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신길 역을 가보면 5호선과 1호선을 연결하는 지하 통로가 하나 있다. 5호선에서 1호선으로 갈아타려면, 높은 에스컬레이터를 올라가서, 약 150미터 정도가 족히 되는 통로를 따라가야만 한다. 몇 년 전만 해도 그 통로는 텅 빈 그냥 통로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통로 한복판을 따라 상점들이 쭉 늘어서게 되었다. 노점상보다는 좀 더 그럴듯한 상점이랄까? 내 보기엔 아마도 지하철 관계자에게 적당히 돈을 쥐어주고 얻게된 1평 남짓의 공간일 것이다. 조악하게 세워놓은 가판대 위에는 유행하는 옷이며, 가방이며, 중소기업이 만든 최신형 카세트 녹음기, 악세서리, 기념품. . . 등이 울긋불긋하게 늘어서 있다.
나는 오래 전에 이 통로를 친구와 걸었다. 발랄하게 재잘거리며 그 상점들을 눈요기로 지나갔던 것이다. 그러다가 상점들이 거의 끝나갈 무렵 커다란 돗자리 위에 펼쳐져 있는 비디오 테이프들이 눈에 들어왔다. 영화에 관한 나의 지대한 관심 때문에, 나는 친구를 잡아채어 그 돗자리 주위로 스며들었다. 꽤 많은 비디오 테이프. 그 위에 적힌 가격표: 1장에 2천원, 2장에 3천원, 3장에 5천원, 파격세일, 재고정리. . . . 음, 괜찮은데? 나는 그 테이프 더미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홍상수의 <강원도의 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히치콕의 <토파즈>, <영 이노센트>, 크로넨버그의 <크래쉬>, 오시마 나기사의 <감각의 제국>, 채플린 . . . 나는 얼른 눈에 띠는 테이프들을 집어들었고, 다른 사람에게 선점 당하지 않기 위해, 팔 위에 그 무거운 것들을 안고 이리저리 눈을 돌렸다. 그러다 갑자기 어떤 특별한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구석에 쳐 박혀 보일 듯 말 듯 묻혀있는 페데리코 펠리니의 <8½>! 익히 들어서만 알고 있었고, 구하기 쉽지 않은 영화. 나는 그 감독이 만든 <길>이라는 영화를 4번 보면서, 4번 눈물을 흘렸었다. 내가 만약 <길>에 대해 글을 쓰게 된다면, 아마도 바람과 고독에 관한 주제가 될 것이다. 이 작품은 어떨까? 나는 약간 흥분하면서 <8½>을 집어들어 친구에게 건넸다. 내 눈이 빛나고 있음을 눈치챈 듯, 그녀는 자신의 품에 그것을 얼른 감싸 안았다.
그런데 빛나는 내 눈을 본 사람은 그녀 뿐 만이 아니었다. 그 돗자리 좌판대 주인! 그는 내 나이 또래쯤 되어 보였고, 안경 너머로 나의 흥분을 아까부터 훔쳐보고 있었다. 처음에 나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건 하편이에요. 상편은 지금 없어요."
확인해 보니 정말로 그랬다. 실망했지만, 그래도 사고 싶었다. 상편은 언젠가는 구할 수 있겠지. "괜찮아요. 그래도 살래요."
그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두 번째 대사를 내뱉었고, 나는 들켜버린 내 흥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거 짝 맞추어 달라고 누가 주문한 건데. . ."
그 말을 들은 후 나는 찬물을 뒤집어 쓴 것 같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받아쳤다.
"주문 받은 물건을 이렇게 아무데나 굴리세요?"
"어. . . 그게 왜 거기에 있었지? 어쨌든 주문 받은 겁니다."
그는 약간 서투르면서도 단호하게 거절했다. 나는 친구의 품에서 그것을 빼내어 잠시 머뭇거리다가 중얼거렸다.
"그럼 할 수 없지 뭐. . . 그냥 내려놓자."
그리고는 재빠르게 그의 눈치를 살폈다. 나는 의식적으로 표정을 마름질하여, 그 테이프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담담하게 다른 테이프들을 둘러보았다. 꼭 사고 싶으니 팔라고 조르거나 부탁하지 않았다. 나의 표정은 그 테이프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잠시 후 지나치듯 물었다.
"짝도 안 맞는데, 뭐 하실려구요?"
아마도 그는 그 테이프를 두고 흥정이라도 해보고 싶었던 듯 하다. 그래서 그 주제를 계속 밀고 나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일종의 본능처럼 못들은 척 하고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마음속으로 2만원 어치만 살 생각을 했다. 12개를 골라야 정확히 2만원의 계산이 떨어졌지만, 나는 일부러 11개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그에게 가서 품에 있던 테이프를 내려놓으며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 . . 아홉, 열, 열 하나, . . 어? 하나 더 골라야겠네? 뭘 고르지? . . .액션물 하나 고를까? 그냥 이것만 살까?"
나는 옆에 있는 친구에게 농담하듯이 말했다. 그러고 나서 저 쪽으로가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고르는 시늉을 하며, 그 주인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는 잠시 후 점잖게 그 주인에게 다가가 넌지시 말했다.
"아까 그 <8½> 그냥 주시죠!?"
그는 명분과 실리(實利) 사이에서 애매하고도 모호한 (약간 코믹한)표정을 짓다가, "이 테이프들 정말로 싸게 사시는 겁니다. 어디 가서 이 가격에 샀다고 말씀하지 마세요, . . . 주절주절."
궁시렁 거리는 그의 혀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의 발길은 그 테이프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아마도 분명 그 테이프는 한 번도 주문 받은 적이 없었으며, 정찰제가 아니니, 그는 내 흥분을 미끼로 좀 더 받아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가 호락호락 하지 않았으므로, 괜한 욕심 때문에 후회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적절한 시간차 공격으로 그를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좋은 영화들을 싸게 갖게 되어 흐뭇했지만, 그 보다는 무엇보다도 그와의 심리적 흥정에서 승리했다는 쾌감 때문에 우쭐해 있었다. 그리고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는 듯한 친구에게 내 영웅담을 은근히 자랑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그 주인의 잔꾀를 알아챘다는 둥, 냉정하게 표정을 관리하였다는 둥, 이를 속칭 포커 페이스(Poker Face)라고 한다는 둥, 포커 페이스는 노름판에만 있는 기술이 아니라는 둥, 세련된 흥정 테크닉은 살아가는데 있어 아주 중요한 미덕이라는 둥, . . . 잘 보고 배우라는 말까지 곁들여서, 은근히 그녀의 어수룩함을 타이르기까지 했다. 내가 쟁취한 그 심리전의 승전보는 거의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내 손에는 그 전리품들이 잔뜩 쥐어져 있었다. 그러다 보니 발걸음조차도 서사시의 couplet 리듬이 되어가고 있었고, 나는 곧 행진곡이라도 부를 기세였다. (모르는 사람이 약간 있을 수도 있으니 참고로 수다 한마디 하겠다. couplet 리듬이란 서사시에서 영웅의 위대함을 보여주기 위해, 그의 행진하는 걸음걸이를 흉내내어, 장중한 어조로 "하낫 둘 하낫 둘(abab)" 하는 식으로 시의 각운을 맞추는 방식을 말한다. 장중하고 위엄있는 것을 좋아했던 고전주의자들이 주로 많이 사용했지만, 현대의 영국 시인 T. S Eliot은 Prufrock이라는 한 놈팽이가 창녀에게 갈지 말지를 고뇌(?)하고 망설이면서 걸어가는 장면을 이 각운으로 처리한 적이 있다.)
우리는 꽤 시간이 흐르는 동안 걸어가고 있었다(나는 여전히 그 리듬으로. . .). 무언가 생각에 잠겨 한참 동안 말이 없던 그녀가 신이 나있던 내 각운에 파격(solecism)을 하나 삽입하듯 갑자기 내게 물었다.
"그 주인이 잔머리를 굴리고 있었다는 걸 어떻게 알았어? 난 그냥 주문 받은 거라고 하기에, 그런 줄만 알고 있었는데, . . . 나는 아마 죽었다 깨어나도 그 사람이 잔꾀를 부리고 있다고는 간파하지 못할 거야."
그녀는 뭔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은 자신의 삶이 너무 뒤쳐져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작은 불안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본능적으로 알 수 있는 거야! 둔한 감각으로는 절대로 알 수가 없지!"
내 어조는 점점 원망조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서울에서 살기 시작한지 몇 년 되지 않았다. 그래서 사투리 뿐 아니라 지방사람 특유의 어수룩함이 약간 배어있다. 간혹 보이는 그 나른함이 걱정도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못마땅해 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실은 사는데 아무 지장도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잘 살고 있는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맨 먼저 비난하는 사람은 바로 나였었다. 나의 비난은 주로 영리하게 살아야 한다는 채근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바보처럼 당하고 살면 안 된다고, 다른 사람들을 잘 간파해야 한다고, 독해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무시당하거나, 도태된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 . . 뭐 이런 정확한 교재도 없는 교육이 가끔씩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교육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무언가에 떠밀려 내려가듯, 그 교육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최소한 거부감 없이 실천하고 있지 않은가? 알면서도 말이다. 영리하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요즘 사람들의 행복의 관건이 되어 버린 지 오래이다. 바보처럼 살지 않는 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 또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잠깐 동안 저 심리전이 내게 가르쳐준 것, 바로 의심하는 능력이었다. 속지 않고 사는 삶! 그것은 바로 누군가를 의심하는 삶이다. 그(그녀)의 말을 믿지 말자! 속셈을 간파하자! 이것이 시장에서 만들어진 상거래 하는 인간들의 심리적 초상이다. 언제부터인가 이 세상에는 모든 사람들이 상인이 되어버렸다(상인 아닌 사람 있으면 손들어 보라!). 우리가 매일 매일 보람을 느낀다고 생각하며 임하고 있는 나의 일터! 내가 앉아있는 자리에서 일어나, 좀 더 넓은 안목으로, 그리고 좀 더 명료한 의식으로, 내 자리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한번 곰곰히 따져보라! 반드시 누군가의 모습이 보일 것이다. 저 만치에서 든든하게 떡 하니 버티고 있는 어떤 모습, 우리가 알게 모르게 계약과 고용이라는 형태로 귀속되어, 보편적인 점원-공동체를 이루며 의지하고 있는, 대머리에 배나온 체형을 하고 입가에는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어떤 모습!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이 다음에 놀라지 않도록, 그 모습을 낯설지 않고 친숙한 것으로 받아 들일 수 있도록, 철저히 연습을 시킨다)
어쨌든 비디오 테이프를 팔고 있는 돗자리 주인과 소비자인 나는 시장의 흥정코드 속에서 서로 소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주인 뿐 아니라 나 역시 상거래의 코드로 서로를 보아야 하며, 나는 친구에게조차 그 코드를 권유해야만 한다. 흥정에서 승리하려면 반드시 미끼를 거머쥐어야 한다. 미끼란 바로 상대의 약점을 의미한다. 그래서 내가 잠깐 보였던 흥분의 표정은 그 돗자리 주인에게는 미끼임과 동시에 나의 약점이었던 것이며, 물건을 하나라도 팔아야 한다는 그 상인의 조건은 나의 미끼임과 동시에 그의 약점이었던 것이다. 내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가진 미끼가 그의 미끼보다는 더 컸기 때문이다. 혹은 그가 발견한 나의 약점보다는, 내가 발견한 그의 약점이 더 커 보이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미끼와 약점의 시이소 놀이를 가만히 보고 있자면, 시장의 코드에는 다음과 같은 공식이 성립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엇인가를 원하고 욕망하는 것은 나의 약점이며 동시에 상대의 미끼이다. 그러니 승리하려면 자신의 욕망의 표현은 최소화하고, 상대의 욕망은 최대화하라! 당신이 가진 미끼를 상대방이 얼마나 절실히 원하는가에 따라(예로, 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을 거머쥐었다면, 당신의 승리는 확실하다), 당신에게 들려올 승전보의 나팔 소리가 커질 것이다. 그러니 욕망을 최대로 절제하고, 그의 최대의 약점을 잡아야 한다. 그리고 당신의 욕망은 클라이막스에 가서, 그동안 참고 견뎌내었던 고통에 복수라도 하듯이, 한꺼번에 터뜨려야 하는 것이다. 변증법을 공부할 때 자주 보았던 "노예의 부정하는 능력"이 바로 이 비스무레한 것이다. 그는 우선 타인을 부정할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신을 부정할 줄 알아야 한다. 시장에서 우리는 영리한 노예의 부정이라는 코드를 익혀야만 한다. 그런데 이 부정의 코드는 우리를 끊임없이 배고프게 한다.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들은 타인에게 결핍되어 있거나 타인이 원하는 것, 혹은 내가 가지고 있지 않거나 가지고 싶은 것을 서로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시대는 그 주고받는 행위가 가져다주는 뿌듯함, 충만함을 아주 허기진 행위로 만들어 버렸다. 왜냐하면 주고 받으며 각자에게 결핍되어 있는 것이 채워지기 보다는, 오히려 그 구멍이 더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 타인의 약점과 결핍을 가리거나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상품"이라고 하는 그럴듯하지만 기만적이기 짝이 없는 이름으로 타인의 그 약점과 고통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본의 아니게” 끊임없이 이웃의 약점을 찾아 오늘도 아침부터 밤까지 어슬렁거린다. 그녀는 바로 이 빈곤과 허기의 코드를 이해하지 못했다. 왜 그 돗자리 주인과 내가, 보이는 대로 혹은 말하는 대로 믿지 않고, 보이지도 않으며 말하지도 않는 속을 들여다보기 위해 잔꾀를 굴려야하는지, 왜 포커 페이스를 취해서 나를 감추어야 하는지, 부정을 모르는 그녀는 절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한참 동안 말이 없으면서 그녀가 생각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자신의 무능력에 대한 자조였을까? 아니면 잘못된 인생(그나 나나 모두가 불쾌해졌기 때문에)을 살고 있는 돗자리 주인과 나에 대한 측은함이었을까? 사람들의 눈빛을 자세히 보자! 시각(視覺)이란 사물의 표면과 관계하는데도, 우리의 시선은 그 표면에 있지 않고, 보이지도 않는 주름진 심연으로 파고들려 한다. 소외, 고독, 불안과 같이 이제는 너무나 진부해진 주제들은 언제나 저 심층과 관계하고 있다. 펠리니의 영화 <길>에서 짐승 같은 잠파노의 고독 역시 저 심연과 깊은 관계가 있을 것이다(좀 다르긴 하지만). 개인들 각자의 몸에 주름진 심연 뿐 아니라, 개인들 사이에 깊게 패여, 건널 수 없는 강물 하나가 흐르고 있다. 오래 전에 그녀는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아무런 심층도 없는, 고요한 상태가 되고 싶어요. 수녀가 되면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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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acter is determined more by the lack of certain experiences than by those one has had. 니체의 이 말에 공감하고 싶어지니다. (간단한 감상)
오랜만의 반가운 덧글, . . 그러나, 단 두줄 . . . furthermore, . . . English!! God!!
Alas! . . . What a universal state of impotence in this terrible Post-Modern society! . . . You postmoderners! It's ironic . . . for you to refer to Nietszche!
you fool~ '말에 담긴 표정'을 감추는 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영어.. ㅎㅎㅎ(이번 댓만을 이야기 하는 건 아니구요)
이게 바로 훈님이 설파하신 포커페이스 아니겠습니까?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두 사람이 영어로 대화를 하면,,
모국어를 습득할 때 자연스레 따라 습득된 한국인만의,,
고유한 <말의 표정과 제스쳐>를 서로 이해하기 쉬운 반면, 언어습득력이 떨어지는 나이에 배운 외국어로 대화하면
(여기선 영어)는 아무래도 그런 잇점이 떨어지지요
어젯밤 졸면서 썼더니 받침이 또 빠졌네.. ^^ 그나저나 전, 포스트모던의 '포'짜도 모릅니다...
A와 B는 필요에 의해서 포커페이스를 썼잖아요? 그치만 '필요'란 건, 개인의 주관적 '해석(interpretation)'에 의해 생기는 것이지 어떤 물건이나 상황 자체에 고유하게 있는 게 아닐테죠.
<8과1/2>를 누구나 필요로 하는 건 아니듯이 그 뿐 아니라 다른 모든 것들도,, 필요하다는 해석이 전제되어야, 포커페이스를 쓰건 칼을 휘두르건 얻기 위해서 행동을 취한단거죠. 얻기 위해서 혹은 잃지 않기 위해서..
필요없다고 생각(포기)하는 건, 아직 그 사람이 그만큼 절실하지 않다는 것.
게다가 마음을 두지 않으면 절실한 것조차 포기가 가능하지요.
한 때, fanatic이었던 저는 어렵잖게 그리했었습니다.
훈님 말씀대로라면, 우리 모두가 상인 맞습니다. 그러나,, 각각의 상인들이
가장 절실히 원하는 것은 조금씩이라도 다 다르지요. 바로 이 점이 상인(개인)들
간의 차이를 만들거구요. 경험한 만큼 (필요성에 대한)절실함이 다르고, 또한
니체의 말대로 경험하지 못한 것들에 의해서 더욱 개개인 간의 성향 차이, 상황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만들어질겁니다...
그리고,,유능한 상인이라면
포커페이스를 써야할 때와 흔쾌히 벗어던져야 할 때도 알겠지요 뭐..
옛날,, 방학때마다 (까르멜)수녀원엘 들어가 있었다면 믿으시겠어요? ㅎㅎ
수녀원에 들어가 . . 뭐 하셨어요?
수녀가 되신건 아닐 것이고. . . 요양을 하셨나?
설마, 거기서 니르바나를 꿈꾼건 아니겠지요?
저 위에 쓰신 부분이요 . .
"그치만 '필요'란 건, 개인의 주관적 '해석(interpretation)'에 의해 생기는 것이지 어떤 물건이나 상황 자체에 고유하게 있는 게 아닐테죠. <8과1/2>를 누구나 필요로 하는 건 아니듯이 그 뿐 아니라 다른 모든 것들도,, 필요하다는 해석이 전제되어야, 포커페이스를 쓰건 칼을 휘두르건 얻기 위해서 행동을 취한단거죠. 얻기 위해서 혹은 잃지 않기 위해서.."
전 이 말씀에는, 한편으로는 긍정적인(positive) 해석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정적인(negative) 해석이 있어서, 저 두 명제가 서로 충돌하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사물이나 상황 자체에 필요(부정)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은 아주 긍정적인 생각인데(즉, 이미 사물이나 상황은 그 자체 존재한다) . . . 필요가 없으면 칼도 휘두르지 않고, 행동도 취하지 않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씀은 또 대단히 부정적인 해석(즉, 사물이나 상황은 그 자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이지 않은가 싶은 것입니다.
필요가 왜 부정이냐면, 항상 무엇인가 없음을 전제하기 때문이지요 . . 이런 식으로, 무엇인가가 없기 때문에 모든 일들이 벌어진다는 생각은, 우리의 삶이 무에서 시작한다고 하는, 그야말로 노예의 부정에서 비롯된 삶의 해석이 아닌가 싶어요.
"돈이 없기 때문에 돈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원하기 때문에, 돈이 없다고 느낀다"는 말이 있습니다. . . 모든 것은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죠. 심지어는 허무(nihil)조차도요 . . . "없음"으로부터 "있음"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있음"에서 "없음"이 만들어진다는 생각 . . .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아주 많이 얘기하게 될 터이니 . . 이 쯤에서 접고 . . .(특히, 니체를 공부하다 보면 . . . 그리고 이건 노자의 "허"나 "무"의 개념과도 상통하는 겁니다)
상인의 문제 . . . 네, .. 보편화 된다는 것이 문제겠지요 . . . 그러고 싶어도, 혹은 그러고 싶지 않아도, 시도 때도 없이, 모든 관계 속에서, 개인이 어쩔 수 없이 쓸려가지 않으면 안 되는 . . . 항상 그게 문제겠지요 . . .
"말에 담긴 표정"을 감추기 위해 영어를 쓴다~ ㅎㅎ
그래서, 상품 이름을 자꾸만 영어로 쓰나 봐요 . . . 상품의 구체적인 느낌을 없애기 위해 . . . 맨얼굴의 거칠지만 생생한 느낌을 지우고, 말끔하게 화장하듯이 . . 그래서 물건에 대한 감정을 모호하게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 . . 그래서 상품에는 "마음에 든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와 같은 중화된 감정, 혹은 소유의 감정만이 있을 따름이죠 . . . 역겹고 혐오스럽다거나, 고통스럽다거나, 사랑한다거나 하는 식의 강렬한 존재의 감정들은 빠져 있죠. . . 사람들이 그렇게 상품에 익숙해져 있다보니까, 거칠어보이거나, 투박해보이거나, 강렬한 것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나봐요. . . 현대인의 무기력증, 무감각증이 보편화되는 한 가지 이유가 되지 않을까?
한국에서는 꽤 인기있는 모노드라마 한편이 정기적으로 연극가에서 상연이 되고 있어요. 어떤 여인의 독백으로 이루어진 건데 . . 해를 바꾸어가며 . . 잘 나가는 여배우가 돌아가면서 . . 연기를 하죠 . . . 제목이 뭐냐면 . . "버자이너 모노로그(Vagina Monologue)"예요(뭐, 여성해방 관련 드라마인데) . . . 제목만 보면 예술적 Vulgarism으로 뭔가를 비판할 것 같은 분위기가 풍기죠? 또 실제로 그걸 겨냥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고 . . 이 제목을 보고 사람들은 파격적이라느니 해가며 흥분하고 . . 하지만, 실제로 저 말은 한국사람들에겐 전혀 흥분도 일으키지 않고, 느낌이 없어요 . . 바로 그렇기 때문에 도시 한가운데 건물만한 간판을 올려 놓을 수가 있었던 거구요. . . 약삭빠른 제목이에요 . . 적당히 중화시키면서 둘 다를 취하는거지. . . 나는 그 관계자들한테 . . 그 느낌 그대로 번역된 제목을 올려 놓아야 하지 않겠냐고 말하고 싶더라구요 . . . 결국, 제 생각엔, 그 드라마의 제목은 바로 그 작품 자체가 상품이라는 것을 예증하고 있었던 거죠 . . 실제적인 강렬한 감정을 제거해버린 . . 적당한 관념과, (여성)담론과, 이데올로기를 뒤섞어서 . . 그럭저럭 구색은 갖추고, 하지만 정말로 찌르거나 파열시키지는 못하는 . . 상품!!! 그렇기 때문에 그런걸 보면 . . 브레히트 말처럼, . . .진부해지고, 하품이 나오고, . . 흥미가 없어져 버리죠 . . . 다만, "구매"만이 있을 뿐이지~!!
아니 아니, 저는 사물의 존재론(性)에 대해 이야기한게 아닙니다. 제 뜻은..
말 그대로 '필요'는 개인의 '해석'에 따른 상대적인 개념이고 존재를 부정하는 말이 결코 아니예요.
사물은 인간이 필요로 하든 하지않든 스스로 존재하고 존재 차체에 이미 의미를 포함하겠지요.
누군가 그 '의미'를 굳이 해석해주지 않아도 말입니다.
단지, 그 것을 바라보는(겪는) 개인에 따라서 그 것을(또는 상황을) 다양하게 해석하고
자신에게 '좋다/나쁘다' 혹은 '원한다/원하지 않는다'등의 necessity, '당위성'을
주관적으로 결정한다,, 말하고 싶었던 거예요. 훈님이 쓰신 스피노자의 <좋음/나쁨>과도 상통하는 의미 말이죠.
그건, 검증에 의해 성립된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인, 그래서 아전인수라고조차
말할 수 있는 상대적인 interpretation이라는 뜻 말입니다.
'필요성'이 부정적 맥락에서(없음을 전제) 비롯되었다 하더라도, 부정해야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다못해 내 몸의 신진대사도 생명현상을 이어가기 위한 작업(行)을 그 '필요'에 의해 하잖아요.
물론 여기에서의 '필요'는 내 의지(will)에 백퍼센트 의지하지는 않지만, 헤모글로빈이 산소를 모든
세포에 운반하는 것은 세포가 산소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지 노예의 부정을 인식하기 때문은 아니
지요. 필요하기에 행동을 취하는 (생존의) 본능은, 필요하지 않으면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는
말의 단순한 反語가 아니라고 봅니다.
내게 필요하지 않은 것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의도는 어디에도 없거든요.
더구나.. '필요하지 않다'는 '필요하다'의 가변적 잠재태라고도 할 수 있으니까요.
버자이나 모놀로그에 대해선 별로 들은 바가 없어 뭐라 말은 못하겠지만,,
훈님의 말씀대로 제목을 영어 발음대로만 표기한 것에 대한 님의 해석은 충분히 수긍됩니다.
그리고,,,,,,, 맨 위에 인용한 니체의 말은, 훈님의 글 속 인물 C에 관련한 멘트였습니다.
필요는 개인의 해석에 따라 정도도 다르고, 그 절실함도 다르고, 그래서 상대적이고, . . . 예, 물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 . . 그 말씀의 뜻을 왜 모르겠습니까 . .
다만, 제가 인용한 부분에서처럼, . . 사과꽃님의 말씀이, 마치 "필요가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냐"고 주장하시는 것 같아서 몇 자 적은 것이었습니다(아니면 말구!). 발끈하시지는 말구요^^
사과꽃님의 말씀과 궤를 같이하면서, 덧붙여서 몇 마디 하자면, . . ."필요"라는 것 자체가 이미 존재를 부정하는 계기라고 할 수 있겠죠. . . . 필요는 무엇 무엇을 "취하는 것(appropriate)"을 전제하고 또 결과 하니까요. 말하자면, 필요는 사물을 규정하게 하고, 쓰임새를 결정하고, 종속되거나 종속시키고, 그래서 결국은 사물들을 상대화하고, . . 그래서 그 사물이 다른 그 무엇은 되지 않는 것으로 결정하는 . . .이게 바로 사과꽃님이 말씀하시는 행동이겠죠.
물론, 필요와 부정의 계기를 무시해버리자는 얘기가 아니라, 선후 관계는 명확히 해야되지 않는가, 그리고 필요 이전의 존재를 간과해서는 안 되지 않는가 하는 거죠(물론, 사과꽃님이 간과했다는 말이 아니라). 필요의 계기는 존재가 살아가는 일차적인 동기가 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가령, "세포가 산소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헤모글로빈이 산소를 운반한다"와 같은 "과학적 명제"는 다시 한번 곰곰히 생각을 해보고 따져봐야 할 문제겠지요. 그건 과학과 친한 사과꽃님이 해야겠죠?
노예의 부정 얘기는 왜 했냐하면, 가령, 헤모글로빈이나 세포가 "노예의 부정을 인식"한다는 말이 아니라(말도 안돼!!) . . 우리가 존재의 존재방식을 부정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서 했던겁니다. 노예의 부정이 뭐냐하면 . . . 니체가 헤겔의 변증법을 비판하면서 했던 긴 사례인데요, . . 간단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노예는 자기의 존재를 긍정하기 위해 이렇게 말한답니다: "주인은 나쁜 놈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좋은 놈이다." 다시 말해서, 노예는 주인을 부정함으로써, 자신을 긍정의 길에 이르게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의 긍정 방식을 "우회로(detour)", 2차적인 방식이라고 합니다. "세포가 산소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헤모글로빈이 운반한다"와 같은 식인거죠. 노예가 자신의 존재를 주인을 통해 설명하듯이, 헤모글로빈의 존재를 세포를 통해 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부정의 계기는 존재의 존재성을 다른 존재의 상대적인 계기로서만 도출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니체는 노예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그럼 노예 넌 진짜로 뭔데?"라구요. 반면에, 주인은 자신을 긍정하기 위해 노예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나는 좋은 놈이다" 라구요. 부정의 계기 이전에, 즉 다른 것을 매개하지 않고도, 필요로하지 않고도, 존재가 긍정되는 거죠. 이건 존재방식이고, 존재에 대한 사유방식이고(사과꽃님이 인용한 니체의 말도 이 맥락에서 했던 말이구요), . . . 뭐 그런 얘기였습니다.^^ . . 너무 단순화시켜서 말했나?
제 말에서의 '필요,necessity'는 존재의 유무를 판단하고 측정하는 잣대가 결단코 아닙니다.
한 개인이 "해석'한, 한 '사물/상황'의 필요성이 그 것들을 상대화하고 그래서 그 사물(상황)이 다른 '무엇(의미/가치)'로는 될 수 없게 한다,,라는 훈님의 말씀은 제가 나름 설명하려던 의도 와 부합되지 않아요.
(그래서, 아님 말구~에 해당하겠습니다 ㅎㅎ)
여기서 저는, 필요와 존재 간의 이분적인 구분이나 상하관계도 거론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필요성'과 '존재(상황)'간의 '역동적인 관계'(삼투압osmosis,잠식phagocytosis, 분열,증식differentiation,
휴면상태dormant등)에 대해 이야기 하고팠던 거지요.
세포들이 서로 필요에 의해 역동적으로 관계하지만, 어느 세포가 어느 세포의 우위에 있다고 말 할 수 없는 것처럼, 사물(상황)과 사람은 서로 필요에 의해 역동적으로 관계하여
다양한 해석을 내고 그에 따른 행위를 합니다. 여기서 사물(존재)와 사람의 해석(필요성)은, 어떤 것이 본질적이다라고 구분 하기 이전에 살아있는 흐름(현상)이라고 보는 겁니다 전..
의미를 내재한 독립적(그러나 상호보완적) 모든 물질들의 존재는 거기에 스스로 있는 것이고,
그 존재를, 각개인이 자신의 고유한 관점(point of view)의 프리즘으로 걸러서,, 어떤 특정한 존재(혹은 사물/상황)이 자신에게 필요한가 하지 않은가, 좋은가,나쁜가, 절실한가 그렇지 않은가,,를 결정한다는..말을 하고 싶었던 거구요.
헤모글로빈과 세포는 상호보완 관계에 있기에 서로의 필요성을 긍정합니다. 헤모글로빈의 존재는 다른 세포를 통해서만 증명되는 주종관계도 아니고, 他를 부정해서(격하해서) 나의
우월한 입지를 반증해야하는 관계도 아니란 말입니다.
나의 '필요'는 사물을 한 특정한 방향(면모)로만 규정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내 개인이 임의로 규정한 한 사물의 필요성은 본질의 일부분이고, 전체는 아니라고 저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하여, '필요'에 의해 임시로 규정된 부분이 한 본질의 참면목이라고 우기지도 않습니다.
아니, 어찌보면 한 개인의 자의적인 해석에 의한 '필요'는 본질의 일부분조차도 아닐 수 있을겁니다. 제가 그걸 모르진
않아요..
결국 제 말의 요지는, <필요와 해석>입니다.
그리고 다양한 해석에 따른 다양한 행위(실천의 의지).
어떤 것의 <존재/본질>과, 한 개인이 자의적으로 해석 <필요성>간에, 선후, 주종 관계를 맺어 주려는 의도는 처음부터 전혀 없었습니다.
네. . . ~~
참. . . 덧글을 수정할 수 있다는 것 아시죠? 비밀번호만 알고 계시면 . . 자기가 쓴 덧글이나 댓글을 마음대로 고칠 수 있습니다. 따로 글방에 가져가서 안 고쳐도 됩니다.
네 ㅎㅎㅎ 여기엔 생동감 있게 오타도 그대로 두고, 옮길 때는 오타나 개인적인 농담은 뺀다는 뜻입니다.
^^ 여기서 고쳐도 되는 거 저도 알아여 ㅎㅎ
글고, 방금도 새로 달린 댓글 업데이트 했습니다.
글이 전체적으로 기니깐 사람들이 읽기에 버거워 하는 듯 하네요..
제 글방에서 훈님싸이트를 RSS로 엮으려 하는 데 안돼네요...
주소 설정이 잘못되었다고 나오고....... 뭬가 이리 어려운게야 당췌,,
주소는 http://www.literarynote.net/rss 인거 아시죠?
그래도 안 된다면 . . 아마 그건 한겨레측에서 다른 사이트를 막아놓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네요 . . 저도 예전에 한번 다른 곳의 rss를 엮으려고 하다가 실패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네요 . . 폐쇄적인 한겨레 . . 쯧~
막아놓았나봅니다........ RSS 형태를 파악할 수 없다고 나와요. 여러번 시도해보았지요................... 나쁜거뜰,,
아 큰잔소리
쓸만한 소리
배워지는 소리 올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