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태성을 흔히 일탈의 일종으로 간주한다. 정상적인 성 행태로부터 벗어나서 비 정상적인 성행위를 자행하거나 강요하는 행위. 이와 같은 정의를 수반하기 위해서는 선행과제가 있다. 정상적인 것과 비 정상적인 것의 구분의 확실성.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예술에서 다루는 문제는 아니다. 예술은 정의이기 보다는 발견이라 해야 할 것이다. 발견과 표현이 예술 속에서 드러나는 운동이다. 그러나 예술이 정의의 활동이 아니라는 것은, 그것이 곧 정의와 분리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발견과 표현은 정의를 토대로 이루어지기도 하며, 정의를 낳기도 하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매저키즘을 예술 속에서 다루는 목적은 변태성 자체를 변호하기 위함도 아니며, 변태성에 대한 정의를 위함도 아니다. 서두에서 밝히고 있듯이, 변태성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차이화 함으로써, 존재의 보다 미세한 차이들을 발견하고 표현하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이로써 들뢰즈가 매저키즘과 새디즘을 다루는 방식을 차이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차이학이란 통계적으로 그룹화된 하나의 현상 - 이것을 흔히 실체로 말하는 경우가 있으며, 또한 그렇게 인식하기도 한다 - 을 근본적 실재로 혹은 환원불가능한 존재의 연쇄고리들로 계열화하는 과정을 말하며, 이것은 차이가 나오는 선을 따라 분류하고 경계선을 가르는 작업이다. 이 책은 정신분석에서 종합과 상반성의 원리로 전체화되어 이해되고 있는 새도-매저키즘에 대한 개념을 차이화 과정 혹은 환원불가능한 존재들의 연결고리들의 단절을 분류하는 과정을 통해 새디즘과 매저키즘의 고유한 질적 차이의 메커니즘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차이학은 존재들의 힘을 긍정하는 것이다. 종합이나 상반성의 원리에 의한 전체화는 존재들의 힘을 긍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부정을 통해 존재들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증상들은 전이(轉移) 되어야만 하며, 마조흐와 반대되는 본능은 사드일 것이라는 상반성과 종합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 보편화 … 새디즘과 매저키즘의 종합이라는 주제와 새도-매저키즘적 실체의 개념은 마조흐에게 커다란 불이익으로 작용 … 그의 작품이 잊혀지는 것으로 뿐 아니라, 보완성과 변증법적 종합으로 사드와의 관계를 정리하려는 불공정한 가정들 때문에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13>
우리는 이 책에서 매저키즘과 새디즘의 환원할 수 없는 차이가 증명되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들은 테크닉이 다르며, 문제의식, 관심사, 경향들이 완전히 다르다. 따라서 새도-매저키즘이라는 종합적 원리의 실체는 이 둘에게 적용될 수 없다. 우리는 <새도-매저키즘으로 알려진 실체의 개념 13> 자체에 문제 제기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증후군(syndromes) 14>과 <징후(symptoms) 14>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해 진다. 의학에서는 이들을 구별하고 있는데, 후자를 가시화되는 존재들의 양상으로, 전자를 이 존재들의 기원들이 서로 모여 군집을 이루는 현상들의 장소로 분류하고 있다. 다시 말해 <징후는 어떤 질병의 존재를 보여주는 특수한 기호 혹은 신호이며, 증후군은 서로 다른 기원들로부터 제기되어 명시화되며, 다양한 문맥들 속에서 발생되는 징조들이 서로 만나고 교차하는 장소이다. 14> 서로 다른 기원들을 가진 존재들이 이질적 총계를 이루고 있는, 증후군 자체의 개념으로는 존재들의 질적 차이를 분간하기 어렵다. 추상적 개념의 오해와 오류는 이로부터 생겨난다. 심지어 오해와 오류는 마조흐와 사드의 예술을 바라보는 관점에게도 가해질 것이다. 새도-매저키즘의 관점에서 새디즘과 매저키즘을 바라보는 것은 결국 부정의 존재론을 통해 이 둘을 결정하는 메카니즘임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차이학이 필요하다. 실재하는 것들은 차이화 되어야 한다: <새도-매저키즘은 일종의 증후군으로서, 환원불가능한 인과적 연쇄들로 쪼개져야 한다. 14>
이 둘을 차이화의 과정으로 접근해 가는 방식은 <문학적 접근방식 14>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미 새디즘과 매저키즘이라는 용어가 문학에서 나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예술은 질적인 본성들의 미묘한 차이들과 부분적 대상들의 환원불가능한 즉자적 존재성을 발견하고 표현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주1). 따라서 매저키즘과 새디즘의 차이학은 마조흐와 사드의 문학 속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이 작품들 속에서 매저키즘과 새디즘의 징후들이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으며, 또한 어떤 계열들을 통해 서로 차이화되고 있는지 분명해 질 것이다. 차이학은 두 영역을 비판한다. 하나는 정신분석이며, 다른 하나는 부정과 상반성이라는 추상적 개념화이다. 물론 전자는 후자의 방식으로 매저키즘과 새디즘을 전체화하여 하나의 실체(새도-매저키즘)로 종합한다. 이 책 전체를 통해 우리는 전체화의 메카니즘이 차이학으로 치환되는 과정들을 보게 될 것이다. 각 장들 여기저기서 혹은 각 문단들 여기저기서 매저키즘과 새디즘은 서로 소통하지 않으며, 서로 다른 기원들을 가진 독립적 존재로서 분리되고 있음을 다양한 관점들 속에서 확인하게 될 것이다. <비평적(문학적 의미에서)관점과 임상의학적 관점은 상호 배우는 관계로 진입해야 한다. 증후학(symptomatology)은 언제나 예술의 문제이다; 새디즘과 매저키즘의 의학적 특수성들은 사드와 마조흐의 특별한 문학적 가치들과 뗄 수 없다. 14>
차이학과 증후학은 서로 보완적 관계에 있다. 하나는 특이성들의 발견이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하나는 이 특이성들의 재 집단화를 도모한다는 측면에서이다. 그래서 차이학의 진보는 곧 보다 세련된 증후학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우리가 만일 예술을 다양한 질적 차이들의 육화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작품 속에서 특이성들이 어떤 모양새들로 위치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문제인 것이다. 특이성은 환원불가능한 질적차이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언제나 단수이며 결코 복수화된 전체로 불리지 않는다. 예술에서 복수성이란 단수들의 복수이지 복수들 그 자체가 아닌 것이다. 동일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술에서 반복이 결코 반복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또 하나의 위험, 오히려 동일한 것에 대한 잘못된 생각보다도 더 치명적인 위험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동일화의 또 다른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동일함을 거부하거나 부정하면서 우리의 게으름을 합법적으로 인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서로 동일하지 않음을 발견하거나 주장함을 통해 서로 동일한 것임을 증명하는 방식이다.(플라톤의 아이러니가 이에 해당된다) 그래서 사드와 마조흐의 상호보완적 관계(새도-매저키즘)라는 상반성과 종합의 원리는, 이 두 병리학적 증상들을 동일한 하나의 실체가 갈라진 두 측면으로 간주하려는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다.
<…나치즘과 사드의 관계에 관한 이론에서, 바타유는 사드의 언어가 역설적으로 피해자의 언어라고 말한다. 피해자만이 고통을 묘사할 수 있으며; 박해자는 제도화된 질서와 힘이라는 위선적인 언어를 사용한다. … "박해자는 권위의 언어를 사용, 침묵하며, 속임수를 묵과하며 … 그러나 사드는 박해자와는 반대적인 태도… 속임수를 거부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태도를 실제 삶에서는 침묵만을 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에게 돌렸으며, 그들을 이용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모순적인 언급을 하도록 했다." 그러면 피해자는 박해자의 언어로 말한다는 이유로 마조흐의 언어도 역설적인가?17>
상반성의 종합원리는 단 한 번의 분석으로 충족된다. 그래서 사드의 언어를 정립하고 나면 그와 상반되는 마조흐의 언어가 이미 정립된 셈이다. 고통에 대한 묘사에는 필연적으로 고통이 수반된다는 역설이 마조흐의 언어에도 동일한 방식으로 적용된다면 - 사드의 경우 가해자는 피해자의 언어로 그리고 마조흐의 경우 피해자는 가해자의 언어로 - 서로 상반된 차이로 연결된 사드와 마조흐는 양적관계로 축소된다. 다시말해 이 둘은 양화된 차이를 띠면서 표정만 다른 동일한 얼굴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은 증상의 분석에는 적합하지 않다. 왜냐하면 만일 이러한 식으로 두 변태성을 정의하고 명명하게 된다면, 두 변태성에 대한 관점이 달라질 것이며, 따라서 자연스럽게 치료는 전혀 엉뚱한 방식으로 진행될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 특정한 시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던 질병의 증상들은 역사적 사회적 원인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증상들의 분류방식과 그것들을 차이화하는 관점들에서도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역병과 나병이 과거에 보다 보편적이었던 것은 … 지금은 따로따로 분류된 질병의 다양한 유형들을 집단화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16>
따라서 차이학과 증후학은 차이를 양적으로 구별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엇으로도 환원할 수 없는 단절의 순간을 포착함으로써 실질적 차이들을 발견하고 종합하는 문제와 연관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들은 예술의 문제와 분리될 수 없다. 사드와 마조흐 혹은 새디즘과 매저키즘은 정신분석적 구조의 문제이기 보다는 예술의 문제이다. 이 두 증상들과 징후들은 작품들 속에서 판별되어야 한다. 그랬을 때 비로소 상반성의 종합을 통한 양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질적차이들의 긍정의 문제가 제대로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 분석과 통찰은 부지런함을 요구한다. 사드와 마조흐를 말하기 위해서는, 사드를 통해 마조흐를 말하거나 혹은 그 반대를 말함으로써는 충분하지 못하다. 우리는 이 둘 모두를 말해야 한다. 시기적으로도 스타일에서도 전혀 다른 이 두 작가와 이들의 변태성에 대해 막연한 종합의 원리로 연결 지으려는 시도는 언제나 배후에 또 다른 정치가 장악하고 있다. 마조흐가 사드에 비해 적절한 대우를 받지 못했던 것은, 이 둘의 관계를 하나의 실체 속에 가두어 두거나 혹은 다른 하나를 통해 나머지를 판단하는 종합과 대칭의 원리에 있었던 것이다. 이 두 변태성과 두 작가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가지의 기원을 모두 다루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둘은 서로 소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차이학은 비교 가능성을 곧바로 종합과 대칭의 원리 속으로 용해하지 않는다.
(주1) 환원불가능한 즉자적 존재성은 존재들의 질적 차이와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질적 차이로부터 즉자적 존재성이 결정되기 때문이며, 즉자적 존재성이 또한 질적 차이를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차이는 간단히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부정(negation)의 결정에 의한 차이이며, 다른 하나는 긍정의 차이이다. 부정의 차이는 존재성이 외부 즉 타자로부터 결정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소쉬르의 기호학에서는 음소들의 결정이 각 음소 자체에서 구성되지 않고 다른 음소와의 차이(부정)에 의해 결정된다. 즉 존재성은 타자와의 차이에 의해 획득된다. 그러나 긍정의 차이는 이와 다르다. 그것은 외부적 타자와의 관계에서 결정되지 않는, 존재 그 자체 내에서 스스로 자신을 감싸고 펼지는 발생적 차이 즉 표현(expression)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존재는 스스로 분리되고 타자가 된다. 이것은 존재의 복수성을 의미하며 이 복수성으로부터 존재성이 드러난다. 이와 같은 차이의 문제는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의 틀을 통해 정립된 것이기도 하지만, 좀더 심오한 분석과 설명이 필요하다. 이에 대해서는 계속 논의할 것이다. 들뢰즈는 예술기호들을 통해 존재들의 질적 차이들을 감싸고 펼치는 차이학의 메카니즘을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이 책 여기저기에서 동성애와 자웅동체의 존재들은 서로가 발산하는 기호들을 통해 소통한다. 그러나 이들의 소통은 전체화되고 통계화된 개인을 대상으로 하지 않으며, 이 개인들이 내뿜는 기호들의 부분적 대상들 속으로 향한다. 이러한 메카니즘은 예술에서 가능하다. 예술에서 스타일이 중요해 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타일은 질적차이를 복수적으로 육화하는 일종의 통로인 셈이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논의는 『프루스트와 기호들』, 서동욱 역, 민음사, 1997. 을 참고. 특히 이 책 pp. 69∼85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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