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의 계획은 이런 것이었다. 우선 6-7개월 안에 번역을 끝낸다. 그리고 1-2개월에 걸쳐 번역본을 두 세 차례 읽어가며 문장을 다듬는다. 그리고 작업 과정에서 작성했던 메모와 노트와 밑줄을 중심으로 이 책에 관한 장편의 해설 에세이를 야심차게 한 편 쓴다. 그래서 마치 야생 동물을 길들이듯이, 이 불친절하고 오만해 보이는 텍스트의 독자에 대한 만행을 누그러뜨려 나긋나긋해지도록 하면, 누구든 쉽게 이해하고 따를 수 있는 중성의 지도가 만들어질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의 번역작업은 번역 보다는 논문을 쓰듯이 메모와 자료수집에 더 중점을 두게 되었다.
작업이 진행되면서 애초의 계획은 많은 장애를 겪게 된다. 우선 사실상 가장 중요한 돈 문제가 있다. 사회-내-존재로서 나는 ‘이론을 위한 이론’ 부류에 속한 ‘이 책만을 위한 삶’을 고집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책은 돈과는 무관한 전혀 다른 이유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돈벌이가 아닌 전혀 다른 이유 때문에 시작한 일은 취미로 해야 한다. 일에 대한 자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할애해야할 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취미란 왜 항상 상대적으로 적은 시간만이 허용되는 것일까?) 따라서 이 책의 번역 작업, 더 정확히 작업 시간은 취미처럼 진행되어야만 했다. 애초의 계획인 6-7개월은커녕 작업은 더디어지고 길어졌다. 또 사회-내-존재로서 개인적인 소사들은 일의 매끄러운 진행을 방해한다. 경제적, 사회적, 개인사적인 모든 난삽하고 자질구레한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실재들로 인해 미리 결정해 놓은 목적들은 지리멸렬해 진다. 역설적이게도 학문의 순수성은 부의 산물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강하게 들었다.
그러나 작업을 방해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책이 재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위의 외적인 요인들은 일을 더디게 할지는 모르지만, 일에 대한 환멸과 태만의 원인은 되지 못한다. 이 책은 사람을 아주 이상하게 나른해지게 하는 구석이 있다. 구사하는 문체의 난해함과 주제의 단조로운 반복 때문인지, 이유를 알 수 없는 환멸과 태만이 바로 이 책의 독자를 사로잡고 있는 분위기이다. 논리적으로 매끄럽게 잘 연결되거나, 내용이 익숙하거나, 어렵더라도 하다못해 뭔가 새로운 것을 배우는 듯 한 느낌만이라도 주었더라면, 원한감정까지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원한 감정, 즉 타인에게 원인을 투사한 무능력의 감각이 번역을 하는 내내 나를 괴롭혔다. 페이지를 쭉쭉 나아갈 수 없는 무기력, 어떤 부분은 알겠지만 그 다음 부분은 알 수 없는 끊임없는 단절감, 의미를 쉽게 결정할 수 없는 모호한 정신상태 속에서의 지속의 고통, . . . 이렇게 텍스트를 쥐고 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면서, 작업은 쉽게 끊어지고, 머뭇거리게 되고, 문장을 구성하는 실제적 행동성의 발랄함은 사라지고, 생각만 한 없이 깊어지면서, 그렇게 늘어난 시간은 텍스트와 독서경험을 나른한 파편들로 만들어 갔다. 쉬운 몇 마디로 요약할 수 없는 총체성 상실이라는 무능력의 감각은 결국 저자에게 투사된다. 역자인 나는 저자의 글쓰기 능력과 이론적 진정성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텍스트를 쥐고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경험이 파편화 되어가고, 총체성이 상실되는 해체와 파괴의 과정 속에서 무엇이 생산되었을까? 점점 쓸모가 없어져가는 이 책은 도대체 무엇을 생산하는가? 저자가 말했듯이, 다름 아닌 “두통”이 생산되었다. 더 근사하게 말해 지속 또는 시간(과학의 차원이 아닌)의 경험이 생산된 것이다.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이 텍스트를 번역하는 과정 자체의 묘사가 이 책에 대한 가장 적절한 묘사이며 규정일 것이다. 독서 자체가 일종의 퍼포먼스이다. 책을 이루는 구성요소들의 다가(多價)적이고 다중적인 모호함, 그리고 그 책을 읽는 매순간의 딜레마, 그 무엇도 확신을 가지고 결정할 수가 없는 텍스트의 의미, 내용과 의미보다는 수단과 형식으로서의 언어 그 자체에 대한 반성, 나아가 읽고 있는 주체인 나 자신에 대한 자기-지시적 사유, 이러한 것들이 바로 마수미가 우화라고 명명하면서 여러 사례들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잠재, 또는 더 넓은 의미에서의 가상계의 질서이다. 사물이 쓸모가 없어질 때, 다시 말해 모호, 딜레마, 비결정, 자기 반영과 같은 가상계의 내적 질서에 존재할 때, 그것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지시한다. 유용성, 기능, 총체성과 같은 구식의 존재론적 가치로부터의 해방은 사물의 본질(플라톤과 전혀 다른 관점에서) 또는 사물의 직접적 자기-존재의 현시이다. 가상계에서 시간과 그 경험은 직접적으로 현시된다.
현실계-내 및 사회계-내-존재인 독자들께서는 이제 이 책 전체를 통해 다양한 분야(현상학, 생리학, 물리학, 예술, 미디어, 정치, 심지어 스포츠와 연예에 이르기까지)의 저류에 흐르고 있는 가상계, 다시 말해 간극과 미결정성의 지대를 접하게 될 것이다. 현실계와 사회계 내에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실재를 살아온 우리는 스스로를 지각의 주체로서 정립하고, 우리 앞에 뚜렷한 윤곽선을 내보이는 사물들, 사람들, 이미지들, 세계-내-존재자 모두를 주체에 대한 존재(대상)로서, 또 주관성에 대한 객관적 실체(객체)로서 규정해왔다. 삶의 필요에서 비롯된 이러한 추상화 운동은 존재를 유용성과 기능에 부합하는 것으로 포섭하면서, 모든 “지각 가능한 것만이 존재 한다”고 하는 자의적이지만 확고부동한 현실의 질서를 조작한다.
그러나 지각 가능하고 사유 가능한 현실적 확신은 새로운(혹은 태곳적) 실재로서의 가상계 안에서 생소해지고 모호해지며 확실성을 잃어간다. 저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현실계를 파고들어, 우리의 지각과 행위 내에서 운용이 가능한 현실적 대상과 사물들에 카오스적 구도를 끼워 넣어 그 단단하고 명확한 윤곽선들을 흐려놓는다. 지각과 사유가 불가능한 그러나 궁극적이고도 실질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가상의 지대를 끄집어내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믿고 있는 현실이 얼마나 모호하고 비결정적인 토대 위에 세워졌는지, 두 눈으로 똑바로 보이는 시각적 대상조차, 심지어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명명하는 색 조차 사실은 명확히 결정할 수 없는 불안정한 지대 위에 서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가령, 그것은 객관적 확실성에 기반을 둔 고전과학 내부의 역설적 불확실성의 미시적 지대―프랙탈이나 카오스 등으로 색인되는 양자역학적 대상들―이기도 하고, 일상에서 접하는 미디어 실천들―텔레비전, 라디오, 영화, 인터넷, 하이퍼텍스트, 가상현실, 기타 모든 문자 및 이미지 매체들―을 통해 전달되어 우리의 감각체계를 변형시키는 정동의 운동이기도 하고, 주변공간과 대기 전체를 변조시키는 미세한 진동의 유도체가 되어 우주 전체를 표현하는 표면-장으로서의 몸(과 그 예술적 퍼포먼스)이기도 하고, 한 영화배우이자 국가 원수인 어떤 인물 또는 가수이자 우상인 어떤 인물의 몸 위상학이 현실화하는 잠재적 정치의 지대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TV에서 방영되는 축구경기의 경기장 내에서 실제적으로 움직이는 선수들, 축구공, 심판, 관중들 이전에 그 장을 결정짓는 근원적 잠재이기도 하다. 이러한 것들에 관한 논의는 우리가 알고 있고 믿고 있는 현실의 질서를 무화시키는 새로운 비-구도를 발생시킨다.
이것은 궤변이 아니라, 존재의 실질적 토대에 대한 사유의 결과이다. 저자가 끊임없이 미시물리학, 생리현상학, 그리고 신경생리학 등의 영역으로 파고들면서도 다시 빠져나와 문화학과 철학의 사변으로 되돌아가는 이유는, 과학이 철학의 물질적 극한으로 그리고 철학이 과학의 주관적 극한으로 향하는, 또는 물질과 정신이 상호역동으로 향하는, 철학과 과학의 구분불가능한 모호한 지대를 검토하려는 의지 때문일 것이다. 그 두 극한 지점 내에 있는 문화, 역사, 예술, 정치, 미디어 등, 모든 개별적 실천들이 가상계라고 하는 비물형적 효과의 지대, 무차별적 비결정성의 단일한 판 위에서 형성되는 과정이 우화처럼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쓸모없음을 자랑스럽게 추구하고, 총체적 기능을 파편화하며, 비-의미로써 두통을 생산하는 이 책의 기능과 의미, 즉 메시지는 무엇인가? "현실과 세계는 미리부터 주어지지 않는다". 이 불확실성의 확실성 또는 비존재의 존재성이 함의하는 바, 세계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다. 주체는 그 자신의 주체성을 창조한다. 말하자면 세계는 그 자신을 생산한다. 과학도 아니고 철학도 아닌, 논문도 아니고 예술작품도 아닌(소설인가? 시인가?) 마수미의 이 모호한 텍스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지점은 다름 아닌 능산적 자연이라고 하는 스피노자주의의 윤리적 개념일 것이다. 나아가 마수미의 텍스트가 질문하는 바를 이렇게 요약해보자: 근원적 환경으로서의 비결정적 실재로부터 결정적 현실과 의미의 주체가 창조되는 것은 어떠한 질적 과정(혹은 추상화 운동)을 통해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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