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과 물질 혹은 시간과 공간이 뒤섞여 뒤죽박죽이다! 더 정확히는 지속의 물질화 혹은 시간의 공간화! 그리하여 삶 자체의 결정론적 기계론적 도식화! 무엇보다도 존재의 부정! 이것이 베르그송, 들뢰즈, 나아가 베르그송주의의 비판의 핵심이다. 시간을 공간으로 환원하는 많은 체계들이 있다. 가령, 운동을 운동체나 운동궤도와 뒤섞어 혼동했던 고전철학(아킬레스와 거북의 동질성), 시간을 공간의 좌표체계로 환원하여 공간을 주파하는 운동의 무의식적 단위로 혹은 상대적 좌표에 배열된 불연속적인 간격들로 파편화한 근대 과학(근대역학이나 상대성이론), 더 지독한 경우로는 마르크스가 '사물화 과정'이라고 말했던 것, 즉 효율적이고 용이한 대상으로 존재를 기능화하기 위해 그것으로부터 지속을 배제하여 순간적 상태로 환원하는 자본주의가 그것이다. 효율과 기능에 대하여 지속과 시간은 일련의 장애 즉 병적인 상태에 다름 아니다. 자본주의는 지속의 모든 두께와 부피의 제거, 나아가 본성적 차이의 무화 과정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베르그송주의는 이러한 역사적 체계들 이전에, 이미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의 도식화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살기 위해 현실적 필요에 사로잡혀 있다. 지각은 현재 필요한 것만을 수용하고 나머지는 놓쳐버림으로써 사물로부터 그 온전한 실재성을 왜곡하거나 변형한다. 말하자면 지속과 시간을 현재의 필요로 수축시키는 것이다. 현실적 필요의 완성은 바로 행동이다. 행동은 세계를 당기고 밀고 휘어지게 함으로써, 행동의 주체를 세계의 중심에 설정하고, 실재의 모든 시간과 공간을 그 중심에 대한 상대적 존재로 집결한다.

따라서 베르그송주의의 중요한 한 가지 프로젝트는 결정론적 기계론적 사유로부터 시간을 되찾는 '기계'를 발명하는 일이다. 기계론과 결정론에 빠지지 않을 것! 현실적 필요에 사로잡혀 삶을 진부함 속에 가두지 않을 것! 존재로부터 그 고유한 시간, 과거, 지속 전체를 구해낼 것! 이는 마르크스주의가 추구했던 것처럼 사회 경제적 소유관계의 재구성보다도 더 근본적인 힘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가장 훌륭한 기계는 물론 예술이다. 들뢰즈가 생각하는 예술의 힘은 존재 고유의 시간의 보존에 있다. 예술에 관한 그의 대부분의 저작은 '존재의 본성적 차이와 긍정'이라는 주제를 기반으로 한다. 가령 운동, 지각, 감정, 충동, 행동, 지속이 영화 이미지에서 어떻게 자신의 고유한 형태로 현존하는지를 분류하여 그 이미지 각각을 긍정한다든지(『영화』의 경우), 현재와는 본성적으로 무관하게 과거가 그 자체 즉자적으로 존재함을 보여주어 과거, 기억, 시간 전체의 순수현존을 긍정한다든지(『프루스트와 징후』의 경우), 정신분석이 새도-마조히즘이라는 증후군으로 뒤섞어놓았던 두 작가의 고유한 문학 혹은 변태성을 본성적으로 다른 계열들로 나눈다(『마조흐: 냉정함과 잔혹함』의 경우). 존재의 긍정이란 현실적 사회적 관계 속에서 다른 존재와 뒤섞여 있는 동안에도 가지게 되는 권리상의 해방, 즉 존재가 그 자신 안에서의 시간 전체의 보존을 의미한다. 본성상의 차이의 발견과 존재의 긍정이라고 하는 들뢰즈의 예술론은 궁극적으로 시간의 잠재적 보존 그리고 그 직접적 현시의 문제에 다름 아니다.

다른 형태로 질문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지속 혹은 시간 그 자체를 직접적으로 볼 수는 없을까? 시계추의 반복처럼 공간에 끼어 있거나, 달리는 자전거처럼 운동에 실려 있거나, 표정 짓는 얼굴처럼 육체(물질)에 묻어 나오는 식의 간접적 현시 말고, 그들―육체, 기능, 운동, 현재―로부터 해방되어, 그들이 사멸해도 여전히 그 순수현존이 스스로 남아 직접적으로 현시되는 시간 그 자체의 이미지. 어떤 점에서 시간을 직접적으로 본다는 것은 과거를 그 즉자적 상태에서 본다는 것이다. 현재적 필요라든가 이해관계와는 무관하게 그 자체로 존재하는 순수한 상태의 비전의 통찰! 이것이 잠재미학의 조건이며, 이로부터 현시되는 실상의 이미지는 결국 우리를 삶의 긍정으로 이끌 것이다.

시간(이미지)을 직접적으로 드러낼 가능성이 있는 현실적 이미지들이 있다. 들뢰즈는 네오리얼리즘이나 누벨바그와 같은 전후(戰後) 현대영화의 공통적인 형식을 '순수 시지각적 이미지'(image pure optique)라고 불렀다. 예컨대, 고전적 리얼리즘에서는 행동 중심의 이미지가 지배적이었다. 계급이나 공동체 전체를 대변하는 하나의 중심으로서의 주인공이 있고, 그를 둘러싼 사회적 정치적 자연적 환경이 있다. 그는 현실의 필요에 따라 환경을 지각하고, 그의 지각은 곧 행동으로 연결되고, 나아가 그의 행동성은 환경 전체의 변화로 이어져 삶의 새로운 조건이 탄생하는 식이다. 그러나 전후의 현대적 상황은 이러한 행동 중심의 도식(“환경1-행동-환경2”)에 균열이 생겨, 더 이상 지각이 행동으로 혹은 행동이 다른 행동으로 혹은 행동이 환경의 변화로 연장되지 못하고, 그 사이에 중단, 망설임, 머뭇거림, 더듬거림과 같은 특이한 간극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기계적이고 무의식적인 말이나 행동에 난데없이 끼어든 ‘공허’라든가, 일상적인 제스처가 중단되고 갑자기 무언가를 ‘주시’하며 순수한 관조에 사로잡힌 상태라든가, 여행이나 배회를 하는 가운데 맞닥뜨리게 된 어떤 ‘딜레마’, 익숙한 지각이나 사유의 한계를 벗어나는 참을 수 없는 광경의 ‘목격’, 낯선 풍경으로부터 감지하게 되는 ‘위기’ 혹은 막연한 ‘공포’, 이러한 관조적 이미지들은 현실에 행동성의 부재, 박탈, 균열을 끌어들인다. 행동이란 관념적 도식의 현재화 혹은 현재의 물질적 도식화인데, 이 도식 구도에 균열이 일어나 어떤 의도되지 않은 우연적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순수한 시각적 청각적 상황에 내몰리게 되고, 나아가 관조적이 될 것을 강요받는다―한편 이 관조적 상황은 베르그송적인 의미에서 최초의 시간의 발생이며 창조의 징후이다.

관조적 상황에서는 모든 존재가 행위 주체에 종속되기를 그치고 그 고유한 실재성을 취한다. 말하자면 행동적 공간(리얼리즘적 공간)에서 세계를 견인하는 중력으로서의 중심에 난입한 균열로 인해, 관계하는 모든 사물을 특정 상황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이는 여행자나 떠돌이가 낯선 풍경에 직면하여 겪게 되는 모든 감각적 편력을 설명해준다. 생경한 비전에 빠진 여행자는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모든 감각능력을 동원하지만, 사물들은 즉각적으로 무엇인가를 지시하거나 어떤 쓰임을 위해 기능하지 않고, 감각적으로 해방감을 주는 자연물처럼 의미가 미결정적인 상태에서 그 고유한 실재성을 드러낼 것이다(비스콘티의 영화들). 따라서 관조적 이미지에서는 주관성과 객관성, 상상과 실제,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의 구별이 모호해지고 식별 불가능해진다. 현실적 필요로부터 벗어나 필요가 야기하는 행동성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특정한 목표에 따라 행위 하지 않고 주어진 상황을 미결정된 상태로 지연시킴으로써, 거기서는 구체화된 것도, 정향된 미래도 없으며, 추억이나 몽상 혹은 주관적 공허와 함께 객관적인 사실들이 소멸된다. 그리하여 모든 사물들의 잠재성이 강화된다(안토니오니의 영화들). 관조는 잠재성의 열림 그 자체이며, 이는 우리를 사물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으로 이끈다. 실상의 구체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네오리얼리즘의 인물들 대부분은 어린 아이라든가, 여성이라든가, 낯선 곳에 다다른 여행자라든가, 프롤레타리아와 같이 사회로부터 행동성을 빼앗긴 사람들이다. 그들은 모두가 약자 혹은 소수자로서, 예술가나 작가가 그렇듯이, 사회적 행동 영역을 박탈당하여 상대적으로 무기력한 상태에 처해있다. 이러한 무기력이 그들로 하여금 난폭하게 드러나는 실상을 맞닥뜨리게 하고, 그들은 거기서 표현할 수 없는 날 것 그대로의 실재를 바라본다.

관조적 상황이 가장 절대적인 형태로 현시되는 이미지가 바로 오즈 야스지로의 그 유명한 “정물” 혹은 “베게-샷”(pillow-shot) 혹은 “정적”(cases of stasis)이다. 오즈의 정물은 인물들의 기계적이고 진부한 일상적 제스처들―집에서 직장으로, 직장에서 술집으로, 술집에서 다시 집으로, 혹은 전형적인 말소리와 분위기의 대화―사이에 삽입된다. 그것은 간혹 고층건물로 나오기도 하고, 한적한 공원이나 공터의 자연물, 도시의 작은 골목이나 술집 네온사인, 산이나 바다의 먼 곳, 실내의 텅 빈 복도, 방안의 가구들, 특히 방 안에 배치된 꽃병, 골프채, 술병, 책, 책상, 스탠드, 복도와 벽에 비치는 물그림자, 밤길을 비추는 가로등의 형상으로 등장한다. 들뢰즈는 이 정물이미지가 이탈된 공간이라고 지적하였다. 장면들 간에 연결되는 공간도 아니고, 행동의 매개가 되지도 못하며, 행동하는 인물이 배치되어 있지도 않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이야기의 흐름이나 인물들의 관계와는 무관하게 임의로 설정된 일종의 균열이다. 행동에 적합하게 설정되어 움직임이나 시지각 대상에 종속된 리얼리즘적 공간이 아니라, 연결 관계가 완전히 끊어져 순수하게 자율성을 가지는 탈구 상태, 더 정확히 그 자체 지나가는 어떤 것, 즉 이미지에 담긴 특정 대상과도 무관한 지속 그 자체의 직접적인 이미지이다. 들뢰즈는 아름다운 장면 하나를 예로 든다: “『늦봄』에서의 그 꽃병은 딸의 온화한 미소와 복받쳐 오르는 눈물의 장면 사이에 삽입된다. 무엇인가가 생겨나고 변하고 지나간 것이다. 하지만 달라진 것의 형식은 그 자체 달라지지 않았고, 지나가지도 않았다. 이것이 바로 시간, 시간 그 자체, ‘그 순수한 상태의 자그마한 시간’이다. . . . 오즈의 정물은 지속한다. 그 10초 동안의 꽃병이라는 하나의 지속을 취한다. 그 꽃병의 지속은, 변하고 있는 상태들의 연속을 통해, 정확히 바로 그 견디어내고 있는 것의 표상이다.”

사실상 삶을 지배하는 것은 여행이나 배회가 아니라 일상적인 작은 행위들이다. 오히려 여행조차 일상의 한 이면의 반복일 정도이다. 우리가 바라보고 앉아있거나 누워있는 곳은 어김없이 전형적이고 진부한 공간(고궁, 온천지, 술집, 가정, 직장)이며, 우리의 대화 역시 대본이 마련된 퍼포먼스처럼 진부한 말소리와 분위기로 채워진다. 우리는 모두가 아주머니, 아저씨, 아들, 딸, 아버지 혹은 어머니로서 판에 박힌 캐릭터로 살아간다. 들뢰즈가 명명했던 이 “무료한 시간들”은 삶을 변화로 이끌지도 주어진 상황을 파국으로 치닫게 하지도 못한다. 고요한 일상을 뒤흔드는 사건들, 가령 딸의 결혼식이 끝나고 혼자 숨죽여 흐느끼는 아버지의 서글픔(『꽁치의 맛』), 잠든 아버지를 미소를 머금고 바라보다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딸의 연민(『늦봄』), 죽은 아버지에 대해 모질게 말을 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딸의 애증(『마지막 변덕』), 심지어 죽음조차도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가족이나 친구의 죽음을 바라보는 인간들의 슬픔과 눈물 역시 결국은 진부한 그 무엇이 되어 버린다. 들뢰즈에 따르면 이러한 진부함은 삶 자체 나아가 대자연의 본성에 기인한다. 자연은 빈틈없는 규칙에 따라, 필연적 질서에 따라, 하나의 항에서 다른 항의 연쇄로, 거대한 방정식의 이항(移項)과도 같은 계열들의 움직임으로 짜여있다. 자기중심적으로 부분만을 지각하고 행동하는 인간에게 이 질서는 부서지고 혼란한 형태의 작은 단편들로만 보이기 때문에, 눈앞에 펼쳐진 많은 것들이 우연적이며 특이한 경험이 된다. 일상의 한 국면이 다른 국면과 마주치면서, 마치 그 가운데에 침입한 드라마처럼, 그 국면들이 놀라운 사건이나 강렬한 첨점으로 보이는 것이다. 신의 지각에서 본다면 아주 단순하게 해명 될 만한 자연적 질서의 사소한 단편이 인간에게는 거대한 재앙으로 보이거나, 타인과의 우연한 만남조차 신화적이고 낭만적인 운명의 외관을 취하는 것이다. 낭만주의적 감동은 자연의 풍경에서가 아니라 인간으로부터 나온다. 인간은 수학과도 같은 단순한 자연에 자신의 혼란한 감정을 투영하여, 그 지루한 일상적 규칙으로부터 벗어나 풀길 없는 격정을 만들고자 한다. 친구들의 농담(『꽁치의 맛』)이나 음흉한 익살(『가을햇살』) 혹은 시위 하듯 친정에 와서 살고 있는 여인의 남편에 대한 반항(『동경의 황혼』)처럼, 가만히 있지 못하고 몸과 마음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대자연의 고전주의에 맞선 기약 없는 낭만주의의 반항을 감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식을 버리고 집을 나간 어머니 때문에 생긴 동생의 깊은 상처를 깨달은 언니가 자신의 어린 딸을 생각하여 다시 남편에게 돌아갈 것을 결심하듯, 혹은 아버지가 딸의 죽음을 겪고 난 후 새벽이 지나 아침이 되어 거대한 산이 환하게 드러나고 나무 그림자가 실내 복도를 드리우자 넥타이를 매고 새로운 일상으로 되돌아가듯, 거스를 수 없는 막대한 힘 앞에서 굴복하고 되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 무기력한 반항일 뿐이다. 때문에 우뚝 솟은 나무나 눈 덮인 산, 잔잔한 대양(大洋)의 장엄은 우리의 낭만주의를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낭만주의가 빚어낸 요란한 동요와 혼란을 아무 말 없이 태연한 일상으로 되돌릴 뿐이다. 자연을 바라보며 우리는 떠나왔던 바로 그곳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또한 낭만주의자들이 간혹 산의 이미지에서 느끼는 무지막지한 대자연의 숭고이다.

바로 여기에 정물의 이미지가 가지는 심오함이 있다. 정물은 지나가는 그 무엇을 직접적으로 현시한다. 하루의 일상적 사건이 생겨나고, 밤이 되어 하루 동안의 동요를 추스르고 잠에 빠지듯, 정물은 사물의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간의 잠재적 이행을 시각적으로 보존한다. 잠든 인물의 의식이 희미해지거나 꺼져있는 동안에도 날들은 스스로 보존되어 밤과 새벽을 지나 또 다른 날들로 운반될 것이다. 밤이 깊어지고 새벽이 되어 해가 뜨거나, 외출에서 돌아와 잠시 앉아 있는 동안, 잠시 동안의 시간의 변화가 그 정물 안에서 잠재적으로 일어난다. 공간을 이동한 것도 달라진 형상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정물은 시간을 일정한 부피와 두께로서 보존한다. 빛, 명암, 색채 및 실재 전체가 겪는 변화의 구도! 의식적이고 행동적인 지각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형상의 미묘한 질적 변화! 이것이 바로 정물이며 시간 그 자체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정물의 심오한 가치는 삶을 견디어내어야 할 그 무엇으로 체험하는 인물들의 내적 지속을 느끼게 해준다는 점에 있다. 오즈의 영화에는 많은 사회적 변화의 환경이 깔려 있다. 산업사회 혹은 패전의 절망, 전통적 가치의 변화와 붕괴, 이러한 변화를 가장 첨예하게 보존하는 장소로서의 가족과 이웃, 거기서 우리는 가장 일상적이면서도 가장 참을 수 없는 형태의 실상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오즈의 이미지의 가치는 일상적이고 사소한 삶의 기저에 있는 말해지지 않은 어떤 실상의 목격이다. 가정으로 난입한 산업(『동경이야기』), 의식의 변화(『부초이야기』), 전통과 현대 혹은 세대의 변모와 갈등(『꽁치의 맛』, 『부초이야기』, 『가을햇살』), 패전이후의 달라진 관계들(『꽁치의 맛』)과 같이, 일본인들의 잔잔한 일상 속에 들이닥친 현대성의 병리적 징후뿐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는 삶 속에서 견디기 어려운 것―욕망, 이별, 죽음 등―을 견뎌내어야 하는 고통을 안고, 인간은 삶 자체에 내재한 참을 수 없는 슬픔에 파묻혀 있다. 아름다운 영화 『동경의 황혼』 마지막 장면에서 딸이 죽은 후 밤을 샌 아버지가 맞는 아침의 대기에는 그처럼 가늠하기 어려운 힘겨운 슬픔이 배어있다. 오즈 영화의 전반을 지배하여 정물을 통해 환기되는 이 슬픔의 정서는 무엇인가를 견디고 기다림으로써만 완성될 수 있는 시간 그 자체의 직접적인 계시이다. 결국 다시 대면 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새벽을 마중하기 위해, 아니면 대자연의 바람 속으로 흩어지기 위해, 삶과 인간에 대해 그 어떤 질문도 유보한 채 조용히 앉아 자기 자신을 기다리는 것이다. 어떤 우여곡절로 인해 빠져나와 버린 일상적 동요가 눈 덮인 산과 고요한 나무를 닮아가며 대자연의 질서로, 빠져나갈 수 없는 그 무지막지한 방정식의 한 항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스스로를 추스른다. 본질적으로 시간은 기다림(혹은 망설임)을 통해서만 체험된다. 특정 대상에 대한 상대적인 기다림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기다림, 즉 자신의 몸뚱이와 과거전체를 직접 짊어지고 견디지 않으면 안 되는 삶의 번민과도 같은 절대적 기다림이다. 오즈의 정물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정물은 시간-지속-기다림 그 자체인데, 그 기다림에는 하이쿠(俳句)에서의 기레지(切字)가 자아내는 일본 특유의 영탄(詠歎)―지성의 질문과 부정을 통해 존재의 이해에 도달하려는 서구의 지성과는 대조적인―에 비견할만한 삶과 존재의 긍정이 주는 슬픔이 있다. 정물은 그 자체 견디어내는 시간, 견딜 수 없는 내적 동요나 감당할 수 없는 근원적 슬픔을 삭이는 시간이다. 그것은 개인이 의식적으로 경험하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지속-이미지이다. 세계에 대해 심오한 질문에 봉착한 네오리얼리즘의 사유의 시간과는 다르게, 오즈의 정물에는 하염없이 바라보아야만 하는 인간의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과 애달픔의 시간이 있다. 설탕이 물속에서 녹아내리고 물이 끓어 수증기가 피어올라 대기에 퍼질 때까지(『창조적 진화』), 어머니라고 하는 한 사회적 존재로서가 아니라 한 여자 한 인간 나아가 자연이라는 존재론적 수용에 도달할 때까지(『가을햇살』), 죽음을 자연의 한 흐름으로 수용함으로써 슬픔을 가눌 수 있을 때까지(『동경이야기』, 『동경의 황혼』), 소유하거나 지배할 수 없는 욕망이 있음을 깨닫고 그것을 포기할 때까지(『부초이야기』, 『가을햇살』, 『꽁치의 맛』), 개인은 기다림 속에서 자신을 초월한 ‘비개인적인 시간’에 도달한다. 이것이 바로 ‘순수한 관조의 시간’이 최종적으로 이르게 될 일원론, 베르그송주의자 들뢰즈가 말했던 ‘지속의 세 번째 단계’, 즉 물의 흐름과 새의 비상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자기 자신까지도 포함하는 단 하나의 시간이다.

우리는 내면화된 구조와 법칙에 따라 사물을 인지하고 느낀다. 지각과 행동의 대상은 현실적 필요와 흥미를 반영하는데, 우리는 실재의 다양한 측면들 중에서 흥미롭지 않거나 불필요한 것을 지각에서 제외한다. 자연에 대한 이 편협한 이해는 사회 경제적 이해관계라든가, 이데올로기적 믿음, 심리적 요구에 따라, 삶의 요구에 적합한 것만을 수용한 결과이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판에 박힌 것’만을 지각하고, 또 그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진부하고 판에 박힌 연쇄에 균열이 생긴다면 어떨까? 네오리얼리즘의 풍경이나 오즈의 정물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그 이미지들은 일상적이고 도식적인 진부함 속에 난입한 단절과 균열이며, 행동적 현실의 파탄과 붕괴이다. 그러나 한편 그 균열은 편협한 행동-도식이 놓쳐버린 어떤 실상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지각 가능한 현실을 넘어서고, 행동보다 더 근원적이고 강렬한 어떤 것의 현시. 실상이란 판에 박힌 인식에서가 아니라 도식화할 수 없는 어떤 것 속에서, 낭만주의자들이 숭고한 자연과의 대면에서 그랬듯이 능력의 불일치와 부조화 속에서, 능력들 각각이 해방되어 반(反)기능적으로 작동하는 과정에서, 즉 알려진 것 외부의 잠재성 속에서 탄생한다. 네오리얼리즘이나 오즈의 이미지는 모두가 잠재적 세계, 즉 가시적이고 결과적인 것 ‘이전’ 혹은 그 ‘이후’의 저편에 은밀하게 내재하는 투시적 세계를 향해있다. 그것은 ‘견딜 수 있는’ ‘허용 가능한’ 지각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이미 습관적 도식이 되어버린 망막의 기능을 효력 정지시켰을 때에만 희미하게 현시되었다가, 우리가 생활의 요구로 돌아갈 때 다시 꺼져버리는 과잉의 세계이며 절대적 타자성의 세계이다.

따라서 실상의 투시는 이미지의 존재론이 정치학으로 나아가는 길과 멀지 않다. 베르그송의 말처럼 이미지란 실재 그 자체이다(“우리는 사물이 있는 바로 그곳에서 사물을 지각한다”). 이미지가 기만적이고 실상을 왜곡하는 부정적 존재라면, 그것은 이미지로부터 흥미로운 것만을 취해 이미지 전체가 아니라 부분만을 수용하는 우리의 판에 박힌 지각과 행동의 악습 탓이다. 거기에는 그 악습이 초래하는 삶의 진부함을 필요로 하고 이용하고 조장하는 현실적 이해관계 혹은 권력이 있다. 삶의 기만을 꿰뚫고 그로부터 단절하려면, 그 무엇도 덧붙이거나 빼지 않은 채 이해관계와 권력이 덧붙여 놓은 색채들을 소거시키고 비워내어 진상을 투시할 수 있어야 한다. 권력과 기만에 맞선 피로한 투쟁이나 구호 그리고 그 힘을 얻기 위한 휴머니즘적 감동으로는 충분치가 않다. 그것은 어쨌든 또 하나의 행동성으로 뒤섞일 것이고, 나아가 또 다른 진부함의 상태로 떨어져 버릴 테니까. 결국 진정한 이미지는 물질과 공간의 도식으로부터 시간을 해방시킬 때에만 현시될 것이다. 이미지가 단지 감각적 운동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지 않아도 혹은 가시적으로 말을 하지 않아도, 담장에 기대어 서 있을 때조차 그 고유의 존재성을 보존하는 자전거처럼, ‘읽혀지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 읽는다는 것은 사물로부터 잠재적인 것, 즉 과거 전체를 끄집어내는 활동이다. 읽기는 사물의 현재성을 과거로 되돌린다. 그리하여 우리의 현실적 필요 때문에 지각이 왜곡시킨 존재의 고유한 시간을 되찾는 일이다―물론 읽기에 머물지 않고 쓰기(아상블라주)로 더 나아가야겠지만 말이다. 이미지는 그 전체가 읽혀져야 하고, 이 독서 자체가 바로 이미지에 지속을 부여한다. 이것이 들뢰즈가 베르그송주의 전체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 세계에 ‘문학성’을 부여하는 직관의 잠재적 역량―신비주의적 극단으로 치달을 수도 있음을 배제하지 않는―이 아닐까?

감각과 운동을 넘어 참된 시간의 이미지로 열리는 잠재미학의 여러 단계가 존재한다. 우선 이미지는 공간, 감각, 물질의 관계를 벗어나야만 하고, 나아가 운동성으로부터 단절하여 바라보는 단계가 필요하며, 필요와 관심과 이해관계에 따라 이미지의 부분만을 지각하는 편협한 단계를 지나 해방된 지각으로 이미지 전체를 읽을 수 있는 단계로 나아가야만 한다. 지속과 시간의 진정한 이미지는 우주가 책이 되어가는 과정과 나란히 공존한다. 그러나 독서는 진부하고 판에 박힌 세계로부터 실상을 추출해 낼 수는 있지만, 그것 자체로는 판에 박힌 세계의 해방일 수는 없다. 그를 위해서는 다른 역량, 즉 무한한 관계 이미지의 구성으로 사유를 전개하는 쓰기의 역량과 연계되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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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hu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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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베르그송: 실제의 운동을 양적으로 재구성하는 환영으로서 영화

우리는 운동을 공간의 이동과 관련지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특정한 물체가 하나의 공간에서 다른 하나의 공간으로 이동하거나, 특정한 공간이 다른 공간들 사이를 주파하거나 겹치고 뒤덮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운동은 공간들의 결합과 위치 이동에 의해 재구성될 수 있는 것으로 정의된다. 예로, 직선상의 점들을 통과하는 것으로 운동이 정의되고 나면, 이제 다시 이 점들의 결합을 상상하거나, 하나의 점에서 다른 하나의 점으로의 이동을 사유함으로써 운동을 재구성할 수 있는 것이다. 이로써 운동과 공간은 양태를 서로 달리하는 동일한 실체가 된다. 운동은 공간의 이동이며, 운동 중에 있는 특정한 순간은 공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움직이지 않는 그 특정한 순간들을 결합하면 최초의 그 운동이 재현될 수 있는 것일까? 베르그송에 따르면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우선, 운동을 공간의 이동과 동일화하는 것은, 움직이지 않는 순간이나 특정한 위치에 추상적인 연속 개념만을 추가한 것일 뿐이다. 연속하지 않는 두 점을 연속하는 것으로 취하기 위해 두 점 사이에 놓여있을 무수한 점들을 설정하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를 위해 연속이라는 개념을 추가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뿐이다. 이 관점에서 운동과 공간은 실질적인 차이가 없다.

운동과 관련하여 베르그송의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그 무수한 직선상의 점들을 실제로 통과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불연속하는 계기들이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연속을 갖기 위해서는 이 계기들간에 존재하는 새로운 양태가 필요하지 않을까? 만일 운동이 움직이지 않는 단편이나 공간화된 위치를 통해 유추된 것이라면, 공간과의 실제적인 차이는 무엇에 근거하는가? 이와 같은 베르그송의 질문은 존재와 관련하여 보다 근원적인 논의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우선적으로 이 질문은 운동과 공간이 실질적인 차이를 갖는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에 따르면 운동은 공간의 이동이 아니라, 공간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운동은 언제나 실제적 지속 안에서만 발생한다. 그리고 이 실제적 지속이 바로 질적 차이를 의미한다. 베르그송은 처음에 매우 단순한 동기에서 시작하였을 것이다. 아킬레스는 어떻게 앞서가고 있는 거북이을 추월할 수 있을까? 철학은 아킬레스의 운동을 무수한 점들의 통과로 이해함으로써, 아킬레스와 거북이 간에 놓여진 거리를 해소할 수 없는 심연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의 경험과 모순적이다. 아킬레스 뿐 아니라 모든 존재들의 거리가 실제로 좁혀져 추월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는 이 모순을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논제를 던진다: 아킬레스의 운동(그리고 거북이의 운동)은 둘 간에 놓여진 공간의 이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과 거북간의 관계 전체, 다시 말해 아킬레스와 거북의 관계를 포함하고 있는 공간적, 시간적, 더 나아가 우주 전체의 변화를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그 운동은 점들의 단순한 통과가 아니라, 점들의 배열 자체, 혹은 이 점들이 포함되어 있는 좌표계 전체의 변화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실질적 차이의 의미이다. 나의 한발의 운동은 나를 둘러싼 우주 전체의 변화이다.

운동은 공간을 지나가면서 매 순간 공간을 감싸고 있으며, 시간적으로 현재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이질적이며 환원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운동은 분리될 수가 없고, 분리하기 위해서는 분할되는 매 순간들의 질적 변형이 요구된다. 반면에 공간은 시간적으로 과거이며, 동질적이다. 따라서 하나의 점과 다른 하나의 점은 질적인 차이가 없고 단선적이다. 공간은 쪼갤 수 있고 분할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운동과 공간의 질적 차이는 다음과 같은 명제를 함축하고 있다: "우리는 공간 속의 위치들(positions) 또는 시간 속의 어떤 순간들을 가지고는 운동 자체를 재구성할 수 없다"(Deleuze 1). 따라서 베르그송에 의하면 운동에 관한 두 가지 공식이 서로 대립을 이루고 있다. (1) 분할할 수 없는 매 순간의 질적 변형으로서 실제적 운동 혹은 지속 (2) 분할 가능하고 불연속하는 단편들의 집합과 사유에 의해 구성된 시간으로 이루어진 공간적 운동.

베르그송에 의하면 우리의 지각은 실제의 흐름이나 운동을 신체의 물리적 장치를 통해(감관, 신경계 등) 혹은 지식의 장치(사유)를 통해 스냅샷을 찍듯이 외부의 자극을 수용한다. 지각은 실제의 운동을 자르고 재연결하는 일련의 메커니즘을 갖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의 운동을 잘못된 형식으로 재현하는 것으로서, 베르그송은 이를 『창조적 진화』에서 영화적 환영(the cinematographic illusion)이라 불렀다. 따라서 영화는 두 수준의 형식적 운동을 통해 구성된다. (1) 이미지라고 불리는 순간적인 파편들이 있으며, 이 파편들은 공간적으로 결정된 움직이지 않는 이미지이다. (2) 이 파편들을 연속하는 것으로 만드는 영화적 장치들의 운동이 있다. 이 운동은 비인간적인 운동이며, 단일하고도 동질적인 운동, 즉 추상화된 운동이다. 따라서 이것은 지각되지 않으며, 지각을 넘어선 형식적 운동이며, 공간화된 시간이다. 예를 들어 장치의 속도의 증감에 따라 이미지들의 연속적 운동의 양태는 전혀 다르게 지각될 것이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영화는 그 자체로 움직이지 않는 단편적인 이미지들을 외적 장치에 의해 연속의 환영을 만들면서 운동을 재구성한다. 그래서 영화는 운동을 직선상의 점들의 통과로 이해하는(제논의 역설) 고대적 사유방식과 다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영화가 재현하는 운동은 잘못된 운동의 전형이다.

2. 운동을 재 구성하는 두 가지 유형

『창조적 진화』에서 베르그송은 운동을 양적으로 재구성하는 두 가지 방식에 대해 언급한다. 이 두 방식 모두 실제의 운동 자체와는 관계가 없다.

(1) 고대철학에서 운동은 지성이 파악할 수 있는 요소들과 관계하면서 나오는데, 이는 사물로부터 초월하여 그 본질을 표현하는 형상이나 이데아의 질서에 의해 가능하다. 예로, 물은 차가운 상태와 뜨거운 상태만이 포착될 뿐이다. 상태들간에 놓여진 무수하고도 실제적인 이행은 지성이 파악할 수 없으므로, 물 온도의 운동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운동은 변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것들의 추상적 종합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형상은 물질의 실제적 흐름과 관계하면서만 현실화되는 것이지만, 지성이 관심을 갖는 것은 실제의 흐름 자체가 아니라, 이들이 본질로서 드러나는 최종적 계기 혹은 특정한 순간(차가운 순간 혹은 뜨거운 순간)이다. 그리고 이 특정 순간들을 이상적으로 종합함으로써, 운동을 변증법적 질서에 따라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운동은 하나의 형상에서 다른 하나의 형상으로 규칙적이고도 단속적인 이행의 형식으로 구성된다. 운동은 물질의 흐름이 아니라, 사유에 의해 연역되어 초월적 질서를 갖는 포즈(pose) 혹은 특정한 순간들의 질서가 되는 것이다.

[고대 철학에서] 형상들 혹은 관념들은 본질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하나의 특정한 순간으로 특징지어진다. 이 순간의 나머지들은 이행으로 채워져 있으며, 형상이나 이데아는 이들의 운동 자체에는 관심이 없고, 다만 하나의 형태에서 다른 하나의 형태로의 이행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는다. [. . .] 따라서 그 순간은 최종적 순간 혹은 정점(telos, akme`)으로 간주되며, 이 정점은 본질적 순간으로 결정된다: 이 순간은 사물의 전체과정을 표현하기 위해 언어에 의해 포착된 순간이다. 또한 과학은 그 순간을 특징짓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 된다(Bergson 359).


실제의 운동을 변증법적 질서로 대체하는 것은, 이행이 완결된 것으로 간주되는 포즈의 이상적 종합이다. 이것은 공간 사이에 추상적 사유의 운동을 추가하는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운동을 재구성하는 고대적 방식은 자연적으로 주어진 지각과 관계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인간화된 관점 속에서만 확립될 수 있다. 지성을 이루고 있는 지각은 실제의 운동을 완전히 포착할 수 없으므로, 개념상 본질적이라고 파악되는 특정한 요소들을 뽑아내어 그 전체를 요약하고 재구성한다. 운동에 관한 고대적 재구성을 추상적 요약 혹은 초월적 종합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2) 현대과학은 이행이 종결된 특정 상태 혹은 본질의 순간을 통해 운동을 이해하지 않는다. 즉 운동은 더 이상 포즈들의 변증법적 종합에 의해 연결되지 않는다. 현대 과학은 자르고 재 연결하는 양적 메커니즘을 통해 운동을 불특정한 순간으로 재구성한다(이것이 테크놀러지의 심화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따져봐야 할 것이다). 물론 이 역시 운동을 양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긴 하지만, 더 이상 형식적이고 초월적인 요소들이 아니라, 물질적 흐름의 내재적 요소들(즉 파편들)로 재구성되는 것이다. 완결된 형상으로서 포즈들이 변증법적으로 구성되기 위해서는 이 포즈들간의 단절된 간극에 외적인 요소들(추상, 관념)을 끌어 들여야 한다. 그러나 현대적 의미에서 파편적인 요소들을 재구성하는 것은 운동 그 자체를 미분하여 축적하려는 노력이다. 즉 운동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순간들(불특정 순간들)을 표현하는 것이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순수)지각은 물질과 동일한 실재성을 갖는다. 또한 지각은 물질의 운동을 그 자체 내에서 전달하고 끊는다.

이런 식으로 하나의 궤도와 그것이 가로지르기 위해 필요한 시간의 관계를 결정함으로써 현대 천문학이 형성되고(Kepler); 떨어지는 물체가 갖는 시간에 뒤덮힌 공간을 연결함으로써 현대 물리학이 형성되고(Galileo); 현대 기하학은 평곡선의 방정식, 즉 움직이는 직선 위의 임의의 한 점의 위치를 [공간과 시간의 함수로]풀어냄으로서 성립된다(Descartes); 그리고 무한히 접근하는 면들을 검토하게 되면서 미적분학이 나온다(Newton과 Leibniz). 어디를 보든지 불특정한 순간들의 기계적 연속이 포즈들의 변증법적 질서를 대체한다: "현대과학은 우선적으로 시간을 독립변수로 간주하려는 열망에 의해 생겨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Deleuze 4). [ ]괄호는 필자


현대적 의미에서 운동은 그 물질적 요소들(감각적 요소와 같은 불특정 순간)의 기계적 연속으로 구성된다. 이에 따르면 운동은 이행하는 임의의 점(편재된 점)들을 감각적으로 포착하여 같은 거리로 균등 분할한 이 요소들을 적분한 총체를 의미한다. 그것은 더 이상 포즈의 종합이 아니다. 현대적 의미의 운동은 자연적 지각과 관계하지 않으며, 따라서 비인간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무차별적인 공간의 분할과 재 연결 혹은 양적인 것들간의 관계의 법칙에 의해 이루어진다. 운동의 현대적 재구성을 감각적 미분 혹은 내재적 분석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운동을 두 방향에서 설명해 왔다: 하나는 지적인 요소들의 개념적 종합으로서 변증법적 방식. 다른 하나는 감각적 혹은 물질적 분석에 의해 즉각적으로 포착된 불특정 순간을 미분하고 적분함으로써 구성하는 해석학적인 방식.

운동을 구성하는 방식에 있어 저 두 번째 방식을 따른 것이 바로 영화이다. 영화는 운동이 완결된 특정 순간이 아니라, 운동 중에 있는 불특정 순간을 잘라낸다. 다시 말해 그것은 시간이 생략된 단편이 아니라, 흐르고 있는 시간에서 임의의 구역을 잘라내는 방식이다. 영화의 결정적인 조건으로서의 스냅 샷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이점에 있어서는 영화와 사진의 근본적인 차이를 발견하기 힘들 것이다. 따라서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운동-이미지의 불특정한 어떤 블록이다. 또한 이 블록에는 실제의(시간의) 부피가 내재해 있으므로, 운동은 그 자체로 내재적 성질을 갖는다. 블록은 하나의 순간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베르그송이 지속(dure'e)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실제의 운동과 시간에 스며들어 있는 부피였다. 그 유명한 Muybridge의 말 촬영에서 하나의 예를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말의 운동을 분석하기 위해, 달리는 말을 동일한 간격의 빛으로 포착함으로써, 운동과 빛의 물질적 함수관계를 시간으로 매핑(mapping)한다(달리는 말은 카메라에 연결된 줄을 끊고, 끊어진 줄은 말의 운동 간격에 따라 카메라의 셔터를 누른다). 이때에 잘려진 단편은 지적인 요소로 추상화된 하나의 상태가 아니라, 물질적 요소들로 채워져 실제의 부피를 갖는 면을 이루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영화는 실제의 운동을 쏙 빼놓은 포즈들의 결합이 아니라, 꽉 들어찬 시간의 어느 한 구역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영화가 근본적으로 유물론에 그 존재론적 토대를 두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운동의 단편에 관한 이 같은 영화적 해석은 운동을 전혀 다른 수준에서 정의하게 한다. 우선 운동을 설명하는 두 유형 중에서 전자의 경우, 즉 고정된 순간이나 그 단편으로부터 설명하는 방식은 운동의 발생 근거를 그 자체에서가 아니라 외부적 결정요인에서 찾는다. 추상적인 하나의 점이 운동성을 갖기 위해서는 다른 형태의 추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즉 시간적 부피나 평면으로부터 설명하는 방식은 운동의 발생 근거를 그 자체 내에서 찾는다. 시간의 부피를 갖는 이 블록들의 간격 사이에는 다른 외재적 힘이 들어갈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운동은 재현되는 순간 전혀 다른 것으로의 질적 변형이 일어나므로, 우리는 그것을 자를 수도 없으며 재현할 수도 없다. 다만 양적인 냉각만이 있을 뿐이다. 운동을 재현하는 두 형식을 다음과 같이 구분해보자: 회화적 방식으로서 초월적 요약. 그리고 영화적 방식으로서 내재적 냉각. 전자의 경우 운동 그 자체는 생략되고, 후자의 경우에는 그 자체로 얼어붙는다.

3. 들뢰즈: 운동-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영화

베르그송이 말했듯이 우리의 지각이 지식이나 신체의 장치를 통해 실제의 운동을 단속적으로 잘라서 이를 재구성하는 것이며, 이를 영화가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눈을 깜빡거리면서 언제나 영화를 찍고 있는 것인가? 혹은 우리가 스크린을 보면서 실제로는 눈앞에서 움직이는 사물의 동작들을 사유하고 있는 것인가? 현상학자들을 모호하게 언급하면서 들뢰즈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영화는 자연적 지각과 두 가지 점에서 다르다. 또한 이 차이는 운동과 관련하여 영화를 새로운 국면에 위치시킨다.

(1) 영화는 운동이 (사유에 의해)부가된 이미지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운동하는 이미지와 운동 그 자체의 이미지를 제시한다. 영화가 단편적인 필름 조각(photogramme)들을 결합하여 일정한 속도(24/sec, 18/sec)를 갖는 장치를 통해 연속의 환영을 만들어내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우리가 영화를 통해 보는 것은 각각의 조각들이 아니다. 우리는 그 조각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이미지를 보는 것이지 그 조각들 자체를 보지는 않는다. 따라서 단편적 조각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운동은 우리의 지각이나 사유를 통해서가 아니라 이미 영화적 장치에 의해 실현되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영화에서의 이미지는 사유에 의해 운동이 추가된 것이 아니라, 이미 운동이 내재하고 있는 이미지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평균 이미지(intermediate image)이며, 이 평균 이미지에 운동이 부가되거나 추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즉각 주어진 것으로서 평균 이미지에 운동이 속하게 된다"(Deleuze 2). 자연적 지각에서 운동은 지각의 대상 뿐 아니라 지각을 가능케 하는 조건들에 의존해 있다. 현상학자들에 따르면 지각의 주체는 이미 세계 안에 존재하고 있는 실존이다. 이것이 바로 주체의 세계-내-존재, 세계에의 정박, 혹은 의식의 열림을 가능케 해주는 실존의 근거들이다. 이로써 지각은 곧 존재를 포함하는 세계를 의미한다. 그러나 영화적 지각에서의 운동은 이 대상들과 조건에 관계없이 그 자체 내부에서 즉각적으로 운동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다시 말해 영화는 주체의 실존적 조건으로서 세계의 지평을 배제함으로써 대상들을 빼고 그들로부터 운동의 순수 이미지만을 추출해 낸다. 이로부터 세계는 그 자신의 이미지가 되거나, 나아가 지각 뿐 아니라 하나의 앎의 형식이 되어 버린다(현상학은 자연적 지각을 우위에 두고 영화적 운동이 자연적 지각의 조건에 맞지 않기 때문에 영화를 비판했다. Deleuze 57을 참조하라). 영화는 우리에게 운동이 부가된 이미지가 아니라 즉각적으로 운동-이미지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연적 지각과 영화적 지각은 질적으로 다르다. 우리가 스크린을 통해 보는 것은 사물의 움직임이 아니라, 이미지의 움직임이며 동시에 움직임의 이미지이다: "영화는 하나의 단편(단면)을 제공하지만, 여기서의 단편은 움직이고 있는 단편이지, 움직이지 않는 단편 + 추상화된 운동이 아니다"(Deleuze 2). 자연적 조건들을 넘어서는 운동-이미지는 영사장치의 속도에 의해 이미지의 운동양태가 달라진다는 점만을 보아도 알 수 있는 문제이다.

(2) 영화는 고정된 관점을 취하는 자연적 지각과는 전혀 다른 메커니즘으로 운동을 생산한다. 물론 영화는 초기에 자연적 지각과 다르지 않았다. 우선 관점(카메라)이 고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때의 쇼트는 그 안에 배열되어 있는 부분 대상들이 점유하고 있는 텅 빈 공간, 혹은 데카르트적 공간처럼 구성된다. 영화 초창기의 프레임은 일종의 좌표계처럼 설정되는데, 따라서 쇼트는 공간적이었고 부동적인 것이었다. 또한 촬영 장치 역시 영사장치와 결합되어 있었으므로, 배치된 사물들을 포함하고 있는 단일한 하나의 추상적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영화의 본질과 그 자신의 고귀함은 카메라가 이동하게 되면서부터 획득하기 시작했다. 카메라의 이동은 고정된 관점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공간의 이동이나 확장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카메라의 이동은 두 차원에서 실행되는데, 하나는 카메라의 실제적인 이동(트래킹 쇼트나 패닝 등)이며, 다른 하나는 쇼트의 편집(몽따쥬)이다. 전자의 경우 운동은 지각과 완전히 분리된 형태는 아니다. 카메라는 마치 우리의 눈이 그렇게 하듯이 사물들을 포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근본적인 수준에서 공간적 범주에 속했던 쇼트가 시간적 범주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선 몽따쥬에 의한 공간적 비약은 (관객의)지각으로 하여금 시간이라는 변수를 개입시키도록 강요한다. 쇼트 A와 쇼트 B의 이질성은 공간 뿐 아니라 시간적 변수에 의해 연속성을 갖게되는 것이다. 또한 몽따쥬는 프레임 안에 위치하고 있는 사물들을 배치하는 좌표계 자체의 이동과 변화를 의미한다. 몽따쥬는 좌표점들간의 공간적 운동이 아니라 좌표계 자체의 운동을 실현하는 것이다. 쇼트 내에서 움직이지 않고 정지해 있는 인물이나 사물을 보여주는 경우에도, 쇼트의 편집은 시간적 변화를 내포하고 있다. 쇼트가 시간적 범주가 됨으로써 영화에서의 운동은 이제 인물이나 사물들간의 이동이나 위치에 종속되거나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들을 운동과 변화 속에 종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영화는 운동의 공간이 아니라 공간의 운동을 생산한다. 몽따쥬는 현실을 하나의 시점에서가 아니라 다양한 관점에서 탐구하는 것인데, 이로부터 시간은 클로즈-업 되어 현실의 심오한 내적 시간이 획득된다. 여기에 "적극적 관찰자(active observer)"(Pudovkin 82)라는 개념을 사용한 푸도프킨의 좋은 예가 있다: 몽따쥬는 거리의 데모를 구경하기 위해 지붕 위에 올라가서, 다시 군중이 들고 가는 플래카드를 읽기 위해 창가로 내려오고, 군중들의 표정을 느끼기 위해 그 속에 섞인다.

베르그송은 존재 일반을 포함하는 단일한 하나의 지속이 아니라 존재들 각자에 스며든 다양한 내적 지속을 주장했는데, 그가 『창조적 기억』에서 언급했듯이 영화는 잘못된 운동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가 주장했던 지속의 다양성을 영화가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4. 운동-이미지란 무엇인가?

시간과 관련하여 사진은 수학적 의미의 점의 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은 시간의 모든 지속을 제거해버린 하나의 추상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화석의 이미지이다. 따라서 사진은 시간의 실질적인 부피나 두께를 가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영화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베르그송이 말했듯이, 영화의 실제적 조건인 스냅사진들의 결합(동일한 간격을 갖는)과 연속은 잘못된 운동을 보여주는 것이므로, 영화 역시 시간이나 운동과 관련하여 화석의 이미지라고 말할 수 있을까? 베르그송이 영화를 추상적 점들의 결합으로, 그리고 운동의 환영으로 이해하면서 이를 비난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영화를 사진과 관련지어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에 대한 이와 같은 형태론적 접근에도 불구하고, 베르그송은 이미 『물질과 기억』에서 사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운동을 구현하고 있는 영화적 운동을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 책 1장에서 사유와 운동의 이원론적 대립의 해소라는 주제를 위해 그가 설정했던 "이미지"의 개념을 영화가 가장 잘 예증해주고 있다.

의식은 공간에 펼쳐지지 않은 질적인 표상이며, 물질은 공간 속에서 양적으로 펼쳐진 운동이다. 이제 의식과 사물 혹은 표상과 운동이라는 서로 다른 두 질서가 마주보고 있다. 적어도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적인 구분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두 질서의 이행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에 있다. 지각에서와 같이 연장성을 갖는 물질의 운동이 어떻게 비연장적인 표상으로 이행할 것인가? 반대로 (가능한)행동에서처럼 표상이 어떻게 운동으로 전환될 것인가? 관념론과 유물론의 해소할 수 없는 이 대립은, 동일한 문제를 서로 다른 방향에서 출발함으로써, 사유의 표상과 물질의 운동을 서로 도달할 수 없는 심연으로 만들어 놓았다. 따라서 유물론은 순수한 물질의 운동을 가지고 의식의 질서를 재구성하고자 한다. 표상은 물질적 운동으로부터 비롯된 비 실재적 효과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지각이 표상한 내용은 물질의 외양에 불과한 것이며, 물질의 심층에는 지각과는 독립하여 질적으로 다른 무엇인가가 존재한다. 반대로 관념론은 의식 안에서의 순수한 이미지들로 우주의 질서를 재구성하고자 한다. 이에 따르면 잠재적 표상 안에 이미 운동이 존재한다. 같은 말이지만 물질은 우리의 지각 안에서 구성되고, 표상은 물질의 본질을 결정하는 것이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관념론과 유물론은 너무 덜 나아갔거나 혹은 너무 나아갔다. 이들은 각각 실재하고 있는 하나의 질서만을 긍정하고, 다른 하나의 질서를 전자의 부정으로서 즉 파생실재로 결정함으로써, 두 질서를 이원론적으로 구성하였다. 이로부터 의식과 사물은 접근할 수 없는 심연을 사이에 두고, 표상은 그 자신의 이미지 안에서 물질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 반대 역시 어떠한 실재로 나아가지 못한다. 우리는 이로부터 물질을 표상으로 망상하거나, 혹은 물질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가 없게 된다. 이렇게 해서 정신은 우리 자신의 영역으로 제한된다: "우리가 취하는 지각으로 물질을 환원하는 것이나, 사물이 그 자체 다른 본성을 갖는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지각 안에서 생산될 수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은 모두 오류"이다(Bergson Matter and Memory xi). 따라서 베르그송은 정신과 물질이 어떻게 접면을 이루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필요했으며, 표상과 운동 그리고 의식과 사물의 이원론을 극복해야만 했을 것이다. 『물질과 기억』의 서문 첫줄에서 베르그송은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정신의 실재와 물질의 실재의 긍정. 그러나 어떻게 서로 다른 심연이 관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실제로 사물들을 접하고 있으며, 우리의 내부에서 이들을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또한 이 둘을 너무 멀리에 놓음으로써 주관적 경험이 객관적 질서와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를 잃어버린 것이 사실이 아닌가?

가설적 이론이 직접적인 체험과 일치하지 않거나 이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게 되었을 때, 필요해지는 것은 경험을 설명해줄 수 있는 새로운 기제를 연역하는 일이다. 표상과 사물의 관계를 분명히 하기 위해, 베르그송은 『물질과 기억』의 1장에서 두 가지 이례적인 이론을 언급하고 있는데, 하나는 이미지에 대한 새로운 가설이며, 다른 하나는 새롭게 정의된 이미지와 관계하는 지각에 대한 가설이다. 이런 점에서 그 책 1장에서의 이론은 문제를 두 방향에서 접근하고 있는 셈이다. 하나는 물질-운동의 관점에서 시작하는 방향이며, 다른 하나는 지각의 관점에서 시작하는 방향이다.

(1) 나타나는 모든 것들의 집합을 이미지라고 부르자. 그에 따르면 이미지는 물질과 동일한 것이다. 물질은 이미지의 집합이며, 반대로 이미지는 물질의 집합이다. 나아가 우리가 우주라고 부르는 것 역시 이미지의 총체로 이루어져 있다. 이미지에 관한 이 정식은 심리학의 역사에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즉 이것은 이미지가 더 이상 의식 안에 존재하고 있는 비연장적인 표상이 아니며, 물질 역시 의식적 표상으로서의 이미지와 근본적으로 구분되어 주관성으로부터 초월적인 신비물이 아님을 함축하고 있다: "물질은 이미지들의 집합이다. 우리가 말하는 이 이미지란 말하자면 관념론자들이 말하는 표상보다는 더한 존재이며, 유물론자들이 말하는 사물보다는 덜 한 존재이다. 즉 그것은 사물과 표상의 중간에 위치한 존재이다. 물질(이미지)에 대한 이 개념은 매우 단순하고 상식적인 것이다"(Bergson Matter and Memory xi). 관념론은 사물을 가깝게 놓기 위해 그것을 정신과 동일시했으며, 유물론은 정신으로부터 독립된 질서 속에 그것을 놓음으로써 우리로부터 너무 먼 곳에 사물을 놓았다. 사물이 우리의 정신 안에만 있는 것이라거나 혹은 우리가 지각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독립된 것이라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그러니 상식의 수준에서 그 사물은 그 자신 안에 존재하며, 반면에 우리가 그것을 지각함에 따라 하나의 이미지가 된다. 따라서 이미지는 의식적 지각 안에 존재하는 표상일 뿐 아니라 사물과 본성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다. 이미지는 우리가 사물을 지각하는 바대로 거기에 혹은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 이미지가 물질과 표상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가 지각하는 대상이 사물이며 세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미지, 즉 물질은 곧 우리의 지각이며, 그 내부에 혹은 그 배후에 어떠한 심층도 내포하고 있지 않다.

우주를 이루고 있는 이미지들 각각은 서로 다른 이미지들에 작용하고 반응한다. 오히려 각각의 이미지는 그 자신이 작용이며 동시에 반응이다. 이들은 서로 주고받는 운동을 통해서 스스로를 변형시키며, 다른 이미지들을 통과시키고 통과한다. 심지어 모든 사물 즉 이미지들은 자신들의 작용이나 반작용과 혼동되어 표면화된 운동을 이루고 있다: "이 모든 이미지들은 그들의 기본적인 부분들 속에서 다른 이미지에 작용하고 반응한다. 이 상호작용은 내가 자연의 법칙이라고 부르는 끊임없는 법칙들에 따라 작용하며, 이미지들의 미래는 그들 현재 안에 포함되어 있으며, 거기에 새로운 어떤 것도 첨가되지 않는다"(Bergson Matter and Memory 1). 또한 이미지는 우리의 외관에 주어진 원자적 실체로서만 정의되지 않는다. 우리의 신체 역시 물질이며 이미지이다. 우리의 두뇌, 신경, 기관, 세포, . . . 이 모든 것들은 이미지이며, 우주를 이루고 있는 이미지 총체의 부분들이다. 따라서 나의 몸은 쉼 없이 증식하고 소멸하며 변형이 이루어지는 분자-이미지와 원자-이미지들의 집합이다: "이것은 보편적 변이의 세계, 보편적 파동, 보편적 물결(파문)의 세계이다: 거기에는 축도, 중심도, 좌/우도, 상/하도 없다. 모든 이미지들의 이와 같은 무한한 집합은 일종의 내재성의 표면(plane of immanence)을 이루고 있다. 이 표면 위에서 이미지는 그 자체로 존재한다. 이러한 이미지의 즉자성. 이것이 바로 물질이다: [물질은] 이미지의 배후에 숨겨진 어떤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이미지와 운동의 절대적 동일성이다. 이미지와 운동이 동일하다고 간주되는 순간 우리는 즉시 운동-이미지와 물질이 동일하다고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 . . 운동-이미지흐름-물질은 분명히 동일한 것이다"(Deleuze 58-59).

(2) 그렇다면 중심이나 심층이 없이 부분적인 이미지들 각각의 고유한 운동 속에서 내재적 표면을 이루는 운동-이미지가 어떻게 하나의 표상으로 혹은 단단한 실체로 구별될 수가 있을까? 또한 물질의 흐름을 누가 구별할 수 있을 것인가? 나의 신체나 두뇌 역시 그 이미지들과 동일한 실재성을 갖는 하나의 이미지가 아닌가? 유물론자들에 대한 베르그송의 비판은 물질이 의식적 표상으로 이행되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으로 집약될 수 있는데, 바로 여기에서 운동-이미지의 또 다른 체계 즉 신체의 지각이 언급되고 있다. 만일 나의 지각이 사라지거나 미약해 졌을 때, 이 이미지-물질의 운동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때 우리는 하나의 특별한 이미지를 보게 된다. 이 이미지는 세계를 이루고 있는 이미지들 중 특정한 유형의 작용을 수용하고, 수용된 이미지들의 운동을 구심신경, 척수, 두뇌, 원심신경, 근육 등과 같은 통로-이미지들을 따라 다시 그 이미지들에게 운동을 되돌려준다. 외부의 이미지들을 선별하고 전달하여 다시 운동을 반사하는 이 특별한 이미지가 바로 신체(두뇌)이다. 나의 신체는 운동을 주고받는 물질 세계 속의 다른 모든 이미지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이미지이다: "우주 일반을 이루고 있는 이미지들이 있고, 내 육체에 근접한 이미지들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내 육체 자체의 이미지가 있다. . . . 나는 물질을 이미지들의 총체라고 부른다. 그리고, 물질의 지각은 이와 동일한 이미지인데, 이것은 내 육체라고 불리는 특별한 이미지의 실제적인 행위에 속한다"(Bergson Matter and Memory 7-8).

운동-이미지가 육체와 관계함으로써 그 운동의 양태는 달라질 것이다. 이들은 우선 육체에 수용되어 육체를 중심으로 상대적인 운동에 들어간다. 육체를 싸고 있는 표면과 관계된 분자운동은 구심신경을 통해 다양한 진동으로 전달되어 중추계로 집결되고, 혹은 두뇌에 도달한 진동은 이런 저런 방식에 의해 원심신경으로, 그리고 다시 각 감각기관 혹은 근육으로 전달될 것이다. 중심을 가지지 않는 이미지의 운동은 중심을 갖는 육체 이미지의 내적인 운동으로 변조를 이룬다. 자신의 고유한 법칙으로 운동하던 이미지들은 나의 육체가 그것에 접근하거나 그것으로부터 멀어지는 정도에 따라, 색, 모양 뿐 아니라 심지어 모든 특질들이 변한다. 지각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러한 분자운동의 내적 이행들 속에서 육체-이미지를 중심으로 배열되고 통과하면서, 내 육체의 위치들을 나타내고 지시하는 일종의 분자운동의 한 기능이다: "이 [내적] 운동은 처음부터 내 육체 안에서 외부 대상의 작용에 대한 내 육체의 반응을 준비하도록 의도된 운동들이다. 육체-이미지는 다만 매 순간 마다 움직이고 있는, 나침반처럼 주어진 특정한 이미지, 즉 주위의 다른 이미지들과의 관계 속에서의 내 육체의 위치를 지시할 뿐이다. . . . 그렇다면 두뇌의 지각 기능이라고 불리는 것과 척수의 반사 기능은 본성상의 차이가 아닌 정도상의 차이만 있을 따름이다. 척수는 수용된 자극을 운동으로 변형한다; 두뇌는 그것을 단순히 초보적인 반응으로 연기시킨다"(Bergson Matter and Memory 8). 따라서 (두뇌의)지각은 정신의 비물질적 표상이 아니라, 물질-이미지의 직접적 운동과 관계한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지각은 분자운동들을 번역한다. 마찬가지로 지각은 물질-운동과 동일한 위상에 있다.

이와 같은 두 방향에서의 논거들은 이미지에 관한 이례적인 진술을 도출해 내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이미지가 취하고 있는 이중적 체계이다. 동일한 하나의 이미지는 두 방향의 지시체계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각 이미지가 스스로 다양해지고, 모든 이미지들이 서로간의 기능으로서, 그들의 모든 면들 위에서 그리고 모든 부분들 속에서, 작용과 반응을 일으키는 하나의 체계가 있다"(Deleuze 62). 우리는 이를 편의상 물적 상태의 이미지, 다시 말해 운동-이미지라고 부른다. 물적 상태는 중심에 의해 가변적인 상대적 변화가 아니라, 그 자신만의 고유한 운동 법칙에 따라 절대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체계를 이룬다. 중심이 없이 부분들 그 자체로 존재하는 체계. 유물론자들에게 있어 이것은 딱딱하고 고집스러우며 포착이 불가능한 물질-신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미지는 또 하나의 지시 체계를 가지고 있다. 모든 이미지 혹은 그 부분들이 "기본적으로 하나의 이미지를 위해 다양해지고, 다른 이미지들의 작용을 그 면들 중 하나에 수용하며, 또 다른 하나의 면 위에서 그 이미지들에 반응하는 체계"이다(Deleuze 62). 이 하나의 특별한 이미지는 바로 육체, 혹은 그로부터 나오게될 지각이다. 육체라는 중심을 갖는 이미지의 체계. 그리고 이 중심의 작은 변화에도 말랑거리고 변덕스러운 이미지의 체계. 우리는 이를 편의상 지각-이미지라고 부른다(이미지의 두 체계에 대해서는 Bergson의 Matter and Memory 12-16쪽을 참고하라). 베르그송은 유물론이 이미지의 첫 번째 체계를 통해 두 번째 체계를 결정했으며, 관념론은 두 번째 체계로써 첫 번째 체계를 정립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두 체계가 어떻게 동일한 실재성으로 관계를 갖는지 설명하기 위해, 이 두 입장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면, 즉 내재적 표면으로서 운동-이미지를 상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세계 일반을 이루고 있는 이미지가 있으며, 이 이미지의 한편에는 물질-운동의 체계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지각-운동의 체계가 있다: "사물과 그 사물에 대한 지각은 동일한 하나의 사물이며, 동시에 동일한 이미지이다. 그러나 이 동일한 이미지는 서로 다른 체계와 관계한다. (1) 사물은 그 자신 안에 존재하는 즉자적인 이미지이며, 다른 모든 이미지들과 작용하고 반응하면서, 서로 완전한 관계를 맺고 있다. (2) 그러나 사물에 대한 지각은 그 사물의 이미지에 틀을 설정하고 초점을 맞추는 또 다른 특별한 이미지[육체]에 관계하면서, 그 사물의 이미지로부터 부분적인 작용만을 수용하고, 간접적으로만 반응한다"(Deleuze 63).

그러므로 물질과 지각은 서로 양적인 차이만을 갖는다. 지각은 물질-운동으로부터 필요에 따라 이러저러한 물질의 면과 선들을 선택한다. 우리는 사물들을 지각하면서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은 이미지들을 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지각은 주관성의 최초의 물질적 상태를 정의하는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각은 이미지들의 집합 중에서 육체가 요구하는 것을 선별하고 그 나머지는 감산한다. 그러나 지각이 사물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이미지라면 사물 역시 지각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물질-운동의 체계 속에서 중심을 갖지 않는 이미지는 다른 이미지들의 면과 선에 작용하거나 반응하면서 그들을 지각한다. 오히려 우리의 지각보다 더 많은 것들을 지각한다. "하나의 원자는 . . . 우리보다 무한히 더 많은 것들을 지각한다. 그리고 그 자신의 한계에서, 최초의 작용들이 일어나는 지점에서, 그 반응들이 도달하는 한계까지, 우주 전체를 지각한다. 사물과 그 지각은 한마디로 말해 포착(prehension)이다. 그러나 사물들은 객관적이고 총체적인 포착이며, 지각은 부분적이며 편파적이며 주관적인 포착이다"(Deleuze 63-64).

바로 이점에서 베르그송은 현상학과 구별된다. 현상학에서 자연적 지각은 세계 내에 위치한 주체의 의식의 열림으로 간주된다("의식은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이다"). 따라서 자연적 지각은 운동-이미지와 본성적으로 차이나는 것으로 간주된 의식이 어떻게 운동-이미지와 관계하는가의 난제를 해결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현상학에서 자연적 지각은 의식의 열림이지 물질의 표면은 아니다. 현상학은 여전히 의식과 물질의 이행을 외재적(초월적) 방식으로 이해했으며, 운동을 포즈(pose)와 연결 지어 생각했다. 베르그송은 유물론과 관념론이 물질과 표상을 서로 대립적인 관점에서 논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간에는 이례적으로 한가지 공통된 가정이 있다고 지적한 바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들이 지각을 순수한 인식의 문제로 간주하고 있다는 점에서였다(Bergson Matter and Memory 17). 이런 의미에서 현상학은 관념론이나 유물론과 마찬가지로 지각을 주관성의 계열에 놓음으로써 여전히 전통적 방법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Deleuze 60). 반면에 베르그송에게 있어 지각은 의식의 열림이기 이전에 이미 물질-운동과 동일한 이미지이다("의식은 어떤 것이다"). 이것은 의식과 사물 나아가 존재에 관한 보다 근본적인 차이를 수반할 것이다. 현상학의 경우 이미지와 운동은 동일한 것이 아니며, 동일한 내재적 평면을 이루고 있지도 않다. 다만 이 두 심층이 서로 열려있기는 하다. 베르그송의 경우 이미지와 운동은 동일한 것이며, 동일한 평면 위에 내재하고 있는 동일한 실재이다. 이미지는 운동이며 그 자체로 하나의 이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운동-이미지는 의식과 물질의 이행을, 나아가 운동일반을 내재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내재성의 면이란 바로 이런 의미이다. 다만 육체와 관계하는 한에서 운동-이미지는 그 양태가 달라질 것이다(들뢰즈는 나중에 이를 지각-이미지, 행동-이미지, 감정-이미지 등으로 분류하였다). 따라서 운동-이미지의 한편에는 지각이 다른 한편에는 물질의 운동이 동시에 내포되어 있다. 운동-이미지는 주관성의 물질적 순간이며 동시에 객관성의 정신적 순간이다. 그것은 그 자체 하나의 이행이다. 주관성과 객관성은 운동-이미지라는 동일한 평면 위에서 하나의 표면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와 관련하여 이 모든 것들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영화의 역사를 훑어보면 사진의 단절과 연속을 포함하는 이미지의 운동이 주요한 관건으로 등장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리피스 이후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영화의 언어 역시 이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운동-이미지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강렬한 효과에 집중하는 것이든, 아니면 표현된 의미에 집중하는 것이든 간에, 이것이 영화적 편집(montage)의 근본적인 질문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영화의 형식뿐 아니라 내용을 이루고 있는 것, 즉 영화의 물질성에 대한 문제가 될 것이다. 우리는 운동-이미지를 물질-운동과 동일한 것이라고 언급해왔다. 그러나 더 구체적으로 혹은 영화적으로 말한다면 운동-이미지는 빛의 운동이 아닌가? 사진으로 되돌아가 말해보자: 피사체의 이미지가 어떻게 감광판에 투사되는가? 지각과 이미지를 의식의 영역으로 제한하는 이론은 언제든지 이 문제를 두뇌의 기적적인 권능에 의해서만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투사된 그 이미지가 실제의 피사체와는 다른 본질(실재성)을 갖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베르그송이 말했던 운동과 지각의 동일한 실재 때문이기 이전에, 이미 우리는 그렇게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물의 표면이 빛을 발하면서 나의 각막이나 피부로 다가온다. 나의 신체로 다가오는 그 운동-이미지를 우리는 빛의 운동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내재성의 면은 모두가 빛이다. 운동, 작용, 반응들의 집합은 여기저기에 편재하는, 저항 없이, 손실 없이 퍼져나가는 빛이다. 이미지와 운동의 동일함은 곧 물질과 빛의 동일함과 다르지 않다. 물질이 빛인 것처럼 이미지는 운동이다. . . . 베르그송이 원했던 것은 . . . 내재성의 면 전체 위에서 발생하는 빛의 분산 혹은 확산의 긍정이다. 운동-이미지에서는 아직 실체나 단단한 선들은 없고 오로지 빛의 선들 혹은 형상들만 있다. 시간-공간의 블록들은 바로 그런 형상들이다. 그것은 즉자적인 이미지들이다. 그것이 누군가에게, 즉 눈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것은 빛이 아직 반사되거나 정지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계속 퍼져 나가지만 결코 드러나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눈은 [의식, 주관이 아닌]사물들 속에, 빛나는 이미지들 자체 속에 있다. 사진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사물들의 내부 자체 안에, 공간의 모든 지점에서 이미 포착되어 있으며 촬영되어 있다"(Deleuze 60). 따라서 우리는 영화의 역사에 있어 영화의 내용을 이루고 있는 문제가 다름 아닌 빛의 문제, 더 심오하게는 어둠의 문제였음을 알게된다. 초창기의 환등(magic lantern)은 촛불과 같은 인공적인 빛을 모으면서 시작되었다. 후에 석회를 백열하는 상태까지 가열시켜서 만든 회광등(limelight)에 의해 전기가 촛불을 대신하게 되었다. 회전 요지경(thaumatrope)은 지각을 왜곡시키는 빛의 잔상효과를 이용해 만들어졌다. 페나키스티스코프(Phenakistiscope), 죠트로프(Zoetrope), 프락시노스코프(Praxinoscope)와 같은 영상장치들은 작은 구멍을 통해 빛을 배열, 분산, 연속, 단절시키는 문제로 집약될 수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사진은 빛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물질을 이용한 것이다.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가 나온 이후, 아크등(arc light)과 렌즈가 추가되었으며, 노출 때보다 더 많은 빛을 모으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 계산되기 시작했다. 에디슨의 약한 확산광을 수정한 것이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래프(Cine'matographe)이다. 영화의 물리적 조건에만 빛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편집과 같은 언어 예술적 측면에서도 그랬다. 예를 들어, 에이젠슈타인은 감각의 몽따쥬를 통해(공감각) 모든 물질-운동을 빛의 형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표현주의자들은 열정의 강렬함을 바로 빛과 어둠의 대위법으로 구성했다. 이뿐만이 아닐 것이다. 영화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운동뿐 아니라, 우선적으로 빛의 물리학으로부터 빛의 예술로 진화한다.

우리가 만일 지각과 운동에 대한 현상학의 논의를 수용한다면 영화가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현상학자들에 따르면 영화는 일종의 의식의 파노라마이다. 영화는 우리가 꿈을 꾸든지 혹은 상상을 하든지, 지각에 의해 포착된 이미지 단편들을 의식 안에서 외부로 풀어내고 있는 일종의 이야기 형식으로서의 릴이다. 그런데 베르그송이 운동과 관련하여 영화를 비난했던 것은 정확히 바로 이것이 아닌가? 운동은 우선적으로 빛과 관련되는데, 의식의 파노라마란 말하자면 사물에 투사되고 있는 의식의 빛이 아닌가? 이에 따르면 물질은 애초에 어둠의 상태였다. 그 존재는 마치 검은 벽에 환등기의 빛이 영사되어 윤곽이 드러나듯이, 의식의 빛에 의해서만 현존하게될 것이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우리는 영사기-의식과 스크린-물질이라는 상보적인 두 개의 항을 도출하게 된다. 영화와 관련하여 누가 보고 누가 지각하고 있는가를 질문한다면, 현상학은 의식의 눈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러한 대답은 사물의 운동에도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베르그송은 이와는 반대이다. 그에 따르면 빛은 의식이 아니라 이미 사물 그 자체 내에서 발하고 있는 것이다. 사물은 조명 빛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빛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영화만큼 잘 보여주는 것이 또 있을까? 마찬가지로 존재의 빛이 아니었더라면 영화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베르그송의 의도는 한마디로 의식의 눈이 아니라 물질의 눈에 있었을 것이다. 들뢰즈는 영화가 "운동-이미지의 첫 번째 체계인 보편적 변이, 총체적이고 객관적이며 모호한 지각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Deleuze 64). 베르그송에 의하면 이 모호한 지각이란 운동-이미지와 관계하는 지각, 엄밀히 말해 아직 기억이 스며들지 않은 의식적 지각 이전의 순수지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영화는 인간의 눈이 아니라, 순전히 기계의 눈 혹은 물질의 눈에 의해 포착된 이미지를 보여준다. 물론 하나의 쇼트에는 아주 많은 주관성의 징후들이 투사되어 있다. 앙드레 바쟁은 하나의 쇼트 내에서도 몽따쥬가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시적 영화(cine'ma de poe'sie)를 언급하면서 파졸리니는 자율적인 주체가 되어버린 카메라가 자의식을 갖게되면서 자유간접적인 주관성을 획득하게 된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하나의 프레임은 이미 주관적 배열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소련의 몽따쥬 대가들, 즉 쿨레쇼프나 푸도프킨 심지어는 에이젠슈타인조차도 주관성의 구성적 효과에 주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쇼트에는 기억이나 사유가 개입될 수 없는 순수지각의 층위가 여기저기에 편재되어 있다. 공중을 활공하는 카메라(예로, 크레인 쇼트)를 보면서, 우리는 어디서든지 사진이 찍히고 있으며, 의식은 어떤 것에 대한 의식이 아니라, 바로 그 자체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지가 베르토프가 선언(Kinoki)했던 골자일 것이다. 따라서 영사기-의식과 스크린-물질이 아니라 영사기-물질과 스크린-의식이라고 해야 옳다. 어떠한 저항도 받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는 운동-이미지 혹은 빛-운동은 단단한 실체로서 밀도 높은 그러나 불투명한 벽에 부딪히면서 그 자신의 이미지를 반사시킨다. 이것이 사진 뿐 아니라 영화의 존재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우주 어디에서든 촬영되고 영사되고 있는 것이다: "그 자체 영화로서의 우주, 메타시네마"(Deleuze 59).

따라서 한 장의 사진이 운동과 시간의 한 점, 즉 화석의 이미지라고 말할 수 있다면, 영화는 면, 그것도 운동하고 있는 면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영화는 화석의 진화, 즉 진화하고 있는 화석 그 자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나의 눈과 그 눈이 바라보고 있는 저 사물 사이에 아무것도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텅 빈 기하학적 공간은 영화에 대해 어떠한 설명도 할 수 없게 만든다. 내 눈과 저 사물 사이에는 무수한 이미지들, 즉 물질-빛-운동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 눈이 혹은 저 사물이 조금만이라도 움직이거나 달라진다면, 눈과 사물간에 놓여있는 꽉 찬 공간 전체의 크고 작은 굴곡이 일어날 것이다. 아킬레스가 거북을 추월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의 눈과 사물 사이의 공간을 냉각시키고 정지시켜 보라. 그리고 거기서 임의의 한 점 혹은 단면을 잘라내어 보라. 아마도 빛의 화석이 고스란히 담겨있을 것이다. 그것은 검은 감광판에 의식을 영사한 것이 아니라, 중심이 없으며 앞-뒤가 모호한 셀룰로이드 판과 같이 그 자체 빛을 내는 투명한 사진이 될 것이다. 사진은 순수지각의 임의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번엔 그 단면을 녹여 보라. 그 투명한 사진은 곧바로 빛-운동, 물질-운동의 집합, 즉 운동-이미지가 될 것이다. 베르그송에게 영화는 잘못된 운동의 전형이 아니라 가장 적절하게 운동-이미지의 예가 되고 있는 것이다.

베르그송이 제기한(오히려 이것은 발명이라고 해야한다) 이미지는, 순간으로 추상화되어 움직이지 않고 고정된 단편이 아니라, 움직이고 활동하고 있는 실질적인 단편으로서의 이미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이것은 보다 심오한 차원에서 시간의 단편이 아니겠는가? 운동-이미지는 보다 심오한 의미에서 시간-이미지와 관계하게 될 것이다. 시간의 실질적 부피는 아무리 잘게 잘라도 수학적 점의 상태로 환원할 수 없는 면이며 덩어리이다(그래서 거기에는 또한 모종의 간극 또는 거리가 내재하고 있다. 이 간극과 거리는 또한 생-이미지를 발생케 하는 조건이 될 것이다. 생명이 결정론으로부터 유일하게 벗어날 수 있는 지점은, 간격이나 거리로 가늠될 수 있는 망설임과 선택의 순간에 깃 든 긴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에 대해서는 Deleuze 62를 참조하라). 그가 제시한 이미지는 지성의 사유에 의해 유추된 부동의 단편적 이미지가 아니다. 그는 이미지로부터 운동과 시간을 배제하지 않았으며, 거기에는 쪼갤 수 없는 공백, 두께 혹은 꽉 들어찬 지속이 스며들어 있다. 이미 우리는 그로부터 정신과 물질의 동시성을 포함하고 있는 부피-이미지를 본 셈이다.

참고문헌

Bergson, Henri. Creative Evolution. trans. Arthur Mitchell (New York: Random House, 1944).

_____________ . Matter and Memory. trans. Nancy Margaret Paul & W. Scott Palmer (London: George Allen & Unwin LTD, 1950).

Deleuze, Gilles. Cinema I: The Movement-Image. trans. Hugh Tomlinson & Robert Galeta.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6.

Pudovkin, V. I. Film Technique and Film Acting. Trans. and Ed. Ivor Montagu. New York: Grove,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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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표상 예술(회화나 문학과 같은)과 구별되는 요소를 지적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관계하고 있는 재료, 즉 이미지만을 검토해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우선 사진에 사영(寫影)된 사물의 형상은 주관적 의식에 의해 자율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카메라는 빛의 흡수와 반사를 통해 사물의 표면을 복사한다. 빛의 연속 운동은 카메라에 의해 특정한 구역이 절단되고, 이 단편이 일으킨 화학작용으로 인해 하나의 형상이 만들어진다. 빛을 이루고 있는 다수의 질점은 감강판의 특정한 영역으로 이동하고, 이로써 사물과 (사진)이미지의 관계는 기계적 대응이라는 함수를 이룬다. 사진 속에서는 “빛=사물의 표면”이라는 공식이 성립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진을 통해 “빛은 물질의 피부”라는 표현을 비유로서가 아니라 실재로서 대면하게 된다. 어느 모로 보나 사진의 형상(形象)을 이루고 있는 이미지는 의식적 기억이나 사유와 같은 주관성의 자율적 체계에 속하지 않는다. 들뢰즈(G. Deleuze)는 베르그송(H. Bergson)이 『물질과 기억(Matter and Memory)』에서 연역해낸 이미지의 개념을 바로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해석하였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이미지란 물질과 동일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어떻게 지각된 대상을 실제의 사물이며 세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미지에 대한 이 개념은 심리학의 역사에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는데, 즉 이것은 이미지가 더 이상 의식 안에 존재하고 있는 비연장적인 표상이 아니며, 물질 역시 의식적 표상으로서의 이미지와 근본적으로 구분되어 주관성으로부터 초월적인 신비물이 아님을 함축한다.1) 들뢰즈에 따르면 베르그송은 이미지를 빛-물질과 동일한 것으로 정립함으로써, 의식(사유)과 물질(운동)의 이행, 즉 물질이 의식의 표상으로 이행하거나 혹은 의식의 표상이 (행동과 같이) 물질로 이행하는 관계를, 순전히 사진적 의미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진에 포착된 사물은 그림이나 이야기로 투사된 의식의 빛 이전에, 주관적 표상(이미지)의 개입 없이도 그 자신 안에 존재하는 물질로서의 빛 그 자체이다.

사진이 물질의 표면을 기계적 함수로 처리함으로써 형상을 재현했다면, 영화는 거기에 운동과 시간의 형식을 덧붙여 실재의 재현을 완성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꽤 복잡한 설명을 필요로 하는 이 명제는 베르그송의 운동 개념을 통해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베르그송은 운동의 두 수준을 구분하였다. 하나는 운동하는 물체와 그것이 지나간 공간, 그리고 다른 하나는 순수한 질적 강도로서의 운동성 그 자체이다. 고대철학은 운동하는 물체가 지나간 공간과 운동성 그 자체를 혼동함으로써, 운동의 질을 양적인 것으로 대체하여, 실질적인 운동을 동질적 공간 속에서의 물체의 위치 이동으로 바꾸어 놓았다. 예를 들어, 아킬레스는 특정한 위치로부터 출발하여 또 다른 특정한 위치로 이동하고, 다시 특정한 위치에 직면하게 될 것이며, 이는 무한히 계속될 것이다. 운동을 위치의 이동으로 이해하는 순간, 아킬레스는 결코 거북을 추월할 수 없을 것이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고대철학이 아킬레스와 거북의 운동을 결코 해소할 수 없는 심연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서로 질적으로 다른 아킬레스와 거북의 운동성을 단순히 좌표 위에서의 점들의 이동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베르그송은 『창조적 진화』의 제4장 전체에 걸쳐, 영화적 환영(cinematographic illusion)이라는 이름 아래, 영화를 잘못된 운동의 전형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영화를 사진들의 결합이라고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사진들을 결합하고 이를 하나의 운동으로 만드는 장치와 영화를 혼동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영화는 고대철학이 했던 운동의 주관적 재구성을 기계의 양적 이동을 통해(기계론적 착각) 똑같이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는 움직이는 사물로부터 운동성 그 자체는 제거하고, 순전히 기계적인 장치에 의해, 정지된 형상(사진)들의 추상적이고도 양적인 결합만을 유도한다고 간주했던 것이다. 그에 따르면 영화는 실제의 운동이 아니라 장치들의 공간적 위치 이동, 더 정확히는 정신적 추상과 동일한 방식에 의해 재구성된 운동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오히려 영화는 사물들로부터 운동성 그 자체만을 증류해낸 것이 아닌가? 물론 영화가 기계장치의 반복적인 메카니즘으로 작동하는 것은 사실이다. 예로, 운동의 양적인 일관성을 보존하기 위해 필름에 동일한 길이의 구멍을 뚫는다. 그렇게 해서 영화 이미지는 필름조각들을 균등하게 분할된 속도에 따라 처리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영화 이미지에서 운동성의 본질은 필름조각 자체가 아니라, 필름조각들간의 대체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아닌가? 영화에 있어 이미지의 운동성은 움직이지 않는 추상적 점들간의 단순한 위치 이동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속이 공간들 사이에서 발생한다고 말했던 베르그송의 운동개념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 이미지의 운동성이 정신적 추상이 아닌 물질적 분석에 의해 수행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미 사진적 의미에서의 이미지를 언급했던 베르그송이 잘 설명하고 있다. 사진은 운동을 초월적 추상으로 요약한 포즈들의 결합(정신적 결합)이 아니라, 물질-빛의 구역, 즉 운동성의 블록을 보여주고 있다. 사유에 의해 조명된 빛이 아닌 물질-빛 그 자체의 기계적 운동. 이 운동과 지각의 동일성은, 지각=물질=빛의 내재적 관계들을 이루면서, 운동 중에 있는 지속의 부피 자체를 보존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 영화는 실제의 운동(물질)에 대한 분석적 냉각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기계장치가 필름조각들의 시간적 균등분할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가능한 말이다. 사진의 물질성은 곧바로 영화의 운동성으로 확대된다. 그리하여 영화에 있어 이미지의 운동이란 신체나 공간과 같은 다른 모든 부수적인 것들을 제거하고, 순수한 의미에서의 운동성 그 자체만을 고스란히 남긴 이미지이다. 예를 들어, 미소짓고 있는 고양이로부터 고양이는 빼고 미소만을 남기는 것이다. 비록 영화의 재현성이라는 개념으로 오해하기는 했지만, 바쟁(Andre' Bazin)이 영화를 사진적 의미에서 그 고유한 존재론적 위상을 확인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런 의미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영화가 표상예술과 구별되는 점은 영화 그 자체의 존재론 속에서, 그 고유의 존재 속에서 발견되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운동과 물질의 내재적 관계로부터 확립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닌가? 영화는 베르그송적인 의미에서 물질과 동일한 외연을 갖는 이미지이며, 동시에 운동성을 증류해 낸 것으로서의 운동 그 자체이다. 들뢰즈가 영화의 존재론적 위상을 분명히 하기 위해 조합해낸 “운동-이미지”의 개념은 바로 이런 의미이다.

사진과 영화는 유물론적 토대 위에서만 성립 가능하며, 그 자체로 유물론을 예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를 기계 테크놀러지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 토대에 기인한다. 우리의 정신은 테크놀러지를 통해서만 물질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진과 영화에도 회화나 문학에서 볼 수 있는 주관적 요소들이 풍부하게 들어있다. 무대 배치나 조명과 같은 화면의 조형성이 아니었다면 영화는 예술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야기의 형식이 아니었다면 영화는 시간 속에서 체험되는 삶과는 무관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심지어 객관적인 르포르타주에도 이야기는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영화에 있어 근본적인 것은 인간적 의식 이전에 존재하는, 심지어는 주관성의 조건이 되는 물질(의 운동과 시간)일 것이다. 아무 움직임도 없는 하나의 정지된 쇼트를 진정한 회화적 의미에서의 그림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면 거기에는 근본적으로 운동과 시간, 즉 배치된 요소들(인물이나 사물)의 움직임이 배제되는 경우에도 지각을 초과하여 흐르고 있는 모종의 굴곡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스크린의 시간이란, 아킬레스의 한 발이 의미하는 것과 정확히 같은 수준에서, 화면 자체가 이미 우주 전체의 변화를 야기하는, 미세하지만 거대한 파동을 의미한다. 제 아무리 근사한 기획에 의해 가공된 화면구성이라 해도, 또 상상력의 빛이 아무리 찬란하다 해도, 스크린 표면에서 움직이고 있는 저 피사체들과 그 주위를 둘러싼 파동은 마음대로 생략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실재이다. 몽따쥬와 같은 문학적 장치를 통한 허구적 효과 역시 영화의 관점에서는 다른 문제일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영화는 종합 이전에 발생하는 기계적 사영(寫影)의 문제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일찍이 소련의 몽따쥬 유파들―예로, 쿨레쇼프나 푸도푸킨―의 실험들(모주킨 효과나 벽돌쌓기와 같은)은 엄밀한 의미에서 영화적 실험이기보다는 회화적 혹은 문학적 실험이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사영된 피사체들은 실제로 거기에 있었으며, 관객은 그 근원적 시간에 압도되지 않을 수 없다. 영화의 탄생 혹은 진화와 관련하여 초기의 역사를 훑어보면, 한결같이 물질의 제약을 뛰어넘으려는 표현의 방법론적 노력을 발견할 수가 있다. 예술이 직접적으로 물질적 제약에 직면한 예는 아마도 영화(사진적 의미에서)가 초유의 일일 것이다. 영화는 예술이기 이전에 일종의 (빛의)물리학이었던 셈이다.


사유의 측면에서 볼 때, 운동-이미지에 대한 논의는 백지상태로 되돌아가려는 노력의 과정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무것도 쓰여지지 않은 빛의 착란 상태 (지각의 소거로 돌아가려는 베케트에 관한 부분을 들뢰즈가 말한 것 설명해본다) . . . 그런데 왜 이러한 회귀를 언급해야만 하는가? 그 유용성은 어디에 있는가? 사유의 측면이 아니라 실천적 측면에서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 . . (베르그송의 제임스 논문에서 과잉실재가 중요한 이유 . . 표면화 . . ., 미리결정된 것의 소거 . . .등으로 가기위해)/// (그런데 왜 잉여실재를 말하는가? ⇒ 열린 우주를 말하기 위해 . . . 영화가 재현하는 실재는 미리결정된 사유에 의해 구성된 것이 아님을 말하기 위해 . . . 그 순수한 의미에서의 베르그송적인 영화는 이미 베르그송이 비난했던 그 자리에서 생겨나고 있었으며, 그의 생각(창조적 진화)을 가장 잘 보여주는 하나의 예증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바로 주관적 구성에 의해서가 아닐까?)


1) 이에 관한 더 자세한 논의는 Bergson, Matter and Memory의 1장 특히 서문과 Deleuze의 Cinema I p.56-61을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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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사진과 영화를 구분해주는 형식을 흔히 운동에서 찾는다. 잘못된 통찰은 아니지만, 근본적인 것은 아니다.  저 두 매체를 본성적으로 다르게 하는 형식은 다름 아닌 바로 시간이다. 영화에서 운동과 시간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질문할지 모르겠지만,  그 둘은 분명히 구별된다. 운동체가 사라져도, 그 공간적 그리고 물질적 실체가 사라져도 여전히 남아 있는, 모든 변화에 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자신은 불변하는, 변질의 순수한 형식! 칸트적인 의미에서의 개념적 형식과도 근본적으로 다른! 들뢰즈의 말마따나, 그것은 마치 오즈 야스지로(Ozu Yasuziro)의 영화에 등장하는 잠깐 동안의 "정물들"이라든가, 결혼을 앞둔 딸이 잠든 홀 아버지를 바라보며 머금고 있는 "미소와 복받치는 눈물" 사이에 한 자락의 베게처럼 삽입된 꽃병의 이미지라든가, 특히 그 고유한 공간적 본질(기능)이 무력화된 운동체로서, "담장에 기대어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자전거"와도 같은 것이다. 물론 사진에도 시간이 없다고 볼 수는 없다. 제한적이지만, 사진은 운동을 표현함으로써(가령, 형상의 윤곽선을 흩트림으로써) 그것을 간접적으로나마 보여주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사진은 그 자체로 직접적인 시간의 이미지는 아니다. 아마도 사진이었다면, 그것을 조용히 바라보고 읽어가며 사유하고 있는 주체에 의해서만 떠올려지게 될, 그래서 어쩌면 그가 싫증이나서 집으로 가버린다든가 죽어버린다면 사라져버릴 수도 있을, 그렇게 사진 속에서는 다만 간접적으로만 드러나게 될, 단지 영화만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잠재적 실재의 지속의 이미지! 브레송(Henri Carttier Bresson)의 "결정적 순간"을 돌연 무한히 이완시켜, 거기에 어떤 두께라든가, 부피라든가, 용적을 부여하는 이미지! 사진과 영화를 근본적으로 다르게 해주는 것, 즉 진정한 시간, 참된 시간의 이미지!

운동-이미지, 지각-이미지, 감정-이미지, 충동-이미지, 행동-이미지, 시간-이미지, . . . 들뢰즈는 왜 자꾸만 참된 이미지나 고유의 이미지를 찾아, 나아가 참된 존재, 고유의 실존을 찾아, 그 목록을 작성하고 있는 것일까? 운동-실존, 지각-실존, 감정-실존, 충동-실존, 행동-실존, 시간-실존, . . .

이미 고대의 인간이 고민했던 "운동의 일탈성"(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즉 운동 그 자체가 가지는 탈중심성, 수적인 관계로부터 빠져나가는 것으로서의 일탈적 운동에 대한 통찰은, "운동을 간접적으로 재현하는 것으로서의 시간", 혹은 운동을 측정하는 "수치로서의 시간", 다시 말해 운동에 종속된 것으로서의 시간(영화에서는 이를 몽따쥬와의 관계속에서, 몽따쥬에 의해 드러나는 것으로 파악)이라는 지위에 의문을 제기하게 됨 . . . (80쪽) . . . 등등에 관한 이런저런 예들 . . .

그리고는, 장-루이 셰페르의 논의를 끌어들여, 들뢰즈는 이렇게 말한다. ". . . 영화 이미지에 고유한 운동의 일탈성은 시간을 모든 연쇄로부터 해방하고, 시간이 정상적인 운동과 맺었던 종속관계를 전복시키면서 시간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는 것이다. '영화는 내게 시간이 마치 하나의 지각처럼 주어지는 유일한 경험이다.' "(82쪽) . . . 셰페르의 말을 다시 말한다면: 영화! 시간의 지각. 

이렇게 해서 들뢰즈의 결론: "시간이란 필연적으로 모든 행동의 규범화된 전개 이전에 존재하는 것이어야 하고, '완전히 운동 기능성의 경험에 연결되지 않은 세계의 탄생'이어야 하며, 또한 '가장 오랜 이미지의 회상은 물질들의 모든 운동으로부터 분리된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정상적 운동이 그 간접적 재현으로서의 시간을 종속시키는 것이라 한다면, 일탈적 운동이란 모든 층위의 불균형의 기저, 중심의 이산, 이미지 자신의 거짓 매치(faux raccord)로부터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시간의 선행성을 증언하는 것이다." 들뢰즈의 이 말을 다시 말해, 물질과 운동으로부터 분리되어 그 고유의 존재성을 갖는 순수-회상, 모든 종속상태로부터 해방된 참된 시간!

그렇다면 영화의 경우는? 고다르의 입을 빌어, 좋은 영화와 나쁜 영화를 선별하는 기준 . . .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서로 뒤섞여 복합물을 이루고 있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에 사로잡혀 있으며, 과거란 그 전에는 현재였으며, 현재가 지나간 이후이다. 미래 역시 다가올 현재이다. 이들은 복합물을 이루며 공존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이미지와 공존하는 이 과거와 미래를 포착하는 것이야말로 영화에 속한 것이다. 이전인 것과 이후인 것을 영화화 할 것 . . . . 어쩌면 이 현재들의 사슬로부터 빠져나가기 위해 영화 내부에, 영화 이전에 존재하는 것과 이후에 존재하는 것이 지나가도록 해야할 것이다."(83쪽) . . . 고다르의 말을 인용: "영화란 바로 이런 것이다. 현재란 나쁜 영화를 제외하고는 결코 영화에 존재하지 않는다." . . . 고다르의 이 구절에 관한 잠정적 해석: 영화 이전이란 실재적인 것일테고, 그 이후란 실재의 질적 변화, 즉 비젼이 낳은 변형, 생성이 아닐까? 영화는 그것을 가능케 해야 할 것이다. 즉, 영화는 즉자적이고 현재적인 순간성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잠재적 실재(과거)와 비젼(미래적 현실화)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 따라서 이것은 앙드레 바쟁이 말했던 바처럼, 단순히 "날것 상태의 현실을 구하기 위해 픽션을 제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가"  않은 것이다.

한가지만 덧붙이자면, 여기서 더 중요한 말이 나온다. "이미지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적인 것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와 공존하고 그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그 자체로서의 이전이후에 도달할 것. . . . 즉 시간의 직접적 현시에 이를 것"(84쪽) . . . 왜, 이미지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가 아니라(리얼리즘이 그랬듯이, 예술과 현실이 혼동되는), 이미지와 공존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현존을 드러내야 한다고 했을까?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복합물과 고립되어 따로 존재하는 현존이 아니라, 복합물 속에 내재된 현존을 드러내는 문제! 다시 말해, 영화 뿐만 아니라 존재는 자기자신을 극복할 내재적 현존을, 그 자신의 외부에서가 아니라, 다름 아닌 바로 자신 안에서 드러내야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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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Cinema를 읽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가야 할 부분이라서 번역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물질과 기억>이라는 제목으로 동문선에서 번역판이 나왔지만, 아마도 역자가 술을 마시고 번역을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책 전부를 번역하고 싶었지만, 시간도 없고 해서, 방학을 이용해 가장 중요한 1장만 손을 대었다. 중간에 주석도 붙여 놓았으니 참고하시라. 본격적으로 보다는, 공부를 위해 번역을 하였으므로, 큰 기대는 없으시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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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접근하는 여러 가지 방법(분류방식, 미적 효과, 역사적 고찰 등)이 있지만, 우선 그것의 본질은 활동하지 않는 시간과 관계가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사진이 미래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라든가, 혹은 현재적 지각에 특별한 촉발을 불러일으키는 경우에도 사진은 과거와 관계를 맺고 있다. 사진을 이해하는데 있어 현상학적 관점이 개입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듯하다. 일단 사진 속에 담고자 하는 사물이 포착되고 나면, 그 포착된 대상물은 더 이상 살아있길 멈춘다. 사진 속의 객체들은 모두가 정지된 시간에 감싸인 채 얼어붙어 있다. 마치 저 풍경이 시간의 한 구역 혹은 이미지라도 된다는 듯이! 영화는 어떤가! 만일에 우리가 영화를 사진들의 연속적인 결합이라고 간주한다면, 영화의 실체는 매우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를 가지게 될 것이다. 죽은 것을 살아있는 것처럼 보여주려는 노력만큼 부자연스러운 것은 없을 테니까! 베르그송(H. Bergson)이 누누이 강조했듯이, 그것은 생명과 운동에 관하여 잘못된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진과 영화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오히려 살아있지 않은 사물에 실을 매달아 그것이 마치 움직이는 듯 보이게 하는 인형극과 같은 기술이, 사진들의 연속적인 결합이라고 정의된 영화보다는 훨씬 더 감동적일 것이다. 인형극은 차라리 죽음에 관한 유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영화나 인형극은 죽어있는 시간과 관계가 있음에도, 모두가 운동이나 시간과 직접적으로 호응한다. 그런데 사진은 경우가 좀 다르다. 사진은 존재로부터 그 본성인 시간의 지속을 따로 떼어내고 모든 영혼들을 빼앗아 박제해 놓은 것처럼 무미건조해 보인다. 동작이나 움직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이며, 애초에 그러한 의도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사진은 관념과 유사한 외연을 갖는다. 관념은 우선 사물을 운동성으로부터 분리하고 추상한다. 이는 운동이나 생명 그 자체를 다루는 경우에도 그렇다.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흐르는 실재를 경험 내부로 포섭하듯이, 관념은 운동과 시간을 공간적 범주로 고정시킨다. 마찬가지로 사진은 활동이 멈춘 사물의 순간적인 포즈(pose)를 포착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현상학적 에포케(epoche)라고나 할까? 풍경들과 그것들을 둘러싼 모든 시간이 괄호 안에 묶여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사진에 포착된 포즈는 사물 그 자체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어떤 경우든지 포즈란 “대상물의 자세(태도)나 카메라를 다루는 사람의 테크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읽어 내려는 의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Roland Barthes, La Chambre Claire(Editions du Seuil, 1981), p.78. 참고로, 이 책은 Richard Howard가 영어로 번역하여 Hill & Wang(New York)에서 1998년에 Camera Lucida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이런 이유에서 사진은 실제의 대상물을 그 내용으로 하면서도, 그 자체와는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그것은 본질적으로 현상학적이다. 사진에서의 포즈란 의식의 활동이 그려낸 한 폭의 그림, 말하자면 현상학적 노에마(noe`me)이다. 반면에 영화는 사진과 마찬가지로 순간적인 자태들로부터 시작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새로운 자태들로 끊임없이 대체되고 치환되면서, 지시되고 있는 사물의 포즈가 변질되어 노에마는 끊임없이 흐르게 된다. 영화에서의 컷(Cut)은 새로운 것들로 인해 그 고유한 자태를 박탈당하거나 거부된다. 영화가 운동 그 자체의 이미지를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참고로, 우리는 운동이나 시간 속에 순간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순간성에 관한 이 망상은 두 가지 이미지로 공존하고 있다. 한편에는 완전하고 결정된 순간으로서의 포즈 혹은 자태가 있다. 이것은 말하자면 정신적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에는 불완전하고 미결정된 순간으로서의 컷이 있다. 바로 감각적으로 포착된 것으로서의 물질적 순간이다. 또한 이 두 이미지는 운동을 설명하는(혹은 그것을 재구성하는) 두 가지의 관점을 나타내준다―운동에 관한 이 두 가지 관점에 대해서는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Cinema I 첫 장에 자세히 연구되어 있으므로, 나는 그 내용을 요약하는 식으로 활용하겠다. 전자의 경우에는 고전 철학의 관점인데, 여기서 운동은 culminating point, privileged instant, telos, acme` 등의 용어로 정의할 수 있는 정신적 사건들, 즉 지적인 요소들의 변증법적 질서 혹은 이상적인 종합으로 이해된다. 즉 운동이란 영원한 것으로서의 형상이나 이데아들 간의 이행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있음’과 ‘없음’이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으로서의 운동, 해소할 길 없는 모순 혹은 비존재로서의 운동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후자의 경우에는 현대 과학의 관점을 보여준다. 현대 과학은 운동을 이상적인 것들의 이행이나 종합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하고도 불특정한 파편들의 연속으로 이해한다. 가령, 현대의 천문학은 하나의 궤도와 그것을 횡단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의 관계로 운동을 분석하였다(Kepler의 경우). 또 현대 물리학은 떨어지는 물체가 뒤덮어버리는 공간을 시간으로 연결하였다(Galileo의 경우). 현대 기하학은 직선 위를 움직이고 있는 어떤 순간의 점의 위치, 즉 평곡선의 방정식으로 운동을 분석하거나(Descartes의 경우), 공간적 단면이나 구역(section)을 무한하게 근접시킴으로써 곡선 즉 운동을 분석하고 재구성하였다(Newton과 Leibniz의 경우). 어떤 경우든지 현대 과학은 자태들의 변증법적 질서가 아닌 불특정 순간들의 기계적 연속으로 운동을 정의한 것이다. “현대 과학은 무엇보다도 . . . 시간을 독립변수(independent variable)로 취하려는 열망이라고 정의 되어야 한다.”(Henri Bergson, Creative Evolution(Eng trans. Arthur Mitchell, 1954). p. 355.) 마찬가지로 사진과 영화의 존재론적 차이는 바로 저 두 개의 서로 다른 이미지와 관계하는 방식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에는 완결된 풍경의 이미지로서의 포즈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물질적 파편으로서의 컷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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