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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12/10 질병, 개인, 그리고 사회
  2. 2006/09/26 체계와 그 예외들 (5)

나는 죽음이라는 것을 이렇게 정의한다: 물질의 변화와 이동에 관한 관념적 이미지. 혹은 물질의 변화와 이동에 대하여 다른 물질이 내적으로 소유한 그 변화에 대한 관념. 한마디로 죽음이란 윤리적이거나 심리적인 문제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질병은 개인으로 하여금 그 자신의 물적 상태를 반복적으로 인식하게 한다. 신체의 부분들 간에 일어나는 구체적인 움직임에 따라, 평소에는 없었던 주의력을 자신의 몸에 집중하고, 이를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떠올린다. 신체의 특정 부분의 물적 변화에 대해 신체의 다른 부분이 반응하는 것이다. 병원에 가서도 우리는 몸의 물적 상태를 경험한다. 환자들은 자신의 몸이 물질적인 기능들로 다루어지는 것을 목격하고, 경이로움과 함께 불쾌함 같은 것을 느낄 것이다: 뼈, 세포, 혈액, 두뇌, 종양, 흉부, 대뇌, 안구, 수정체,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검푸른 감광판 위에 영사한 엑스레이 . . .

<Picture of Mouth disease sourced from a book bought by Bacon c1928>


간혹 의사들은 환자의 신체와 그 상태에 대해 시니컬한 묘사를 즐긴다: "귓속이 썩었네요", "기관지가 좀 지저분하군요", "대장 청소 좀 합시다" . . . 그렇다고 언짢아하지는 말아야겠다. 신체를 물질의 덩어리(혹은 물질들의 생화학적 이행)로 보지 않으면 안 되는 그들의 속사정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악의가 있어서도 아니고, 환자의 몸을 함부로 다루려는 의도에서 그런 것도 아닐 것이다. 다만, 습관적으로 "당신의 몸은 단백질 덩어리 그 이상이 아닙니다"라고 숙지시킴으로써, 그 자신 뿐 아니라 의료 행위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을 물적 상태로 끌어들여, 이 모든 사태들이 단지 물질의 현상일 뿐이라고 전문가적 조언을 해 줌으로써, 몸의 급진적인 변화에 대한 당혹감과 무지로부터 비롯된 신비화된 공포를 벗어날 수 있도록 배려한 일종의 과학적 노력일 뿐이다. 아울러 이것은 심리적 고통을 극복하는 한 방법이기도 하다.

의사들은 질병을 탈심리화 혹은 탈인간화하여, 환자가 없어도 질병은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특정 질병에 걸린 환자가 호소하는 고통이라든가 증상들을 부정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 환자의 호소는 질병존재에 대한 비과학자의 주관적 심리에 불과한 것이라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이들의 관심은 질병존재 그 자체이지, 질병에 걸린 환자가 아니다. 심지어는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 조차도 정신을 물적상태에 의존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프로이트는 의식(Bewuβtsein)이 육체의 가장 표면에 자리잡은 특정 조직(<Bw.>라고 명명되는)의 기능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것은 외부의 자극을 지각(Wahrnehmung)하고, 내부의 감정(쾌/불쾌)과 같은 정신 조직들을 감싸면서 외부 세계로부터 보호함으로써, 일종의 <지각-의식 W.-Bw.>조직이라고 하는 공간적 경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특이하게도 프로이트는 이를 대뇌 해부학을 참고하여, 의식조직의 위치는 두뇌의 가장 안쪽이 아닌, 바로 대뇌 피질, 즉 중추 기관의 가장 바깥쪽에 있는 표층에 위치하고 있다고 적는다(『쾌락원칙을 넘어서』).

어쨌든 질병은 나 자신의 신체를 하나도 부서지지 않은 완전한 전체(유기체적 전체 혹은 조화로운 자연)가 아니라, 부스러기처럼 잘려지고 부분적인 대상으로, 마치 베이컨(Francis Bacon)의 고깃 덩어리 그림들처럼, 그 자체 독립한 뒤틀린 물상으로 보이게 한다. 그리하여 개인은 지금까지 외면해 왔던, 혹은 전혀 의식조차 하지 못했던 자신의 객관적 물상에 직면한다. 그렇게 본다면, 질병이란 가고싶지 않은 그러나 가야할 힘들고 고독한 여행과도 같다. 한동안 유지되었던 온전한 신체가 몽우리지고, 경직되어 진부한 상태가 되면, 신체는 스스로 어떤 동요를 찾아 떠난다. 혹은, 외부의 동요를 받아들일 틈을 스스로 벌려 놓는다. 그리하여 그 동요는 고집스럽게 얽혀있는 부분들을 한바탕 휘집어 놓으며, 한꺼번에 분산되었다가, 다시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와 버리는 것이다. 작게는 감기에서부터 크게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일생에 걸친 몇 차례의 사랑이나 열병처럼, 딱딱하게 고인 신체를 갈아치우듯, 썩어가는 물밑을 걸러내듯, 질병은 우리로 하여금 물상의 변화에 대면하여 물질적으로 뿐만 아니라 윤리적으로 이를 견뎌내라고 채근질을 한다. 질병은 부패가 아니라 오히려 부패를 예방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Francis Bacon, Figure with Meat 1954>


좀 다른 관점에서, 질병과 죽음에 대한 우리의 혐오나 거부는 '온전하고도 아름다운 상태'와 같은 윤리적(미적) 가치들에 관한 우리의 집착을 반영한다. 그 가치에는 생명의 유기적 완전성이라고 하는 우리의 형이상학적 이상이 있으며, 물적 상태의 변화에 대한 우리의 보수주의적 성향이 깊게 배여 있다. 어쩌면 베이컨의 저 그림(성직자와 고깃덩어리)과 같은 어떤 이미지에 대한 혐오감은 우리 안에 내재한 보수성의 정도를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깡끼옘(Georges Canguilhem)은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Le Normal et le pathologique)』에서, 다양한 생리학적-병리학적 사례들을 열거하면서, 정상과 비정상, 건강과 질병 등의 구분이 실존하는 존재의 문제이기 보다는, 규범적 존재의 수준에서 일어나는 개념임을 논의한다. 생명이란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이나 환경에 단순히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적합한 환경을 구축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변화시킨다. 심지어는 수동적으로 보이는 환경에의 적응조차 어떤 "합목적적 활동"(자크모노)의 일부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생명체는 자기 자신과 외적인 환경 간에 특정한 유형의 관계와 가치를 형성한다. 깡끼옘은 이를 "생물학적 규범성"이라고 불렀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자신의 생물학적 규범성을 가지지 않는 생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식으로든 생명은 자신에게 적합한 가치를 형성하고, 그 가치에 따라 자신의 생명 활동을 지속한다.

그런 의미에서 병리적 상태란 정상성이 결핍된 상태라든가 정상으로부터 벗어난 잘못된 궤도를 뜻하지 않는다. 우리가 병적이라고 부르는 어떤 상태 역시 생명이 자신의 규범에 따라 지속되어 살아가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모든 존재가 그 자신 안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비정상이라는 개념이 우리 자신의 관점에서 만들어진 어떤 허구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병적 상태라고 불리는 어떤 상태 역시 그 자신의 존재를 갖는다.

그러나 물론 건강이라는 개념이 무의미하거나 공허한 말은 아니다. 정상적인 상태와 건강한 상태는 구별되어야 한다. 깡끼옘은 이를 "생리적 항상성"과 "병리적 항상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 설명에 따르면, 건강 상태는 환경의 변화에 대해 균형을 유지하거나 안정된 상태를 회복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생리적 항상성은 변화와 전진의 가치를 갖는다. 다시 말해 변화를 수용할 수 있는 생물학적 규범의 폭이 넓어졌음을 의미한다. 반면에 병리적 상태는 환경의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규범적 기준의 폭이 축소 되었음을, 말하자면 질병 즉 물적상태의 변화에 대해 쉽게 불안정해지고, 회복 능력이 감소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하여 병리적 항상성은 퇴행적이고 자기보존적 고착으로 나아가는 가치를 갖는다. 치유란 생명체의 자기 규범이 안정된 상태를 회복하는 과정이다. 달리 말해, 건강한 상태와 병적인 상태의 차이는 변화를 수용하는 능력의 여부와 정도에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치유된다는 것은 규범과 가치의 보존이 아니라, 새로운 규범 혹은 보다 우월한 규범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명체의 환경에 대한 적응, 그리고 환경의 내재화의 척도이다.

보수적 가치들 역시 그 자신의 항상성과 규범을 갖는 어떤 삶의 상태이다. 따라서 긍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변화를 수용하는 규범의 기준이 협소할수록, 그 가치의 지속가능성의 정도는 적어질 것이다. 그 폭과 깊이는 바로 건강함의 정도를 나타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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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엉뚱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프로이드(G. Freud) 얘기 잠깐하고 시작해보자. 살아있는 유기체는 쾌감을 추구하고 고통은 피하려 한다. 이것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보편적 원리로서 바로 쾌락원칙이다. 그런데 프로이드는 <쾌락원칙을 넘어서>라는 논문에서, 그 보편적 원리로부터 벗어나 외부에서 떠도는 몇 가지 예외들을 다룬다. 예를 들어 현실원칙의 부정하는 기능이나 우회로에 의해 발생하는 불쾌라든지, 쾌를 불쾌로 전환시키도록 이끄는 정신 조직 요소들의 군사 지리학과도 같은 투쟁이라든지, 어머니의 사라짐과 같은 불쾌한 경험을 재생산하여 반복하는 아이의 놀이라든지, 외상성 신경증에서 자주 보이는 외상적 경험에의 고착이나 반복 강박, 기능적 장애나 전이 현상과 같은 것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 예들은 모두가 특정 개인에 의해 반복적으로 추구되고 있는 불쾌와 관련이 있다. 쾌락 원칙으로는 간단히 설명할 수 없는 예외들인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드가 궁극적으로 다루고자 했던 것은 치료 과정에서 발견되는 이와 같은 경험적 예외들이 아니었다. 하나의 동질적인 원리나 체계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잔여물들을 다루는 것은 문제를 매우 복잡하게 이끄는 처사일 것이다. 이는 더 이상 그 체계를 고수할 수 없으며, 나아가 새로운 체계를 구성하라는 요청을 받아들여야 함을 뜻한다. 예외들이 발생시키는 이와 같은 복잡성에 의해 쾌락원칙은 초과용량에 달한 것이다. 이 때에 필요해 지는 것은 무엇일까? 프로이드가 반복해서 언급했던 사색적 고찰, 즉 철학적 반성이 아닐까? 사색적 고찰이란 개념화되고 보편화된 원리로부터 벗어나 주변을 맴도는 예외들을 찾아내거나 분류하는 과정이 아니다. 실제의 경험적 자료들과 법칙을 초월하여 이 원리를 가능케 하는 보다 상위의 어떤 것을 발견하는 과정. 이것이 사색의 문제이다. 프로이드는 초월적인 어떤 것을 찾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삶 본능의 토대라고 할 죽음본능에 관한 논의 뿐 아니라, 어떤 경우든지 쾌락원칙은 지켜진다고 하는 애매 모호한 논의에까지 이른다. 뭐 이런 저런 구체적인 얘기야 정신분석의 사정일 테니 여기까지만 하고 한 가지만 기억해 두어야겠다. 체계의 문제 자체를 검토하고 조사하는 과정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철학적 반성에 입회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관료는 철학을 하고 싶은 것일까? 혹은 그들의 공무(公務)라는 것이 철학하기 인가? 내가 아는 한 공무원들은 사색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철학적 반성은 그들과 어울리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의 기질과도 무관하다. 그런데 이들은 끊임없이 체계를 반성하고 구성하면서 심지어는 체계 그 자체가 되고자 한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예외들을 고려하지 않은 채 체계에 집착하거나, 심지어는 그 유령(예외)들이 사라져야 한다는 망상에서 출발한다. 이들에게 있어 체계의 완벽함이란 주변에서 배회하는 예외들을 모조리 제거함으로써 달성된다. 이에 따르면 예외들은 존재할 수도 없으며 존재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예외의 발생은 체계의 경제성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체계의 목적도 아니기 때문이다. 예외들은 힘겨운 에너지와 아까운 비용을 의미한다. 이를 최소화하려면 소리를 낮추고 전방(前方)만을 주시하며 가던 길만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버스노선 체계, 민원 처리 체계, 주민 등록 체계, 병원 관리 체계, 각종 회의 체계, 체계에 의한 체계, 체계에 관한 체계, 체계의 체계, 체계를 위한 체계, . . . 한도 끝도 없는 이 소란한 체계들 속에서 살고 있지만, 사실상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체계는 언제나 조용하고 지루하며 단조로울 뿐이다. 동사무소 등의 관공서에 가보면, 경력이 오래된 공무원일수록, 무슨 말 안 하기 대결에 참가한 사람들처럼 조용하다. 그 이유는 그들이 스스로 체계 그 자체가 되는 과정에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체계란 자질구레한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매끄러운 절차들 위에 우발적인 질문들이 생긴다면 그 체계는 실패한 체계이다. 행정 관료가 질문을 싫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귀찮아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소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체계는 체계여야 한다는, 따라서 절차들은 자동화되어야 한다는 소신을 침묵으로 관철시키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용지가 어디에 있죠?"라고 하는 간단한 질문에조차 절대로 대답하지 않는 그들의 침묵에는, 고집 센 철학자의 미간에서나 볼 수 있는 무늬와 유사한 강도의 고뇌와 신념이 있다. 용지가 어디에 있냐고? 저런 어리석은 질문에 까지 내가 대답을 해야 하나? 다소 코믹한 것은 사실이지만, 어쨌든 대답할 수 없는 그들의 애로사항을 이해하지 않으면 어쩌겠는가? 예외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망상에서 비롯된 그 애로사항을 말이다.


그러나 그들의 애로사항은 애초부터 잘못 설정된 전제에서 출발한다. 체계로부터 이탈하여 자유롭게 떠도는 예외들은 필연적으로 있기 마련이다. 다르게 말해 완벽한 체계는 필연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우선 완벽한 체계란 앞으로 생겨날지도 모르는 변수에 대해 완전한 예측과 통제를 전제로 할 뿐만 아니라, 이를 위해서는 하나의 체계 혹은 모든 독립변수의 최초의 상태를 완벽하게 정의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조건들이 충족되기 위해서는 그 체계가 소모하는 양에 맞먹는 양의 에너지를 지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마디로 비용이 많이 드는 것이다. 보르헤스(L. Borges)의 글에 좋은 예가 있다. 제국의 완벽한 통제에 대한 망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제국을 완벽하게 재현한 지도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지도와 제국의 일대일 대응을 가능케하는 현척지도에 대한 꿈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이 계획은 제국을 파멸로 이끈다. 전 국민이 지도 제작에 온 힘을 소진해 버리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Umberto Eco는 IL SECONDO DIARIO MINIMO(1992)에서 매우 짖꿎은 방법으로 이 현척지도의 불가능성을 논증한 바가 있다). 변수를 예측하고 통제하기 위한 여러 정보는 그 자체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정보가 창출하는 역 엔트로피는 소모되는 에너지량에 의해 반드시 다른 곳에서 엔트로피를 생성하지 않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체계의 완벽한 통제가 효율성을 증가시킬 것 같지만, 사실은 효율성의 정도가 낮아진다. 국가나 사회경제의 관료제적 운용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관료는 자신들이 통제하는 전체체계나 하위체계를 숨막히게 하고, 그 과정에서 관료 자신 또한 질식시켜 버린다. 이를 부정적 피드백이라고 하는데, 하나의 상태는 그것이 관계하는 다른 상태들과의 평형을 유지한다는 일반 경제적 관점에서 출발한다. 어쨌든 완전한 체계는 관료가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예외들보다도 더 많은 비용이 요구된다.


예측과 통제의 연속성에 기초한 완벽한 체계는 그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치러야할 비용 혹은 대가 때문에 실패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 같은 체계 외적인 한계뿐만 아니라 물질 자체의 성질과 같은 체계 내적인 한계 역시 존재한다. 료따르(J-F. Lyotard)는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한 논문에서, 열거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지면이 필요한 과학적 성과들(양자역학이나 원자 물리학의 도입, 새로운 수학적 인식과 같은)을 설명하고 있다. 간단히 나열만 하자면 이러하다: 구(求)체의 부피에 따라 변화하는 내부 공기 량의 밀도 측정에서 나타나는 산발성(Jean Perrin의 실험), 비누와 소금이 섞인 물거품의 외형과 같이 표면에 접선을 그을 수 없는 불규칙성을 갖는 함수의 존재(Mandelbrot의 도함수 논의), 정밀측정의 한계를 보여주는 미소입자의 브라운 운동(Brownian movement), 브리타니 해안선, 분화구로 뒤덮인 달의 표면, 별을 이루는 물질의 분포, 전화 통화중의 혼선 발생 빈도, 대기의 난류나 구름의 모양과 같이 윤곽이나 분포의 규칙성을 보여줄 수 없는 대상, 만델브로(Mandelbrot)가 보여주었던 자기-상사성(self-similarity)을 갖는 프랙탈(Fractal)구조, 둘 이상의 통제변수가 동시에 역치(threshold)에 도달하였을 때 발생하는 상태변수의 예측불가능성에서 보듯이 결정된 현상들 속에서 발생하는 불연속성에 관한 르네 통(Rene' Thom)의 파국이론(catastrophe theory), 역설이론을 정신분열증에 화용론적으로 적용한 팔로알토(Palo Alto) 학파의 이중구속 이론(Double Bind Theory) 등이 바로 그 예들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은 무엇일까? 료따르에 따르면 "연속 미분함수는 지식과 예측의 패러다임으로서 더 이상 우월한 것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예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정확도가 높아진다고 해서 불확실성(통제의 결여)이 감소하는 것은 아니며, 불확실성은 정확성과 함께 증가한다"는 사실이다. 체계의 구성은 예외들을 배제하는 과정이 아니라 반대로 예외로부터 파생하는 것이 아닐까? 프로이드가 두개의 본능(생의 본능과 죽음 본능)을 불가분한 것으로 보았듯이, 체계는 그 자신 안에 체계를 벗어나는 예외들, 다시 말해 그 자신의 역설을 스스로 품고 있는 것이 아닐까?


존재 윤리학적 질문을 하나 덧붙여야겠다. 만일에 완벽한 체계가 가능하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사실 이 가정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 유효한 것으로 남아있다. 간단한 예로, 어느 공무원이 자신의 공무를 매끄럽게 해줄 완벽한 체계를 확립했다면, 그래서 더 이상 불필요한 예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사실 이 질문에는 이상적 관료체계를 추구하는 개인의 모순적 존재를 설명해줄 근거가 있다. 완벽한 체계가 불변의 상태에 이르면, 그 체계의 수행자들은 소멸되어야 한다. 우발적인 예외들이 사라져 버린다면, 그 공무원이 왜 거기에 앉아 있어야 하겠는가? 어떤 체계에 있어 예외들의 소멸이란 그 수행 주체의 소멸을 의미한다. 칸트(I. Kant)적 의미에서 순수 형식이 되어 가는 현대의 법체계에 있어, 그 주체가 더 이상 입법부나 사법부가 아니며 법관이나 법인은 더더욱 아니듯이 말이다. 이것이 시스템의 이데아가 아니겠는가? 포이에르바하(Ludwig. A. Feuerbach)는 『기독교의 본질 Wesen des Christentums』에서, 신이란 인간으로부터 독립하여 절대적인 표상으로 전화된 인간 자신의 속성이라고 쓴 바가 있다. 하나의 대상 일반 혹은 그 이데아가 확립되고 나면, 이제 모든 현상들의 배후에 바로 그 표상이 원인으로 자리 잡는다. 이것이 이른바 소외된 사회 속에서의 주체의 전도(顚倒)된 이미지이다. 지고(至高)의 존재는 종교적 환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사회는 그 보다 더 종교적인 강박이 있다. 신경증적이기까지 한 체계에의 망상에 사로잡힌 사회에서 주체는 더 이상 그 체계를 운용하는 수행자가 아니다. 수행자란 운용 절차상의 한 기능일 뿐이다. 체계의 신경증적 망상이란 바로 체계 그 자체가 순수 형식으로서의 주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개인들이 자신의 존재를 추상적 인간으로 혹은 인간 일반으로 부정하거나 소멸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고, 이러한 사회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만일에 살아갈 수 있다면 체계에 내재한 궁극적인 역설이란 바로 이 개인들일 것이다. 우리 모두는 각각이 하나의 예외이다.


이러한 얘기들은 삶을 바라보는 관점의 문제로 귀결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예외들이 사라진 사회, 완벽한 체계의 사회가 실현된다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하겠다는 말인가? 손가락만 빨고 있겠다는 말인가? 스스로 체계 자체가 되어서 뭘 어쩌겠다는 말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우리 사회의 관료에게 필요한 것은 예외 없는 체계나, 그 체계에 대한 사색이 아니다. 완전한 체계란 무능력의 망상적 반어(反語)일 뿐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예외들이 반드시 존재하고 있음을 수긍하는 것, 그리고 이들을 단발적으로 처리하는 능력, 즉 땜질 작업에서나 있을 법한 유연함과 협상능력이다. 엔지니어가 아니라 땜쟁이가 될 것을 당부한다. 또 그들이 거기에 있는 것도 바로 그와 같은 목적이 아니겠는가? 개인의 삶이란 최종적인 체계나 목적을 향한 과정이 아니다. 최종적이라고 가정된 체계의 예외들, 그 내부의 역설을 만나는 일일 것이다. 예외 없이 지켜지는 원칙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 아닐까? 관료라고 해서 이 원칙이 달라질까?

 



<문예 노트>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