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아는 얘기지만 한번 더 상기하는 의미에서,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맑스(Karl Marx)가 말했던 노동 소외를 간단히 요약해보자. 그것은 노동을 하는 사람이 자신의 노동을 즐겁게 여기지 않는 상태일 것이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일하는 사람이 자신의 일을 고역으로 느낀다면, 그 일을 그만두는 것이 정답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그럴 수가 없다. 굶어죽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길, 자본주의라는 정치-경제 체제가 여차저차 하여 사람들로부터 모든 생산수단(토지, 기계, 건물, 원료 등)을 빼앗고, 오로지 노동력으로만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게끔 했기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굶어죽지 않기 위해 억지로 공장에 들어가 일을 하면서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맑스주의자들의 구호들 속에 항상 등장하는 '빼앗긴 노동', '강요된 노동', '소외된 노동'은 바로 이런 의미이다.
맑스가 쓴 <자본>(Das Kapital)이라는 책에 그 좋은 예가 하나 있다. 19세기에 한 영국 자본가가 공장을 세우기 위해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 그리고 이런 저런 생산수단을 싣고 오스트레일리아의 스완강 지역으로 갔다. 그러나 공장을 세우고 나니 아무도 일하러 나오지 않았다. 당시의 그 지역은 주인 없는 땅이었기 때문에 누구든지 땅을 차지해서 자신만의 경제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공장이 생산을 하려면 즉 자본주의가 가동되려면, 저 사람들로부터 땅이나 일체의 생산수단을 빼앗아, 그들이 공장에 들어와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환경을 만들어야만 한다. 실제로 영국에서는 중세때부터 수세기에 걸쳐 토지를 합병하고, 농지를 전환하고, 사유화하는 등의 운동이 있었는데, 이를 인클로져(Enclosure movement)라고 한다. 그 과정에서 쫓겨나 갈곳이 없었던 수많은 농민들이 대도시로 몰려들어 공장노동자를 이루게 되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초석이 되었던 것이다. 산업 경제 개발에 박차를 가하던 6, 70년대의 한국도 이러했을 것이다. 지금의 우리가 그런 일을 직접 경험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자본의 품 안에서 살고 있으니, 자신도 모르게 이미 무엇인가를 빼앗긴 결과 속에서 살고 있는 셈인가?
강요된 일은 우리의 삶을 여러가지 면에서 비참하게 만든다. 그 모든 비참함의 목록을 전부 나열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가 쉽게 체감하는 비참함을 단 한가지만 말한다면, 우리는 일하지 않을때 가장 행복해진다는 점이 아닐까? 솔직히 말해 평생 일 안 하고 살았으면 좋겠다. 가장 기다려지는 토요일 오후! 지금은 좀 나아져서 금요일 오후! (엄밀히 말해 나아진 것도 아니다. 휴일을 잘 보내려면 돈이 필요하다) 점점 배가 아파오는 일요일 저녁! 월요병! 실제로 월요일만 되면 배가 아파오는 증후군이 있을 정도이다. 일 자체에서 오는 고역도 있지만, 이제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불쾌함도 역시 우리의 배를 아파오게 하는 요인이다. 그들은 동료이기 보다는 잠재적 적(敵)이라고 해야 더 옳을 것이다. 노동과 관련하여 겪고 있는 이 모든 불쾌함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월요일만 되면 어김없이 그 현장들 속으로 뛰어든다. 그리고는 불쾌함의 원인이 적응을 못하는 자신의 성격탓이라거나, 사회화가 덜 된 탓이라거나, 등등의 이름모를 죄의식을 가지며, "인내가 부족해!"라고 자위하면서 조용히 자신의 자리에 앉는다. 흔히 인간관계가 좋다고 알려진 사람들은 잘 참는 사람들이다. 기독교에서는 노동이란 낙원에서 추방당한 벌, 즉 인간 자신의 죄값이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삶 자체는 노동의 과정이고, 노동이란 으례 고역이며, 참아야 할 어떤 것이다. 그래서 일주일 내내 힘든 고역을 참고 견뎌 내었다. 그런데 단 하루 좀 편하게 있어볼까 했더니, 별안간 '우리의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부르며 교회에 나가 기도를 드리란다. 인생 자체가 무슨 극기(克己) 훈련장 같다.
맑스는 인간의 본질을 노동이라고 보았다. 인간은 일하는 존재이며, 일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의미했던 노동이란 아담 스미스(Adam Smith)와 같은 고전 경제학자들이 말했던, 또 대부분의 우리가 배워왔던 의미에서의 노동은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 노동이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생산하면서 삶의 충만을 경험하고, 일 그 자체가 주는 행복을 만끽할 수 있는 일이지, 더 많은 임금과 더 많은 댓가를 받음으로써 얻게되는 승리감 따위로 유지되는 그런 저질적 노동이 아니었다. 노동의 의미가 다른 것이다. 타인으로부터 댓가를 바라는 일! 그리하여 지겹고 힘들지만 어쩔 수 없이 하는 일! 눈치보며 하는 일! 잔머리를 굴리는 일! 그 자체 경쟁이고 싸우는 일! . . . 이것이 우리를 노예 상태로 만드는 일이고, 우리의 몸과 마음을 속박하는 쇠사슬이다. 우리가 풀어헤치고 벗어나야 할 것은 궁핍이 아니다. 바로 쇠사슬 그 자체로서의 노동이다. 그런 의미에서 임금투쟁은 근본적이지 못하다. 심지어 그것은 쇠사슬에 흉측한 흠집들만을 냄으로써, 그에 묶인 우리의 상처를 더 아프게 할 수가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다 많은 월급이 아니라 바로 즐거운 월요일이다. 이것이 바로 맑스가 궁극적으로 원했던 것이 아닐까? 예술가들이 밥을 굶으며 궁핍에 허덕이면서도 자신의 작업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맛을 본 것이다.
노동을 강요한 것은 삶 자체가 아니다. 여차저차 하여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체계, 쇠사슬로 발목을 묶었던 고대나, 아버지의 이름 아래 말씀의 무게로 정신을 내리 눌렀던 중세의 서구처럼,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어떤 규칙들이 거꾸로 우리의 노동을, 나아가 우리의 삶을 힘들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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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듯 물신화란 말이 생각나는 군요!어떤 부수적인 것들이 나중엔 신격화가 되고 또 그러한 것들에 의해 인간이 다시 지배당하고,,,,
하지만 인간의 본질을 노동으로 본 맑스야 말로 자본주의적 지배이데올로기에 충실했었을 거란 생각이 드는군요.
그가 주장하였던 공산주의적 유토피아가 어찌되었건 그의 뇌리를 지배하고 있던 자본주의적 형이상학을 탈피하지 못한 것은 곧 맑스의 한계요 문제점이겠죠.
늘 공산주의나 자본주의를 이야기할 때 이야기되는 맑스의 한계는 인간이나 사회 또는 세계를 인간이나 사회 세계 그 자체에서 찾지 못하고 늘 자본주의적 테두리 안에서 이야기하려 하였던 데 있었을 것 같군요.다시 말해서 인간이 타고난 선천적인 본질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자본주의나 당시 산업사회가 직면한 환경에서 그 의미를 찾고 해결하였었다는 거죠.노동을 강요하는 것이 삶 자체가 아니단 말도 우리의 노동이 반드시 어떠한 체계나 중세의 말씀이 짓누르는 우리의 자유의지에 의해서만 이해 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란 거죠.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자들의 오류가 늘 잠재해 있는 인간의 모순적 이해가 필연적으로 도출해 내기 마련인 이러한 오류들에만 사로 잡혀서 인간의 노동과 사회적 모순을 이해하려 한다면.
인류가 오래(?)동안 지속해왔고 그렇게 살아왔던 많은 의미를 일 순간에 팽게치는 꼴이 되고 말거란 생각이 드는군요.
인간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한에 있어서는 어디까지나 그러한 사회적 제도적 모순속에서도 여전히 존재하는 인간적인 문제들이 단순히 생산수단의 소유나 제도적 압제에 대한 타도만으로 그 해결점을 찾으려 한다면 공산주의나 사회주의가 인류에게 제시하였던 지극히 타당하고 합리적인 의견마져도 무화되고 말 수 밖에 없을 거란 생각도 들구요.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은 체제나 사상의 한계 밖에서도 여전히 인간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물론 .. 자본주의적 모순을 방관하고 아니면 봉건적 압제를 인정하고 그러한 이야기를 하는 데도 한계가 있겠지만, 언제나 그렇 듯이 보이지 않는 본질적 가치의 본질적인 면을 간과한체 현상적 모순에 집착해서 인간과 그 인간이 가지는 여러 가치를 단순히 물질적이고 가시적인것으로 환원하여 지향점을 찾으려 하였던 19세기 사상가들이야 말로 그들을 구속하고 있는 물신적 가치를 극복하지 못한, 사상이 가지는 본연의 의미를 망각한 사람들일 수 밖에 없었을 것 같군요.
인간에게 언제나 상존하는 모순과 오류를 단지 외재적인 제도적인 문제로 인식하는 것은 정말 인간이 노동의 지배를 벗어나 살기를 원하는 인간 본연의 가치를 망각한 것인 지도 모르죠.현대 논리학이 제시하는 논리학의 한계가 자체적인 계만으로서는 논리가 완정할 수 없고 그러한 문제점이 플라톤 이래로 지속되어 왔던 유클리드적 진리에도 적용된다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아마 공산주의나 기타 비슷한 사상들이 가지는 한계도 마찬 가질거 같지 않으세요?
배고프고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들에게 형이상학적 진리나 내세적 안락을 이야기한 다는 게 때론 잔인하고 때로 모순적인 거겠지만, 우리가 19세기와 20세기를 지나며 지켜본 이성주의의 한 맥락의 전개를 살펴 볼때 그러한 것들이 단순히 유물론적 사고에 집착해 세계를 개혁하려 하였던 사람들이 이해하려려 했던 것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언제나 열려있는 사회의 가능성을 찾으려 하였던 20세기 사상계의 독단가를 구지 생각지 않더라도 자본주의나 부르조아적 사상의 이해를 좀 달리 한다면 좀 더 넒은 의미의 인간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이야기가 되지 않으까 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종교적 신비주의나 체제적 비리가 용인되어져야 한다는 건 아닌 것 같고, 중용적 지혜가 필요하단 이야기겠죠? 말 뜻을 이해한 것 같으신가요? 2005/12/12 17:51
우선, 이 블로그에 올라오는 글에 꼬릿말을 달아주셔서, 춥지 않게, 풍요롭게 해 주신점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편견을 가지고 글을 읽지 말아달라는 것입니다. 제 글 어디에도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관한 언급은 없습니다. 또 그것을 암시하지도 않았구요. 노동의 문제는 우리가 매일 겪고 있는 문제라는 것은 아실테구요, . .맑스는 하나의 대안일 수 있고, 노동을 논의하는데 있어 중요한 사람입니다. 맑스를 직접 읽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 . 그렇게 반공교육에 익숙한 사고방식(맑스=사회주의=공산주의=폭력혁명. . . 결국은, 맑스=북한=괴뢰=용공=빨갱이= . . .)으로 저 글을 읽으시면 제가 할말이 없습니다. 저 글은 즐거운 노동에 대한 얘기이고, 불쾌하고 우울한 노동이 어디에서 비롯되는가에 대한 얘기이고, 노동의 의미를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야 하는가, . . 등에 관한 글입니다.
제가 이 블로그를 연 것은 진지하고 성실한 토론을 위해서이지, 지식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쪼금 없잖아 있긴 하지만). 자랑할 만큼 아는 것도 없구요. 맑스라든가 다른 사람들을 언급하면서 얘기를 하는 것은, 그들로부터 뭔가를 더 끌어내서 배워보자는 것인데, 그러려면 편견없이 수용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저 위에 달아 놓으신 꼬릿말로는, 맑스의 이론이 어떻게 해서 문제가 있는 것인지, 어떤 한계가 있는 것인지를 명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다시 한번 명확하게 맑스의 한계와 문제점을 짚어 주시겠습니까? 2005/12/15 18:35
러셀의 '게으름에의 찬양' 이란 책이 생각납니다. 노동에의 찬양은 노동을 하지않고 소작농의 노동에 의해 부를 다져가는 귀족들에 의해 고무된 사상이라고요. 딱딱하기 쉬운 주제인데 글발이 고와서 읽기가 편했습니다. 2005/12/20 02:47
네. . . 부를 누리기 위해 노동을 신성한 것으로 가르치고, 신의 섭리를 세속적으로 실천하는 방법으로서의 노동 말이죠?! 금욕적인 노동이나 근검 절약 같은 부르주아적 가치들도 그 중 일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 좋은 지적이십니다.^^ 2005/12/21 00:54
저 위 영송님의 글을 읽으면서 어려서 한때 '유물론'이란 단어 자체에 대해 거부감을 느꼈었던 한 순간이 떠오릅니다. 원 '물질'이라니!하는 생득적인 거부감 내지는 뭔가-아마도 인간의 존엄성 같은(이건 어디서 찾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문제입니다만 하여튼 어린 마음에)걸 배앗기는 것 같았던 기분이었지요.
끝까지 봐주세요! 반전이 있으니 ㅎㅎ
뒤늦게 검색창에 소개되어 있어서 이글을 보게 되었는데 아는 건 없지만 뭔가 한마디 거들고 싶은 마음이 드네요. 단순화시켜 죄송합니다만 영송님의 생각은 인간본연의 생질적인 보다 풍성한 그 무엇 유물론으로만 규정지을 수 없는-그무엇을 말씀하시는 것 같읍니다만 결국은 소홀해진 유심론을 강조하고 싶어하시는 걸로 들리네요.특히 서양철학이며 서양학문들이 -뭐 학문 뿐 아니지만- 체계와 축적으로 이루워져 있다는 사실이 더우기 그런 점을 강조한다는 느낌을 주고 있음이 사실이고 그리고 우리 삶이 사실상 서양문물의 범람으로 이루워져있고 그런가운데서 느껴지는 어떤 결핍감 그리고 오늘의 세계에 대한 이해가 영송님으로 하여 위와 같은 서술을 하시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는 화살을 그리로 향하게 했다는 ^^-
인간이 무엇으로 영위 되는지 하는 문제는 둘째치고, 물론 서구문명이 지독한 오류를 반복해 오면서 오늘날에 이르렀고 그 해악이 엄청난 것도 사실이지만-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서구 문명이 중세도 있고 신도 있고 그렇긴 하지만 근본적으론 유물론적 바탕안에 있는게 아닌가하는 모자란 생각 때문에 좀 단순화시켜 말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그들의 베이스가 유물론적이라함은 이들이 축적과 체계에 능하다는 사실이 이런 말 않되는 ^^ 순 제식의 생각을 하게 하는데.-
물론 인간은 말로 다 설명될 수있는, 즉 가시적으로 다 이해될 수있는,그리 단순한 존재도 아니고 그렇게 진행되는 삶을 사는 존재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
서양 문명 문물들은 끝없이 축적하고 침탈하고 그것을 반복하면서 그러나 체계를 세워가며 오늘날에 이르렀습니다. 동양에 대비시켜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오늘날 동서양의 사고가 따로 존재하기나 하는 것인진 모르겠습니다만-그리고 중국인들 같은 경우 지극히 현실적이고 본질적으론 유물론자들이라 생각합니다만-
단순하게 말해서 십리를 가보고 울며 돌아온 자하고 앉은 자리에서 천리를 논하는 자하고 그 깨달음이 다를 것이란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경험론적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그것이 무시 못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앉은 자리에서 논하는 자의 정신은, 이것은 비하가 아닙니다, 실전에선 결국 지게 되어 있어요.도사연해봐야 소용없습니다. 중국이 정신차린 건 외세에 의해 고통을 겪으면서 유물론적 실험을 거쳐온 통큰 저력 때문이고 인도는 오늘날 세계의 두뇌라 불리우지만 하청품으로 자라나고 있는 두뇌이고 아직 자신들의 삶을 처결하지 못하고 있어요. 반면에 서양사람들은 슬슬 동양정신을 논하기 시작했습니다.어느쪽이 앞서 갈 수있을지 해봐야 하는 게임이지만 우리가 그들의 오류를 겪지 안고도 타산지석할 수 있다면 마치 저개발 국가의 지하철 설비가 더 앞서갔듯이 앞서 갈 수도 있겠지요.그러나 어떻게 될까요? 일본은 앞서 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특질 까지도 아주 정교하게 그들이 배운 서구식 방식으로 '상품화'시켜 앞선 케이스 입니다.우리는 그들이 하던 나쁜 짓들을 내외적으로 반복하면서 자라고 있고,세계의 공장이라는 중국은 어떨까요? 어떻게 갈까요? 그들의 뿌리깊은중화주의 속에 숨겨진 야심이 과연 어디에 기초한 것일까요? 유물론? 유심론?지배야욕은 무엇에 기인하는 것입니까?
말이 좀 이상하게 갔습니다만 드리고 싶은 말씀은 중용도 필요하고 정신성도 필요하고 고양된 이상도 연민도 뭐 기타 등등의 온갖 인간적인 것들이 필요하지만 그러나 요지는 이게 실제 우리의 폭력적인 이 세계를 해석하고 살아감에 있어서 얼마나 허술한 생각인가 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기를 죽여가고 있는 중국은 자신들의 중화주의를 포기할 것인가요? 인도는 과연 전부가 깨어나면 갠지스 강가의 영성을 지속할 것인가 하는 겁니다. 그들은 아마도 그것' 영성'을 상품화시키겠지요. 그러면 그토록 침략적인 유물론적인-본질적인 의미로의 유물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계를 왜 유지해야 하는 가 정신성을 회복시키고 잠재한 개개인의 다른 역량을 깨우쳐줘야 하지 않겠는가 라고 말할 수 있지만...누가 그렇게 할 수 있나요? 아이들이 굶어죽는 걸 선의의 구호사업에 내팽개치고한 족에선 일반교양으로나 적합한 말그대로의 여러측면의 교양을 함양시키는 것으로 자신들의 미덕을 대신하며 약간의 적선으로 양심을 다래는 동안 대신 원대한 폭력적인 꿈-오늘날엔 그것이 교역이며 상품이며(무기를 연상해 봅시다 ^^) 뭐 그런 것들로 구성됩니다만-이건 다시말하면 대기업의 문화사업이나 자선 활동 따위를 연상해 보면 매우 쉽습니다.- 유물론적인 자세가 아니면, 그들 문물의 자세가 아니면 이걸 헤쳐나갈 수 있을까요?과연.경제를 빼놓고 무엇이 논해질 수 있을까요? 이세상이. 혹은 굶주림이 보다 합리적 분석방식을 취하지 않고 해결될 수 있을까요? 오바마가 대통령이 된다음 어디선가는 '그도 사람인가?-흑인이라서- 라는 소릴 했다고 합니다만.
쓸데없는 소리가 많아진 것은 영성님의 쓰신 글이 오는 바가 있어서 였습니다.그와 같은 반감과 이해가 제게도 있었습니다.이해를 바로 했는 진 모르지만 이해되는 바가 있고.
그러나 결론은 세상이 그리 소박하지 않다는 생각입니다.제가 뭘 바라는 진 모릅니다만.
저는 본래도 두서가 없으니 -게다가 요즘은 열까지 내니-용서 하십시오 ^^
지금 보니 정리 하나도 안된 소릴 담아놨네요.ㅎ
영송님의 생각에대해
계몽주의 사회주의 뭐뭐 할 것 없이 서양 사고가 기본적으로 유물론적이란 의견에 동의한다는 이야기가 하나이고,그것의 만연에 우려를 표하는 마음에 동의한다는 것이 둘째이고, 세째는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라는 것이었습니다.대체해서 상황을 뚫고나갈 다른 세계관이 있는가라는 것이었어요. 유물론도 쓰기에 따라선 양날의 칼이 아닌가하는 엉뚱한 생각을 합니다. 맑스고 엥겔스고는 모르겠어요.공부도 안돼있지만 오늘날 되살릴 수 있는지는 더욱 모를 일이고.환부를 해석하고 도려내는 작업에는-그게 뭐 가능키나 한 소린지는 모르지만- 저들 방식이 훨씬 유효한 거 아닌가 뭐 그런 소릴 하고 싶었답니다.
생각이 논지를 떠나 너무 비약해 버렸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