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nctum'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07/07/28 존재의 시간, 푼크툼 (11)
  2. 2007/05/30 징후와 고통 그리고 진실
  3. 2006/10/05 푼크툼(Punctum) (4)
  4. 2006/07/17 브록백 마운틴 (6)

예전에 나는 바르뜨(Roland Barthes)가 쓴 사진에 관한 몇 가지 단상을 읽은 적이 있다. 거기서 나는 사진과 관련한 전문적인 지식을 별로 알아내지 못했으므로 곧 그 책을 기억에서 지워 버렸다. 그러나 한참 지난 후에 문득 이런 질문이 생겨났다: 사진에 관한 글을 쓰면서 그는 왜 사진의 이러저러한 지식에 대해 말하지 않았을까? 아는 것이 없어서?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어서? 그랬다면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 책을 통해 사진을 하나의 방법으로 접근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은 대체로 이미지에 의해 사물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사진을 방법으로 보는 것. 이는 결국 사진 뿐 아니라 사물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이며 동시에 그로부터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책 전체를 다시 훑어보면서 사실은 특정한 주제에 향해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바르뜨 역시 이 주제를 가장 흥미롭게 혹은 가장 중요하게 언급하고 싶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주제는 의외로 단순한 구분에서부터 출발하는데, 그것은 사진이 발생시키는(혹은 우리가 발견하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감정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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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찾아 나서는 자는 철학자보다는 오히려 "애인의 거짓말 때문에 고통 받는 질투에 빠진 남자", "찾기를 강요하고 우리에게서 평화를 빼앗아가는 어떤 징후의 폭력"에 맞닥뜨린 사람이라고 Deleuze(혹은 Proust)는 말했다. 지적이고 분별이 있는 사람은 언제나 명확하고 객관적인 의미를 제시한다. 또한 자연으로부터 윤곽선이 뚜렷한 형태들을 자신의 지식으로 취한다. 그들은 쓰여진 책을 통해 진실을 찾아나서길 좋아하는 모범생이다. 하지만 지식이 만들어지는 것은 그러한 길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와 같은 지성이 만들어 낸 진리 말고도, 우리는 다른 풍요로운 방식으로, 즉 사물의 징후로부터 출발하여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 지적이거나 위대한 사람보다는, 평범하거나 결점이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은 징후를 가지고 있고, 그것이 그의 존재를 더욱 풍요롭게 해준다. 그것은 예술가들을 풍족하게 해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성의 노동과 임무를 가지고 세계에 뛰어들어 노력하는 학자들보다는,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며 인생을 보내는 사람들, 직업도 없이, 그렇다고 예술을 할 만큼 능력도 없는 실망스러운 인간”들이 더욱 더 징후에 있어 풍요로운 진실에 도달할 수가 있다. 가령,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이란 바로 허송세월을 보낸 시간을 의미한다. 그러나 쓸모없이 보내버린 시간, 즉 훌륭한 사람을 만나 진지한 대화를 하거나 지적인 모임에 나가 무엇인가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교계에 드나들며 사람들과 노닥거리고, 여인들과 사랑에 빠지고, 감각적 경험에 사로잡혀 봄으로써, 오히려 우리는 사람들과 풍경과 이 세계에 대한 진실을 배울 수가 있다. 우리는 완전한 이상적 대상에서 보다는, 불완전한 인간들과 비틀린 물질적 감각에 쉽게 매료된다. 또 결함 없는 위대한 한 인물 보다는 평범한 여인을 통해 인간과 세계의 근원적 진실에 도달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 사유의 지적인 활동이 강렬하게 활동하여, 대상들로부터 본질을 발견하고, 세계의 진실에 도달하게끔 하는 것은, 그 비틀린 경험과 비균형적 경험 속에서 규정하기 어려운 징후들의 난입을 직면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재와 그 징후가 우리에게 직접 던져주는 것으로, 우리가 직접 풀어내고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이다. 그것은 친구들이 모여 합의한 해답과는 판이하게 다른 해답을 도출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어떤 여인과 사랑에 빠지고, 그 여인에게서 어떤 진실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녀와 매끈한 소통을 하거나, 합의된 대화에 이르렀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 의미가 무엇인지, 그 진실이 어디에 감추어져 있는지 알지 못한 채, 그녀가 발산하는 낯선 징후들을 해석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잃어가며, 시간을 낭비해가며 알몸으로 달려드는 직관능력 덕분일 것이다. 선생님이 제시한 문제들 속에서는 그 무엇도 배울 수가 없다. 그렇게 의무와 노동에 사로잡힌 배움을 통해 얻은 진실은 “필연성이 결여”되어 있다. 억압적이고 부정적인 반성적 노동이 만들어낸 진실은 추상적이고 인위적일 뿐이다. 그 진실은 그것을 배우는 나 자신과는 무관한 진실이며, 따라서 이렇게 말해도 저렇게 말해도 되었을 법한 임의적 진실에 불과하다.

진실이란 정다운 대화 속에서가 아니라 참을 수 없는 폭력 속에서 피어난다. 우리는 고통을 겪음으로써만, 통증이나 갈증이나 제지된 욕구를 통해서만, 그 추동적 힘에 직면해서만 비로소 의미와 진실을 찾으려 한다. 진리를 사랑한답시고 고통도 없이 달려드는 얼뜨기 속물 학자로부터는 그 무엇도 배울 것이 없다. 그 보다는 오히려 애인의 얼굴에서 거짓말의 징후를 간파하고 질투에 빠진 남자가 참된 것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그 속물 학자로서는 결코 자신에게 가해오는 인상들에 아프지도 않고, 그것을 해석해야할 어떠한 필연적 운명적 책임도 느끼지 못하는 반면, 질투에 빠진 남자는 인상과 징후들의 폭력에 맞서 그 누구보다도 민감해지기 때문이다. 질투의 고통만이 애인의 거짓말과 사랑의 진실을 찾는다. 진실이란 사회 속에서가 아니라 근원적인 것에 대한 질문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회의 지배계급은 그 사회의 진실에 접근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떤 놀라운 경험 때문에 우리의 기억이 작동하듯이, 고통은 지성으로 하여금 진리와 의미를 찾도록 강요한다. 필연적 진실이 태어나려면, 우선 실재가 뿜어내는 징후의 폭력에 직면해야만 한다. 지성은 실재의 징후들로부터 어떤 강요를 받아야만 하고, 이것인가 저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빼앗긴 채, 모든 도구와 무기와 갑옷을 벗은 맨 몸으로 실재를 대면해야만 한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지성은 등장하게 될 것이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낌으로써만, 그 징후들의 의미와 본질을 찾아내고 진실의 근처로 다가갈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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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뜨(Roland Barthes)는 사진에 관한 한 에세이(Camera Lucida: Reflections on Photography. Eng Trans by Richard Howard. New York, Hill and Wang, 1981)에서, 우리는 어떻게 사랑에 빠지는가를 “푼크툼(punctum)"이라는 용어로 설명하고 있다. 처음에 나는 이 생소한 단어를 이해하기 위해 이 단어에 속하는 몇 가지 술어들을 찾아내었다. 사전적 정의로부터(점(點), 순간, 날카로운 것, 자극하거나 찌르는 것, . . .), 그것이 환기하는 의미까지(욕망의 부분대상, 물신주의적 환유, 프루스트적 의미에서 비자발적 추억을 불러들이는 징후, 사물들이 종합되는 순간 그어진 사선, 특정한 감정을 촉발하는 파문, . . .). 나는 이렇게 많은 술어와 의미들을 열거하고 난 후에 이들을 종합하여 다음과 같은 잠정적인 결론을 도출해 내었다: 아마도 주체가 예술작품이나 인물과 같은 특정한 대상을 만나게 될 때 우연히 그를 자극하는 이미지. 또한 그것은 대상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긴 하지만, 그래서 우연적이긴 하지만, 그가 발견한 이미지. 이제 나는 경험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자주 뇌리에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하나씩 되새겨보면서, 그것들이 푼크툼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이미지들은 곧 사라져 버리기가 십상이었고, 더구나 억지로 떠올린 이미지들로 가득 차 버려서 나를 기쁘게 하지도 못했다. 또 이미지들은 다른 의미들을 불러오지도 않고, 텅 빈 그림들만 내게 현시 될 뿐이었다. 결국 나는 푼크툼이 무엇인지 경험해보지 못했고, 몇몇의 그럴 듯한 술어들만 암기하고 있을 뿐이었다.

친구를 만날 때면 가끔 드나드는 식당이 있다. 그곳은 서구적인 분위기를 내기 위해 실내를 한껏 장식했고, 벽과 천장에는 커다란 서구인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테이블들 사이에 놓인 칸막이 난간에는 빈양주병들이 놓여있었다. 웨이터와 웨이트레스가 분주하게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앉아있는 손님들로부터 새어나오는 수다스런 소리. 어둠침침한 조명들 사이사이를 휘감고 오르내리는 담배연기. 출처를 알 수 없는 멜로디. 주방과 테이블에서 풍겨 나오는 음식 냄새. 이 냄새는 서로 엉키고 섞여서 각각을 구별할 수 없이 그냥 시큼하고 불쾌한 냄새가 되어 버렸다.

웨이터와 웨이트레스들은 검은색 조끼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목과 가슴부분, 그리고 팔은 흰색 와이셔츠가 드러나 있었다. 흰색과 검은색이 실내의 조명과 잘 어울렸다. 대비가 강한 두 색은 산뜻해 보였지만, 아마도 눈을 자극하기 위해 고안된 지배인의 시각적 조작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걸친 옷에만 조작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모두가 비슷한 톤으로 손님들과 사무적 대화를 나누었다. 제각각 다른 얼굴 모양새였음에도, 신분과 역할을 의미하는 동일한 미소가 한결같이 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친절하고 정중하게 손님들을 대했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미소와 말투는 나를 불쾌하게, 아니 불안하게 만들었다. 나의 불쾌감은 따지고 보면 신경증적 불안에서 온 것이다. 그러나 그들 뿐 아니라 나 역시 이러한 대면이 반복되면서 무감각해 질 것이다. 아무런 기대도 호기심도 없는 무감각.

특히 나를 불쾌하게 했던 것은 그 식당의 지배인쯤으로 보이는 사람의 태도였다. 손님이 오면 테이블로 안내하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뒤, 손님을 보면서 미리 마련된 미소를 내보인다. 언제나처럼 메뉴를 건넨 후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갔다가, 적당한 시간이 흐른 후 다시 옷매무새와 표정을 점검하고 나서 주문을 받으러 온다. 레스토랑이니 카페니 하는 곳은 항상 이런 식이다. 이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서로가 공통하지 않은 목적들을 가지고 각자만의 방을 가지기 위해 이곳에 모인다. 누가 이곳을 사교모임의 장소라 했을까? 현대 사회는 이곳을 특이한 시장으로 만들었는데, 여기서는 환상이 거래되고 있다. 이곳이 사교모임의 장소라는 말은 틀린 말이지만 또한 동시에 옳은 말이다. 어쨌든 그 지배인은 언제든지 이곳이 시장임을 상기시킨다. 그에 대한 나의 불쾌감은 아마도 거기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가 몇 살 정도인지를 가늠해 보려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젊은 나이임에는 틀림없지만, 20대인지, 30대인지, 혹은 40대인지 조차 구분이 되질 않았다. 아마도 그가 취하는 제스처나 의복 등이 나이를 말해주는 어떠한 기호도 가지고 있지 않은 탓이었을 것이다. 동일하게 프로그램화된 그의 말투 역시 그를 어떤 사람인지 모호하게 만드는 요소이다. 통일감을 자아내기 위해 고안된 유니폼 제도는 개인이 모호해지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그 완성을 이루었다.

이렇게 모호한 이 식당은 내게 불쾌감을 주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지루했기 때문에, 내 관심으로부터 벗어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나의 불쾌감은 금세 사라질 수 있었으며, 나는 더 이상 이 실내의 분위기와 사람들로부터 시선을 떼기 시작했다. 이곳은 더 이상 나의 흥밋거리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변화 없이 단단한 것들, 동일한 반복이 계속되는 것들은 언제나 지루함과 태만을 낳는다. 내가 이 고급 식당에서 보고 있는 시각적 조작이나 사무적 몸짓 그리고 모호함 등을 그럭저럭 긴 시간 동안 견딜 수 있었던 까닭은, 아마도 그 모호함이 더 이상 나의 시선을 붙들지 못했기 때문이며, 그래서 나 역시 그들로부터 무감각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시스템이나 권력이 그렇게 오랫동안 존속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가 아닐까? 그것은 저 먼 곳에서 신비한 광채를 띤 채 공포나 불안에 호소하기보다는, 아무런 미동도 들키지 않을 만큼 아주 가까이에서 지루함과 태만에 기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또한 사교계의 본질이기도 하다. 유한부인들의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면, 왜 그렇게 하품이 나오는지.

어쨌든 나는 이 식당에서 특별히 긴장하거나 호기심을 가지지 않은 채, 편안한 마음으로 친구와 함께 여느 때처럼 담소를 나눌 수가 있었다. 내 시선은 마주 앉은 친구의 모습과 실내 사람들의 움직임, 그리고 이리저리 바쁘게 걸어 다니는 종업원들을 번갈아 가며 훑어 내리고 있었다. 웨이터들은 경직된 표정으로 지배인의 눈치를 보면서, 그의 시선에 오랫동안 남아있지 않기 위해 괜히 이곳저곳을 움직인다. 그 지배인은 나이가 많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휘하에 있는 종업원들에게 위엄을 보이기 위하여, 어른스러운 몸짓과 어투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러다가도 그는 자신의 앞에 다가온 종업원에게 넌지시 친근한 어투로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노력이 관계를 더 나은 쪽으로 이끌지는 못할 것이다. 지배인은 이를 아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며, 심지어는 더 나은 관계를 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는 다만 종업원들이 자신의 직분에 더 충실할 것을 요구했던 것  뿐이며, 그 직분에는 지배인에 대한 성심(존경은 아닐지라도)과 경애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이것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은 서로 단순한 계약관계에 놓여있었지만, 그 계약의 심층에는 훨씬 더 한 것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농담은 음흉한 것이었고, 이를 눈치라도 챈 듯 종업원들은 모두 그 농담에 거리를 두곤 했다.

종업원들 중에는 근사한 모습을 한 웨이트레스가 있었다. 중간쯤 되어 보이는 키이지만, 날씬한 다리와 잘록 들어간 허리. 특히나 유니폼이 그녀의 가냘픈 몸매를 한껏 드러내어 주고 있었다. 유니폼이란 항상 저런 미인들을 위해 마련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니폼이 우리를 참담하게 만드는 이유이다. 이리저리 분주하게 손님들을 접대하는 그녀의 모습은, 종업원이기보다는, 젊은 귀부인이 자신의 친구들을 초대해 만찬이라도 베풀고 있는 듯 우아해 보였다. 하얀 유니폼의 소매보다도 더 맑아 보이는 손등. 접시를 내리고 올리는 팔이 드러내는 포물선의 자취. 경박하게 보이지 않기 위해 살짝 안쪽으로 당겨 접은 턱. 아래로 떨군 눈매에 길게 드러난 검고 고운 속눈썹. 그녀는 이 모든 동작과 표정들을 어떻게 연출해야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는 듯 했으며, 타인들의 시선과 갈채를 스스로 품은 채, 자신의 연출에 도취되어 나르시스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 듯 했다. 그녀의 시선이 언제나 아래로 향해있는 것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그 눈동자는 늘 자기 자신으로 향해 있었다.

한참이나 후에 깨달은 것이지만, 지배인은 그 웨이트레스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 같다. 누가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듯이, 그는 아마도 그녀가 연출하거나 그녀 자신도 모르게 발산한 수많은 질적 이미지들에 매료되어 취해버렸을 것이다. 우선 그의 시선에 그녀가 들어올 때면 표정이 달라진다. 그녀가 다가와 그에게 사무적인 질문이나 의견을 말할라치면, 그는 시간을 지연시키기 위해 불필요한 다른 질문들을 도리어 던지기 시작한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해도 그녀와 관계있는 모든 것들에 긴장하고 민감해지기 시작한다는 것을 금세 알아볼 수가 있었다. 그때의 그 태도와 몸짓은 더 이상 지배인의 것이 아니었다. 때로는 그녀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때로는 그녀의 동정심에 호소하기 위해, 또 때로는 자신이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지위를 이용해, 그는 끊임없이 그녀 주위에서 배회하며 이리저리 자리를 바꾸어 가면서 어지러운 선분들을 허공에 그어대고 있었다. 그러나 지위와 권력이 보증했던, 그래서 단단하고 강하게만 보였던 그의 위엄은 너무나 왜소하고 보잘것없는 것이 되어버렸으며, 자신의 달콤한 타락을 깨닫지 못한 채, 공포와 태만 위에 군림한 힘이 아니라 기쁨을 주관하는 더 위대한 힘에 굴복해야만 했다.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뒤바뀌어 있었다.

그는 지금 그녀를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특별한 미소를 보내고 있다. 그 미소는 직분을 수행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냉정히 가다듬으며, 최소한 당신과 나 사이에 별 일이 없기를 바라는, 그러한 두려움을 품은 미소가 아니었다. 그녀가 그 푼크툼을 발견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 미소는 어쩌면 나에게만 들켜버린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순진하고 앳된 미소. 최초로 그 특별한 미소를 내가 보았을 때, 나는 그것이 푼크툼임을 단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 쑥스러움을 가리기 위해 그녀에게 살짝 곁눈질을 하며 흰 치아를 드러냈지만, 그 표정은 나에게 그의 모든 본질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혼자 있을 때, 친구들과 어울릴 때, 어렸을 적에 등등, . . . 자라온 일생만큼이나 긴 시간동안 그와 함께 있었을 그 표정을 다 읽어낼 수가 있었다. 그러고 나니 그의 속살들이 마치 물속에서 색종이가 퍼지듯이 하나 둘씩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는 아주 오래 전부터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청년이었을 것이다. 나이는 20대 후반쯤. 확실히 그는 앞에 다소곳이 서 있는 저 웨이트레스를 사랑하고 있다. 특히 그의 손목에 찬 시계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따분한 복장규칙이 적용되지 않고 자유가 허용된 몇 안 되는 신체의 자투리 구역에, 그는 환심을 살만한 온갖 전리품을 달아놓고 싶었을 것이다. 젊은 학생들이 즐겨 찾는 스포츠용 방수시계. 점잖은 양복 유니폼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목에 걸린 핸드폰. 그녀에게 젊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어쨌든 나는 그의 촌스러운 취향을 알아버리고 말았다.

아마도 오랜 시간동안 그와 함께 지낸다면 이러한 푼크툼을 더 많이 발견하게 될 것이다. 푼크툼은 순식간에 뚜렷이 돌출하기도 하겠지만, 아무도 모르게 아주 천천히 주체의 기억과 감각 속으로 스며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떠나가 버린 사람을 사랑했음을 깨닫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그 지배인은 내게 들켰던 것들 보다 더 강도 높은 푼크툼을 그녀에게서 보았으며, 그의 사랑은 아마도 이렇게 시작되었을 것이다. 내가 그를 더 이상 (어디든 널려있는 혹은 누구여도 상관없는)지배인으로서가 아니라 유일한 그 사람으로 볼 수 있게 되었듯이, 푼크툼은 섬세한 눈을 필요로 할 뿐만 아니라, 한 사람으로 하여금 섬세한 눈을 가지게 한다. 그가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이 남다르듯이. 사랑이란 일종의 특이화(specialization)인데, 사랑과 관계하는 모든 용어들은 바로 저 의미를 향해 있다(그러나 부르주아 사회는 이 사랑을 경쟁과 독점적 소유의 문제로 해석해 버림으로써, 우리 자신을 비참한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물론 푼크툼의 발견은 기쁨이나 사랑에만 관련된 것은 아니다. 그를 통해 야비함이나 포악함 혹은 역겨움 등을 볼 수도 있다. 또한 사랑의 대상을 전혀 엉뚱한 존재로 치환해 버리기도 한다. 바르뜨는 앤디 워홀(Andy Warhole)이 자신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 있는 사진(Duan Michael 1958)을 보면서 워홀의 손가락에 혐오감과 역겨움을 느꼈다(Barthes. Camera Lucida, 45). 손톱을 짧게 깎아 손끝의 살이 마치 손톱을 감싼 것처럼 둥글고 연하게 보이는 손. 그는 이 손가락과 관련된 앤디 워홀의 어떤 비밀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 손가락을 닮은 다른 사람에 대한 혐오스러운 기억이 떠올려진 것일까? 현실은 우리에게 항상 좋은 것만 보게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들을 더 많이 보게 한다. 그것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기도 하고 슬픔을 주기도 한다. 어떠한 대상을 완전히 파악하고 그것을 지배하여, 그 대상의 조야한 본질을 파악하게 되면, 우리는 거기에서 역겨움이라는 새디즘적 고뇌에 빠지기도 한다. 내 본성과 잘 어울리지 않는 다른 본성에 대한 일종의 알레르기나 메스꺼움이라고 할까?

어찌 되었든 이런 경우에도 푼크툼은 존재를 살아있는 것으로 만든다. 보다 정확히 말해 그것은 집단적 환영이 만들어낸 우리의 망상이나 믿음을 변질시킨다. 그래서 나의 망상에서 비롯된 사랑하는 사람의 순수한 이미지조차 변질되어 생생한 실제의 장소에 위치하게 된다. 존재는 두 번 변질되어 불순한 이미지로 뒤바뀌는 것이다. 푼크툼은 존재를 이중으로 변질시키면서, 심지어 사랑조차도 타락의 세계로 끌어내린다. 혐오감을 없애기 위해 짙게 화장한 시체의 코에 살짝 내려앉은 검은 반점(Roland Barthes. A Lover's Discourse: Fragments. Eng Trans by Richard Howard. New York: Hill and Wang, 1999. p. 25). 부패의 징후. 사랑으로 채색되었던 나의 신념과 최면은 이 점 하나로 인해 송두리째 전복되기 시작한다. 사랑의 대상은 평범한 존재가 되어 실제의 세계에 놓이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푼크툼은 사랑을 지나 연민으로 가는 통로인 것 같다.

<문예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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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Lee Ang) 감독의 영화 <브록백 마운틴(Brokeback Mountain)>의 관객들이 주목해서 보아야 할 것은, 대중매체가 선전하는 대자연의 아름다운 풍경이나 동성연애가 아니다. 아름다운 풍경이란 가끔 피로를 풀기 위해 여행하는 사람이 잠깐 기지개를 펴면서 느끼는 세속적 포만감일 뿐이다. 대자연에 대한 이런 식의 이해는 도시인의 무성의한 냉소주의를 반영한다. 그것은 안락한 차 안에서 달콤한 음악을 들으며 시골길을 달리다가, 갑자기 어떤 생각에서인지 창문을 내리고 멈춰 서서, 초가을의 황금물결을 바라다보며 뿌듯해하는 류의 자연관에 불과하다. 우리와는 무관한 것으로서의 자연,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해 우리의 환타지로 유출된 자연. 우리가 이 영화에서 그러한 것만을 보며 만족한다면, 그저 그런 상투적인 속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여행자의 앵글로는 자연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직접 들어가서 봐야만, 즉 잠을 자고, 밥을 짓고, 시간을 때우는, 거기서 실제로 살고 있는 자로서, 자연과 직접 대면하는 그런 상황 속에서 느껴지는 자연을 볼 줄 알아야 한다. 풍경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장소와 현장으로서의 자연을 투시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사실, 미 대륙의 자연환경이란 우리가 생각하듯 그렇게 아름다운 것만이 아니다. 거기에는 유럽이나 아시아와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른 종류의 자연사가 있다).

역설적이게도, 자연 속에 직접 뛰어든 사람에게 있어 가장 큰 관건은 그곳으로부터 빠져 나오는 일이다. 마치 풋내기 마라톤 선수가 출발선 앞에서 의기양양하게 거울을 보며 폼을 잡다가, 출발선으로 뛰어든 후에 맞닥뜨린 현실이랄까? 헤어나지 못해 허우적 거리다가 주저앉기 십상인. 이것이 바로 저편에서 흐믓해 하던 여행자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입장의 미국인 청년들 잭(Jack Twist)과 에니스(Ennis Delma)의 대자연이었다. 이 영화는 미국인들이 거대한 대륙의 평원에 뛰어들어 살아가면서, 여행자처럼 그냥 고개를 숙이고 되돌아갈 수는 없는, 그 암흑으로부터 빠져 나오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 영화이다. 그리고 이것은 실제로 미국의 성스러운(?) 개척사의 그늘에서 눈에 띄지 않던 현장인들이 느꼈던 대자연과의 미국적 대면, 즉 낭만주의와 이상주의와 그들 특유의 낙천주의와 공존했던 미국적 프론티어라인의 실상이었던 것이다. 대자연이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빠져 나오고 싶은, 역겹고 무자비한 것이다. 양떼들을 먹어 치우는 코요테, 무서운 곰, 이들을 몰아내기 위한 카우보이의 총질, 거친 벌판이나 산속에서의 야영, 그 고독과 밤의 광란, 야밤의 추위나 갑작스러운 폭풍, . . . 이러한 드라마와도 같은 모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대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가혹함이란 무엇보다도 드라마의 부재, 드라마가 불가능한 바로 그 일상적 진부함에 있다. 황량한 대륙의 바람. 정지한 듯 보이는 거대한 뭉게구름. 방문을 닫아버린 디킨슨(Emily Dickenson)이 창가의 일상에서 느꼈을 뜨겁지만 싸늘한 한낮의 햇볕. 꿈쩍도 하지 않고 언제나 저기에 버티고 있는 저 거대한 브록백. 우람한 전나무들의 반복. 그 안에서의 목동들과 양떼들의 반복. 태엽시계의 바늘이나 대수방정식과도 같은 대자연의 일상. 간간히 반복되는 기타의 늘어지는 선율. . . . "하루에 네 시간 이상을 이 짓이군! 아침 먹으러 내려왔다, 다시 양 보러 올라가고, 저녁 먹으러 내려왔다, 또 양 보러 올라가고, 밤잠 설치며 코요테나 감시하고. . . 먹고, 지키고, 자고, 먹고, 지키고, 자고 . . . Shit!" 오즈 야스지로(Ozu Yasjiro, 小津安二郞)나 홍상수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기계적이고도 진부한 일상들이 비좁은 도시에서가 아니라, 막대한 대자연 한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공간과 시간 전체를 무지막지한 법칙의 흐름 속으로 흡수해 버리는, 중력과도 같은 지긋지긋하고도 끔찍한 힘! 그 힘에 붙들려 잭과 에니스는 온전한 의미에서 정주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는 하루 하루를 무의미하게 살아간다. 도무지 그들이 산에서 언제 내려올 수 있을지 가늠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리고 이것이 브록백에서의 미국 카우보이의 실상이었고, 두 젊은 낭만주의적 이탈기계로 하여금, 그들 안에 내재해 있는 힘과 동요를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이었다. 대자연이란 견딜 수 없게 하는 그 무엇이다. 갑자기 눈이 내리고, 우박이 떨어지고, 온 몸을 얼어붙게 하는, 가혹한 자연의 섭리들. 모비딕(Moby dick)의  그 써늘한 회백의 색채처럼, 인간적 감동과는 무관한, 미동조차 하지 않는, 무심하고, 비개인적인 자연. 이것이 바로 멜빌(Herman Melville)을 한참이나 지나 20세기가 되어서야 깨닫고 괴로워 했던 미국인들의 자연주의이다.

그와 같은 진부한 삶은 대자연의 침묵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제2의 자연은 그것과 너무나 흡사해서, 아니 그것을 넘어서서,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한번 과묵하게 한다. 스티븐 소더버그(Steven Soderbergh)는 <Bubble>에서 가구점의 카탈로그 만큼이나 지루하고 진부한 미국인의 일상을, 몇 가지의 놀라운 카탈로그 쇼트들의 모음으로 보여주었다(그 영화에서의 살인은 첫 장면에서 해가 뜬 새벽의 찬 공기를 마시는 순간부터 이미 준비되고 있었다: 파헤쳐지는 공동묘지,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뜬 채 뭔가 생각에 사로잡힌 Martha, 강렬하지만 단조로운 기타의 스트로크. . .). 물건들뿐만 아니라 우정, 데이트, 사랑, 자애, 신의(信義), 종교, . . . 그 모든 것들은 집안과 인생에 비치해 두어야 할 빠트려서는 안 될 어떤 품목들이고, 그들은 그 품목들의 소유를 통해 공동체에 참여한다. 한마디로 말해 인생은 실제로 카탈로그의 산물이고, 카탈로그의 집결체이며, 카탈로그는 상품 사회 미국의 삶 그 자체이다. 그것은 19세기의 휘트먼(Walt Whitman)이 시에서 구가했던 카탈로그 집합체와는 그 본질에 있어 전혀 다른 것이었다.

전형적인 미국식 인지방식의 하나인 카탈로그는 <브록백 마운틴>에서도 확인할 수가 있다. 몇 가지만 나열해 보자.

컨트리 음악 / 청바지 / 카우보이 모자 / 집단 댄스 파티 / 술집에 걸린 커다란 성조기(일찍이 미국의 실내에서 성조기 만큼 자연풍경의 역할을 한 사물도 없을 것이다) / 남자와 여자 그리고 그들의 만남과 카-섹스(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것은, 남자들끼리의 관계가 암묵적으로 과도하게 금기시 되고 있어서인지, 남녀 관계만큼 따분한 것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 보기에도 낯설어 보이는 노동 / 결혼 / 세상에서 가장 따분한 침실(미국 영화 대부분이 그렇지만, 게슴츠레한 눈으로 집세걱정을 하며, 입 냄새가 진동할 것 같은 숨을 헐떡거리며 서로를 만지는 에니스와 그 부인의 애로장면은, 정말이지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오고 싶을 정도로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 인형 같은 아이들(그 최악의 의미에서. 한편, 소더버그는 <Bubble>에서 진짜로 인형 공장을 등장시켜, 마치 그 인형들이 마지막 크레딧에서 처럼 일그러진 모습에서 점차 어른들의 꿈의 투사로 변형되어 가는 것처럼 다룬다) / 주말마다 등장하는 교회(미국에서의 교회란 사교를 넘어 하나의 일터이다. 한편, <Bubble>에서는 교회에 앉아 무엇인가에 도취된 몽환적 상태에 빠져 있는 미국인 Martha의 소름 끼치는 얼굴이 클로즈업 된다) / 그리고 이 모든 끔찍한 미국의 악몽을 종합하는, 말하자면 사람들로 하여금 설교(말씀)를 들을 때와 동일한 표정과 포즈를 취하게 하는, 가장 위대한 신 즉 자연 즉 텔레비전!

이들의 삶은 파큘라(Alan Pakula) 감독의 <암살자(Parallax View)>에서 기자가 요원 테스트를 받을 때, 반사회적인지 아닌지, 정신질환적인지 아닌지 등을 파악하기 위해 제시되었던 바로 그 카탈로그 사진들 속에 있는 삶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그것은 미국식의 세속적 도덕주의의 건전함 속에 깃든 어떤 우울한 색채였고, 첫 눈에 주목할만한 트레일러 지배인의 그 청교도적이고도, 고압적이고도, 고지식한 눈매에서 읽을 수 있는 분위기였다(백인 남자들은 대체로 과묵하다. 단순해 보이기도 하고, 우직해 보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도덕적이고 둔해 보인다. 그들의 손가락의 움직임을 살펴보면 알게 된다. 그들은 감성보다는 의무에 더 쉽게 반응하기 때문에, 그들과 쾌활한 대화를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들과 좀 길게 대화를 하려면, 그것이 어떤 것이든 사회적 의무에 충실해야 하고, 그럼으로써 모종의 자격 같은 것을 가져야만 한다).

그러나 사실 여기에는 미국적 일상의 진부함 뿐만이 아니라 일상 자체의 진부함이 있다. 이 영화는 수 많은 카이보이들이 등장했던 서부영화에서는 거의 한번도 볼 수 없었던 목동의 실상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양떼를 몰고, 맹수들을 쫓는 일을 넘어서서, 야영을 하고, 텐트를 치고, 말뚝을 박고, 불을 지피고, 설거지를 하고, 돌무더기를 쌓고, 나무를 자르고, 끼니를 때우고, . . . 뿐만 아니라, 보이지는 않지만 아주 많은 생활의 행위들, . . . 이는 인물들로 하여금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큰 흐름에 참여하는 큰 행동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벗어난 아주 작은 행동들을 요구한다(이러한 행동을 하기 위해 필요한 삶의 요령[tip]들은, 거대한 물리학 이론이나 생물학 논문을 쓰는 것 만큼이나 중요한 일이고, 미국적 지식의 화용론적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들이다). 그 행동들은 최종 결말이나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취해진 액션이 아니라, 감지하기 어려운 어떤 작용과 반작용의 결과로 인해 별 뜻 없이 생겨났다가, 어느새 그것을 취한 자신도 모르게 사라져 버리고 마는 표정이나 제스처의 변화를 뜻한다. 우리가 삶의 실상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바로 그 감지할 수 없는 표정이나 제스처들의 묶음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삶은 큰 행위로서의 드라마가 아니다. 그것은 보이지도 않고, 의식되지도 않고, 따라서 존재하지도 않는, 사실상 죽어버린 시간들 속에서 탄생한다. 어느 누구도 부른 적이 없었음에도, 스스로 난데없이 튀어나와 버리는 그 자유-모티브들! 이것이 삶의 역설이다.

삶에는 멋진 드라마도 없고, 격렬한 총질도 없으며,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할 어떤 의미 있는 상징이나 그 가치들조차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것은 브록백 산맥에 둘러싸여 뜻 없이 먹고 자는 저주와도 같은 삶이다. 그 저주란 가령 끌로드 시몽(Claude Simon)이 심지어 광폭한 전쟁이 지나고 난 흔적 속에서도 발견하였던, 그러한 진부함의 저주이다: "도로를 따라 길게 장식된 화장지의 꽃 줄 광경처럼, 그것은 마치 창자가 다 드러난 여행 가방에서 도무지 헤아릴 길 없이 많은 옷가지가, 대부분이 흑백으로 풀어 헤쳐진 것 같다"(Claude Simon, La route des Flandres (Paris: Minuit, 1960), p. 29.) 시몽의 비유가 주는 슬픔이란 전쟁과 그 가혹한 죽음이 아니라, 바로 우리 삶의 견딜 수 없는 어떤 사소하고도 가벼운 상태를 폭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쟁뿐만 아니라 감옥에도, 심지어 죽음의 순간에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Bubble>에서 Martha는 감옥에 투옥된 후에도, 아침에 일어나 어제와 마찬가지로 양치질을 하며 새로운 일상을 맞는다. 혹은, Emily Dickinson의 한 화자는 무덤 속에서 영원히 잠이 들기 직전의 몽롱한 비애의 순간에 갑자기 날아든 파리 한 마리의 성가신 날개 짓과 웅-웅 거리는 소리를 감지한다). 온갖 쓸모 없는 수많은 객체들, 쓰레기통 옆에 떨어진 자그마한 휴지조각 같은, 이미 죽어버린 삶의 무의미를 반복적으로 상기시켜주는, 매일 아침 쉼 없이 쏟아지는 먼지들과 싸우듯이, 그 무수한 부수적인 것들을 끊임없이 매 순간 참아내야 한다는 것!

비극적인 냉소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또 다시 대자연으로 되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 정도야 어찌되었든,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냉소주의자가 된다. 거기에는 일상의 진부함의 결과라고만은 말할 수 없는 그 이상이 있다. 견디지 않으면 안 되는 일상이지만, 한편 우리는 간혹 혹은 자주 그 반복적인 일상을 견딜 수 없는 무엇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냉소주의란 무기력한 낭만주의이다. 이것이 바로 영화 전체에 감돌고 있는 잭과 에니스의 생활에의 냉소적 정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다시 대자연으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산에서 집으로, 집에서 산으로, 혹은 멕시코로, . . . 인간은 가눌 수 없는 요동을 잠재우기 위해, 양떼나 소떼처럼 이리저리 자기 자신을 유목한다. 우리가 아는 것과는 다르게, 여행이란 광포하고도 웅장한 대자연의 낭만주의적 경험이 아니다. 그러한 낭만주의는 자연 속이 아니라, 인간의 저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내재적 저주이기 때문이다. 인간만이 오로지 이탈하고 싶어하며, 파문을 일으키고, 반복적인 리듬을 못 견디어, 그 방정식에 동요를 일게 한다. 그 청년들의 사랑 역시 그 저주 탓일 것이다. 그들은 애초부터 동성연애자도 아니었으며, 새벽의 한기가 그들을 사랑하게 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우리는 진부한 일상들 속에서, 그러한 내재적 성질들이 도저히 참고 견디어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를 때, 가령 야스지로의 영화 <가을햇살(秋日和)>에서 보듯이, 일상에 매인 힘없는 노인들의 작지만 갑작스러운 농담이나, <늦봄(晩春)>에서의 순종적인 딸이 언뜻언뜻 보여주는 복받치는 울음과 같이,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그 감정의 광풍들이 견딜 수 없을 때, 저기서 저렇게 굳건히 버티고 서 있는 대자연의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며, <동경 이야기(東京物語)>에서 방에 앉아 창 밖의 정물(靜物)을 보며 마음을 달래는 노인들처럼, 자신 안에서 일고 있는 격동을 그 불변의 거대한 흐름을 닮아가며 조용히 잠재우기 위한 것이다(이것이 바로 노엘 버치[Noël Burch]가 명명했던 야스지로 특유의 베개 샷[Pillow Shot]의 미학적 의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행이란 떠나는 것이 아니라 되돌아오기이다. 이것이 바로 여행의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밤을 새야 할지도 모르니, 여기서 짐 자무쉬(Jim Jarmusch)라든가 홍상수의 작품 얘기는  빼자.

따라서 이 영화에는 두 개의 자연 혹은 반복이 있다. 근원적이고도 1차적인 자연. 경험적으로는 파악될 수 없으며, 느껴지는 것조차 불가능한. 그러나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자연. 그 자신 스스로 그것이 되고 싶어 했던 사드(Marquis de Sade)의 표현에 따르면, "눈을 감고 있는 동안에도 효력을 미치는 절대적 악". 아마도 근대 물리학이 정식화하고자 했던 거대한 방정식. 무자비하고도 무차별적인 범우주적인 반복.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그 자연을 닮아가는 또 다른 2차적 자연이 있다. 한편으로는 혐오스럽고, 또 한편으로는 애처로운. 근원적 자연을 벗어날 수 없는 존재가, 그 흐름 속에 자신을 내맡겨 놓고 사는 가운데, 도식적인 몸짓들로 이루어진 가벼움과 사소함. 그러나 무엇보다도, 언제나 제자리로 되돌아옴으로써 허탈함을 자아내는 반복. 그리고 이 두 자연에 둘러싸인 두 인간의 위험하고도 격렬한 여행을 동반한 위태로운 낭만주의가 있다. 결국 그들은 어떤 어떤 산자락에 위치한 사람들이다. 무슨 마을이나 무슨 집에 들어 앉아 있는 동안에도. 그러나 그들은 산이나 계곡으로 떠났다가 되돌아 온다. 그 왕복운동의 반복은 그들의 고립을 심화시키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이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이 영화로부터 미국적 삶의 실상을 보아야만 할 것이다. 영화는 세 번 이상을 볼 것을 권유한다. 그럼으로써, 단계적으로나마 보다 많은 실상에 근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1) 전면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감동적인 혹은 격렬한 낭만주의. 그래서 노동이나 만남이나 섹스나 관계들의 실상, 즉 행위의 실상 뿐만 아니라, 그러한 행위의 삶 속에서 그들이 견딜 수 없어 하는 어떤 감정. 그래서 그 격동을 잠재우고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떠날 수 밖에 없었던 그 여러 종류의 여행(동성애는 그 중 하나이다).

(2) 차가운 계곡의 대기라든가. 끝없이 나 있는 산맥의 줄기라든가. 전나무에 달린 자그마한 잎새라든가. 또 그 모든 것들을 비추는 싸늘한 햇볕. 혹은 주인공들의 행동의 배후에서 움직이는 다른 존재들. 가령, 산으로 가기 전 트레일러에서 두 청년이 기다리는 동안, 저편에서 잠깐 지나가고 있는 이름 모를 두 미국 소녀라든가. 에니스가 산에서 내려와 왠지 모를 구역질을 하고 있는 동안, 저 뒤에서 자그마하게 일고 있는 바람 먼지라든가. 물컵에 침을 뱉는 고압적인 인상의 잭의 아버지와 기죽은 착한 어머니, 그리고 그들이 사는 말없고 우울한 가정들. 그들의 공포를 말해주는 황량한 벌판과 을씨년스럽게 서있는 바람 부는 집. 먼지. 에니스를 좋아하게 된 어떤 여인의 능숙한 그러나 판에 박힌 춤 솜씨,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에니스의 큰딸 알마(Alma)의 모습에서 보이는 순진해 보이지만 어떤 욕망 혹은 동경. 그 밖의 모든 잠재적인 것들.

(3) 마지막으로, 그 모든 사람이나 사물과 감정들을 한꺼번에 드러내는 회상과도 같은 하나의 분위기 혹은 느껴지는 단일한 시간. 가령, 잭이 어린 시절을 보냈을 써늘한 방. 상처 많은 책상과 초라한 가구들. 때묻은 물건들. 잭을 둘러싼 미국 전체의 주름진 세월. 보니체르(Pascal Bonitzer)가 말했던 얼룩(tâche)처럼, 혹은 바르뜨의 푼크툼(punctum)처럼, 혹은 겹쳐진 셔츠에 묻은 피얼룩에 깃든 에니스 델마와 잭 트위스트의 고유한 시간. 이 외에도 무수한 사례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왜 그들의 고유한 시간을 보고 느끼기 위해 노력해야만 할까?

미국인들은 우리를 '동양인'이라고 부른다(유럽인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그래서 중국인이나 일본인이나 한국인을 그 동양인이라는 용어 속에 뒤섞어서 이해하기 때문에, 그 구체적인 모습들을 잘 구별하지 못한다. 미국 영화에 등장하는 한국인이나 중국인이나 일본인들을 보라(심지어는 중국어를 쓰는 한국인이 등장하기도 한다). 뭐가 뭔지도 모른 채 모든 동양을 뒤섞어 놓았던, 롭 마샬(Rob Marshall)의 <게이샤의 추억(Memoirs of A Geisha)>이 좋은 예일 것이다. 간단한 예로, 그 영화에 등장한 게이샤의 모습과 미조구찌 겐지(溝口健二)의 작품에 나오는 게이샤의 모습만 비교해보아도, 그 맥 빠지는 오해가 무엇인지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어느 나라를 가든 영어밖에 쓸줄 모르는 미국인들의 그러한 이해는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를, Martha의 끔찍한 파란 눈처럼, 텔레비전 스크린에 혼을 빼앗긴 반수면 상태의 두뇌환경 속에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분명히 잘못된 이해이다. 그러한 진부한 시선은 우선 당사자들을 매우 불쾌하게 하는, 아주 무례한 이해 방식일 뿐만 아니라, 잭과 에니스의 일상처럼, 그 자신 스스로 따분한 삶에 젖어들기 때문이다. 자신이 중심이 되어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으로는 결코 공존이란 가능할 수가 없다. 공존이란 개인성을 벗어나 자신의 이해와 흥미로부터 단절하고, 괴롭지만 사물의 실상을 보려는 노력 속에서만 가능해진다. 한참을 기다리며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되는 그 실상들. <브록백 마운틴>으로부터,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낭만적인 자연풍경이나 정치적 주제로서의 동성연애를 확인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그들에게 원하는 방식으로 그들을 보아야 한다. . . . 그렇지만, 점점 반수면 상태로 빠져들고 있는 우리들에게 영화는 과연 실상의 충격을 줄 수 있을까?




<문예노트>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