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나는 바르뜨(Roland Barthes)가 쓴 사진에 관한 몇 가지 단상을 읽은 적이 있다. 거기서 나는 사진과 관련한 전문적인 지식을 별로 알아내지 못했으므로 곧 그 책을 기억에서 지워 버렸다. 그러나 한참 지난 후에 문득 이런 질문이 생겨났다: 사진에 관한 글을 쓰면서 그는 왜 사진의 이러저러한 지식에 대해 말하지 않았을까? 아는 것이 없어서?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어서? 그랬다면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 책을 통해 사진을 하나의 방법으로 접근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은 대체로 이미지에 의해 사물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사진을 방법으로 보는 것. 이는 결국 사진 뿐 아니라 사물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이며 동시에 그로부터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책 전체를 다시 훑어보면서 사실은 특정한 주제에 향해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바르뜨 역시 이 주제를 가장 흥미롭게 혹은 가장 중요하게 언급하고 싶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주제는 의외로 단순한 구분에서부터 출발하는데, 그것은 사진이 발생시키는(혹은 우리가 발견하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감정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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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누군가의 글에 매료 되었을때, 글을 쓴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작품 만큼이나 그의 삶도 아름다울 것이라고 말이다. 당연한 일처럼 보이지만, 실은 아주 우스꽝스러운 넌센스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넌센스는 예술을 대하는 우리의 전반적인 태도(주로 속물적인) 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나아가 이는 예술과 예술가 그리고 예술작품을 마음대로 뒤섞어서, 그들을 한꺼번에 폄하하거나 망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예술가나 작가 개인의 전기적 사실들에 대한 관심, 가령, 그의 출신은 어디인지, 학력은 어떤지, 유년시절이나 가족관계는 어땠는지, 연애를 얼마나 했는지, 버릇이나 취향이 무엇인지, 동성애자는 아닌지, 결혼은 했는지, 주변의 누구와 친분이 있었는지, 도덕심이 어땠는지, 성격은 어떤지, 앉은 자리가 얼마나 높았는지 하는 식으로, 한 개인과 작품에 접근함으로써, 우리는 예술가의 본질로부터 멀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심지어는 예술가 개인에 대한 실망감을 그의 작품에 대한 비난으로 대신하는 어처구니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든 예술과 개인, 예술과 삶을 묶어서 예술이 삶으로부터 따돌림 당하는 일을 막아보려 한다. 그래도 예술은 삶에 꼭 필요하다든지, 살아가는데 도움이 된다는 식으로 말이다. 미안한 얘기지만, 그들은 예술의 적이다. 인맥과 겸손으로 작업을 하는 협잡꾼들은 주로 그런 인간들 속에서 나온다.

한 번만 숨을 죽이고 생각을 해보자. 만일에 하나의 작품이, 그 예술가나 작가의 전기적인 사실들과 동류의 문제이고, 그 예술가 개인의 삶과 구분되지 않는 것이라면, 그래서 그의 전기적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작품이 평가될 수 있는 것이라면, 도대체 예술 작품이란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인가? 가령,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작품이 그의 소소한 과거사에 관한 이야기이고, 그의 개인적 시간 경험의 기록이며, 그가 관계한 많은 사교계와 사랑에 관한 보고서이며, 그 주변 인물들에 대한 소묘이며, 작가 개인의 정신적 성장의 과정에 불과한 것이라면, 그래서 마르셀(작가의 이름이며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한) 개인에 대한 이해가 작품의 이해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것이라면, 그의 소설이 벽장 속의 사진첩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예술작품이나 이론은 작가나 예술가 개인의 사회적 삶과는 본질적으로 아무 관련이 없다. 가령, 방금 전 불륜의 밤을 보낸 후에 쓴 한 예술가의 연애시는 얼마든지 위대하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과 이론은, 육체와 대상에 필연적으로 묶여있는 그의 지리멸렬한 삶보다 더욱 심오한 어떤 통찰 속에서, 그의 내적인 영혼에 관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일은 단순히 한 개인의 경험의 기록이나 감정 표현이 아니다. 그런 이유였다면, 당장에 손에든 책과 그림을 던져버리고, 차라리 당신 자신의 일기를 써라! 작품은 그 개인의 삶을 뛰어넘는 것이다. 그래서 작품은 현실세계에서 살아가고, 생각하고, 사회적 관계를 맺는 바로 그 개인이 아닌, 전혀 다른 존재(심지어는 인간 조차도 아닌), 전혀 다른 관점과 세계와 가능성의 펼침이다. 우리가 그림 앞에서 모자를 벗고, 소설 속에서 전 우주의 떨림을 체험하고, 그 예술가에게 위대함의 찬사를 보내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렇치 않다면 예술작품은 화장실의 신문지보다도 가치가 없다. 예술가는 사실들을 가지고 자질구레하게 신변의 넋두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현실적 존재를 넘어서기 위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붉게 충혈된 동공으로 새벽의 작업실을 빠져나온다. 우리가 그 작품에 빨려들어 매료되는 것은, 그의 덕망도, 인품도, 겸손도 아닌, 그가 펼쳐 놓은 어떤 풍경, 우리와는 전혀 다른 세계 때문이다. 삶이 없어도 예술은 존재한다거나, 예술이 삶을 대신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그것과 그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라는 말이다. 신변잡기의 얘기를 썼다 해도, 그의 작품은 그 자신과 무관하다. 신적인 광채를 지닌 작품을 쓴 작가를 실제로 만나보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모습의 한 주정뱅이 노인을 발견하고는(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의아해 하며 그의 작품을 다시 보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예술과 삶을 혼동한 우리의 편견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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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나 사물에는 변하지 않는 하나의 모습이 있다고들 한다. 영원히 같은 모습의 정체성 혹은 본질이 있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조금만 더 냉정하게 세계를 바라본다면 삽시간에 허공으로 꺼져버릴 만큼 근거가 빈약한 믿음이다. 사물을 바라보고 대하는 우리의 변덕스러운 모습만 보더라도 이 말을 쉽게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친한 사람, 사랑하는 사람, 애뜻한 사람, 미운 사람, 혐오스러운 사람, . . . 그들의 정체성 때문에 그러한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체성에 대한 우리의 믿음 때문에, 우리는 아주 많은 가능성들을 스스로 포기한다. 그들로부터 우리는 풍경들을 바라보고, 그들 중 어느 하나의 풍경이 우리를 만나게 한다. 풍경이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만일에 우리가 사랑하게 된다면, 그것은 단지 하나의 행운일 것이다.

나의 변덕은 내 앞에 펼쳐진 모든 것들의 변화와 다양성을 말해준다. 가령, 하늘을 보라. 그리고 하늘이 무엇인가? 혹은 하늘은 무슨 색인가? 라고 질문을 해보라. 우리는 쉽게 대답할 수가 없다. 우리가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대답할 수 없음 자체가 하늘이기 때문이다. 바다는 또 무엇인가? 바다는 무슨 색인가? 이 또한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 대답없음 자체가 바로 바다이기 때문이다. 그들에 대해 대답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들을 제대로 본 것이다. 하늘, 바다, 노을, 뿐만 아니라 내 작은 방 창틈으로 새어들어오는 자그마한 빛, . . . 그들은 본성이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것들을 '하늘', '바다', '노을', '빛' 이라고 부르고, 그들을 식별해 내는 것은, 단지 우리의 어림짐작으로, 우리의 무딘 지각이 뭉뚱그려 놓은 통계 때문이다. 현실이란 잡히지 않는 기체-연기가 무리를 이루며 모인, 혹은 우리가 뭉뚱그려 놓은 여럿의 덩어리-몸둥이들의 집합이다. 현실은 한 두가지의 통계일 뿐이다. 사랑은 또 어떤가? 우리는 사랑이 하나의 감정 상태인 것처럼 믿고 열광한다. 하지만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랑의 대상들, 애인들의 수 만큼이나 많은 사랑이 있으며, 뿐만 아니라 한명의 애인에게 조차 매순간의 서로 다른 사랑과 질투와 고통이 있다. 그 감정들은 서로 뒤섞이지 않으며, 각각의 세계와 각각의 풍경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한 사랑을 다른 한 사랑과 혼동하지 않고, 그 사랑을 다른 사랑과 대체하거나 교환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태만과 무성의는, 바꿀 수 없고 대체할 수 없는 그 각각의 사랑을 마치 하나의 감정이라도 되듯 뭉뚱그려 뒤섞는다.

현실을 이루고 있는 것이 그 덩어리-몸둥이라고 해서, 하나의 현실, 하나의 본질이 있다고 믿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 몸둥이에는 아주 많은 주름들이 나 있고, 그 몸둥이의 실상은 바로 그 주름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가 평생을 찾아 헤매던 풍경: "어머니가 아들에게서 보는 것, 예술가가 장미에게서 보는 것, 수녀가 마리아 상에서 보는 것!" 주름이 만들어 놓은 각각의 풍경들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그 각각의 풍경에 맞는 전혀 다른 광학 도구들을 필요로 한다. 사랑의 주름을 생각해보라.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뒤척일 때마다, 웃을 때마다, 담요에서 먼지가 일어나듯, 그녀의 주름들 속에 숨어있던 어떤 미지의 영혼들이 작은 몸짓과 뒤척임 속에서 퍼져나와, 방금전에 내가 보았던 그녀의 풍경을 지워버리고, 전혀 다른 풍경을 펼쳐놓는 바람에, 나는 새로운 돋보기로 그것을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들여다보다가 내 스스로 웃기도 하고 찌푸리기도 하며 진풍경을 자아낸다. 그 하나의 풍경은 내가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이고, 다른 여인과 구별되는 바로 그녀(전체)는 그 관점들의 통계이다. 그녀가 퍼뜨리는 풍경과 관점들이 요술을 부려, 내가 믿었던 그녀가 아님을 보게 되었을 때, 알 수 없고 소유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 풍경 속에 내가 없을 때, 그 저주같은 풍경들이 점점 내 눈에서 증식하여, 그녀를 사랑하는 내게 되려 적이되어 몰려올 때, 나는 배신감과 질투의 포로가 될 것이다. 그 관점과 풍경들은 마치 기차여행에서 보게되는 창문의 풍경처럼, 이리로 갔다가 저리로 갔다가 종잡을 수 없는 부스러기와 조각들로 펼쳐져, 내가 믿고 있었던 그녀의 본질을 해체한다. 나는 더 이상 어제의 그녀를 찾을 수 없으며, 내일의 그녀를 예측할 수가 없다.

하늘을 바라보며 발견하게 되는 그 무수한 관점들의 수 만큼이나 많은 우리의 자아가 있다. 창틈으로 새어 나오는 빛과 세상의 모든 빛의 수 만큼이나 많은 우리의 영혼이 있다. 사랑하는 애인의 그 복잡한 모습 만큼이나 많은 자아와 관점이 우리를 사로 잡고 있다. 푸르스트(Marcel Proust)는 이렇게 말한다. 애인이 떠났을 때, 그녀를 상대했던 내 안의 수많은 자아들 모두에게, 그녀가 떠났음을 각각 알려주어야 한다고.

우리는 사랑하며 잠에 빠진다. 잠 속에서 보게 되는 그 많은 풍경의 방들을 돌아다니듯, 각각 밀폐된 방안으로 연기처럼 스며들듯, 사랑은 우리를 이방 저방을 옮겨다니게 하고, 애인이 내뿜는 풍경에 길을 잃고 방황하게 한다. 잠과 마찬가지로, 사랑에서 깨어난다는 것은, 그 많은 풍경들로부터, 그 풍경의 방들 속에서 펼쳐지는 것들로부터, 내가 지금 앉아있거나 서 있는 이 현실의 방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다. 혹은 그 많은 풍경들에 빠지기 전의 자아, 단 하나의 풍경에 고착된 허전한 자아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결국, 잠과 마찬가지로, 사랑에서 깨어난다는 것은 그 아름다운 풍경들을 져버리고, 잠에서 깨어나 내가 누군지 여기가 어딘지를 정신없이 서둘러 선택하듯이, 불안 때문에 아니면 두려움 때문에, 단단하게 마련된 사슬들을 몸에감고, 덩어리-몸둥이가 되어 스스로 한 곳에 묶여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찬란한 순간들을 포기한 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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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찾아 나서는 자는 철학자보다는 오히려 "애인의 거짓말 때문에 고통 받는 질투에 빠진 남자", "찾기를 강요하고 우리에게서 평화를 빼앗아가는 어떤 징후의 폭력"에 맞닥뜨린 사람이라고 Deleuze(혹은 Proust)는 말했다. 지적이고 분별이 있는 사람은 언제나 명확하고 객관적인 의미를 제시한다. 또한 자연으로부터 윤곽선이 뚜렷한 형태들을 자신의 지식으로 취한다. 그들은 쓰여진 책을 통해 진실을 찾아나서길 좋아하는 모범생이다. 하지만 지식이 만들어지는 것은 그러한 길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와 같은 지성이 만들어 낸 진리 말고도, 우리는 다른 풍요로운 방식으로, 즉 사물의 징후로부터 출발하여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 지적이거나 위대한 사람보다는, 평범하거나 결점이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은 징후를 가지고 있고, 그것이 그의 존재를 더욱 풍요롭게 해준다. 그것은 예술가들을 풍족하게 해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성의 노동과 임무를 가지고 세계에 뛰어들어 노력하는 학자들보다는,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며 인생을 보내는 사람들, 직업도 없이, 그렇다고 예술을 할 만큼 능력도 없는 실망스러운 인간”들이 더욱 더 징후에 있어 풍요로운 진실에 도달할 수가 있다. 가령,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이란 바로 허송세월을 보낸 시간을 의미한다. 그러나 쓸모없이 보내버린 시간, 즉 훌륭한 사람을 만나 진지한 대화를 하거나 지적인 모임에 나가 무엇인가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교계에 드나들며 사람들과 노닥거리고, 여인들과 사랑에 빠지고, 감각적 경험에 사로잡혀 봄으로써, 오히려 우리는 사람들과 풍경과 이 세계에 대한 진실을 배울 수가 있다. 우리는 완전한 이상적 대상에서 보다는, 불완전한 인간들과 비틀린 물질적 감각에 쉽게 매료된다. 또 결함 없는 위대한 한 인물 보다는 평범한 여인을 통해 인간과 세계의 근원적 진실에 도달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 사유의 지적인 활동이 강렬하게 활동하여, 대상들로부터 본질을 발견하고, 세계의 진실에 도달하게끔 하는 것은, 그 비틀린 경험과 비균형적 경험 속에서 규정하기 어려운 징후들의 난입을 직면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재와 그 징후가 우리에게 직접 던져주는 것으로, 우리가 직접 풀어내고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이다. 그것은 친구들이 모여 합의한 해답과는 판이하게 다른 해답을 도출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어떤 여인과 사랑에 빠지고, 그 여인에게서 어떤 진실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녀와 매끈한 소통을 하거나, 합의된 대화에 이르렀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 의미가 무엇인지, 그 진실이 어디에 감추어져 있는지 알지 못한 채, 그녀가 발산하는 낯선 징후들을 해석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잃어가며, 시간을 낭비해가며 알몸으로 달려드는 직관능력 덕분일 것이다. 선생님이 제시한 문제들 속에서는 그 무엇도 배울 수가 없다. 그렇게 의무와 노동에 사로잡힌 배움을 통해 얻은 진실은 “필연성이 결여”되어 있다. 억압적이고 부정적인 반성적 노동이 만들어낸 진실은 추상적이고 인위적일 뿐이다. 그 진실은 그것을 배우는 나 자신과는 무관한 진실이며, 따라서 이렇게 말해도 저렇게 말해도 되었을 법한 임의적 진실에 불과하다.

진실이란 정다운 대화 속에서가 아니라 참을 수 없는 폭력 속에서 피어난다. 우리는 고통을 겪음으로써만, 통증이나 갈증이나 제지된 욕구를 통해서만, 그 추동적 힘에 직면해서만 비로소 의미와 진실을 찾으려 한다. 진리를 사랑한답시고 고통도 없이 달려드는 얼뜨기 속물 학자로부터는 그 무엇도 배울 것이 없다. 그 보다는 오히려 애인의 얼굴에서 거짓말의 징후를 간파하고 질투에 빠진 남자가 참된 것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그 속물 학자로서는 결코 자신에게 가해오는 인상들에 아프지도 않고, 그것을 해석해야할 어떠한 필연적 운명적 책임도 느끼지 못하는 반면, 질투에 빠진 남자는 인상과 징후들의 폭력에 맞서 그 누구보다도 민감해지기 때문이다. 질투의 고통만이 애인의 거짓말과 사랑의 진실을 찾는다. 진실이란 사회 속에서가 아니라 근원적인 것에 대한 질문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회의 지배계급은 그 사회의 진실에 접근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떤 놀라운 경험 때문에 우리의 기억이 작동하듯이, 고통은 지성으로 하여금 진리와 의미를 찾도록 강요한다. 필연적 진실이 태어나려면, 우선 실재가 뿜어내는 징후의 폭력에 직면해야만 한다. 지성은 실재의 징후들로부터 어떤 강요를 받아야만 하고, 이것인가 저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빼앗긴 채, 모든 도구와 무기와 갑옷을 벗은 맨 몸으로 실재를 대면해야만 한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지성은 등장하게 될 것이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낌으로써만, 그 징후들의 의미와 본질을 찾아내고 진실의 근처로 다가갈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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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본질적인가? 문학(예술)과 관련하여 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또한 문학에서 본질은 스타일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문학작품에서 관점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철학에서 전체화(부분과 전체의 관계)의 문제가 문학(예술)에서 어떻게 논의될 수 있는가? 전체화에 관련해 문학(예술)적 모델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형태인가? 이 글은 이 질문들에 대한 탐구와 해석으로 구성되었다.

I.

사물의 본질에 관한 니체(F. Nietzsche)의 질문방식을 들뢰즈(G. Deleuze)는 "극화"라는 용어로 개념화했다("Nietzsche" 75∼79). 이 논의는 플라톤과 대립적인 쌍으로 진행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본질의 정의와 관련하여 플라톤이 질문하는 방식은 실재하는 사물의 상위원리를 결정하면서 시작된다. 즉 큰 것과 작은 것의 본질은 각각 '큼'과 '작음'이라는 근원적인 기원(개념)에 의해 정립되는 것이다. 이것이 사유의 출발점이며 동시에 세계의 시작이다. 이 방식은 사물의 외부에서 그 본질을 규정하는 원리이다. 따라서 자연의 각각의 사물들은 하나의 본질 아래 배열되고 분배된다. 만일 운동과 관련하여 자연을 정의할 수 있다면, 개별적인 것으로서 자연의 운동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원인에 의해 발생하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힘은 주어지는 것이다. 자연은 언제나 자신을 분배하고 지시하는 기원적인 제3의 원리에 관계하는 한에서만 증명될 뿐이다. 소크라테스가 보여주는 아이러니가 언제나 승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자는 대화에서 미리 결정된 해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해답은 드러나지 않는 심층적 의미로서, 그러나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하나의 본질로서 자연을 초월한다. 변증법은 대화의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교설의 위장일 뿐이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에게 대화는 탐구의 과정이 아니라 준비된 정답에 도달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자연을 따르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정의할 대전제를 재현하고 확인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마련된 그 해답이다. 그것은 경험적인 것 이전에 미리 결정되어 모든 사물들 위로 부지불식간에 도약을 해버린 임의적 관념이기 때문이다. 우연적이고 임의적인 관념. 한 번도 그 발생적 원인을 확인하지 못한 채, 아름다움-큼-작음이 어째서 필연적으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대답은 미루어진 채, 법과 도덕의 원천이 되어버린 이데아. 이것은 사물의 본질이 아니라 의식의 본질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데아 아래에서 개별자들은 서로 불연속하면서 오로지 그 관념과의 관계만을 유지할 따름이다. 자연 안의 모든 사물들은 종적(縱的)인 관계들로만 채워질 것이다. 이로써 개별적인 것들과 이들을 하나의 본질로 꿰뚫는 기원적인 것 혹은 전체적인 것과의 관계는 마름질 잘된 하나의 체계를 구성하게 된다. 이 체계 아래에서 부분은 전체와 기원에 정체된다. 또한 이 체계 내에서 우리는 파편적인 것들을 끌어 모아 하나의 전체를 구성할 수 있거나, 혹은 그 각각의 부스러기를 통해 전체를 이해할 수 있으며, 심지어는 실재의 근원적 기원을 단편화된 부분들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우주 전체가 이미 부스러기 안에 들어있다는 생각이 가능한 이유이다.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그 반대 역시 얼마든지 가능해진다. 그러나 우리가 실재하는 사물들로 눈을 돌려보면 혼란스러워 진다. 개별적인 것들의 상대적 가치들 속에서 사물들의 아름다움과 크고 작은 성질들은 혼합되어 있음을 보기 때문이다. 사물들 자체는 크고 동시에 작다. 심지어는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추하다.

이런 이유에서 니체의 질문은 사물들 안으로 그리고 이 사물들이 직접 참여하고 있는 관계들 속으로 파고든다. 그는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라고 질문하지 않고, 오히려 "무엇이 아름다운가?"라고 질문한다. 이 질문은 소크라테스의 심층적인 사유아래 포섭된 개별적이고 가변적인 것들에 대한 단순한 물음이 아니다. 사물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한 이러한 질문은 더 이상 개별적인 것들을 근원적인 상위의 원리에 환원하지 않기 위함 이었다. 따라서 본질은 부스러기들간의 관계들 속에서, 횡단하고 있는 부분적인 대상들간의 힘의 관계들 속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 이었다(주1). 니체에 의하면 본질은 그것을 담고 있는 대상 혹은 주체로부터 초월해있지 않다. "왜냐하면 본질은 단지 사물의 의미와 가치이기 때문이다; 본질은 사물을 향한 친화력을 가진 힘들에 의해 그리고 그 힘들을 향한 친화성을 가진 의지에 의해 결정된다"(Deleuze, 같은 책 77). 누가 보는가? 무엇을 보는가? 어디에서? 그리고 언제? 등을 질문하지 않고는 더 이상 본질과 의미에 관한 맑은 대답을 기대할 수가 없다. 본질은 관점의 현실화(구체화)이기 때문이며, 관점은 일자(一者)로서 이데아가 아니기 때문이다. 관점은 오히려 니체 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힘에 가깝다. 따라서 하나의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본질들이 있다. 이것은 하나의 사물과 대상에 관련될 때에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본질을 힘과 복수적인 관점으로 설명하는 방식은 더 이상 본질과 의미를 이미 준비된 단일한 개념으로 사유하지 않겠다는 것을 뜻한다. 본질과 관련하여 모든 질문과 해답을 임의적이고 우연적으로 결정된 사유의 체계로 환원하지 않는 방식. 따라서 사물의 본질은 그것을 명령하고 지시하는 외부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그들간의 연속적인 관계들 속에서 그리고 그의 내부에서 생성하는 힘들 속에서 발생한다. 이것이 소피스트가 보여주었던 "경험적이고 복수적인 기술(art)"로서 니체가 이해한 비극적 질문방식이다(Deleuze 같은 책 76).

본질에 관한 두 가지 방향이 있는데, 하나는 대상을 그것의 본질로부터 떼어놓고, 이 대상을 본질로부터 파생된 실재(파생실재)로 정의하면서, 이들을 기원과 전체로서 본질에 포섭하는 방향이다. 이때 본질이란 전체와 기원의 다른 말이다. 다른 하나는 실재하는 것들의 본질을 단일한 전체나 기원으로 환원하지 않으면서, 실재하는 것들간의 운동과 힘들의 관계들로 복수화한다. 본질은 이 관계들 속에서 발생하는 가치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두 번째의 방향이 니체가 의미한 극화의 방향이며 비극적 방향이다. 비극적 세계 내의 존재는 시간적 존재로서 무수한 관점들과 함께 운동한다.

 

II.

의미는 해석하는 주체나 해석하는 활동에 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주체에게 사물은 관찰하고 해석하는 방식으로만 현존한다. 이는 해석이 객관적 대상과의 필연적인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도 그렇다. 세계는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고 그것에 대해 요구하는 방식으로만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러므로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은 대상 자체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또한 주체 내부의 관념적 연상에 의존하지도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세계에 대한 이해의 두 방향(1. 대상에 집중하는 방향(객관주의) 2. 주관적 연상으로 환원하는 방향(심리적 주관주의))은 해석의 활동이 무엇과 관계하면서 시작되는지를 혼동하면서 나오게 된 결과이다. 우리는 주관에 외재적인 대상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보여주는 징후들과 관계하면서 만 활동한다. 따라서 이 징후들을 대상과 동일한 것으로 혼동하면서, 대상의 면밀한 관찰이 우리로 하여금 궁극적인 이해를 가져다 준다고 믿음으로써, 우리는 한없는 실망만을 경험하게 된다. 이 방향에서는 관찰대상이 선재된 소여(所與)로 주어지며, 해석활동의 모든 양상은 이 소여된 대상에 정체된다. 따라서 해석하는 활동의 주체들인 심성능력들 역시 정향된다. 여기서 오게 되는 실망은 두 측면에서 우리를 좌절하게 하는데, 하나는 완전한 리얼리티를 재현할 수 없으며 심지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좌절이고. 다른 하나는 이 재현불가능성의 결과로서 우리의 무능력에 관한 좌절이다. 해석의 두 번째 방향의 경우는 의미를 주체의 주관적인 해석이나 심리적 연상에 의존하는 문제로 환원하는 경우이다. 이것은 사물의 의미를 연상 메커니즘의 연쇄고리로써 이해하는 방향이다. 그러나 이는 대상이 나타내는 징후들과 그 대상을 동일하게 생각하여, 대상에 대한 관찰과 증언들만으로도 충분히 대상의 본질을 꿰뚫을 수 있다고 믿는 것만큼이나 임의적이다. 따라서 이 방향은 사물들이 본질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구별하지 못한다. 연상 작용은 사물과의 필연적 관계를 맺지 못하고 우연적이며, 그 연상의 메커니즘 안에서 사물들은 양적으로만 분할 될 뿐이다. 이것이 바로 주관적 연상주의나 심리주의가 공허한 이유이다. 이 두 방향은 물질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한다. 이들은 우리로 하여금 좌절케 하거나 혹은 허기를 느끼게 한다.

사물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은 사물이 소유하고 있는 징후들과 관계하지만 사물 자체로부터는 거리를 갖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물과 완전히 단절되어 주체로 환원되지도 않는다. 이런 이유에서 의미와 본질은 인식의 대상 자체와 동일하지 않으며, 또한 그 만큼 인식의 주체와도 구별된다. 그렇다면 의미(본질)는 무엇인가? 그것은 존재가 궁극적으로 자기자신을 드러내는 최종적인 성질이다. 그래서 본질은 차이가 남으로써만 현실화한다. 이것은 외재적인 차이일 뿐 아니라 내적인 차이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우리가 경험적으로 파악 가능한 대상들 간의 차이 뿐 아니라 대상과 주체의 차이이며 주체 자신의 차이이다. 본질은 대상으로서 지시된 특정한 내용이 아니다. 그것은 사물들이 시간의 계기와 운동의 지속 안에서 긍극적으로 특별하게 그리고 개별화되어 드러나는 일종의 형식이다. 본질은 다수의 내용들로 이루어져 차라리 그것은 내용이 없다고 말해야 한다. 본질은 실질적이고 근본적인 차이이지만 또한 형식으로서 드러난다. 이것이 바로 본질이 예술에서 에피파니의 형식으로만 드러나는 이유이며, 물질의 거추장스러움을 벗어버리고 순수한 정신적 계기들 속에서 나타나는 이유이다. 본질은 확실히 주관성의 한 영역에 속하지만 일단 그것이 표현되고 나면 마치 독립된 실재처럼 주관성의 영역을 넘어버린다. 따라서 해석되고 표현된 본질은 주체 자체의 본질이기보다는 차라리 하나의 세계의 본질이다.

차이는 그 자체 어느 것으로도 환원되거나 치환할 수 없는 유일하고 독특한 존재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양적으로(개념적으로) 구분된 두 대상들간의 비교를 통해서는 나타나지 않으며, 시간 속에서 발생하는 그 자체 본성적인 성질을 통해 나타난다. 그것은 다른 것과 비교될 수 없는 궁극적(순수한) 차이이다. 이런 의미에서 징후들과 인상들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본질이 드러나는 문제는, 대상이나 주체로 환원되지 않는 즉자적 존재, 진정한 타자를 발견하는 문제이다(주2). 프루스트(M. Proust)는 이것을 "질적인 차이"라고 말했으며, 헨리 제임스(Henry James)는 이를 "상상적 해석"에 의해서만 얻게 되는 어떤 것이라고 했다. 질적인 차이는 관점들의 차이이기도 하며 관점 그 자체의 차이이다. 이런 식으로 본질은 질적 차이의 문제로부터 시작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더 이상 드라마적으로 주인공에 정체된, 혹은 주체의 자기의식에 사로잡힌 그런 타자가 아니라, 그 자체 실재하는 환원 불가능한 즉자적 타자를 발견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질은 순전히 정신적인 계기들을 통해서만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우선 물질 즉 질료들과 관계하면서 출현한다. 프루스트의 무의식적 기억이 이를 예증하고 있다.

하나의 관점은 하나의 세계를 표현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체는 각각 하나의 관점으로 자신들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이 세계는 다른 세계와 본질적으로 다르며, 시간의 지속 안에서 그 자체  차이나는 그런 세계이다. 내재적으로 차이나는 세계. 따라서 각각의 주체는 자신만의 세계를 표현하며, 이 세계들은 예술 안에서 발생한다. 예술에서는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세계들이 있으며, 주체 자신만의 세계가 아니라 본질의 세계, 다시 말해 즉자적인 타자가 공존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니체는 철학의 질문이 아닌 비극적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극화의 형식은 세계를 용해하는 본질의 이데아를 관점의 복수주의로 치환해 버렸다. 헨리 제임스는 어째서 소설에 있어 관점의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했을까? 그가 이해한 도덕적 상상력은 관점의 테마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매기와 아담의 단편적 이미지(주3)의 예를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매기가 감싸고 있는 본질의 환원불가능성, 절대적 차이, 질적이고 본성적 차이일 것이다.

사랑은 고통을 수반하게 마련인데, 이는 사랑하는 연인에 대한 해석이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즉 사랑한다는 것은 연인이 뿜어내는 징후들과 인상들을 개별화하는 것이며 이들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연인이 함축하고 있는 세계를 발견하고, 자신의 내면적 세계를 펼치려는 노력 속에서 전개된다. 사랑은 현실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그러나 실재하는 어떠한 세계를 표현하고자 한다. 그것은 연인이 감싸고 있는 세계의 발견이며 동시에 자신 속에 감싸인 세계의 전개이다. 그러나 이 펼치고 전개하는 과정은 또한 끊임없이 질투를 생산한다. 해석의 과정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경험하는 것은 언제나 타자이기 때문이다. 해석은 자기자신을 타자로 만들어야 할 뿐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타자를 경험한다. 어떤 것으로도 담아 내거나 잴 수 없는 궁극적 차이. 사랑이 고통스러운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해석하는 과정 속에서 깨닫게 되는 대상의 즉자적 존재. 이것은 한없이 자신을 배제하고 연인의 세계로부터 그를 쫓아내어 버리는 그런 세계이며, 주체의 주관적이고 자발적인 연상으로는 절대로 나오지 않는, 심지어는 주체 안에 스며들어 본성적으로 다른 존재이게끔 하는 그런 세계이다. 질투는 이러한 세계를 발견하게 되면서 나오게 된다. 사랑의 징후들을 해석하려는 노력, 연인의 몸 속에 감싸인 영혼과 본질의 세계를 발견하고 찾아내려는 노력은 언제나 사랑하는 사람을 배제함으로써 좌절하게 한다. 사랑은 좌절의 과정이다. 매기가 발산하는 이미지들을 통해 아담이 깨달은 것은, 자신이 완전히 소유할 수 없는 그 자체 빛을 지닌 그런 존재를 매기로부터 발견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더 이상 매기는 제도가 부여한 역할로서, 소유된 존재로서 딸이 아니라 타자가 되어 버렸다. 이것은 마르셀(Marcel)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알베르틴(Albertine)과의 이별에서 경험한 충격은, 자신의 주관적 메커니즘으로는 절대로 소유할 수 없는 즉자적 존재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갑자기 들이닥쳤다는 사건에 기인한다(주4).

그러나 거기서 나오는 고통은 본질과 의미가 비자발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출현하면서 경험된 것이다. 마르셀에게 그것은 하나의 폭력으로 난입한 것이다. 본질은 모든 존재를 의식의 메커니즘 안으로 흡수하는 개념적 활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지불식간에 출현한다는 것. 즉자적 존재는 주관적이고 논리적인 연쇄로 연결되는 고리가 아니라, 그 자체 실재하는 타자이기 때문에, 이것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순간적으로 도약을 해야 한다. 그것은 자발적인 기억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에서 시간조차도 존재의 층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관념의 산물이 아니라 존재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이미 펼쳐져서 그 지형 안에 사물들이 적절히 배열되거나 좌표들로 위치를 점하는 공간화 된 범주가 아니라, 차라리 모든 존재들 속으로 스며들어가 이들의 본질이 표현되길 기다리고 있는 주름과도 같다. 그것은 실재하는 것들 속으로 들어가면서 서서히 물 속에서 퍼지는 "일본종이"처럼 펼쳐지기 시작한다. 프루스트가 말한 "무의식적 기억"은 정신과 사유 안에 포로가 된 양적 차이의 세계가 아니라, 전혀 이질적이며 시간에 있어 완전히 질적 차이를 갖는 세계로 도약하게 한다. 우리는 특정한 감각적 성질들을 경험하면서, "무의식적 기억"을 통해 과거의 세계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 세계는 마치 물질의 단절과도 같아서, 도저히 개념적 연상이나 논리적 인과관계로는 설명하기 힘든, 그러나 허구로서가 아닌 잠재적 실재로서 타자를 구성한다. 진정한 타자성의 세계. 따라서 이것이 갑자기 우리의 신체로 난입해 들어올 때, 우리는 고통을 느끼며 불현듯 경련을 일으킨다. 왜냐하면 질적으로 차이나는 존재의 발견과 해석을 제대로 하려면 응고된 주체와 개인성이 파괴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고통은 에피파니의 징후인 것이다. 소유로써 사유하는 응고된 주체에게 타자의 출현은 우연적이며, 주체는 수동적이어야 하며, 따라서 그것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주5).

 

III.

근원적 시간과 본질로서 차이는 어떻게 육화 하는가? 그것은 우선 물질적인 것들을 통해 나타난다. 개념적 사유가 제공해주는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이차원적 이미지들간의 텅 빈 차이들일 뿐이라면, 그래서 존재들 간에 그리고 그들 자체 내에서 발생하는 본성적 차이가 관념의 연쇄들로는 나타나지 않는다면, 질적 차이는 우선 질료적으로 출현할 것이다. 본질적 차이는 존재가 소유하고 있거나, 주체가 자신의 신체 안에 비밀스럽게 감싸고 있는 무한한 성질들, 즉 무형의 질료들을 통해서만 나타난다.

아담이 매기로부터 발견한 그 심오한 이미지는 그의 의식 속에서 개념화되고, 균등한 분할구조로 분류된 개인으로서의 매기가 아니었다. 그가 포착한 그 이미지는 오히려 매기 자체가 아니라, 그녀를 구성하고 있으나 그녀 자체는 아닌, 자신의 딸로서, 아메리고의 아내로서 혹은 샤롯테의 친구로서, 기능화된 신체로서가 아닌 그녀의 본질이었다. 이 본질만이 그녀를 다른 존재로 운반해준다. 매기라는 개인은 이 본질이 두드러지면서 바다가 되며, 커다란 산이 되기도, 혹은 아주 작은 하나의 우주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 아담에게는 한 마리의 물고기가 되어 버렸다. 지금 그녀의 어떤 알 수 없는 부분적 대상들이 물고기 쪽으로 운반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매기가 고백하면서 사용했던, 그녀의 입에서 발화되어 분절된, 언어가 지시하는 내용들의 이미지를 통해 그녀를 물고기로 운반한 것은 아니었다. 말의 통사적 구조나 의미론적 담론은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확실히 이 때의 언어는 양화 되어 구조화된 하나의 체계이기 때문이다. 소쉬르(F. Saussure)가 기호를 둘(기표와 기의)로 분할했을 때, 이들을 물질과 연결짓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관심은 어떻게 소리 이미지들이 의식의 영역으로 용해될 수 있을 지에 대한 염원에서 시작된다. 따라서 그에게 말은 소리 자체가 아니라 의식의 이미지들이다: 언어는 구조의 문제이다. 만일 아담이 매기를 통해 본 그 이미지의 본질을 이해하려 한다면, 이런 식의 언어담론에서는 불가능하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녀를 이루고 있는 신체와 색과 어조, 몸짓들과 윤기들, (말의)소리들과 같은 질료의 층위들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를 언어담론의 어떠한 영역으로 정위(正位)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통사론도 의미론도 음운론도 심지어는 음성학도 아니다. 본질적 이미지는 최소한 화용론에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만이 니체의 질문형식에 가장 가까울 것이기 때문이다.

말은 하나의 구조적 체계를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보다 앞서는 더 근본적인 층위로서 질료가 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말을 단순히 분절되어 양적으로 고착된 구조로 파악하는 것은 초보적 단계에서나 가능한 생각이다. 언어는 질료들이 펼쳐지는 과정이라고 이해되어야 한다. 발화된 기호와 분절된 소리가 지시하는 의미체계의 기능으로 언어를 환원해서는 곤란하다. 우리는 마디로 짜여진 소리가 지시하는 기의들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물에 더욱 풍부하게 반응하고 이들을 발산하는 물질, 지시체계를 들락거리고 그 회로의 주위에서 미세하게 흘러 다니는 물질을 통해 소통하는 것이다. 언어의 재료는 통사구조나 기호가 아니다. 제1의 재료들은 기표와 기의를 넘어서는 다른 곳, 바로 질료에 있다: 언어는 질료의 문제이다. 화가에게 색과 선과 면(面)의 덩어리들이 재료이듯이, 음악가에게는 음계나 악보가 아니라 소리이듯이, 발화자의 재료는 분절된 기호들이 아니라 표정이며, 소리이며, 심지어 냄새이다. 언어는 우선적으로 사유와 구조의 문제가 아니라 표현의 문제이며 표현의 층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언어를 최소한 화용론의 영역에 끌어들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볼 때 언어의 의미체계가 양적인 구조를 띠는 것은 사실이다. 작가의 고통은 여기에 기인한다. 무한한 실재들과 내면에 감싸인 무형의 세계를 어떻게 양적으로(그리고 양적인 도구로) 다듬을 것인가? 용기에 담기 위해 그 세계를 깎아야만 하는 고통. 글쓰기는 확실히 사유의 영역과 더욱 밀접한 관계가 있는 듯 하다. 작가는 구조를 통해서만 세계를 창조하게 될 것이다. 글은 말을 못하기 때문이다. 거기엔 표정이 없으며, 색도, 선도, 면도, 소리도 없다.

그러나 작가에게 언어가 재료이고, 그것이 사유의 영역에 더 밀접하다면, 문학작품이 사유의 문제에만 머물러야 할까? 예술작품을 하나의 유기적인 구조이며 견고한 체계라고만 이해해야 할까? 만약에 존재의 본질적 차이가 질적으로만 등장한다면, 문학작품은 사물의 본질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인가? 아담이 포착한 매기의 이미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글 자체가 질료적일 수는 없을까? 그래서 문학작품 자체가 질료의 순간을 드러내도록 하는 특정한 시간의 계기를 가질 수는 없는 것일까? 문학작품으로 하여금 의미체계를 넘어서 질적 차이를 표현하는 질료가 되도록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문체(style)이다. 그러나 이것이 물질 자체라는 의미가 아니라, 질료적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는 의미에서이다. 정신이 질료적인 것과 가장 근접한 순간, 그 두 층위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변형된 순간. 정신이 질료적으로 변형된 것인지, 질료가 정신적으로 변형된 것인지 알 수 없는 그 순간. 문체가 아니라면 문학은 한 번도 이 순간을 맛보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문체를 통해 글 속에서 표정을 읽으며, 소리를 들으며, 심지어는 냄새를 맡는다. 동시에 우리는 어느 것으로도 교환될 수 없는 유일한 존재를 보게 된다. 더 이상 분할 할 수 없는 최종적 양태로서 유일한 존재. 이것이 본질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러한 것들이 바로 문학이 우리를 흥분하게 하는 이유이다. 문체가 아니었다면 문학은 경험의 교본이 되었거나 신체를 길들이는 기구가 되었을 것이다. 억압이란 한마디로 무한한 질료들을 양적 구조에 가두는 과정이며, 또한 같은 말이지만 거기서 나오는 고통이란 즉자적 존재가 중력의 굴레에 붙들리는 아픔이다. 작가에게 글쓰기는 고통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문학(예술)만이 가장 그를 기쁘게 한다. 왜냐하면 그는 문체를 통해서 질적 차이를 실재하는 것들 속에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체에 의해 사물과 존재의 질적 차이가 육화 된다. 언어의 질료적 층위는 바로 스타일을 통해 발생하는 것이다. 문학에서 스타일은 그림에서의 색이며, 발화에서의 표정이며, 소리, 선, 면, 질감의 덩어리라고 말할 수 있다. 본질은 단어들이 배열되는 구조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일단 이것들이 배열되기 시작하면 이들은 서서히 색을 드러내고 부지불식간에 표정을 내 비추며 냄새들을 풍기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들을 발산하는 그 대상에 대해 어느 것으로도 치환할 수 없는 묘한 뉘앙스를 맛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 뉘앙스들로부터 포착한 심오한 이미지들에 대해 기호화된 매체를 가지고 설명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우리는 다만 이와 유사한 본질을 갖거나 동류의 다른 이미지들로 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건 마치 . . . 같아", "이건 저것이야"라고 말하기 시작한다. 매기는 이런 식으로 물고기로 운반되었다. 예술에서 스타일이란 한마디로 메타포이다. 마찬가지로 본질은 은유를 통해 나온다. 사물이 시간 속에서 드러나는 최종적 계시의 양태: 매기(의 본질)는(은) 물고기이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술 어디에도 전체로서 일자(一者)를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은유는 개별적인 하나의 체계가 파편화되고 부스러기들이 되면서 만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매기와 물고기는 각각 조각 나면서 만 결합한다. 이들이 하나의 통계화된 전체로서, 모든 본능들을 흡수하는 자아로서, 하나의 유기적 체계로서 각각 존재한다면, 이 단절된 두 신체가 어떻게 결합할 수 있겠는가? 아담이 매기의 이미지를 통해 이해한 내용은 더 이상 자신의 개념적 연쇄로는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는 시인이나 화가가 되면서 만 이 모든 그림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헨리 제임스에게 그토록 관점의 주제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정한 하나의 관점이 출현하고, 다시 다른 하나의 관점이 도약하고, 그리고 또 다른 관점들이 발생하면서, 또는 이 관점들이 결합하고 공명하면서, 효과들이 발산되면서 세계들이 증식한다. 특정한 하나의 순간. 그리고 하나의 육체에서 다른 하나의 육체로 횡단하는 선분들. 그러나 어떠한 전체도 상정하지 않는 시간. 단일화나 통일을 불허하는 시간. 분할할 수 없는 특권화된 순간. 이것이 바로 관점이다.

이런 이유로 개인들 작가들 독자들 모두는 서로 그 자신으로서, 자아로서 소통하지 않는다. 이들은 서로 차이가 나면서 소통하는데, 이 차이란 아무 것도 대신해주지 않는 고유한 하나의 관점을 의미하며, 또한 이들을 소통하게 해주는 것은 주체가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뿜어내거나 포착하는 특정한 질료의 시간들, 징후들, 그리고 인상들을 통해서이다. 베르그송은 이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을 "도약"이라고 말했으며, 프루스트는 "경련을 일으키는 인상"이라고 불렀다(주6). 여기서 동일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으며, 따라서 표상 된 것 역시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각각 개인들의 육체 속에, 표정 속에, 말들, 심지어 단어들의 배열 속에 담겨져 있지만, 강도 높은 친화력을 가진 그러나 다른 육체에 속한 관점들과 우연한 계기들을 통해 부지불식간에 만난다. 라깡이 개념화했던 부분적 욕망과 부분적 대상간의 관계를 니체식으로 본다면 관점(힘)들 간의 친화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단일한 전체에 의해 강요된 친화성이 아니라는 점이다. 부분적 욕망들은 오로지 부분적 대상들과만 관계할 뿐이다. 마들렌이 꽁부레를 불러들이고, 커피 잔에 온통 발백의 세계가 펼쳐지고, 매기가 물 속에서 놀 듯이 말이다.

 

IV.

생각해보면 문학(작품)에서는 본질을 발견하고 그들을 펼쳐내는 것만큼이나, 이들이 어떻게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가 역시 중요한 문제이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개별적인 작품들을 각각 동일한 그것으로 식별할 수 있겠는가? 부분적인 대상들간에 서로 공명하고 소통하는 테마가 문학작품 전체의 통일성을 설명해준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공명과 소통들은 자기자신의 힘에만 집중할 뿐이지, 자신과 아무 관계도 없는 다른 부분대상들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론 이 테마(부분적 대상들간의 소통)에 의해서만 전체성의 이미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부분적인 것과 전체적인 것의 관계를 검토할 때에 우리는 종종 두려움을 가지는 경향이 있는데, 그 이유는 어느 하나의 층위가 손상되거나 파손될 것이라는 우려에서이다. 확실히 다수적이고 부분적인 것으로서 질료는 단일화된 전체성과의 관계에 의해 환원 불가능한 즉자성을 잃어버리는 듯 보이며, 따라서 형태를 알지 못하는 질료들의 즉자성은 형태를 부여하는 단일한 전체로서 일자를 거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플라톤의 입장에서 볼 때 물질이 포함하고 있는 다수의 질료적 운동은 동일성을 표상하는 형상에 저항하며, 더 나아가 단일한 판단의 준거로서 전체성을 훼손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상대적 가치가 우리에게 주는 공포이다: 어떻게 하나의 사물이 동시에 둘 이상의 시간의 층위에 관여하는가! 어떻게 동일한 존재가 복수적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가! 사물의 크기가 어떻게 동시에 크거나 작을 수 있으며, 아름답고 추함이 어떻게 동시에 가능할 것인가! 한편 이러한 공포는 한 가지 구조적 조건에 의해 생겨나는데, 그것은 두 층위가 서로 대립하고 있다고 간주함으로써 이다. 이것이 바로 관념의 모순적 구조인 셈이다. 관념은 공존의 구조를 곧바로 모순의 구조로 변환시키면서 활동한다. 의식에 있어 변증법의 테마가 부정과 모순의 메커니즘을 통해 발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이를 피하기 위해 에피쿠로스(Epicurus)는 자연학을 윤리학의 토대로 정립하면서, 판단의 규준으로서 모든 감각이 어째서 참인가를 가르쳤던 것이며(에피쿠로스 51∼88.), 니체는 관점의 무수함을 주장했으며, 제임스는 매기와 아담의 분할된 관점을 질료적 언어(서정적 언어)속에 녹아 들게 함으로써 매기의 존재를 잃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프루스트는 식물에게서 배운 한 가지 모델을 통해, 모든 부분적인 것들이 어떻게 횡단하는지를 보여준다(Deleuze, "Proust" 133∼44). 그러나 이들이 그렇게 했던 것은 부분적인 것들을 특화 시키고 전체적인 것을 훼손하여, 그것과 대립적인 위치에 서있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들은 다만 그 공포로부터 벗어나고, 통일성 훼손이라는 죄의식을 없애고자 함이었다.

따라서 개요는 다음과 같다: 부분들을 종합하는 통일성으로서 전체는 다수의 부분들과 대립적이지 않다. 단일한 전체성은 존재한다. 이것은 질료적으로 특화 된 부분적 징후들이 마치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듯 보이는 문학작품을 보아도 금새 알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이 통일성이 없었다면 우리는 제임스의 소설을 프루스트의 그것과 구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차이는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만 특화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차이를 차이이게 하는 원인으로서 전체라는 의미가 아니다. 전체로서 단일자는 차이나는 것들을 손상시키지 않는 한에서만 의미가 있다는 말이다. "다자(多者)들의 통일로서 전체성, 다수성의 통일로서 전체성, 조각들의 통일체로서의 전체성은 존재하며 또 존재해야만 한다. 이때 일자와 전체는 다자와 그 부분들을 주관하는 원리가 아니라, 반대로 이 다자들로부터 생기는 '효과'이다. 일자와 전체는 원리로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효과로서, . . . 작동할 것이다"(Deleuze, 같은 책 163).

여기 하나의 주어가 있으며, 이에 달라붙어 연쇄하는 수많은 술어들이 있다. 복수적으로 따라붙는 이 술어들은 각각이 하나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으며 이 세계들이 하나의 전체를 구성한다. 술어는 각각 자신만의 고유한 고리들을 가지고 세계를 표현할 뿐이다. 우리는 이 각각의 조각 난 세계들을 끌어 모아 하나의 전체를 구성하고 여기에 이름을 부여한다. 의식의 개념적 범주들은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다(칸트의 경우 이 각각의 세계들이 시간과 공간, 그리고 언어의 범주들 안에서 하나의 전체를 구성하고, 나아가 전체의 전체로서, 최종적 단일자로서 신을 정립했듯이). 그러나 이 세계들은 자신들의 외부에 있는 그 단일한 전체의 원리에 의해 표현되지 않는다. 술어의 세계들은 대전제에 정체된 대자적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 본질을 갖는 즉자적 존재이다. 그들은 "조명 속에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들로부터 나오는 빛 속에서 나타난다". 같은 말이지만 주어가 술어들을 주관하지 않는다. 오히려 술어 자체와 술어들간의 효과로서 주어가 나온다. 다만 그것이 말에서 맨 앞에 나오는 이유는 모든 부분들의 원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반대로 맨 나중에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역순으로 자연에 되돌려 주기 위함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문체라고 부르는 것은, 단일한 전체로서, 하나의 기원과 원리로서 개념적으로 미리 정립된 주어를 가지고 술어들을 배분하고 조합하는 문제가 아니라, 반대로 무수하게 산재하는 부스러기들 중에서 (공명하는)어떤 세계들을 끌어 모아 어떻게 순열(permutation)로 배치할 것인가의 문제인 것이다.

Proust가 언급했던 무의식적 기억은 개별화된 존재의 시간 속에서 드러나는 질료적이고 본성적인 차이를 통해 하나의 세계를 다른 세계와 공명하게 한다. 이 세계들간의 공명은 통계적으로 배분되어 일정한 집합을 이루는 분포들이나 전체화된 특정의 개인들(개체들) 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보다 궁극적인, 더 이상 환원할 수 없는 즉자적 차이들이 서로 연결되는 과정에서 드러난다. 이 과정에서 분류체계는 완전히 달라진다. 개체가 감싸고 있는 개별화된 징후들(부분적 대상)은 각각이 특정한 시간을 가지면서, 유일한 차이들을 발산하지만, 동시에 이들은 예술 속에서 은유를 통해 서로 횡단한다. 은유란 징후들의 횡단 그 자체이다. 은유 안에서 부분적 대상들은 서로 일치되지도 전체화되지도 않으면서 서로서로 소통하고 협약하는 것이다. 이들은 충돌하면서 만 연결된다. 이 부분적인 대상들의 불일치와 일치의 메커니즘과 유사한 형태를 띠는 것은 칸트가 발견했던 숭고미와 능력들(이성, 오성, 상상력 들)간의 역설적인 관계일 것이다(주7).

프루스트는 식물의 성(性)을 비유로 자웅동체의 양성애 과정을 이론화했는데, 이 전체과정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성의 횡단(transsexual)"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Deleuze, "Proust" 136). 하나의 개체 안에 공존하는 이질적인 두 성(性)은 각자가 자신의 짝을 찾아 다른 개체들 속으로 파고든다. 이들의 성은 생물학적으로 분류되어 생식의 기능에 따라 구분되는 개체성(남/여)이 아니라 개별화된 징후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하나의 개체(남자 혹은 여자)안에 다수의 성들이 있으며, 이들의 성은 서로 사랑하기 위해 다른 개체 안에 감싸인 다수의 성들과 교차하고 횡단한다. 이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드러내는 몸짓과 표정과 미소들은 남자 안에 숨어버린 여성을, 혹은 여자의 몸 속에 침입한 남성을, 심지어는 이 둘을 하나의 신체 안에서 모두 드러내면서, 서로를 유혹하고 끌어당긴다. 우리가 그것들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서 순간적으로 특별화된 징후들, 개별화된 질료들을 통해서만 접근해야 한다.

그런데 은유가 바로 이 양성애와 닮았다. 하나의 사물 안에서, 서로들 간에는 전혀 소통하지 않던 이질적인 유일한 징후들은, 어떤 특정한 조건들과 시간 속에서, 다른 사물들이 뿜어내는 개별화된 징후들과 공명하는 것이다. 본질은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뛰어든다. 그것은 개인이나 개별자의 본질일 뿐 아니라, 그들과는 구별되는 그러나 그들 안에 이리저리 꽉 들어찬 하나의 혹은 다수의 독립적인 세계와 같다. 개인들 안에 감싸여 있는 본질의 세계(그러나 플라톤의 그것과는 엄연히 구분되는). 그래서 개인으로서 남자와 여자의 사랑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가 감싸고 있는 무한한 질료들 혹은 무수한 세계들의 사랑이라고 해야 옳다. 매 순간 뿜어대는 징후들간의 만남. 이 세계들은 신체의 기관으로서 커다란 눈을 바다가 되게 하며, 뛰는 심장을 대지가 되게 한다. 은유가 이들을 결합하고, 이들은 예술 속에서 서로 횡단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횡단은 서로 다름, 즉 차이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단절된 육체들을 소통하게 한다. 차이나고 단절된 육체들간의 거리를 제거하지 않으면서, 횡단성은 자신만의 독특한 체계를 가지고 서로 다른 두 존재를 결합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체성의 새로운 모델이다. 예술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규약들과 배열과 통계들은 우리가 삶 속에서 지루하게 보았던 그런 규칙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전체성의 이미지로서 동시에 기원의 이미지로서 하나의 이데아가 나오고 나면, 모든 육체들이 강요된 친화력으로 무장해야 하는 과정과는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은유(예술)가 사랑하는 여인의 모습을 바다로 이끌어 물고기를 만들고, 새로운 다른 세계를 불러들였다. 그러나 매기의 존재는 미리 결정된 이데아를 닮기 위해 다치지 않아도 된다. 은유는 본질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포착된 특정한 본질을 표현할 뿐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녀의 몸 주위에 이러저러한 세계들이 하나 둘씩 달라붙어 몸이 불어난다. 그녀의 세계는 물고기뿐 아니라 바다와 산들로 채워지며 세계들이 늘어난다. 이 세계들은 플라톤의 세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세계이다. "예술 덕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단 하나의 세계만을 보지 않고, 세계가 증식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독특한 예술가들의 수만큼이나 많은 세계들을 우리 마음대로 가질 수 있으며, 무한하게 회전하고 있는 세계들보다 더 많은, 각자가 서로 다른 세계들을 가지게 된다"(Deleuze, 같은 책 162; Proust 재인용).

 

V.

우리는 통일성의 새로운 모델을 예술에서 발견하고자 했다. 이는 본질의 결정이 단일한 원리로서 정립되면서, 개별적인 것들을 이 원리 아래 부분으로 포섭하는 전체화의 모델을 지양하기 위함 이었다. 왜냐하면 이 모델은 존재를 부정하고 그것의 본성적 차이를 양적으로 제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질에 관해 다른 방식의 질문이 요구되어, 본질에 관한 새로운 이해로서, 그것을 변화하는 시간과 특수성의 계기들 속으로 끌어내렸다. 존재의 본질은 하나의 원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개별화된 의미와 가치들로 복수화된다. 니체의 경우 이 과정을 힘의 관계들 속에서 설명하고 있으며, 이것이 그가 의미한 바 극화이다.

극화는 문학(예술)적 모델의 다른 말이다. 예술에서 존재들은 질적 차이를 통해서만 현실화하며, 이 때문에 생동하는 즉자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육화 한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예술에서 스타일이라 할 수 있는데, 스타일이란 여기에 없으며 우리의 주관적 사유능력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질적 차이를 현실적인 시간 속에서 경험하게 해준다. 우리는 스타일을 통해, 눈앞에 보이지 않는 대상을 바로 앞에서 만지고, 냄새 맡고, 맛을 보게 된다. 따라서 개념적 연상구조에서는 포착할 수 없는 세계들의 질적 차이를 실질적인 것으로 느낄 수 있게 한다. 이것이 헨리 제임스가 의미하고자 했던 질료의 매개로서 서정적 언어이다. 예술 언어에서 존재는 더 이상 관념의 논리적 연상에 의해 사유되는 이차원적 이미지가 아니다. 그것은 시간의 계기들과 개별화된 운동들 속에서 질적으로 육화 되는 세계들이다.

그런데 예술적 모델에서 존재는 통계적으로 구분되고 분배되는 하나의 전체로서가 아니라 근원적으로 차이나는 부분 대상들로 국소화된다. 또한 이 부분적 대상들은 다른 부분적 대상들과 교차되는 방식으로 공명하는데, 이 공명하는 양상이 문학에서 스타일을 이루는 것이다. 이렇게 개별적인 것들은 하나의 전체 안에서 동일화되거나 부분적 기능을 가지지 않고, 서로 유사한 계기들 속에서 복수화된 관점들로 현현한다. 이때 전체가 구성되는 배열이 달라지는 것이다. 예술에서 통일적 전체는 개별자들의 관계에 따라 체계를 달리한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예술작품의 어느 한 부분만을 떼어내도 전혀 다른 뉘앙스로서 전체를 경험하며 심지어는 완전히 다른 작품을 보게 되는 것이다. 예술적 전체성이란 한마디로 관점들이 무리 짓는 효과로서 등장한다. 이것은 전체화된 하나의 원리(본질)로 존재를 포섭하는 방식과는 반대로, 각각의 관점들 안에서 존재를 표현하는 양식이다. 즉자적 존재는 궁극적인 성질들을 자신 안에서 드러내는 것이다. 예술은 본질을 초월적으로가 아닌 내재적으로 표현한다. 따라서 예술에서 단일한 하나의 전체란 어디에도 없다.

예술에서 부분과 전체의 관계는, 전체의 부분들이 아니라 부분들의 전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전체성은 조합의 메커니즘이 아니라 순열적 배열이다. 우리는 이에 대한 몇 가지 예들을 프루스트와 제임스의 언어들 속에서 살펴보았다. 프루스트에 따르면 예술은 횡단적 통일성이라는  전체화의 새로운 모델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주1) 라깡(J. Lacan)에 따르면 욕망의 흐름은 특정한 형태로 전체화된 대상에 향하지 않는다. 개인은 전체로서 욕망하는 존재가 아니라, 환원할 수 없는 부분적인 욕망들을 포위하고 있는 존재이다. 또한 부분적인 욕망은 부분적인 대상을 취한다. 따라서 어떤 것을 욕망할 때에는 전체로서 대상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시간 속에서 보여지는 특정한 면들에 향해있다. 횡단이란 전체화된 개인들 속의 특정한 면들과 대상의 특정한 면들이 서로 교차되어 연결됨을 의미한다.

 

(주2) 들뢰즈는 베르그송(H. Bergson)과 프루스트 양자의 시간관과 관련하여, 시간의 존재론적인 층위와 심리적인 층위를 구분해서 현재와 과거의 관계들을 논의한다. 이 논의에 따르면, 현재를 중심으로 표상되는 과거는 현재와 질적인 차이를 가지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는 주체의 직관활동을 통해 과거를 재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의 직관이나 지각은 과거의 기억과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과거와 현재가 서로 연쇄적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과거는 존재하지 않으며, 언제나 변하지 않는 현재를 통해서만 표상될 뿐이라는 내용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과거든 미래든 질적인 차이는 없으며, 현재의 주체의 기억은 과거가 되고, 주체의 기대는 미래가 된다. 이 경우 과거는 현재의 의식으로 구성된 이차원적 이미지일 뿐으로 현재의 어느 것으로도 환원 가능하다. 반면에 베르그송과 프루스트는 과거가 현재와는 구별되는 즉자적 존재성을 띤다고 이해한다. 과거는 주체의 현재적 활동의 소산이 아니라, 그 자체 변하지 않는 환원 불가능한 존재론적 시간 속에 있다. 이런 이유로 이들에게 현재와 과거는 사라지거나 현존하는 연속적 관계가 아니라, 각각 동시에 공존하는 시간의 두 차원이라고 말한다. 현재의 경우 활동적인 형식으로, 과거의 경우 활동이 중단되고 보존되는 방식으로. 그래서 주관적 연상의 고리들 속으로 과거(의 존재)를 흡수하는 주체의 현재적 활동으로서, 자발적인 기억이나 의식적인 지각은 존재의 질적 차이를 파악하지 못한다. 반면에 현재의 물질적 경험들(예로, 소리나 맛 색깔 등의 질적 성질의 포착)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과거의 기억(비자발적 기억)은(예를 들어, 그의 작품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은 마들렌 과자의 맛을 통해 최초로 그 맛을 경험했던 과거의 고향 꽁부레를 떠올린다), 주체가 의식의 자발성을 통해 연상한 과거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현재와 불연속하면서 존재론적으로 공존하는 즉자적 존재로서의 과거는 연상의 의식적 고리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비자발적 기억에서처럼 주체의 의식과는 관계없이 부지불식간에 주체의 지각을 자극하고 압도해 버린다. 이렇게 갑자기 침입해오는 존재의 즉자성 앞에서 주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마 "경련(catalepsis)"이외엔 없을 것이다. 시간에 있어 두 차원의 문제와 그와 관련된 프루스트의 비자발적 기억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Deleuze, "Bergsonism" 51∼72, "Proust" 52∼66)를 참조.

 

(주3) 너스바움(M. Nussbaum)은 헨리 제임스의 The Golden Bowl에서 주인공인 매기(Maggie Verver)와 그녀의 아버지 아담(Adam Verver)간의 선택의 딜레마를 욕망과 책임의 두 대립적인 관계로 풀어서 다루면서, 이 부녀의 갈등이 (자발적)희생을 통해 존재를 긍정함으로써 어떻게 서로 상처받지 않고 행복해 질 수 있는가를 이 소설의 한 장면을 제시하면서 전개한다. 이 소설의 주요 모티브는 아담과 그의 딸인 매기의 복잡한 윤리적 관계로 시작된다. 여기서 다루어지는 두 사람의 관계는 아버지와 딸의 제도적 관계를 넘어서는 실존적 인간관계를 의미한다. 처음에 이들은 한 번도 서로(의 관계)에 대해 의심해보지 않았다. 아버지에 대한 딸의 지극한 효성과 딸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 이들은 충만한 부녀관계(제도적 관계) 속에서 언제나 함께 였지만, 제도적 기능을 넘어서는 실존으로서 자신들의 존재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다. 그러나 매기가 남편인 아메리고(Amerigo)에 대한 강렬한 사랑과 아버지에 대한 사랑(효성)이 공존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 후, 그녀는 아버지와의 제도적이고 상상적인 관계 자체를 회의한다. 이제 두 사람은 부녀관계를 넘어서 실존적 관계에 위치한 것이다. 그녀에게 아담의 존재는 무엇인가? 아버지와 딸이 아닌 동등한 인간적 관계에서 이 두 사람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남편에 대한 관능적인 사랑과 아버지에 대한 연민은 어떻게 다르며 또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이러한 고민들 속에서 매기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남편에 대한 관능적 사랑과 아버지에 대한 지고한 사랑을 섬세하고 조심스럽게 고백하게 된다. 그녀는 아버지를 향한 사랑에 대해 "가장 깊은 사랑은 질투를 넘어서며, 모든 것을 초월해 버리므로, 아무 것도 그 사랑을 꺾을 수 없다"(Nussbaum 150; James 재인용)고 말한다. 이때 아담은 딸의 고백을 들으면서 아련히 밀려오는 하나의 이미지를 마음속에 그려본다. 그녀의 자태를 보면서 그는 어느 것으로도 포획할 수 없는 한 마리의 물고기를 연상한다: "찬란한 은빛 바다 속에서 노닐고 있는 자유로운 한 마리의 물고기"(151). 아담은 이 물고기의 비유를 통해 딸이 더 이상 아버지의 보호와 그늘 아래서가 아니라 자기자신에게서 나오는 빛으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실존임을 이해하게 된다. 무엇으로도 교환할 수 없는 그녀 자신만의 존재.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Nussbaum, "Finely Aware" 148∼57)을 참조. 본 논문은 너스바움이 제시한 이 부녀의 장면을 간헐적으로 언급하면서, 너스바움이 전개하고 있는 존재의 긍정의 문제와 환원 불가능한 즉자적 존재성의 논의를 유사한 맥락에서 보여주고 있다.

 

(주4) 너스바움은 또한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인 마르셀과 알베르틴의 이별장면을 통해, (사랑의)인식이 과연 어떠한 조건들(과학적이고 자발적인 지성 혹은 비자발적인 인상들) 속에서 가능해지는가를 논의하고 있다. 이것은 인식 일반에 관한 논의로 확장될 수 있는데, 프루스트에 따르면 본질과 의미에 관한 인식은 과학적이고 자발적인 지성이 아니라, 주체의 의식에서는 예기치 못한 사건과 인상들을 통해 가능해 진다. 마르셀이 알베르틴에 대한 사랑을 깨달은 것은 그녀를 소유하고 있다고 여길 때가 아니라, 반대로 그녀가 이별을 선고함으로써, 마르셀이 그녀를 소유할 수 없는 존재로 깨달은 후이다. 본 논문은 프루스트와 관련된 몇 가지 개념들과 예들이 있으며, 주인공의 이별의 경험을 통해 전개되는 인식의 조건들의 주제 역시 너스바움(프루스트)의 주제와 같은 맥락에서 다루고 있다. 이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Nussbaum 261∼274)를 참조.

 

(주5) 바따이유(G. Bataille)는 헤겔적인 어조로 에로티즘을 정의한다: 그것은 소유하지 못하는 금지된 대상에 대한 강렬한 (위반의)욕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대상은 심지어는 신비롭기까지 하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Bataille, "Share" 51∼8)을 참조.

 

(주6) 들뢰즈는 생명이 분화하는 과정, 즉 새로운 것이 어떻게 발생하는가를 말하기 위해 이와 유사한 이미지를 끌어들인다. 그에 따르면 새로운 것은 필연적 연쇄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연적이고 선택적인 과정 속에서 생긴다. 이 선택의 순간에 망설임이 등장하는데, 이 망설임이 바로 경련의 순간이다. "Biologists, for example, teach us that the development of the body proceeds by fits and starts: a butt of a limb is determined to be a paw before it is determined to be the right paw, etc. It is possible to say that the animal body "hesitates," and that it proceeds by way of dilemmas. Similarly, reasoning proceeds by fits and starts, hesitates and bifurcates at each level."(Deleuze, "Logic" 280) 강조는 필자가 했음.

 

(주7)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숭고미를 개념화하는 가운데, 숭고 체험은 능력들간의 일치된 조화가 파편화되면서 만 가능해진다는 점을 논의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형태를 가늠할 수 없는 무형적이고 기형적인 대상에 직면했을 때, 상상력은 이성이 명령한 이념의 실현, 즉 전체성의 현시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자신의 극한에까지 능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포착과 총괄이라는 자신의 능력들로는 이 대상을 전체화할 수 없음에 대해, 자신의 한계를 이성에게 되돌리면서, 이념의 전체성을 직접 체험하게 된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능력이 하나의 이념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것임을 인정하게 만드는 것이 이성임을 깨닫게 된다." 이때에 숭고미를 체험하게 되는데, 이는 상상력이 전체성의 거대함이나 이념의 막대함을 체험(칸트는 이를 경외심이나 존경과 같은 소극적 방법이라 함)하는 과정에서 나온다. 즉 숭고미는 상상력과 이성이 서로 갈등하면서 체험되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 과정을 능력들이 불일치하면서 일치되는 체험이라고 설명하면서, 『판단력 비판』을 칸트의 작품들 중 가장 훌륭한 저작이라고 언급한다. 숭고미와 능력들의 불일치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Deleuze, "Kant" 50∼52)를 참조.

 

 

참고 문헌

Bataille, Georges. "The History of Eroticism", The Accursed Share: An Essay on General Economy. 2 vols. New York: Zone Books, 1993.

Deleuze, Gilles. Bergsonism. Tr. Hugh Tomlinson and Barbara Habberjam. New York: Zone Books, 1997.

-----. Kant's Critical Philosophy. Tr. Hugh Tomlinson and Barbara Habberijam. London: The Athlone Press, 1995.

-----. The Logic of Sense. Tr. Mark Lester. New York: Columbia UP, 1990.

-----. Nietzsche and Philosophy. Tr. Hugh Tomlinson. London: The Athlone Press, 1983.

-----. Proust & Signs. Tr. Richard Howard. Minneapolis: U of Minnesota P, 2000.

Fink, Bruce. The Lacanian Subject. Princeton: New Jersey, 1995.

Nussbaum, Martha C. Love's Knowledge: Essay on Philosophy and Literature. Oxford: Oxford UP, 1990.

에피쿠로스. 「헤로도투스에게 보내는 편지」.『쾌락』. 오유석 역. 서울: 문학과지성사, 1998.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