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과 소통은 전자적 virtuality의 차원에서 다시 정의되고 있고, 텍스트와 상호텍스트성은 하이퍼 텍스트성으로 확장되어 이해되고 있다. 사이버네틱스의 문제는 정보기술 뿐 아니라, 그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야기되는 인식론적 윤리적 사회 정치적인 복잡한 결과들을 포함하고 있다. 사이버네틱스는 초기의 패러다임(시각적/물질적 현존이나 선형적 독점적 발화)에 젖어있던 사람들에게는 공포와 혐오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으며, 반대로, 구식 패러다임을 포기한 자들과 새로운 움직임의 선봉을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환희에 가까운 희망을 보여 주었다. 이 글의 목적은 하이퍼 매체가 읽기 과정을 어떤 식으로 변형시키는가를 분석하고자 한다. 인쇄물에서 디지털 텍스트로의 과도기라 할 수 있는 현재, 나는 지금 한창 대두되고 있는 하이퍼 소설이라는 장르를 미학적으로 접근하고, 여러 형태의 가상현실 매체의 미래를 논하려 한다. 새로운 매체에 대한 극단적인 두 반응이 있지만, 여기서는 사이버네틱스의 미학을 무조건 반대하거나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 둘의 적절한 결합에 집중하고자 한다.

사이버네틱스적 읽기는 점점 선형적이고 폐쇄적이고 고립적인 인쇄물 읽기 방식을 대체하고 있다. 하이퍼 텍스트의 이상적인 독자는 대중매체와 정보기술의 상호 텍스트성과 잠재성(virtualities)으로 구성된 독자이다. . . . 내 생각엔, 하이퍼텍스트가 하나의 예술적 형식으로 살아남으려면 다양한 매체(그래픽, 오디오, 필름)의 가상적 즉시성, 자발성, 복잡한 운동, 풍부한 텍스트망과 텍스트를 재구성하기 위한 창조적 매개의 형식이 독자에게 상호 작용할 수 있는 즐거움을 제공해야 한다. 상상적 세계 속에 침잠했다는 즐거움(리얼리즘 문학의 성과)과 도구를 통해 그 세계 속에서 행동할 수 있는 즐거움(가상현실 기술의 목표)을 주지 못하면 하이퍼 텍스트의 그 잠재성은 실현되기 어렵다. . . . Michael Joyce, Carolyn Guyer와 Stuart Moulthrop의 하이퍼 소설을 보면, 이들 모두가 독자에게 새 장르를 알리기 위해 하이퍼 텍스트에 대한 메타서사를 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이퍼텍스가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 분석하려면 일련의 궤적들을 볼 필요가 있다. 예로, 1945년 Vannevar Bush의 '메멕스'는 개인이 자신의 기록이나 문서 책들을 저장하고, 이 텍스트들간에 경로를 설정하고, 그 안에서 특정한 정보를 검색하거나 불러올 수 있는 장치이며, 이는 기억이 연상으로 연결된 개념들이 의미론적 망으로 조직되어 있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메멕스는 인간의 인식과 유사한 방식으로 자료들을 구조화하도록 고안된 장치이다. 이 생각에 약간 영향을 받아, Theodore Nelson과 Douglas Englebart는 60년대에 텍스트들을 연결 할 수 있는 컴퓨터 시스템을 개발했다. Nelson은 'hypertext'라는 용어를 65년에 만들었고, 80년에 Literary Machines 에 그 개념을 자세히 설명하고, 이 새로운 텍스트성을 "독자들에 의해 조절되는 링크들로 이루어진 비연속적 글쓰기"라고 부연했다.

하이퍼 텍스트는, 구조주의나 포스트 구조주의 이론가들에 의해 발단이 되었던, 쓰고 읽는 방식의 실증적 예를 보여주며(metatext), 이 이론들을 실천으로 이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로, 바흐친의 dialogism과 heteroglossia, 레비스트로스의 bricolage, 바르트의 생산자로서의 독자와 소비자로서의 독자의 구분, 데리다의 로고스의 탈 중심화와 현존/부재 이분법의 해체, 들뢰즈 가따리의 rhizome, 그리고 푸코가 말한 독자의 입장(위치)으로서의 저자의 기능 등이 있다. 사이버네틱 효과를 강화하기 위한 하이퍼 소설의 노력은 모더니즘이나 포스트 모더니즘적 실험문학에서도 이미 성취된바 있다. 조이스의 'Ulysses'나 'Finnegan's Wake',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의 'the waves', 거트루드 스타인의 'The Making of Americans', 토마스 핀천의 'Gravity's Rainbow',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Pale Fire', 이탈로 칼비노의 'If on a winter's night a traveler'등이 그 예이다. 이 작품들은 사이버네틱스와 자주 연관지어 언급되는 사이버펑크 소설인 윌리엄 깁슨의 'Neuromancer'보다 더 하이퍼 텍스트를 닮고 있다. 깁슨의 소설은 사이버 공간의 미래에서 일어나는 삶을 주제로 다루고 있지만, 그 형식은 전통적인 리얼리즘 방식이다. Moulthrop은 사이버펑크를 하나의 순환으로 묘사하는데 그것은 "여전히 똑같이 꾸러미로 제시된 구식의 미래로 되돌아가 과학소설에 등장하는 결함이 많은 사회를 다루는 소설이나 영화"와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그는 깁슨과 같은 사이버펑크 작가들이 버츄얼 문화라는 완전히 다른 경험을 갖게 해줄 전자적 글쓰기 양식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급진적인 하이퍼 텍스트 작가인 멀드롭은 작가들이 경전화된 책에 묶여 소심함을 보인다고 비판한다; 특히, 그는 인쇄물은 사이버펑크 작가들에게는 하나의 장벽이며, 사이버네틱스적인 현실을 강박적으로 재현하려고만 했지, 실제로는 하이퍼 텍스트 미디어를 사용하여 실례를 보여주는 데에는 미흡하다고 지적한다.

한참이 지난 후 Robert Coover 같은 포스트 모던 작가는 자신의 실험을 인쇄물 장벽을 초월하여 확장했다. . . . 특히 그는 집단 글쓰기 구성을 즐겼는데, 그가 보기에 매우 저돌적이며 창의적이었다 . . . : "익명으로 짜여진 조각들로 된 이 공간은 계속 온라인 상태이며, 각각 새로운 워크숍 학생들 집단은 거기서 초대받아 하이퍼텍스트 호텔의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다. 1세기나 2세기 가량 더 두고 보고 싶다".

후버가 발견한 것은 '내러티브의 실질적인 흐름은 조각난 텍스트들간의 연결에서 이루어지지만', 대부분의 창조적 영감은 파편적인 기능을 가진 조각난 텍스트들간의 틈새에서 일어난다는 점이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에서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플롯이나 성격 전개와는 다르게 하이퍼 텍스트의 창조성은 링크, 여정, 순환, 지도제작(주1) 등과 더 관련이 있음을 말해준다. 하이퍼텍스트 작가와 독자의 관계는 특히 위계적 구조를 배제하고, 정보의 불연속적인 조각의 구성을 제시하는 것으로 강조된다. 이 조각들은 독자들이 참여하여 배열하지 않으면 내러티브가 되지 않는다. 가장 효과적인 하이퍼 텍스트는 독자에게 복잡하게 얽힌 텍스트 목록을 조직하게 하는 것이다. 하이퍼 텍스트 시학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유동성, 우연성, 미결정성, 복수성, 불연속성"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 방식이 미래적임을 믿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이 작가의 천재성에 위협이 될 수 있고, 탈 중심이나 복수성의 과잉을 초래할 수 있으며, 선형적인 이야기의 교환에 머물 수 있음을 견지한다. 이렇게 볼 때, 하이퍼 텍스트는 너무 과장되거나 힘을 잃고 축 늘어지거나 싸구려 열광이 될 위험도 있다.

조이스의 "Afternoon", 가이어의 "Quibbling", 멀드롭의 "Victory Garden"을 읽고 나면 쿠버가 경고했던 말에 동의할 것이다. 확실히 하이퍼텍스트는 독자로 하여금 공간을 벗어나서 장면들과 인물들의 대화나 환영들을 통해 부유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 . . 이야기를 찾아가는 길들이 미로 같아서, 그것을 찾다보면 적어도 얼마간은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가질지도 모른다. . . . 그러나 이 즐거움은 깊은 성찰이나 지속적인 만족을 주지는 못한다. 미로 찾기 여행이 주는 강요라 할까? 그것이 물리적 공간이든 텍스트 공간이든 간에 탐정이야기의 플롯같이 해결의 열쇠를 찾기 위해 고문당하는 듯한 이야기는 확실히 독자가 부정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이퍼 소설의 또 다른 즐거움은 동적인 활동이라 할 만 한데, 마우스를 이리저리 눌러 여러 항목들을 한번에 보고 선택할 수도 있으며, 전혀 다른 새로운 항목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점이 좋다. 그러나 이 또한 실질적인 즐거움을 주지 못한다. 하이퍼 텍스트를 읽고 있자면, 독자는 단순히 표면적인 활동에 머문다. 창조적인 쌍방향적 사이버네틱 경험(MUD, MOOs, MUSHes 게임등?)과는 좀 다른 면모이다.


Michael Joyce의 Afternoon은 하이퍼 소설의 발전을 이해하는데 기본이 되는 텍스트이다. 미스터리는 아니지만 미스터리 같다. 불륜이 일어나고, 혹은 잠재적으로만 일어나고(환상속에서 처럼) 그리고/혹은 일어나지 않고. 마찬가지로, 이야기에 비극적인 자동차 사고가 나오고, 그것은 그리고/혹은 일어나지 않고, 그리고 그 안에서 열광적이고/거나 무관심한 인물의 아들이 죽고, 그리고/혹은 다치고/거나 관련이 없거나. . . 등 조이스의 이야기의 복잡함은 독자들이 요구되는 다른 노드들의 연쇄를 다 여행해야만 특정한 노드로 갈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된 경로들은 다른 많은 장소들에서 각각 다른 것으로 횡단한다. 그래서 각각의 경로들은 지나갈 때마다 서로 다르게 링크되거나 연결된다. . . . 그럼으로써 "<만일 내가 네 옛 아내와 잠을 잔다면 어떤 느낌이지?>" 와 같은 질문은 네 개 이상의 이야기 문맥 속에서 매번 다르게 굴절되는 것이다.

스토리 스페이스 프로그램은 기본 옵션을 제공하여 독자가 선택하지 않고도, 텍스트 전체를 이동할 수 있게 한다. 물론 수동적이고, 선형적이고, 비모험적이긴 하지만, 조이스를 포함해서 이 프로그램 제작자들은 이 기본옵션을 통해 변화를 요구하지만 여전히 인쇄문화 습관에 젖은 사람들을 위해서라고 말한다. 기본옵션으로 이야기 전체를 훑고 나면, 이제 부스러기를 고르고, 약간 거칠게, 여기에 있는 단어들을 활동적으로 쫓아 다른 이야기 공간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 물론 단어들을 찾는 일은 즐겁지만, 찾아서 클릭하면 다른 스크린으로 넘어가고, 다른 단어를 찾으려면 다시 되돌아와야 한다. 이것은 시간을 소비하는 일이다.


소개말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분명한 신호가 없는 것은 당신들을 헷갈리게 하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호기심을 자극하고 유희를 도모하여 그 깊이에 초대하기 위해서입니다. 관심 가는 단어에 클릭 하세요". 구석에 있는 단어는 경로를 유발하지 못하는데, 이것은 다른 경로에 자리를 내어 준다. 그에 따르면 단어를 선택하는 것은 일종의 'texture'를 이루고 있으며, 독자들과의 실제 상호작용은 "texture의 추구에 있다고 "말한다. Texture를 통해, 조이스는 언외(言外)의 느낌과 낯설음으로부터 공명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 . .


그러나 만일에 그가 생각했던 흥미로운 단어들을 독자가 똑같이 선택한다면, 조이스가 중요하게 생각한 상호작용의 희망은 실현될 것이다. 내가 보기엔, emphysematous라는 이상한 형용사가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다른 많은 말들은 그렇지 못했다. 따라서 조이스의 관점에서 직물화되지 못했다. 조이스의 이 텍스트가 도모하는 상호작용의 성과를 판단하면서 그는 인정하기를 "부분적으로 실패한 시도"라고 했다. "구성적"이기 보다는 "탐색적"일 뿐이다. 탐색적이라는 말은 독자들이 이야기 경로들을 따라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매개되는 것에 제한이 있다느 말이고, 구성적이라는 말은 독자들이 구조적으로 그 텍스트를 변경시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성적 하이퍼 텍스트에서 독자는 저자가 되는 것이다.

독자의 기대와 작가의 생산간의 이러한 갭은 상호작용에 있어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상호작용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독자들과 텍스트 작가들간의 수많은 인터페이스가 있어야 하며, 단어 선택의 경우, 독자들의 노력에 대한 보답이 충분해야한다. . . . 모험의 차원에서 결국 이야기의 놀라움 같은 것 말이다. 하이퍼 작가들에 의해 고안된 비틀고, 바꾸고, 돌고 하는 장치들이 놀라움을 주지는 않는다. 사실 그것을 대신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이 작품의 마지막 경로에 다달았을 때 나는 실망했다. 하이퍼 경험은 선전과는 많이 다르다: 내가 기대했던 끝없는 이야기(칸트적 의미에서 양적/수학적 숭고와 같이)는커녕 너무 단순했다. 그리고  비전통적이거나 거칠기보다는 오히려 섬세하고 절제된 느낌이었다.

조이스 작품에서 보게되는 서정적 아름다움의 경우도, 이야기 진행을 멈추게 하는 경향이 있다. 쿠버가 우려했던 것처럼 서사운동을 멈추게하여 축 늘어지게 할 수 있다는 말이다. . . . 여러 가지로 파편화된 서정적이고 세밀한 묘사들은 우리로 하여금 거기에 머물러 한참 그것을 생각하게 하여, 하이퍼 매체의 활동적 잠재성을 축소하고 정체된 상태의 집중을 요구하기도 하는 것이다.

Guyer의 Quibbling은 조이스의 텍스트보다 덜 완벽하고 꽉 짜여지지 않았다. 가이어의 텍스트는 근사한 산문 몇 편을 통해 중세 수녀 마가렛을 놀랍게 묘사하고 있다. 그녀는 헨리라는 수사와 관능적 관계에 빠진다. . . . 그러나 이 서정적인 구문들은 조이스의 그것 보다 확대되고 이질적이고 대화적인 텍스트로 짜여져 있다. 가이어는 단호하게 관념적 심미주의를 거부하여, 천제로서의 단일한 존재인 작가, 유기적 총체로서의 예술작품, 거리를 두고 관조함으로써 획득되는 감수성(reception) 등의 개념을 거부한다.

가이어는 우선 독자를 위해 지도와 챠트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장소들을 목록으로 만든 지도는 독자들에 대한 그녀의 세심한 주의를 알 수 있다. . . 종종 작가-화자가 독자에게 질문을 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작가의 이야기 선택과 독자의 보고싶은 희망을 둘 다 고려한 것이다: "어디 봅시다. 여기에 링크를 놓을 테니, 한번 찾아보시죠. 미스터리 좋아하죠?"라는 식으로 화자가 독자에게 말을 건내기도 하며, "따라오지만 말고, 저 변덕스러운 것을 잡으세요 . . ." 라고 말함으로써 독자들의 기대나 이야기 전통을 조소하기도 한다.

조이스의 이야기는 중심 인물들의 상호작용을 따라 움직이지만, 가이어의 텍스트는 지각연상을 통해 퍼져나간다. 예로, 한 남자의 팔의 촉각-시각적 굴곡으로 시작하여, 어떤 여자의 등, 다음엔 손에 쥐인 멜론, 다시 점토로 된 병의 굴곡 등으로 이동한다. 다른 형태의 응집력을 위해 이야기의 응집력을 피하면서, 그녀는 일종의 흐르는 망을 구성하여 텍스트 요소들간의 연결을 퍼트리고 있다.

화자는 스스로 이야기 조직을 변화시키면 어떤 효과가 있는지 의심해보고, 그 대답을 하면서, 독자에게 자신의 의도를 밝히기도 한다 . . . . 잡지 목록 중 하나에서 가이어는 Mary Gordon의 에세이집에 대한 비평을 읽은 것을 언급하면서, 자신의 작품에 언급했던 고든의 인용구를 다시 생각해 보기도 한다. . . .

가이어의 텍스트로 알수 있는 것은 상호텍스트성이 하이퍼 소설에서 표제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이다. 다른 작가나 화자로부터 나온 텍스트 스크린들(보르헤스, 바르뜨, 보들리야르, 베이슨,조지 부시, 바이어니 . . .이들 작가들은 다만가이어의 텍스트에 나오는 B자로 시작하는 이름을 가진 이들일 뿐이다)은 직접적인 코멘트 없이 웹 상에서 짜여진다. 이들간에 연결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독자는 또한 "marginal notes" 메뉴선택을 사용할 수 있는데, 다른 텍스트들을 하이퍼텍스트에 첨가할 수 있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텍스트에 동화되지 않고 서로 불연속하는 파편들(다른 작가의 텍스트들)을 포함시킴으로써 "main"텍스트의 위계를 부식시키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그 자체로, 하이퍼 텍스트는 바흐친이 말하는 dialogic과 heteroglossic적인 경향으로 간다. 이것은 인쇄 문화의 텍스트가 단일 화자나 작가의 목소리나 관점에 종속된 상태에서 다른 텍스트를 끌어들이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단일목소리/독백적인 텍스트는 다른 모든 작가들을(인용되든, 부연하든 혹은 인유되든) 허수아비로 만들며, 원래 목소리를 묽게 하여 작가가 자신의 위치를 강화하게 한다. 랜도우는 바흐친이 다른 텍스트를 인용하는 방법이 책에서의 형식보다는 하이퍼 텍스트의 형식에 가깝다고 지적한다. 바흐친 주석가인 Caryl Emerson은 바흐친이 인용할 때 "상세하게 인용하고, 각각의 목소리를 완전히 인용한다. 인용하는 작가의 특권적인 힘을 인식한 탓이다"라고 말하고 있다(주2).

Moulthrop의 Victory Garden은 조이스나 가이어의 그것보다 더 복잡하다. 이는 하이퍼 소설 장르가 점점 복잡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이야기 노드의 부분적인 지도를 삽입하고 북쪽 남쪽 정원 구역의 형식으로 경로들을 연결한다. 지도 없이는 읽기가 불편하다. 왜냐하면 이야기 속에는 많은 순환고리들이 있어 단순히 기본 옵션 버튼만을 클릭하는 독자에게는 출구를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 . . 빅토리 정원은 독자에게 처음 몇 개의 화면 안에서 경로를 선택하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야기는 진행되지 않는다. . . .

멀드롭의 초기 작품은 핀쳔에 집중해 있었다. . . . 빅토리 정원에서도 핀쳔의 작품의 영향이 많이 있다. 핀쳔의 작품에서 2차대전과 베트남전쟁이 뒤섞인 것과 유사하게 베트남전과 걸프전이 섞여 있다. 빅토리 정원의 주요 인물들 중 하나는 핀쳔의 편집병적 인물인 Boris Urquhart이다. 그는 무의식과 전자적으로 대면할 수 있도록 하는 프로젝트에 가담하여 "세계 최초의 쌍방향적 꿈"을 만들어낸다. 이 작품은 이상한 인물들로 가득차 있고, . . . 이야기의 어조는 갑자기 달라지고 유머러스한 문구들이나 정치적인 심각한 문구들, 포스트 모던적인 매체의 비판과 전화내용 등이 여기저기 병치되어 있다. . . .

조이스나 가이어처럼 멀드롭은 하이퍼 텍스트성에 대해 메타서사적 관찰을 시도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하이퍼 텍스트는 정보들의 일시적인 흐름을 능동적으로 관리하고 다루기 위한 중요한 도구이다. 이 매체는 "발명하고, 발견하고, 쳐다보고, 여러 가지의 조직적인 구조들을 실험"하는데 꼭 필요하다. 그래야만 정보를 재구성하고 인식의 지도를 제작 할 수 있는 것이다. 불연속하는 이러저러한 텍스트 파편들을 땜질하여 새롭게 결합하는 기술의 효과는 지각이나 개념에 관련된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다. 이러한 신념은 단어들을 만들어내는 것의 중요성을 설명해준다: "비록 단어생산이 가끔은 불연속을 창조하지만, 이는 또한 연결 지형을 만들기도 한다". 멀드롭은 paraknowledge(Lyotard의 paralogy에서 암시 받은)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편집병과 지식의 관계를 설정하고 모든 것이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언급한다. 멀드롭은 질서의 개념은 무질서로부터 출현한다는 카오스 이론을 상기시키고, 하나의 복잡한 시스템에서 확률론적인 요소들의 중요성을 언급한다. 하이퍼텍스트는 독자에게 기본옵션으로 제시된 경로를 바꾸어 정보의 바다에서 길들을 연결하고 찾으라고 요구한다. 하이퍼 텍스트의 혼돈을 보고 있지만 말고, 독자들은 질서를 구성하는 임의적이고 즉흥적인 결합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하이퍼 텍스트 문학의 미적 가치를 판단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매체에 적합한 규준을 사용해야 한다; 하이퍼텍스트 매체는 독자의 상호작용을 최대화했을 때 완전히 실현된다. 무작위성과 확장성만으로는 하이퍼텍스트 문학의 미적 가치나 성공을 담보해주지 않는다. 사실 무작위성과 확장성은 그 자체로 하이퍼 텍스트 작가가 물신화된 형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쿠버의 관찰에서 볼 수 있듯이, "언제 어디서든 자기가 원하는 어떠한 방향에서건 이야기를 취할 수 있는 작가의 자유는 의무가 되어 버린다: 결국 그 자유는 마비될 수 있는 것이다". 요즘 몇몇 하이퍼 소설의 생산과 판매에서 보면, 텍스트의 확장, 복수성과 복잡성에 관한 이러한 강조를 볼 수 있다 ― 예로, John McDaid가 쓴 "Uncle Buddy's Phantom Funhouse"의 기술적 포트래치가 있는데, 이것은 Eastgate Systems가 "Five disks Two basement tapes One chocolate box Too many links to count"라고 광고하는 소책자를 판매한다.

복수성과 확장성이 여러 독자들에 의해 텍스트로 확장될 때, 하이퍼텍스트는 그 잠재성을 실현하게 되며 단순한 탐색이 아닌 구성이 된다. 이 효과를 성취한 작품이 바로 Deena Larsen의 "Marble Springs"이다. 역시 Eastgate 판매 책자에서, 이 작품은 "an open constructive hypertext"라고 적혀있다. 라슨의 텍스는 쌍방향적인 시인데, 미 서부 변방에 사는 여인들의 삶을 탐구한다. 디자인은 시편들로 이루어져 유령마을의 교회의 익명의 저자들이 있고, 이들은 독자들을 끌어들여 텍스트 전체에 널려진 실마리에 숨겨진 시인들의 정체성을 찾도록 한다. 이 하이퍼 텍스트는 복잡한 망으로 구성되어 다양한 문화의 여인들간에 상호연결을 가능케 한다. 이것은 라슨의 헌신적 연구에서 구성된 것으로, 그러한 법률, 종교, 이불 누비기나 요리와 같은 주제들에 관한 폭넓은 전기들로 연결된 노드로 구성되었다. 구성적 하이퍼텍스트로서 Marble Springs는 독자를 부추겨서 새로운 인물들과 이야기를 덧붙이게 하여 새로운 연결을 도모한다. 또한 라슨의 텍스트를 역사와 문학 수업에서 일어나는 독자-작가간의 쌍방향적 교육과 창조적 협동과제로 계획할 수 도 있다.

6년 전에 New Literary History에 글을 쓴, Richard Ziegfeld는 하이퍼텍스트 소프트웨어는 곧 독자들에게 문학텍스트를 상호 재구성하게 할 뿐 아니라, 독자들의 반응들로부터 자료들을 모아 미래의 텍스트(예로, cybernetic feedback loop)에서 독자들의 참여에 의해 하이퍼텍스트 매체를 정교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견했었다. 비록 요즘 하이퍼텍스트 소프트웨어는 아직 독자들의 반응을 수집할 능력이 없지만, 새로운 매체에 빠진 많은 작가들 대부분은 하이퍼 텍스트를 자신의 수업에 사용하고 자신의 텍스트를 학생들과 공유하는 학자들이다. 독자가 고무되어 자기 자신을 반추할 수 있도록 하는 가이어의 텍스트와 더불어, 조이스에서 라슨으로 이어지는 궤적은, 독자들의 쌍방향성에 대한 커지는 욕구가 당연하다는 점을 제시하고 있다. 하이퍼텍스트 읽기의 이러한 면모는 아마도 다른 어떤 것보다, 18세기이래, 칸트나 코울리지나 아놀드, 그리고 리차즈와 크린스 부룩등이 말하는 읽기와는 구별되는 것이다. 올바른 반응이라는 개념은 위에서부터 문화를 주입하는 교육적 방식을 특징짓는데, 이 방식은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주체적 경험의 한계나 특수성을 초월하여 허가받은 문학 독자가 되고, 심미적 수용과 심미적 창조를 일치시키도록 강요했었다. 그러나 하이퍼텍스트 문학은, (고급)문화를 독자에게 하향시키기보다는, (독자의)문화를 상향시키는 것을 겨냥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 하이퍼텍스트가 쓰기, 읽기 연구 비판적 사고를 촉진시키기 위한 교육 도구로 폭넓게 사용된다면, 예술 형식으로서 하이퍼 텍스트는, 오랫동안 계속해서 지배적인 문학매체의 자리를 차지해 왔던 인쇄물과 경쟁해야 할 것이다. 최소한 이것들은 출판과 비평이라는 구비된 제도를 포함하고 있다: . . . Raymond Carver, Jayne Anne Phillips, Brett Easton Ellis 그리고 Bobbie Ann Mason과 같은 신사실주의 작가들의 문학의 위상과 대중성은 포스트모던한 세계에서도 여전히 리얼리즘적 서사가 힘을 가지고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아직도 전통적인 서사구조를 선호하고 물질적 감각을 즐기고 묶인 책을 들고 다니길 즐기는 독자들이 있는 한, 여전히 문학 인쇄물 산업은 존속할 것이다.

하이퍼텍스트에 도전하는 세력은 가상현실 기술에서 출현할 것이다: 완전히 매몰된 가상 경험(시각 청각 헤드셋이나 장갑 혹은 옷 등을 필요로 하는)은 점점 세련되고; 전자 토론이나 동호회와 같은 것들이 이미 미국에서만 60,000개에 달한다. Marie-Laure Ryan 이 지적하듯이, 가상현실 체험의 힘은 "신체 자체를 매개로한 집중(immersion)과 상호작용"이다. 반면 문학의 경우, 인쇄물이든 하이퍼텍스트든, 독자는 이 두 가지 효과를 동시에 다 경험할 수는 없다(주로 사유의 영역에만 작용). 소설 작품(너무 실물 같아서 독자가 의심하기를 유보하듯이)에 더 더욱 침잠할수록, (텍스트 구성 그 자체에 더 집중하는) 쌍방향적인 메타-소설적 경향은 사라질 것이다. 비록 포스트 모던적인 인쇄물이나 하이퍼 텍스트가 보다 능동적인 독자로 인해 쌍 방향성을 도모하긴 해도, 이 쌍 방향적 소설 형식은 가끔은 허구의 세계에 사로잡히는 독자의 즐거움을 부정하기도 한다. 라이언은 가상현실(신체 내부로부터 허구세계의 경험 뿐 아니라 그 세계 내부에 직접 도구를 통해 상호적으로 개입하는 역할을 제공하는)이 제공하는 특별한 종류의 침잠은 두 관점(작가/독자)을 화해시킬 것이며, "언어를 극적인 연기로 바꾼다"고 지적한다.

비록 모든 문학 읽기는 일종의 행위를 필요로 한다. 가상 세계에서 직접 참여하는 행위와는 상반되는 문학적 리얼리즘의 침잠된 경험에 의해 위임된 행위(신체적 지각적 감각적 경험과 사유의 경험이라는 두 측면을 말함). . . . 상호작용과 협동적 창조를 찾는 사람들을 유혹하려면, 하이퍼 텍스트는 가상현실 기술과 협력해야 한다. 그래야 독자들은 실시간으로 다른 독자들과 극적인 행동의 연기자가 될 것이다.

(주1)

링크는 연속의 의미(소통, 연속)에서 연결이라기 보다는 다른 곳으로 튄다는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여정은 오랫동안 상주하지 않고 머문 자리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지 않음을 의미하며, 순환은 프로그램화된 원환적 고리의 뜻이기보다는 거미줄과 같은 망으로 구성되어 우연적으로 출발점이 종착점으로 되는 모양새를 의미한다. 지도제작의 의미는 지도를 가지고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길을 만드는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역자)

(주2)

바흐친이 보기에 언어 혹은 발화에서 사물의 의미를 지시하는 측면은 부수적인 것이다. 그에 따르면 언어는 행위 그 자체가 된다. 따라서 의미를 지시하기 위한 표현들보다는 어떠한 목소리(어조, 언어습관 . . .등)를 갖는가에 따라 사회 문화적 의미를 가지게 된다. 바흐친은 따라서 인용할 때, 의미만을 요약한 상투적인 표현 보다는, 직접 말하거나 쓴 사람의 목소리 '아!', '글쎄. . .' 등과 같은 행위적인 측면을 더 강조하여 이를 인용하기를 즐겼다고 한다.(역자)


* 이 글은 Molly Abel Travis의 다음의 논문을 요약 번역한 것이다: "Cybernetic Esthetics, Hypertext and the Future of Literature". Mosaic. 29/4 (Dec. 1996): pp. 115-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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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텍스트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형식적 특징이 있으며, 하이퍼 텍스트의 주목할만한 형식을 이 텍스트의 특징들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 글이 가만히 붙박혀 있지 않는다.

편집된 화면에 나타나는 일군의 글은 저자가 계획해놓은 절차에 따라 순환적이거나 연결적으로 바뀌면서, 다음 화면의 다른 내용으로 전환된다. 따라서 읽는 사람은 지금 읽고 있는 글의 내용을 마치 버스를 타고 창가에서 지나가는 광경들을 보듯이 쳐다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그 글들을 꼼꼼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의 행동을 직접 취해서(부라우저 조작) 억지로 붙잡거나 편집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독자는 그 글들에 무심해야 할 것이며, 순차적으로 바뀌는 화면에 눈을 맡기고 따라가야 한다(dive in).

2. 순환적인 화면 전환에서도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출구가 있다.

매 화면에 나타나는 글에는 네 가지의 서로 다른 연결 지점이 마련되어 있다. 따라서 특히 눈에 띠는 단어가 나오거나 관심이 가는 구절이 나오면, 현재 화면상에서 진행되고 있는 순차적인 변환을 다른 방향으로 전환할 수 있다. 이 텍스트의 특징은 순환적인 움직임 속에서 다른 방향으로 전환할 수 있다는 점이다.

3. 전체의 스토리와 내용을 이해하여 큰 틀로 구조화할 수가 없다.

플롯을 따라 짜여진 이야기가 아니라, 이러저러한 파편화된 문구들을 계속해서 연결하여 놓았기 때문에, 하나의 구조를 띠는 것 같으면서도 그 맥락을 전체화할 수가 없다. 따라서 이 텍스트는 처음부터 지도가 없는 셈이다. 지도 없이 떠나는 여행처럼, 이 글들은 처음과 끝이 없으며, 어디에서 시작해도 무관하다. 이 텍스트는 하나의 브리꼴라쥬이다.

4. 저자는 꿈과 같은 무의식의 활동을 텍스트로 재현하고 있다.

파편적으로 흐르거나 다른 곳으로 이탈하게 끔 제작된 이 텍스트는 마치 꿈을 꾸는 사람이 꿈속에서, 이 방 저 방으로 도약하여 본성적으로 다른 내용을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각이나 연상의 흐름처럼, 이리저리 흐르다가 다른 출구로 나가는 방식을 재현하고 있어, 이 텍스트를 따라가다 보면 저자의 꿈의 흐름을 쫓는 듯 하다.

5. 이 텍스트는 의미와 관련하여 메타-텍스트적인 반응을 유도한다.

의미해석의 두 가지 관점이 있는데, 1. 저자가 꾸며놓은 의미에 독자는 침잠되어 그 의미를 내면화하거나 향유하고 느끼는 방식이다(내면화된 독자). 2. 저자가 계획한 의미에 함몰되기보다는, 텍스트에 나타난 의미가 어떻게 제작되고 짜여지는지를 찾는 방식이다(분석적 독자). 독자는 Hegirascope를 읽으면서, 의미해석의 두 번째 방식처럼, 계속해서 넘어가는 구문들과 사방으로 갈라지는 링크들에 침잠되지 못한다. 따라서 이 텍스트에서 잘 드러난 의미를 내면화하고 음미하기보다는(드러난 전체의미 조차 파악 할 수가 없다), 의미가 어떤 방식으로 구성되고 있는지를 분석한다. 이렇게 본다면 더 나아가 독자는 구성된 의미의 수용자가 아니라, 오히려 의미의 구성자라고 까지 말할 수 있다. 하이퍼 텍스트는 메타텍스트적이다.

6. 하이퍼 텍스트는 일종의 프로그램으로 짜여진 퍼포먼스이다.

하이퍼 텍스트는 문자 기호들이 지시하는 의미를 통해 저자와 독자가 연결되는 방식이 아니라, 프로그램 제작을 통해 연결된다. 다시 말해 하이퍼 텍스트는 기호의 의미론적 형식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것은 여러 가지 감각활동 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Hegirascope는 쓰여진 글뿐만 아니라, 여기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구성 요소들, 즉 글자 크기, 색깔, 화면 레이아웃, 화면 색, 이동 속도 등, 각각의 노드와 링크가 구성되는 모든 요소들 자체가 하나의 텍스트의 기능을 하고 있다. 이 요소들은 쓰여진 것이 아니라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지고 제작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이퍼 텍스트는 하나의 화폭에 그려진 단일한 재료의 의미론적 구성이 아니라, 모든 공 감각적 요소들을 동원하는 일종의 퍼포먼스이다.

7. 선을 벗어난 시간

이 텍스트의 저자인 S. Moulthrop은 이 작품이 시간을 근간으로 하는 텍스트라고 말한 바 있다. 문학을 흔히 시간의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이 텍스트 역시, 저자의 말에 따라, 시간의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텍스트에 구현된 시간은 고전적 형식의 문학(아리스토텔레스적)에서 볼 수 있는 시간의 개념과는 많이 다르다. 우선 이 텍스트의 흐름은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순차적이며 선형적인 형태를 띠고 있지만, 이를 구성한 저자나 텍스트를 따라가는 독자의 시간은 전혀 선형적이지 않다. 계속해서 흐르는 창에 짜여진 글은 각각이 서로 다른 제목을 가지고 있으며, 관점과 묘사 혹은 서술 기법 등이 모두 동일하지 않다. 또한 일관적인 단계를 취하지도 않으며, 논리적인 순서를 따르지도 않는다. 특정한 플롯이 없는 것이다. 시간은 고전적 방식의 재현에서처럼 주관적 사유의 계열이 아니라 객관적 신체(혹은 무의식)의 계열에서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시간은 (주관적 형식으로서)사유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가 되었다. 실존하는 몸이 배제되고 있는 경우에도 불구하고, 하이퍼 미디어나 사이버 미디어에 관한 이러저러한 논의들에서 '직접적인 경험의 문제'가 자주 언급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8. 결론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모든 것들이 파편화 되어 있다. 따라서 전체화할 수가 없다. 기억은 임시적이고 과도기적인 방식으로만 기능할수 있다. 오랫동안 머물러 정주할 수가 없기 때문에, 기억은 부분적인 잔상들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보니 어떠한 의미가 구성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독자 고유의 mapping이 요구된다. 부분적인 것들은 독자의 임의적인 구성력에 의해 재구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의미는 고정되지 않고 변화하거나 잠재적이다. 이 텍스트는 처음부터 재판(1995년도에 이어 97년도에 다시 수정됨)을 예고하고 있었던 셈이다.

* Stuart Moulthrop의 Hypertext인 "Hegirascope"는 아래의 주소에서 볼 수 있다.

  http://iat.ubalt.edu/moulthrop/hypertexts/HGS/HGS0B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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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과학과 도구의 사용은 과학자들의 연구성과가 현실화되는 데에 어떤 도움이 될까? 우선 물리적 환경의 통제, 의식주 개선, 안전의 보장, 자연상태에 노출된 생물학적 굴레로부터의 해방, 생물학적 진화과정에 대한 지식의 증가, 질병과 수명의 연장, 정신 건강의 개선 등이 있을 것이다. 소통이 발달함으로써 생각을 기록하고 분류하는 기술의 좋은 점은 개인뿐 아니라 종 전체로 확대된다.

  엄청난 연구 성과들이 있지만, 모두가 독립적으로 생산된 것도 아니며, 심지어는 다른 분야의 연구에 의존적이기까지 하다. 또한 시간적 제약, 기억할 수 있는 양의 한계 등으로 인해 학제간의 교량이 될 만한 것들은 피상적 수준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만델의 유전법칙이 한세대동안 빛을 못 본 이유가 그의 저작이 독자에게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듯이, 과학에서 간과해서는 안될 부분은 연구성과 만큼이나 중요한 연구결과의 유포(전달)와 검토일 것이다. 인간의 경험은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지만, 이를 사용하고 제대로 수용하기 위한 수단은 초보적 수준에 불과하다.

  현대 기술이 등장하기 전 세대에는 복잡성과 불확실성은 동의어였다. 생각은 발전했지만 그것을 현실화할 물리적 기제가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경제적 여건과 생산체제(대량생산이나 노동력 등)의 한계로 인해 현실화할 수 없었던 라이프니츠의 계산기나, 생각은 훌륭했지만 건설 유지비용의 부담 때문에 좌절되었던 베비지의 계산기, . . . 만일에 파라오가 자동차를 구체적으로 디자인하고 실제로 실험해 보았다 해도 그것은 왕국에 엄청난 세 부담을 안겨주면서 실패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엔 타자기, 무비카메라, 자동차, 자동 전화 등 교체 가능한 부속을 장착한 기계나 얇은 유리단자에 싸여 전선에 섬광이 있는 라디오 열이온 진공관 등이 수도 없이 만들어진다. 이들은 섬세한 부속과 함께 장인들의 솜씨를 능가하는 정밀한 공학적 설계로 구성되어 30센트 정도면 거뜬히 만들어진다. 우리는 값싸고 성능 좋은 정밀기계의 시대에 살고 있다.

과학에서 기록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계속 확대되어야 한다. 옛날엔 쓰기와 사진, 인쇄 등으로 기록했지만, 지금은 필름이나 Wax disks나 마그네틱 선으로도 기록한다. 이보다 더 혁신적인 공정이 나타나진 않았지만 여전히 변하고 있고 확대되고 있다.

  사진기술의 발전은 끊임없이 지속되는데, 더 자동화되고 세공이 잘된 민감한 복합물들이 미니카메라 개념을 낳았다. 미래에서나 볼 법한 이러한 카메라는 본체 위에 작은 장치를 달고 평방 3미리 크기의 그림을 찍을 수 있고, 렌즈 초점이 사방에서 가능하며, 육안으로 보이는 어떠한 물체도 볼 수 있고, 자동 노출로 광대역 조명이 가능하여 천연색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어 입체경이라 할만하다.

  건식사진(dry photography)이 가능할까? 브래디가 남북전쟁 때 찍은 사진은 판을 노출시킬 때마다 젹셔야 했다(습판 사진술 wet collodion process). 지금은 대신에 현상할 때 습기가 필요하다. 미래에는 아마도 젹실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오랫동안 질산염이 주입된 필름을 사용했다. 그래야 현상하지 않고도 찍자마자 사진을 낼 수가 있었다. 암모니아 가스에 노출되면 노출되지 않은 염료는 파괴되고, 사물의 상(象)이 빛에 의해 찍힌다. 또 다른 과정이 있지만 여전히 느리고 서투르다.

  삼십년동안 염료가 주입된 종이를 써서 전기장치에 접촉되는 점들을 검게 만드는 방식을 사용했다. 종이에 포함된 요오드 화합물 속에서 일종의 화학변화를 유도하는 방식이다. 이는 음반을 만들거나 여러 기록장치로 쓰였는데, 바늘이 필름이나 종이 위를 움직이면서 자취들을 남긴다. 바늘 끝의 전기장(electrical potential)은 바늘이 움직일 때마다 변한다. 그러면 바늘이 지나간 선은 전기장에 따라 밝아지거나 어두워진다. 이 장치는 현재 팩스에 사용된다. 두 끝을 가진 바늘이 (열쇠복제처럼) 왔다 갔다 하면서 원본 위를 돌아다니면서 자장을 이용해 변화를 감지하고, 이것이 다른 쪽 바늘로 전송되어 복제되는 것이다. 이 장치는 카메라를 대체하여, 원거리에서도 가능하다. 좀 느리고 화질도 별로 이지만, 또 다른 형태의 건조사진이라고 할 만하다. 그래서 사진이 찍히는 즉시 출력이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1초간 16개의 선명한 이미지를 전송하는 텔레비전과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차이라면, 텔레비전은 바늘대신에 전자빔이 움직인다는 점이고(빠른 스캔), 단순히 화학변화를 일으키는 종이나 필름이 아니라 전자가 닿으면 순간적으로 빛을 내는 스크린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움직이는 영상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기록 속도가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빛을 내는 스크린 대신에 화학변화를 이용한 필름은 연속적인 사진이 아닌 한 장의 사진을 전송할 수 있으며, 이는 건조사진으로 빠르게 찍을 수 있는 속성 카메라를 탄생시켰다. 화학 처리된 필름은 지금보다 더 빨리 움직여야 하는데, 이것이 가능하긴 하지만, 문제는 진공상태의 상자 안에 필름을 넣을 때 생기는 방해물들이다. 전자빔은 아주 섬세한 환경에서만 제대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필름과 전자빔의 방을 각각 분리시켜, 서로 다른 쪽에서 작동하게 하는 것이다.

  건조사진처럼, 마이크로 카메라 역시 갈길이 멀다. 기록물을 최소화하는 장치는 영사(影寫)로 가능하다. 광학적 영사와 축소된 사진의 결합은 학문적 목적에 의해 이미 마이크로 필름을 만들어 냈고 잠재 가능성이 많다. 현재 마이크로 필름으로 20배율로의 축소는 이미 도입되었으며, 재 확대되었을 때 완벽한 선명도를 유지하게 했다. 100배율로 축소된 종이두께의 필름을 생각해보면, 책을 종이에 기록한 양과 그것을 마이크로 필름으로 복제한 것 사이에는 10000배의 차이가 난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성냥 갑 만한 크기로 축소 가능한 것이다. 수백만 장서의 도서관도 책상 하나 크기로 축소 가능하다.

  물론 단순한 압축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기록을 만들고 저장하는 일 뿐 아니라 그것을 분류하고 색인하는 검토작업도 필요하다. 하지만 비용을 생각해본다면 압축이 매우 중요하다. 마이크로 필름으로 된 브리태니커를 만들려면 니켈 하나정도의 물질이면 족하다. 또 단 1센트면 어디서든 메일을 보내고 받을 수가 있다. 수백만 권의 책을 복사하고 인쇄하는 비용을 생각해 본다면 그 차이는 엄청날 것이다.

  기록을 하려면 펜을 집어들거나 타이프를 때린다. 그리고 교정, 식자, 인쇄, 제본의 복잡한 과정이 나온다. 그러나 기존의 메커니즘을 변용하고 언어를 변경하면 이러한 복잡한 과정 없이 다양하게 기록할 수 있다.

  Voder라는 기계가 있는데, 키보드를 누르면 말로 변조되어 나온다. 인간의 목소리가 들어간 것이 아니라, 다만 키 동작이 단순히 전기로 만들어진 바이브레이션을 결합하고, 이것이 스피커를 통해 전달되는 것이다. 벨연구소에서는 이를 반대로 바꾼다. 일명 Vocoder라 하는데, 스피커 대신에 마이크로폰을 사용한다. 말을 하면 그에 해당하는 키가 움직인다. 음성학적으로 단순화된 언어로 말소리를 기록하는 속기타이프라이트(stenotype)와 이 Vocoder를 결합시켜서, Vocoder가 속기타이프라이터를 작동시킨다. 이 결과가 말할 때 찍히는 타이프라이터이다. 현재의 우리 언어는 이러한 메커니즘에는 적절하지 않다. 만국어를 만드는 학자들은 어째서 언어를 전송하고 기록하는 기술에 적합한 언어를 발명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특히 과학에서는 아주 중요한 문제인데 말이다.

  앞으로 많은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자료를 수집하고, 검토하고, 기존자료에서 필요한 재료들을 뽑아내고, 새로운 자료를 만들고 하는 등등. 성숙한 사고를 기계적으로 대체할 수는 없지만, 생산적이고(creative) 반복적인 사고는 기계적인 것의 도움을 많이 받을 것이다.

  계산기(행위)는 반복적 사유 과정이며 오랫동안 기계에 속한 문제였다. 키보드로 조절하고, 숫자에 맞는 키들을 누르는 일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도 피할 수 있다. 광전지를 통해 타이프로 찍혀진 숫자들을 읽는 기계들이 만들어지고, 그에 맞는 키들을 해독하는 기계들이 만들어 졌다. 이것들은 스캐닝을 위한 광전지, 논리적 변이들을 분류하는 전기회로, 솔레노이드의 움직임을 해독하는 계전회로 등의 결합이다. 만일 숫자들을 위치로 찍어 간단히 점들의 집합으로 변환한다면 숫자 해독체계는 더 간단해 질 것이다. Hollorith가 인구조사를 목적으로 만든 펀칭 기계는 카드에 구멍을 뚫어 이러한 메커니즘을 구현했다.

  덧셈은 계산의 한 예에 불과하다. 전산(電算)은 가감승제를 수행한다. 여기에 일시적인 결과저장, 더 나아가 다른 처리를 위해 저장에서 제거하고, 최종결과를 인쇄함으로써 기록한다. 두 가지 방식이 있는데, 하나는 데이터 입력을 손으로 조절하거나 자동으로 조절하는 키보드 기계와 펀치카드 기계이다. 이들은 사실 초보적 수준에 불과하다. 이보다 빠른 전자계산이 물리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출현한다. 이들은 열이온 진공관 장치를 만들어, 초당 100,000번의 전기 임펄스를 계산한다. 미래에는 지금의 100배 이상의 속도를 낼 것이다.

  반복적 사유는 계산이나 통계의 문제로만 환원할 수 없다. 이미 확립된 논리적 과정에 맞게 사실들을 결합하고 기록하는 매순간마다 사유의 창조적 측면이 개입된다(자료나 처리과정을 선택할 때 등). 그리고 다음에는 반복적 조작이 따르며 이것은 기계적인 과정에 속한다. 그런데 이러한 계산은 사업의 필요성이나 확장된 시장이 요구될 때에만 발전한다. 생산방식이 충족될 만큼 발전되었을 때 비로소 대량생산을 가능케 하는 계산기의 진보가 보장되는 것이다. 진보한 분석기계만으로는 그러한 상황은 오지 않는다. 아직까지 시장의 확장도 없고, 빠른 처리방식의 사용자 역시 많이 없기 때문이다. 미분방정식, 함수, 적분 방정식을 푸는 기계, 조수간만을 예측하는 고주파 합성 장치 등 특이한 기계가 많지만 이들은 일부 과학자들에게만 필요하다. 만일 과학적 추론을 논리적 계산과정으로 제한한다면, 물리적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멀리 나아갈 필요가 없다. 포커게임에서 이기려면 확률수학을 사용하는 것으로 족하다. 염주 알을 묶어 쓰는 주판은 아랍인들로 하여금 몇 세기나 앞서서 자리계산법(positional numeration)과 0개념을 생각하게 했다. 아직도 유용하기에 쓰지 않겠는가?

  주판과 현대의 계산기에는 많은 차이가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과학자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다. 고등수학에서 요구하는 고통스러운 계산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확립된 공식에 맞추어 세심한 변환을 반복하는 것 이상의 다른 무언가를 위해 계산기를 사용하는 것이다. 수학자는 숫자들을 처리하는 사람이 아니며, 미적분을 적용해서 방정식을 변환하는 사람도 아니다. 이들은 상징적 논리를 고차원의 지대(plane)에 위치시키는 사람이다. 그리고 특히 그가 도출하는 계산과정의 선택 속에서 직관적인 판단을 하는 사람인 것이다.

  언제든 논리적 사유과정이 전개되면, 기계가 출현할 기회는 반드시 생긴다. 형식논리학은 긴요한 수단이 될 수 있는데, 쉽게 하나의 기계를 구성하여 간단히 교차회로(relay circuits)를 사용하면 형식 논리에 맞게 전제를 다룰 수 있다. 또한 전제들의 집합을 장치에 넣고 크랭크를 돌리면, 키보드 덧셈기계보다 더 정확하게, 논리적 법칙에 따라 쉽게 결론들을 뽑아낸다.

  수학적 논리에도 직관이나 판단이 있어야 하듯이, 논리적 진보에는 새로운 심볼리즘이 요구된다. 이것은 논리적 인과관계와는 무관한 것이다. 새로운 상징주의는 아마도 수 체계를 공간으로 치환한 것일텐데, 이것은 수학적 변용을 기계적 과정으로 이끄는 것보다 더 먼저 일어난다. 그래서 수학자들의 엄격한 논리를 넘어서는 일상적인 논리의 적용이 필요하다. 자료를 엄청나게 쌓아놓았지만, 그것을 어떻게 검토하고 처리해야할지 당혹스럽다. 이는 과학에서 자료를 수집하고 추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획득된 지식을 어떻게 유용하게 뽑아낼 것인가? 사용하기 위해서는 우선 선별해야 한다. 회사에서 고용인들을 관리하기 위해 고용인 카드들을 선별기계에 넣고, 미리 계획된 코드를 넣으면 특정한 지역에 살며 스페인어를 하는 고용인의 목록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파일 안에 있는 수백만 명 중 하나의 지문을 찾으려면 너무 느리다. 물론 선별기계는 빨라질 수 있다. 광전지와 마이크로 필름을 이용하면 훨씬 빠르게 항목들을 검토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 씩 교대로 검토하고 점점 하위 항목들로 내려가서 특정한 조건에 맞는 사람들을 뽑는 이 과정은 단순한 선별에 불과하다. 이보다 더 진보적인 방법이 있는데, 자동 전화교환을 보면 알 수 있다. 여기서는 전부 하나 씩 검토하지 않고, 처음 세 자리로 분류된 것만 검토함으로써 훨씬 빠르고 간단하다. 더 빠르게 하려면 기계적 개폐장치를 열 이온 진공관 개폐기로 대체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백화점에서 신용카드를 이용하면 훨씬 효율적으로 거래가 가능하다(전자빔을 이용한 바코드방식도 그 예이다). 그러나 선별과정의 진짜문제는 색인 체계의 피상성에 있다. 어떤 종류의 자료가 저장고에 쌓이면 알파벳순으로 혹은 번호순으로 파일이 된다. 그리고 정보를 추적해서 분류별로 정보를 찾는다. 여기에 일정한 규칙들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규칙들은 번거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하나의 항목을 찾으면, 그 경로체계에서 나와서 다시 새로운 경로를 입력해야한다(즉, 분류하고 선택하는 기계적 과정이 Dos의 경우처럼 선형적이다. 여기에는 규칙이 있어야하고, 코드화된 규칙을 사용자가 알고 있어야 한다).

  인간의 마음은 이런 식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은 연상으로 움직인다(연상체계, 비 선형적, 과(hyper)공간적). 하나의 항목이 선택되면, 그것은 재빨리 연상에 의해 선택된 다른 항목으로 이동한다. 이것은 복잡한 단서나 흔적들(trails)의 망으로 이루어진다. 순차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궤적이나 단서들에 따라 연상되는 데로 이동하는 것이다(꿈의 경우처럼). 기억은 일시적이고 순간적이지만 속도는 엄청나다. 인간의 이러한 정신적 과정을 인위적으로 완전히 복제할 수는 없지만 이를 통해 다른 방식의 체계를 만들 수는 있다. 우선 연상에 의해 선별된 자료들은 색인에 의한 것 보다 더 빠르고 유연하다. 미래에 개인은 체계화된 개인 파일이나 개인 도서관을 가질 수 있다. "memex"가 이를 가능케 한다. 이것은 개인이 모든 책을 기록하고 소통하고 저장하는 장치인데, 엄청난 속도와 유연성으로 자료들을 처리한다. 또한 사용자의 기억이나 연상에 친숙한 대용물이 될 것이다. 데스크형식으로 구성된 이 장치의 대부분의 내용들은 마이크로필름의 형태로 구입할 수 있다. 책과 그림과 잡지 등 모든 종류의 자료들을 저장하고 처리하고, 화면상에서 직접 프로젝션을 통해 자료를 한꺼번에 볼 수도 있다.

  메멕스는 연상적 색인(associative indexing)을 가능케 하는데, 자료의 모든 항목들은 사용자의 의지에 의해 자동적으로 즉시 선별 가능해진다. 우선 사용자가 단서와 흔적들을 만들고, 거기에 이름을 붙이고, 코드화한 이름들을 입력하고 키보드를 누른다. 사용자 앞에는 연결된 두 개의 항목이 보이고 볼 수 있는 장소에 투사된다. 각각의 버튼에는 빈 코드공간이 있고, 포인터가 이들 중 하나의 항목을 선택할 수 있다. 키 하나를 누르면 항목들은 계속해서 연결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언제든지 항목들 중 하나가 보이면, 다른 항목은 버튼 하나만 누르면 그에 상응하는 코드 공간에서 간단히 불러들일 수 있다. 또한, 많은 항목들이 하나의 단서를 형성하기 위해 서로 연결될 때, 이들은 반복해서 다시 볼 수 있다. 책의 페이지를 넘기듯이 레버를 당기기만 하면. 정확히 물리적 항목들이 새로운 책을 만들기 위해 서로 모이는 것과 흡사하다. 예를 들어, 사용자가 활과 화살의 기원과 성질에 대해 관심 있다면, 특히 어째서 터키의 활이 영국의 긴 활보다 더 유리한지에 대해 공부할 것이다. 그는 수많은 관련서적이나 기사들을 자신의 메멕스에 보유하고 있다. 우선 그는 백과사전에서 관심 있는 논문을 찾는다. 그리고 이 찾은 것을 스크린에 남겨 놓는다. 다음에 역사책에서 또 다른 관련 항목을 찾아 이 두 개를 연결시킨다. 이런 식으로 많은 항목들의 단서(흔적)를 만들어 놓는다. 경우에 따라 자신의 코멘트를 삽입하고 이를 중요한 단서와 그것에 연결된 부수적인 단서를 특정한 항목들에 삽입시킨다. 사용하는 재료의 탄력성이 활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증거가 나오면, 그는 부수적인 단서들 위에 가지를 쳐서 교재를 통해 탄력성과 물리적 견고성의 표를 얻게 된다. 그리고는 길게 분석한 그 자신의 페이지를 삽입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백과사전이 출현할 것이다. 연상의 흔적들과 단서들로 그믈망이 이루어진다. 변호사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관련된 견해들과 판례들을 다룰 수 있으며, 동료들이나 권위자들의 경험도 확보한다. 특허 변호사는 많은 양의 특허처리를 불러와서, 친숙한 단서들을 그의 고객의 관심에 맞는 것으로 짜 맞춘다. 의사들은 단서를 쫓아 환자의 복잡한 반응을 이미 연구된 사례들을 가지고 빠르게 유사한 병력으로 치료하고, 참고문헌을 찾아 관련 해부학이나 조직학의 고전들을 참조한다. 화학자들은 유기복합물의 종합을 연구하면서 모든 화학관련 자료를 연구실에서 불러들여, 복합물들의 유사관계를 따라 흔적을 찾고, 부수적인 단서들로 그 복합물의 물리적 화학적 습성을 연구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학자는 방대한 연대기를 가지고 언제든지 최신의 단서들을 찾아서 모든 시기들을 검토할 수 있다. 새로운 전문직이 출현하여 단서들을 재단하는 사람도 생길 것이다. 이들은 엄청난 양의 기록을 이용해 유용한 단서들을 만들 것이다. 전문가로부터의 유산은 단지 기록 한가지를 추가한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새로운 발판의 계기를 마련해주는 셈이다.

  그러므로 과학은 인간이 생산하고 저장하고 기록을 검토하는 방식들을 충족시킨다. 이는 미래의 수단을 크게 발전시킨다. 모든 종류의 기술적인 문제들은 무시되어 왔다. 그러나 오히려 무시되었던 것은 기술적 진보(열 이온 진공관처럼)를 가속화할 알려지지 않은 수단이다. 현재의 패턴에 고착해서 진부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그 가능성들을 말해야 한다. 예언이 아니라 제안의 차원에서 말이다. 예언이란 알려진 것이 확장되어 실재하기 때문이다. 알려지지 않은 것에 기초한 예언이란 다만 두 번 추론된 추측일 뿐이다.

  기록에 필요한 재료들을 창조하고 흡수하는 모든 단계들은 감각들 중 한가지를 통해 이루어진다. 키를 만질 때의 촉감, 말하거나 들을 때의 구강, 읽을 때의 시각 등. 언젠가는 이보다 더 빠르고 직접적인 경로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눈을 통해 볼 때, 모든 관련 정보들이 시신경 채널을 통해 전기파장이 뇌로 전달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이것은 정확히 텔레비전 케이블이 보여지는 전기파장들과 유사하다. 이 파장들은 그림을 스캔하는 광전지로부터 방송되는 라디오 전송기로 보내진다. 더 나아가 만일 우리가 적절한 도구를 이용해 그 케이블로 접근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만질 필요가 없다. 이 파장들을 전도체로 뽑아내어 전송되고 있는 장면을 드러내고 재생산할 수 있는 것이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두드리는 전화선처럼 말이다. 타자기를 두드리는 사람의 팔 신경에 흐르는 임펄스는 그의 눈과 귀로 번역된 정보들을 손가락으로 보낸다. 손가락이 적절한 키들을 두드리도록 하는 것이다. 이 흐름들을 포착할 수는 없을까? 정보가 뇌로 전달되는 원래의 형태나, 이것이 손으로 전달되어 놀랍게 변형된 형태들이 포착되거나 감지될 수 없을까? 우리는 이미 골전도(bone conduction)로써 귀머거리가 들을 수 있도록 소리를 신경채널에 전달할 수 있었다. 현재처럼 처음의 전기파장을 기계적 메커니즘으로 변형하는 지루함 없이 이러한 것들을 도입할 수 있을까?(아날로그에서 디지털신호로 처럼), 혹은 인간의 메커니즘을 즉각 전기적 형태로 변형하는 일은? 두개골 양쪽에 전극봉을 끼워 뇌파촬영을 하면 잉크로 기록된 흔적을 만들어 뇌 자체의 움직이는 전기현상의 관계를 만들 수 있다. 실제로 기록은 감지되거나 이성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증가하는 대뇌 메커니즘의 잘못된 기능을 잡아낼 수는 있다.

  모든 지각 가능한 외부세계의 형태들은, 소리이건 시야이건 간에, 전기회로를 통해 변형된 흐름 또는 전류의 형태로 환원되어 전송된다. 인간의 구조 내에서도 정확히 유사한 과정이 일어난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의 전기적 현상을 다른 것으로 진행하기 위해 기계적 운동으로 변형시켜야 하는가? 이는 시사하는바가 크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과 즉자성과의 접촉을 잃어버리지 않고는 확실히 보증할만한 예견이 나오기는 힘들다.

  만일 인간이 자신의 과거를 더 잘 회상하고 현재의 문제를 보다 완벽하고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면 인간의 영혼은 더 고양될지도 모른다. 인간은 매우 복잡한 문명을 만들었다. 그래서 자신의 기록을 더 완벽하게 체계화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래야만 과학적 실험들을 더 논리적인 결론으로 도출할 수 있고, 별로 좋지도 않은 기억에 지나치게 의존해서 옆길로 새는 일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물이 이해하기 복잡해도, 필요할 때 다시 옆에 놓을 수 있다는 확신만 든다면, 복잡한 것을 잊을 수 있는 특권을 갖고 이탈하는 것도 재밌을 것이다. 과학을 적용해서 인간은 풍요로운 거주공간을 만들었다. 거기서 건강한 삶을 배우기도 했다. 또 그를 이용해 대량학살도 자행했다. 정말로 좋은 곳에 과학을 써보기도 전에 싸우다 죽을 판이다. 그러나 필요와 욕구에 따라 과학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이를 중단하고 과학이 안겨주는 희망을 잃는 것 역시 불행이 아닐 수 없다.

* 이 글은 1945년 7월에 The Atlantic Monthly 잡지에 실린 Vannevar Bush의 논문 "As we may think"를 요약 번역한 것임.

Posted by hu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