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연구지가 권위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은 학술진흥재단(Korea Research Foundation, 이하 '학진', www.krf.or.kr/)에 등재되는 일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들은 일종의 제도적 혹은 법적인 인가를 받게 되는 셈이다. 한국에서 학진에 등재된 학술지는 분야에 관계없이 대략 1500여개이다. 학계에서 어슬렁거려본 사람들은 다 아는 일이지만, 학진 등재 학술지에 논문을 얼마나 게재하는가에 따라, 일종의 학업 성적표와 같은 등급이 암암리에 정해진다. 학계에서 계속 어슬렁거리려면 좋든 싫든 등재 학술지에 논문을 써서 제출해야만 한다(공부하는 백수들이 놀고먹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하지 않아도 누가 뭐라고 하지는 않는다. 다만 도태될 뿐이다. 그 집단이 싫거나, 도태되었다 싶으면, 밖으로 나와 다른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저렇게 등재가 되어 어느 정도 권위가 인정된 대부분의 학술지에서는 논문 게재료를 받는다. 그러니까 일반 잡지처럼 논문을 투고하여 채택이 되면 투고자에게 원고료를 주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투고자가 논문을 실어 달라고 돈을 내야 한다. 그래야만 심사를 해주고, 게재 여부를 판단해 준다. 죽었다 깨어나도 돈 버는 일에는 소질이 없는 학삘이 백수들에겐 대단히 불합리한 일처럼 보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아주 가끔은 논문 원고료를 주는 곳도 있다. 재단이 돈이 많거나, 무슨 무슨 프로젝트를 성사시켜 지원을 많이 받거나 하면, 대단한 선물을 풀어 놓듯, 학술지 게시판에는 거의 "font-size"는 30pt에, "font-weight"는 볼드(bold)에, "font-color"는 레드(red)나 크림슨(crimson)이나, 심한 경우에는 딥핑크(deeppink)의 스타일로 '원고료 지급!'이라는 글자를 적어 놓는다. 원고료 수십 만원 때문이기 보다는, 권위를 인정받아야 하니까, 이왕이면. . .! 하는 마음으로 연구자들은 논문을 어렵게 준비한다.
얼마 전에 모 대학 연구소에서 발간하는 학술지에서 원고료를 준다기에, 나 역시 한참을 망설이다가 투고를 준비한 적이 있었다.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시 쓸 수는 없었고, 예전에 써 놓았던 논문 한편을 골라, 편집 규정에 맞게 수정을 하고 보충을 한 것이다. 학술지 측에서 원하는 원고 매수가 약 A4용지 20매 내외였으므로, 그에 부합하는 양의 논문을 찾아 컴퓨터 폴더 목록을 한 참을 뒤졌다(내게는 발표하지 않은 논문들이 많이 있다). 최근 들어 나는 글을 짧게 쓰는 경향이 생겼기 때문에(이것은 글쓰기 취향 때문이 아니라, 본인의 현실적인 상황의 결과이다), 할 수 없이 오래 전에 작성했던 것을 뒤져야 했다. 다행히 적당한 분량의 논문을 찾아 검토를 해본 결과, 적당히 장 별 제목과 편집 배열을 조정하면, 그럭저럭 학술지용 논문 한편은 나올 법 했다. 그러나 학술논문 쓰기가 그렇게 쉬운가? 학술논문의 경우엔, 내용이 얼마나 좋은가 하는 문제는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일 정도이다. 문제는 바로 편집규격에 맞게 글자들을 배열해야 하는 것이다. 권위가 높은 학술지일수록 편집 규정은 엄격해 진다. 그 유명한 MLA(The Modern Language Association, http://www.mla.org/) 같은 곳에서는 편집규정을 위한 책이 발간될 뿐만 아니라, 종종 신간을 발행하여 변경사항들을 바로잡기도 한다. 논문을 쓰려면 편집에 관한 책부터 뒤져서, 한 권을 통달해야 할 정도이다(실제로 그런 사람은 없지만). 과학 논문의 경우엔 따로 팀을 구성하여 편집본을 작성하기도 한다.
그런 문제들이야 그쪽 사정이고, . . . 어쨌든 나는 그다지 크지도 않은 대학 연구소 모집 논문을 작성하였다. 연구소 측에서 요구하는 편집 규정본은 대략 10장 정도의 분량으로 되어 있었는데, 처음부터 꼼꼼히 살펴서 나의 논문과 대조를 해가며, 거의 이 삼 일에 걸쳐 규격에 맞게 서식을 조절하였다. 그 모든 것을 전부 언급할 수는 없고, 특징적이다 싶은 것만 몇 가지 추려서 적어보겠다. 실은 그 규정본 파일을 다시 열고 싶지 않아, 기억에 의존한 목록이므로, 세세한 부분은 좀 다를 수도 있겠지만, 내 이야기의 요체를 이해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글을 통해 아는 것과는 느낌이 다를테니, 시간이 있는 사람은 한글 2004나 2005 프로그램을 열고, 아래에 적힌 대로 하나씩 실행을 해보길 권한다.
논문의 맨 앞 페이지에는 국문초록을 작성해야 하고, 맨 뒤 페이지에는 영문초록(Abstract)을 작성해야 한다. 규모가 작은 논문이므로, 각각 A4 용지 1장 내외 정도면 적당하다. 국문초록의 경우, 맨 윗줄에서 두 칸(폰트크기는 구체적으로 정해주지 않았지만, 아마도 제목이 될 폰트와 같은 크기일 것이다)을 띄우고 "국문초록"이라는 제목을 쓴다. 제목은 중고딕체로 17포인트를 주고, 텍스트 배열(align)은 중간(center)으로 한다. 그리고 다시 한 칸을 띄우고(역시, 폰트크기는 몇으로 하고 칸을 띄우는지는 가르쳐주지 않았다), 논문 작성자 이름을 쓴다. 이름은 12포인트로 하고, 서체는 신명조로 한다. 텍스트 배열은 오른쪽. 그리고 다시 한 칸을 띄우고, 초록의 내용을 쓰되, 들여쓰기를 한 글자하고, 서체는 신명조, 크기는 10포인트로 하고, 줄 간격은 170%로 한다. 장평은 언급되지 않았다. 다시 한 칸을 띄우고, 주제어를 쓴다. 주제어는 들여쓰기를 하지 않고, 중고딕체로, 10.5포인트를 준다. 이제 페이지를 바꿔서, 두 칸을 띄우고 논문 제목을 쓴다. 폰트크기는 17포인트로 하고, 서체는 신명조로, 굵게 한다. 다시 한 칸을 띄우고, 12포인트를 주어 이름을 쓰되, 배열은 오른쪽에 한다. 다시 한 칸을 띄우고 배열은 다시 왼쪽으로 와서, 목차를 쓴다. 목차는 신명조로 하되, 들여쓰기 하지 않고, 목차의 번호는 장, 절, 항, 등에 따라 I, 1, 1), . . . 순으로 한다. 목차를 다 썼으면, 다시 두 칸을 띄우고, 신명조 12포인트로, 농도(weight)는 굵게(bold) 해서, 장(Chapter) 제목을 적는다. 텍스트 배열은 가운데. 다시 한 칸 띄우고, 한 글자 들여쓰기, 신명조 10포인트, 줄 간격 170%. 다음 장으로 넘어갈 때에는 두 칸을 띄우고, 제목을 적고, 다시 한 칸을 띄우고, 본문으로 들어간다. . . . 인용을 할 경우, 3줄 이상을 인용할 때에는 별도의 단락으로 처리 하되, 한 칸을 띄우고, 들여쓰기를 하지 않고, 신명조에 크기는 9.5포인트로 하고, 단락 전체를 두 칸을 들여쓰기 한다. 따옴표는 쓰지 않는다. 다만, 본문 중에 인용을 할 때에는 따옴표를 쓴다. 각주의 처리는, 본문의 번호와 각주의 번호 모두 1), 2) 식으로 한쪽만 괄호를 하고, 각주 내용은 9.5포인트에 들여쓰기는 하지 않는다. 각주와 본문의 구분선 길이는 전체 본문 너비의 1/3로 하고, 구분 선 위 쪽은 1.8mm의 간격을, 구분 선 아래는 1.5mm의 간격, 각주 사이에는 1.5mm의 간격을 준다. 국문 서적의 경우엔 저자의 이름을 쓰고, 쉼표를 하고, 하나짜리 꺾쇠 안에 논문 제목을 쓰고, 두 개짜리 꺾쇠 안에는 책의 제목을 쓴다. 다시 쉼표, 지역 이름을 쓰고, 출판사를 쓰고, 년도를 쓰고, 페이지는 p. 12. 혹은 pp. 12-13. 식으로 쓴다. 같은 책이나 같은 논문을 바로 다음에 다시 인용할 때에는 저자이름, 쉼표, "같은 책"(혹은 같은 논문), 쉼표, 페이지를 쓰고, 전에 언급한 책이나 논문이지만, 바로 앞에서 언급하지 않은 경우, 예전에는 op., cit., loc., '앞의 책', '전 게서', '상 게서' 등의 명칭을 썼지만, 지금은 저자, 쉼표, 책 제목 혹은 논문 제목, 쉼표, 쪽수만을 순서대로 쓴다. . .
우리는 아직도 본문을 벗어나지 못했다. 본문은 커녕, 각주조차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대충이나마 이런 식으로 끝 페이지에 있는 영문초록까지 열거를 해보려고 했지만, 무의미한 것 같아, 또 갑자기 안 좋은 기억이 되살아나는 관계로, 여기까지만 하고 마치겠다. 다만, 저 위에 열거했던 규정은 전체 규격의 1/10도 안 된다는 점만 지적하면서.
안 좋은 기억이라고 말했던 이유는, 규정집을 보며 열심히 글자들을 배열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변태성욕자가 지시하는 이런 저런 명령들을 직접 몸으로 실행하는 상대여성이 지금의 나와 같은 기분이 아닐까? 포르노그라피의 기본적인 구조는 지시(명령)와 행위로 이루어져 있는데, 특히 권력관계를 암시하는 경향이 강한 도착의 경우, 지시는 극단적인 형태의 명령이나 가학이 되기도 한다. 변태성욕자가 상대 여성에게 내리는 그 명령들은 "옷을 벗어!"라든가 "자리에 누워!"와 같은 식으로 행위 자체의 직접적인 명령이 아니라, 행위가 암시하는 어떤 질적인 이미지들을 추구하는 식으로 내려진다. 가령, 이런 식이다: "꽃병이 있는 곳에서만 바지를 내리도록 해! 시선은 정면을 주시해서는 안 돼!"
아마도 그러한 예들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람은 사드(The Marquis de Sade) 일 것이다. 가령, 그의 작품 <쥘리에트(Juliette)>에서, 쥘리에트에게 독살되는 클레어윌은 식탁에서 식사를 할 때에 마치 침대에서 성교를 하듯 특이하고도 기괴한 태도들을 취한다.
"그녀가 먹는 것은 오로지 닭고기와 사냥에서 잡은 고기 뿐이다. 그 고기는 항상 뼈가 발라져서, 온갖 모양의 장식과 치장으로 뒤덮여 제공된다. 평소에 마시는 음료는 계절에 상관없이 단맛을 내어 얼린 물이다. 그리고 이 물을 담은 모든 물병마다 레몬즙 스무 방울과 오렌지 꽃 추출물 단 두 숟가락을 첨가한다."(The Marguis de Sade, Juliette, Tr. Austryn Wainhouse, New York: Grove Press, 1968. p. 295)
혹은 다른 곳에서,
"테이블 윗면은 무릎을 꿇은 노예들의 등이 되고, . . . 네가 보는 이러한 탁자, 등불, 의자들은 각각 한 무리의 소녀들을 교묘하게 배치하여 만든 것이다. . . . 열 두명의 벌거벗은 소녀들 . . . 여덟이나 열명의 처녀의 피로 만든 소시지와 두 개의 고환으로 만든 밀가루 과자 . . . 열 여덟 병의 그리스 와인 . . ."(티모 에이락시넨, 『사드의 철학과 성 윤리』, 서울: 인간사랑, 1997. pp. 252-253.)
혹은 다른 곳에서,
"우리의 결혼식 날 밤에 그는 나에게 자신의 취향에 조심하라고 했다. . . . 나는 그에게 복종을 맹세했다. . . . 나의 남편은 변덕스럽게 자기를 빨아달라고 했다. . . . 그리고는 이상한 행위를 요구했다. 내가 몸을 숙여 나의 궁둥이와 항문을 그의 얼굴 정면에 두고, 그의 불알에서부터 귀두까지 힘차게 빨아대는 동안, 나는 그의 얼굴에 똥을 싸야 한다! 그는 그것을 먹어버린다."(The Marguis de Sade, "Philosophy in the bedroom", Three Complete Novels -- Justine, Philosophy in the Bedroom Eugenie de Franval, and Other Writings. Ed. And tr. Austryn Wainhouse and Richard Seaver, New York: Grove Press, 1965. p. 202.)
아니면, 좀 희화적으로 말해:
"팬티의 오른쪽 사타구니 부분을 왼쪽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으로 잡고, 반대편 왼쪽방향 중앙부분으로 음모가 보이도록 약 5센티미터를 당기고, 장지손가락의 첫 번째 마디를 질 속에 넣고, 오른손은 왼쪽 어깨의 삼각근 부분을 살포시 감싼 채, 고개는 오른쪽으로 돌리고, 시선은 아래로 떨구면서, 저기에 놓여 있는 저 모피코트를 갈망하듯 주시하는 거야! 내가 들고 있는 이 채찍에 대한 공포의 눈빛으로! 물론 왼쪽 발엔 지퍼를 내린 채 가죽 부츠를 신고! . . . 신명조 10pt, 줄간격 170%, 폰트 weight는 굵게 . . . "(모피를 입은 비너스를 창녀로 만들고 싶어하는 어느 마조히즘 혐오주의자 인터뷰 속기록 중에서)
이러한 각각의 개별적인 명령과 행위들은 변태성욕 주체의 과거라든가, 그가 성장하면서 보냈던 시간 전체를 환기하면서, 그가 겪었던 경험의 질적인 이미지를 강렬하게 드러낸다. 어떤 행위들을 반복하다 보면, 마치 죽은 물건으로부터 영혼이 빠져나가듯, 경험의 질적인 이미지들이 살아나 대기로 흩뿌려지는 경향이 있다. 거기서 환타지도 나오고, 환각도 나오고, 망상도 나오고 그러는 것이다. 그 행위들이 반복적이면 반복적일수록 강렬함은 증대한다. 사드의 작품을 보면, 난봉꾼들은 변태성의 쾌락을 맛보기 전에, 철학이나 종교에 관하여 장시간의 토론과 설교를 함으로써 예비적인 단계를 취한다. 토론, 철학적 논증, 종교적 설교는 다양한 형식적 규정본을 필요로 하는 일이지만, 무엇보다도 철학과 종교와 법과 같은 것들 그 자체가 하나의 규정집이다. 그 난봉꾼들은 세 단계의 변태성의 과정, 즉 사유(논증)하고 해방(가학행위)되고 휴식(토론)을 취하는 과정 속에서, 사회의 불의라든가, 권력의 악덕에 대해 비난하고 분석하는 일을 반복한다. 그들의 감각적인 쾌락은 사색적인 요소가 없이는 강렬해지지 않으며 증대될 수도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의 쾌락을 배가시키는 요소는 바로 명령과 행위의 반복이 나타내는 제의적인(ritual, 祭儀) 요소이다. 행위들이 제의적인 성격이 강해질수록, 그 행위가 주는 쾌락의 질적인 측면들이 보다 더 현실적이고 실천적이 된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행위를 요구하는 주체뿐만 아니라, 그것을 직접 수행하는 쪽도 해당되는 말이 아닐까 싶다. 영혼을 부르기 위해 향불을 피우고, 다양한 다기(茶器)나 제기(祭器)들을 배열하고, 가령 우리의 전통적 제례 의식의 절차들, 즉 강신(降神), 진찬(進饌), 초헌(初獻), . . . 합문(闔門), . . . 사신(辭神) . . . 이 모든 사소한 절차들은, 정신적인 것 즉 영혼에 속하는 것을 행위를 통해 물질적인 것으로 팽창시키는 기능을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변태성의 주체는 눈을 감으면 사라져 버릴 수도 있는 망상적 쾌락의 이미지들을 지루하고도 엄격한 절차들의 반복을 통해 현실적 효력을 보증 받고, 자신의 망상의 힘을 스스로 느끼며 제의적 쾌락에 사로잡힌다. 우리가 몇 년 전에 요란하고 시끌법석하게 관람을 했던 장선우 감독의 <거짓말>을 보면, 주인공이 상대여성에 의해 몽둥이로 맞으며 변태적 쾌락에 사로잡히는데, 거기서 사용된 그 몽둥이는 길이 두께 재질 등의 정확한 계산에 의해 선별된 것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몽둥이는 환타지로 가기 위해 치밀하게 배치된 성스러운 제기(祭器)였던 것이다.
이제 다시 나의 얘기로 돌아와서. 나는 그 학술지의 규칙들이 요구하는 지시문을 따라 한 줄 한 줄씩 수행해 가는 동안, 저 명령들 속에 혹시 무슨 심오한 뜻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제사를 지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지방을 쓰고, 그 내용을 읊조리며, 술을 따르고, 향을 피우고, 절을 하고, . . . 그렇게 제의 규칙들을 수행해 가다 보면 나 자신 스스로 머리가 숙연해지고,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면서, 죽은 영혼과 살아있는 나 사이에 어느새 거부할 수 없는 신비한 끈 같은 것이 묶여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그러는 가운데 어떤 상징적 환타지가 강림하는 것을 느끼기도 한다. 학술논문에 요구하는 그 각각의 규정들은 혹시 어떤 환타지를 암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규정이 어떤 공통성을 줌으로써, 복잡성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공통성을 주기 위한 것이라면, 가급적이면 단순한 원리로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가령, 모든 서체를 10으로 한다든가, 제목은 반드시 1칸을 띄어야 한다든가, . . 통일적인 형식이 되려면, 오히려 단순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학술지마다 규정들도 다르고, 통일성은 전혀 없다. 그 논문을 다른 학술지에 보내려면, 전혀 새로운 편집 규정에 따라 하나씩 다시 수정해야만 할 것이다. 각각의 행과 제목과 주석과 본문과 문헌목록 등에 대한 그 개별적인 지시의 복잡성은 오히려 모호한 것을 낳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 복잡한 명령들이 지켜지게 하기 위해서는 더욱 복잡한 규칙들을 만들고 통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령, "제목 위는 두 칸을 띄우고, 그 아래는 한 칸을 띄운다"는 규정을 보면, 제목의 폰트가 몇 인가에 따라, 제목 위의 폰트 크기와 제목 아래의 폰트 크기는 전혀 달라진다. 그 규정이 엄격히 지켜지려면, 제목 위의 빈 칸의 폰트 크기와 제목 아래 빈 칸의 폰트 크기가 따로 정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복잡성이 배가 되는 것이다.
학술논문의 경우 변태성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변태성과 성질이 유사한 상징적 환타지가 거기에 있는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 객체인 나는 수십 만원의 화대를 위해 그 요구를 묵묵히 완수하면서, 마디 마디 몸을 더듬듯이 행위 절차들을 하나씩 수행하는 동안, 그 미로가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더욱 더 거부할 수 없는 힘과 권위를 느끼며 어렴풋이 숭고체험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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