(cinematographic illusion)이라는 이름 아래, 영화를 잘못된 운동의 전형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영화를 사진들의 결합이라고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사진들을 결합하고 이를 하나의 운동으로 만드는 장치와 영화를 혼동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영화는 고대철학이 했던 운동의 주관적 재구성을 기계의 양적 이동을 통해(기계론적 착각) 똑같이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는 움직이는 사물로부터 운동성 그 자체는 제거하고, 순전히 기계적인 장치에 의해, 정지된 형상(사진)들의 추상적이고도 양적인 결합만을 유도한다고 간주했던 것이다. 그에 따르면 영화는 실제의 운동이 아니라 장치들의 공간적 위치 이동, 더 정확히는 정신적 추상과 동일한 방식에 의해 재구성된 운동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오히려 영화는 사물들로부터 운동성 그 자체만을 증류해낸 것이 아닌가? 물론 영화가 기계장치의 반복적인 메카니즘으로 작동하는 것은 사실이다. 예로, 운동의 양적인 일관성을 보존하기 위해 필름에 동일한 길이의 구멍을 뚫는다. 그렇게 해서 영화 이미지는 필름조각들을 균등하게 분할된 속도에 따라 처리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영화 이미지에서 운동성의 본질은 필름조각 자체가 아니라, 필름조각들간의 대체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아닌가? 영화에 있어 이미지의 운동성은 움직이지 않는 추상적 점들간의 단순한 위치 이동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속이 공간들 사이에서 발생한다고 말했던 베르그송의 운동개념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 이미지의 운동성이 정신적 추상이 아닌 물질적 분석에 의해 수행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미 사진적 의미에서의 이미지를 언급했던 베르그송이 잘 설명하고 있다. 사진은 운동을 초월적 추상으로 요약한 포즈들의 결합(정신적 결합)이 아니라, 물질-빛의 구역, 즉 운동성의 블록을 보여주고 있다. 사유에 의해 조명된 빛이 아닌 물질-빛 그 자체의 기계적 운동. 이 운동과 지각의 동일성은, 지각=물질=빛의 내재적 관계들을 이루면서, 운동 중에 있는 지속의 부피 자체를 보존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 영화는 실제의 운동(물질)에 대한 분석적 냉각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기계장치가 필름조각들의 시간적 균등분할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가능한 말이다. 사진의 물질성은 곧바로 영화의 운동성으로 확대된다. 그리하여 영화에 있어 이미지의 운동이란 신체나 공간과 같은 다른 모든 부수적인 것들을 제거하고, 순수한 의미에서의 운동성 그 자체만을 고스란히 남긴 이미지이다. 예를 들어, 미소짓고 있는 고양이로부터 고양이는 빼고 미소만을 남기는 것이다. 비록 영화의 재현성이라는 개념으로 오해하기는 했지만, 바쟁(Andre' Bazin)이 영화를 사진적 의미에서 그 고유한 존재론적 위상을 확인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런 의미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영화가 표상예술과 구별되는 점은 영화 그 자체의 존재론 속에서, 그 고유의 존재 속에서 발견되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운동과 물질의 내재적 관계로부터 확립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닌가? 영화는 베르그송적인 의미에서 물질과 동일한 외연을 갖는 이미지이며, 동시에 운동성을 증류해 낸 것으로서의 운동 그 자체이다. 들뢰즈가 영화의 존재론적 위상을 분명히 하기 위해 조합해낸 “운동-이미지”의 개념은 바로 이런 의미이다.

사진과 영화는 유물론적 토대 위에서만 성립 가능하며, 그 자체로 유물론을 예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를 기계 테크놀러지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 토대에 기인한다. 우리의 정신은 테크놀러지를 통해서만 물질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진과 영화에도 회화나 문학에서 볼 수 있는 주관적 요소들이 풍부하게 들어있다. 무대 배치나 조명과 같은 화면의 조형성이 아니었다면 영화는 예술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야기의 형식이 아니었다면 영화는 시간 속에서 체험되는 삶과는 무관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심지어 객관적인 르포르타주에도 이야기는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영화에 있어 근본적인 것은 인간적 의식 이전에 존재하는, 심지어는 주관성의 조건이 되는 물질(의 운동과 시간)일 것이다. 아무 움직임도 없는 하나의 정지된 쇼트를 진정한 회화적 의미에서의 그림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면 거기에는 근본적으로 운동과 시간, 즉 배치된 요소들(인물이나 사물)의 움직임이 배제되는 경우에도 지각을 초과하여 흐르고 있는 모종의 굴곡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스크린의 시간이란, 아킬레스의 한 발이 의미하는 것과 정확히 같은 수준에서, 화면 자체가 이미 우주 전체의 변화를 야기하는, 미세하지만 거대한 파동을 의미한다. 제 아무리 근사한 기획에 의해 가공된 화면구성이라 해도, 또 상상력의 빛이 아무리 찬란하다 해도, 스크린 표면에서 움직이고 있는 저 피사체들과 그 주위를 둘러싼 파동은 마음대로 생략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실재이다. 몽따쥬와 같은 문학적 장치를 통한 허구적 효과 역시 영화의 관점에서는 다른 문제일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영화는 종합 이전에 발생하는 기계적 사영(寫影)의 문제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일찍이 소련의 몽따쥬 유파들―예로, 쿨레쇼프나 푸도푸킨―의 실험들(모주킨 효과나 벽돌쌓기와 같은)은 엄밀한 의미에서 영화적 실험이기보다는 회화적 혹은 문학적 실험이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사영된 피사체들은 실제로 거기에 있었으며, 관객은 그 근원적 시간에 압도되지 않을 수 없다. 영화의 탄생 혹은 진화와 관련하여 초기의 역사를 훑어보면, 한결같이 물질의 제약을 뛰어넘으려는 표현의 방법론적 노력을 발견할 수가 있다. 예술이 직접적으로 물질적 제약에 직면한 예는 아마도 영화(사진적 의미에서)가 초유의 일일 것이다. 영화는 예술이기 이전에 일종의 (빛의)물리학이었던 셈이다.


사유의 측면에서 볼 때, 운동-이미지에 대한 논의는 백지상태로 되돌아가려는 노력의 과정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무것도 쓰여지지 않은 빛의 착란 상태 (지각의 소거로 돌아가려는 베케트에 관한 부분을 들뢰즈가 말한 것 설명해본다) . . . 그런데 왜 이러한 회귀를 언급해야만 하는가? 그 유용성은 어디에 있는가? 사유의 측면이 아니라 실천적 측면에서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 . . (베르그송의 제임스 논문에서 과잉실재가 중요한 이유 . . 표면화 . . ., 미리결정된 것의 소거 . . .등으로 가기위해)/// (그런데 왜 잉여실재를 말하는가? ⇒ 열린 우주를 말하기 위해 . . . 영화가 재현하는 실재는 미리결정된 사유에 의해 구성된 것이 아님을 말하기 위해 . . . 그 순수한 의미에서의 베르그송적인 영화는 이미 베르그송이 비난했던 그 자리에서 생겨나고 있었으며, 그의 생각(창조적 진화)을 가장 잘 보여주는 하나의 예증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바로 주관적 구성에 의해서가 아닐까?)


1) 이에 관한 더 자세한 논의는 Bergson, Matter and Memory의 1장 특히 서문과 Deleuze의 Cinema I p.56-61을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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