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퍼플코메디(purple comedy)라고 부르고 싶은 <하녀>를 발표한 임상수 감독. 수 년 전 그는 블랙코미디스러운 <그때 그 사람들>을 통해 권력의 이면 아니 정면을 잘 보여주었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어째서 임상수 감독은 작품 속의 대통령 역으로 송재호 씨를 캐스팅 했던 것일까? 독선적이지만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 이미지가 지배적으로 만들어지고 조작되었던 박정희씨를 닮은 구석이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배우를 말이다. 예상과는 달리 그 작품에서는 성대모사도 없었고 흉내도 없었던 것이 의아스러웠다.
성대모사와 흉내가 가장 빈번히 그리고 가장 격렬하게 추대되는 곳은 다름 아닌 정치판이다. 그의 흉내를 내며 그 후광에 기생하려는 현실정치인들이 간혹 있었는데, 이들은 한결같이 어떤 사진 하나를 모사하곤 했다. 그 사진은 공공건물이나 학교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동네 이발소에서조차 어릴 적부터 보아오던 것이었다. 한때 얼굴이 약간 비슷하다고 알려진 어떤 정치인은 선거 기간 내내 그 사진의 모습과 똑같은 구도로 카메라 앞에 서서 목에 부목을 한 것처럼 힘을 주고 다니곤 했다. 단정하게 빗어 4:3 비율로 가림마를 넘긴 특유의 각진 헤어스타일, 정면을 보는지 측면을 보는지 아니면 어떤 대상을 주시하고 있는지 조차 꼬집어 말할 수 없어서 뚫어지게 살펴보면 약간 사팔뜨기 끼가 있어 보이는 모호한 시선(이것이 권력이다!), 윤기가 흘러 빛을 반사하는 듯한 이마와 콧 잔등, 살짝 다문 입술과 돌출한 듯한 입, 작지만 단단해 보이는 얼굴 윤곽선, 야무지게 달려있는 귓 볼, . . . 모든 가치들이 융합되어 있는 듯 하면서도 아무 가치들도 없는 듯한 이미지.
임상수 감독이 인물 캐스팅을 그렇게 한 이유가 코메디였기 때문이었을까? 코메디였다면 더욱 더 비슷한 이미지를 도입했어야 하지 않을까? 오히려 원본보다도 더 원본 같아 원본을 능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더라면, 그 과장과 왜곡이 풍자를 실감나게 했을 것이다. 위에서 말한 그 정치인이 이에 해당한다. 그는 원본을 능가하여 원본을 닮고자 했기 때문에, 즉 그 자신을 지우는 과정이 그를 코믹하게 한 것이었다. 닮아가고자 애를 쓸수록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원본은 희화화의 가능성이 커진다. 어쨌든 임상수의 작품이 일종의 코메디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부적절한 캐스팅의 이유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추측으로 미루어 보건대, 임상수가 의도했던 것은 권력의 '아이콘'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닮은 모습이란 본질적이기 보다는 신비화되거나 주어진 이미지일 경우가 많다. 그것은 복원이라는 목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복원은 반드시 복원해야 할 이유를 가진다는 점에서 본질이나 실상과는 멀어질 수 밖에 없다. 수많은 역사드라마나 상업 주류 영화의 인물들이 중압감 있는 대사와 자세를 취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무섭게 부라리는 눈매 이면에 항상 코믹한 요소를 빠지지 않고 실어나르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기호로서의 아이콘의 운명이다. 아이콘은 닮음이 아니라 오히려 원본의 부정에 가깝다.
임상수가 원했던 것은 물론 아이콘이 아닌 '권력의 실상'이었을 것이다. 어떤 실상? 다시 말해 어떤 권력? 그가 생각한 권력은 나쁜 권력도 아니고, 포악한 권력도 아니고, 사디즘도 아니고, 잔인한 권력도, 냉담한 권력도 아니다. 비판과 비난을 받는 동안에도 어떤 위대함을 머금고 있는 그런 권력이 아니다. 그렇다고 친숙하고 자상한 권력 역시 아니다. 그런 식으로 극화된 권력이 아니라 찌질한 권력! 이것이 임상수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즉 어떤 막연한 추상으로서의 권력이 개인을 통해 육화할 때, 아니 개인이 그 권력을 모사하고 재현하고자 할 때, 그것이 얼마나 유형적으로 물화가 되어 지질한 행태들로 변질되는지를 말이다. 그 행태를 열거하기란 얼마나 쉬운가! 건설업계 똘마니들을 법적으로 비호해주고, 그 댓가로 초중고 학부모들이 자식을 잘 봐달라며(아이러니하게도!) 담임선생들에게 주는 용돈보다는 조금 더 많은(학군에 따라 다를 수도 있지만) 금전의 비호를 받으며, 잘나가는 딴따라 여가수를 불러 앉혀 놓고 치마 속에 손을 넣어가며, 양주를 홀짝이며, 술에 취해 풀린 눈으로 징징 거리는, 소위 술집 여종업원들의 용어로 말해, "일반인 보다 더 난해하게 놀아대며," 그 댓가를 물건들로 교환해버리고 마는 찌질하기 그지 없는 권력. 임상수가 본 권력은 코웃음 밖에는 터져나올 수 없는 그런 성질의 하찮은 것이었다. 말할 수 없이 지리멸렬한 분위기의 배우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우스꽝스럽고도 찌질한 권력의 실상이었다면, <하녀>에서의 권력은 직접적으로 모방권력, 즉 흉내와 연기로 재현하는 권력을 향해 있다. 권력의 흉내는 우선 제스쳐들을 통해 육화된다. 미디어에서 그리고 그것을 따라하는 일반인 찌질이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명 법조계의 제스쳐가 좋은 예이다. 똘마니들 앞에서 비만스러운 커다란 덩치를 이리저리 흔들어가며 걷는다든가, 윗 저고리가 반쯤은 벌어질 만큼 배와 가슴을 떡하니 내밀고 앉아 몸으로 말을 하고 싶어 한다든가,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부하 찌질이들을 좌우로 내려다보며 거만하게 훈시를 내리는 포즈를 취한다든가, 손가락질 하나로 사람을 부른다든가. 이러한 모든 양아치스러운 제스처와 포즈는 지배력을 '보여주기' 위해 혹은 '나타내기' 위해 저변화되어 암암리에 '학습받은' 것으로, 마치 신분을 나타내는 이름표와도 같다. 권력을 암시하는 제스쳐를 취하는 순간, 즉 이러한 이름표를 다는 순간, 익숙하게 보아온 어떤 전도가 일어난다. 역할을 부여받은, 그것도 매우 잠시동안, 폼잡고 사진 한 방 박을 새도 없이 임시로 위임된 지위가, 어느새 어떤 힘을 스스로 생산하는 것처럼 보이는 권력이 된다. 권력이란 흉내, 즉 물화된 형상을 통한 연기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소품들, 전시물들, 전리품들 같은 것이 필요해진다. 이정재 분이 홀짝이던 와인이나, 아침마다 두들겨대는 여유로운 피아노, 가정부에게조차 요구되는 하이힐과 정장, 엄격한 식사시간, 널직한 소파와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러한 소품들은 이정재 분의 우악스러운 눈매나 인상착의, 무엇보다도 부잣집 아들이라는 선천적-사회 계급에서 흔히 느껴지는 코믹스러운 안하무인 무지막지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걸쳐져야 할 예복의 기능을 한다.
권력과 똘마니의 관계는 관력관계가 아니라 계약관계이다. 둘 모두가 계약의 주체가 되어 서로 종속되어 있는 것이다. 위험성의 정도를 따지자면, 실은 그 관계는 뒤바뀌어 있기조차 하다. 말하자면 그들의 관계는 "권력이 똘마니를 비호하는" 구도가 아니라, "물주에게 고용된 깍뚜기 혹은 기둥서방"의 구도와 같다. 스폰서라는 용어가 이를 잘 말해준다. 흔히들 공정하고 자유로운 경쟁을 부르짖으면서도 약육강식의 사회를 묵인하고 따르는 경제적 이율배반 속에서, 사업을 하려면 법의 비호를 받아야 하는데(그런 점에서 법이란 상부구조가 아니라 순수하게 하부구조적이다), 그러려면 법-물리적 수단으로 비호를 해주는 장정에게 술도 사주고 떡값도 주어야 할 것이다. 개인들이 누리는 권력의 실체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잠시 술잔을 기울여 와인을 홀짝이며, 혹은 다리를 뻗고 소파에 누워 있는 동안 두 손을 모아 와인을 따라주는 정장차림의 가정부를 바라보며, 자신이 무엇인가를 닮은 것 같은 느낌에 도취된 쾌감. 힘 혹은 역량이 특정 개인에 의해 물화(物化)될 때, 그것은 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이렇게 찌질하고도 코믹한 흉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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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8/16 찌질이들의 흉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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