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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8/16 봉지커피를 마시며 (2) (5)

특히 한국 사람들에게 커피는 해방의 이미지와 관계가 깊다. 한동안 유럽에서 이교도의 음료로 불리던 커피가 한반도에 들어온 것은 구한말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이 처음 커피를 마시면서부터라고 전해진다. 확인된 바는 없지만, 명성황후가 가장 애호했던 음료였다고도 들었다. 한 독일인이 정동구락부에서 커피를 팔면서 일반인들도 마실 수 있게 되었고, 이후 명동이나 종로 등지에 여러 다방(진고개 다방이 최초였다던가?)들이 생기게 되었고, 해방 이후 미군에 의해 대중들에게 퍼졌다고 한다. 특히 명동 등지에서 배회하던 많은 지식인과 문인들은 다방에서 커피를 홀짝거리는 것으로 소일을 삼았으며, 카페에서 노닥거리며 신세계의 열망을 나누던 18세기 유럽의 쁘띠 부르주아지처럼, 이들에게 있어 커피 마시는 일은 신선한 바다 바람을 쐬는 일 만큼이나 이국의 취향을 경험하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거의 다방에서 살다시피 하다가 죽은 한 시인(空超 吳相淳)이 죽기 전에 남긴 방대한 양의 방명록 이름이 사실은 다방 이름으로부터 유래하기도 하였다(淸銅文學). 그가 가장 즐기던 메뉴는 허기까지 배려하여 달걀노른자를 띄운 모닝 커피였다고 한다. 더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이야 어찌되었든, 가만히 회상해보면 우리에게 있어 커피란 다름 아닌 서구(western)를 의미한다. 아시아(소위 동양)의 근대사에서 서양의 체취를 더듬다보면, 모르긴 몰라도 맨 먼저 그리고 가장 진하게 저 야릇한 커피향이 스며든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서양의 묘한 냄새가 우리들 개개인에게 주는 이미지란 어떤 것이었나? 이 작은 반도에 피비린내를 몰고 온 야수의 이미지였을까? 아니면 다소 그늘진 그 어둠 때문에 신비롭게 뒤틀려 보이는 동양적 혼돈을 가지런히 정돈해 줄 한줄기 계몽의 빛이었을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보다도 더, 우리에게 있어 서구의 이미지란 우선 자유분방을 환기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환한 빛과는 조금 다른. . . .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일본인들이 미국이나 유럽으로부터 두려운 와중에 느꼈을, 또 거기서 배운 조선의 지식인들이 다소 허위의식을 가지고 꿈꾸었을, 뭐 대충 그런 저런 식의 이국적 자유분방 말이다. 바다 넘어 그 자유분방은 꽉 막힌 한반도에, 소극적이긴 하지만, 출구 같은 것을 마련해준 것은 아니었을까? 무수한 세월을 버티고 서서 바다 저편에서 불어오는 바람보다도 더 가혹했던 이 땅의 모든 고귀한 가치들, 개인으로서는 그 완강함을 도저히 거부할 수 없어 받아들일 수밖에는 없었을 그 고집 센 가치들, 또 그럭저럭 적응해 나가다 보면 생활에 스며들어 지루해지기 짝이 없었을 그 가치들을 잠깐이나마 잊게 해줄 출구 같은 것 말이다. 아버지에게 매를 맞고 쫓겨나와, 갈 곳이 없어 헤매던 아이가 우연히 알게 된, 불량한 친구들과의 작은 환락 같은. 많이 두렵기도 했겠지만 서구의 이미지란 아버지의 완강한 강요를 뿌리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주는, 혹은 피비린내의 공포와는 아주 다르게 바다 너머로부터 산들거리는 바람을 타고 희미하게 들려오는 어떤 음악소리가 아니었을까?

저와 같은 의미에서 커피는 생활의 여유를 암시한다. 커피의 서구적 이미지에 깃든 부(副)와 풍요의 환타지. . . . 수 십 년간을 궁핍에 허덕이던 우리에게, 서구의 옷을 걸친 모든 것들은 선망과 부러움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최 고~급"에 속한 것이었으며, 나아가 생활의 작은 스캔들이었다. 따지고 보면 풍요의 한 결과에 불과한 커피가 우리에게는 마치 물신주의적 환타지처럼 풍요와 여유의 원인으로 보였던 것이다. 어떻게든 그것을 소유하고 나면 그 소유자의 모든 자격이 생기기라도 하듯이! 이러한 환유적 욕망은 특히 여성들이 더 크지 않았을까? 그들에게 서구는 저러한 긍정적인 이미지 모두를 제공해 줄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원했던 것은 서구가 아니었다. 다만 답답한 이 질서를 좀 벗어나고 싶었을 뿐—정신사적 의미에서 외세(外勢)란 우리 자신의 허물이나 과오에 대한 무의식적 공포가 아닐까? 아마도 외세에 대해 민족적 자존심을 내세우며 강한 거부감을 보였던 이들은 그 허물 많은 답답한 질서의 주체였을 것이다—모든 면에서 궁핍했던 우리에게 커피의 본질은 바로 저 환타지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버지가 존재하지 않는 해방의 환타지. 다도(茶道)라는 이름의 다소 위선적인 절차(그래서인지 녹차는 남성의 냄새가 짙다)를 필요로 하지 않는 쾌활한 환타지. 그러다보니 커피를 마시는 동안 아버지를 닮은 남편의 얼굴을 애인이나 남자친구의 미소로 탈바꿈시키는 평등과 친교의 환타지. 이 모든 것을 몰고 오면서 커피는 거실이라는 그 자체 환타지의 공간을 열어 제친다: 흔들의자, 벽난로, 정원이 보이는 창밖, 고풍스런 Tea Table, 앙징맞은 Tea Spoon, 그에 어울리는 다소곳한 이야기, . . . 거실의 이러한 풍경을 소유하는 순간, 그녀는 이전의 그 자신이기를 멈추고 전혀 다른 인간이 되는 꿈을 꾸며 스르르 잠이 든다.

따라서 커피는 화학식 C8H10O2N4의 크산틴 구조를(그게 뭐지?) 갖는 카페인 향을 띤 음료이지만, 그 본질은 그와 같은 물질이 아니라 물질 주변을 연기처럼 맴돌고 있는 한줄기의 환타지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물질이 아니라 자아의 환영에 도취되어 있다. 커피에 중독된다는 것은 말할 수 없이 깊은 나르시스의 환영을 쫓아 자기 자신의 수렁으로 빨려 들어간다는 뜻이다. 문을 닫고 한 없이 들어앉으려 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알코올 중독이나 미디어 중독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사실 대부분의 중독에는 이와 같은 폐쇄적 욕망이 많이 있다. 그러나 커피는 이 욕망을 육체적 파괴라든가 다른 대상에의 정신적 의존으로 몰고 가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분위기를 통해서만 욕망을 실현한다. 혀끝의 맛으로부터 나오는 감각적 분위기 뿐만이 아니라, 커피를 마시기 위해 필요한 이런 저런 준비물들을 꾸리면서, 우리는 이미 모종의 의식(儀式)과도 같은 분위기에 젖어든다. 커피는 환타지를 조성하는 환경, 즉 분위기를 만드는 가장 훌륭한 물신이다. 멋들어진 잔에, 브라운 색조의 대기(大氣)에, 세련된 이국의 향에, 우아한 손 매무새에, 쁘띠 부르주아의 여유에, . . . 뭐 이런 것들을 자신의 기억과 욕망에 담아 한껏 표현해 보는거다. 그러다가 커피를 마시며 내가 하는 일이란 나를 바라볼 다른 누군가가 되는 것이다. 참으로 묘하게도 우리는 다른 누군가가 되면서 자기 자신에 도취된다.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나르시스가 그랬듯이. . . ! 커피는 나르시스가 선사한 멋들어진 선물이다.

젊은이들은 커피 맛 때문에 그 카페에 가지 않는다. 조명, 의자, 실내 디자인, 분위기, . . . 이런 것들이 카페를 선택하는 이유이다. 그들이 옳다고 생각한다. 식사 후에 커피를 마시는 일 처럼, 단조로운 절차나 의례와 같이 지루한 습관이 되는 한이 있어도, 우리는 곧 죽어도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저러한 물신들을 갖추어야만 한다. 아마도 최근에 가장 유행하는 카페의 유형을 잘 살펴보면,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인간이 되고 싶은지, 무슨 상상을 하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커피를 포함하여 차를 마시는 모든 일에는 좀 더 급진적인 의미가 있다. 우선 차를 마시는 일은 구체적으로 행동하고 실용적으로 실천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냥 쳐다보거나, 앉아서 생각하거나, 무엇인가를 느끼는 정도에 불과하다. 차를 마시며 하는 유일한 행동이란 그저 입을 놀리면서 해대는 손짓 정도이다. 탁상공론(卓上空論)이란 용어는 아마도 차를 마시는 일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또 그 "탁(卓)"자는 아마도 찻상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차를 마시며 나누는 대부분의 이야기는 금새라도 실현 가능해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그 자리를 뜨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대화하는 일 만큼이나 게으름을 피우는 일도 없을 것이다. 부지런한 일꾼들이 가장 싫어하는 일 중에 하나가 바로 커피숍에 앉아 얘기하는 일이다. 뭔가를 해 봅시다!하고 외치며 모이는 곳이 커피숍이라면, 십중팔구 그 모임은 남녀의 밀교집단(?) 정도에 머물 가능성이 높다. 차와 커피는 사람들을 동물적이 아니라 식물적인 존재가 되게 한다. 식물을 정성스럽게 길러본 사람들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안다. 거기에는 자신에게 유해한 환경에 대한 급진적인 거부가 있다.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퇴폐적이 되면서, 그 자신의 환경을 몸소 예증 한다고나 할까? 계란 노른자를 띄운 커피를 즐겼던 공초(空超) 선생의 식물과도 같은 삶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죽어 감으로써 탁한 환경을 조용히 거절하는 것이다. 이것은 투쟁이나 저항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이다.

그 비(非) 행동적인 거부를 완성시키는 것이 있다. 바로 부르주아적 근검-절제와 가장 대립적인 가치로서의 사치이다. 그것이 불러올 결과 때문인지, 우리는 그 가치를 가장 두려워하고 또 혐오한다: 아무데나 가면 어때? 어차피 똑같은 커피! 더 심하면, 커피숍은 무슨! 집에 가면 얼마든지 있는데! 내 학창시절 어머니는 내게 용돈을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다방이나 커피숍엔 절대 가지 말거라! 다 쓸데없이 돈 쓰는 거란다! 차라리 친구 만나면 식당이나 빵집에서 얘기해라!" 그러면 나는 돈을 챙긴 후에 꼭 한마디 한다: "배만 채우고 살아요?" 배를 채우기 위해 차를 마시는 얼간이는 없을 것이다. 커피나 차는 아무리 마셔도 배가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 몇 잔만 마시면 오줌이 마렵기 때문에 오히려 귀찮기만 하다. 더구나 커피는 오줌을 많이 나오게 하는 요소가 있지 않은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차나 커피 마시는 일을 사치라고 말하고 싶다. 나의 어머니가 우려했던 것은 바로 사치였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사치를 겁내던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사치란 일종의 자존심이라고. 과도하게 써 버림으로써, 물질적 재화에 미련을 두지 않음으로써, 폭죽을 터뜨리듯이 그것을 한 순간의 유희로 날려 버림으로써, 우리가 아직은 자연에 목숨을 구걸하는 존재는 아니라는 것을, 빵을 살 돈이 부족해도 남아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오히려 그 물적 재화의 천박한 속성을 거절할 줄 안다는 것을, 그래서 부르주아는 알지 못하는 그 외의 다른 중요한 삶이 있음을 안다는 것을, 소극적이지만 단호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며칠을 굶은 노숙자가 개죽과도 같은 밥그릇을 앞에 두고도 허겁지겁 달려들지 않고, 허름하게 찢겨지긴 했지만 단정하게 정장을 차려 입을 줄 아는 조용한 자존심 같은 것. 차와 커피에는 바로 이와 같은 자존심이 있다. 가난한 연인들이 값싼 라면으로 저녁을 때우면서도, 실내 디자인이 우아한 비싼 커피숍을 찾는 것. 식모처럼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도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는 저 여인이, 자신의 본래적 우아함을 훼손시켰던 아버지나 남편 혹은 시어머니 몰래 거실에 나와 따뜻한 커피 한잔을 만끽하는 것. . . . 바로 저와 같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