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히 홍상수 영상의 중요한 요소인 과잉실재는, 세계를 요약하여 그 힘을 최대화하는 표현(주의)적 경제성과 대립하고 있다. 그 형식적인 예는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예를 들어, 클로즈업의 사용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든지, 혹은 그 고유한 의미에서의 몽따쥬의 사용도 보이지 않는다든지, 혹은 카메라가 특정 인물이나 상황을 전경화하기 위해 그들을 따라다니는 일이 두드러지지 않는다든지(카메라가 인물들을 따라다니는 경우가 있지만, 인물들은 프레임의 다른 모든 요소들 속에 묻혀있을 뿐이다), 혹은 빛과 색채를 회화적으로 사용하여 그들의 과도한 대립이나 강조를 뚜렷이 하는 일이 없다든지, 그리고 화면 구성에 있어서도 역시 의식적 배치가 두드러지지 않는다든지 혹은 숨긴다든지 하는 점이 그것이다. 또한 문학적 주제를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물론 사랑하는 연인들과 이들의 관계 그리고 욕망이나 배신 혹은 권력과 같은 소재들이 있다. 그러나 그의 영화 전체를 자세히 훑어보면, 그러한 소재들이 담론으로 다루어지거나, 서사적 의미작용을 일으키는 메커니즘은 발견되지 않는다. 단지 그 소재들을 둘러싸고 있는 정당화할 수 없는 동작들만 있을 뿐이다. 한마디로 말해 근원적 기원이나 최종적 결론이 없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동작들과 언어는 중심을 가지지 않으며, 따라서 요약되지도 않으며, 그 힘을 최대화할 수도 없다. 홍상수 영화에 있어 유일하게 스며있는 문학적 요소―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는 산만한 실재 그 자체에 대한 이름 모를 의식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 보인다. 그래서 모든 문제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행동주의적 사실들로부터 파생된다. 또한 이것이 바로 제임스(William James)를 위시하여 몇 몇 화용론자(pragmatists)들이 생각했던 실재이다. 이들이 생각했던 실재란 바로 의미가 결정되지 않은 세계, 미리 결정된 중심을 가지지 않는 세계, 인간적 지각 이전에 존재하는 (지각이)소거된 상태의 세계이다. 그것은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상태들 간의 이행, 나아가 지각의 이행 그 자체가 아닐까? 이를 명시적으로 예증할 수 있는 좋은 이미지가 하나 있다.
홍상수의 두 번째 영화인 <오! 수정>은 개인적으로나 사무적으로나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세 사람―영화 감독인 영수, 작가인 수정, 그리고 영수의 돈 많은 후배 재훈―의 사랑 이야기를 몇 편의 에피소드로 꾸며놓았다. 그런데 각각의 에피소드는 동일한 사실에 대해 세 사람 각자의 관점과 기억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까 하나의 사건이 각 에피소드에 따라 두 번 혹은 세 번 이상 반복되어 제시되지만, 카메라의 위치나 사건의 내용은 매번 약간씩 다르게 편집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의 화법은 개인들의 서로 다른 기억과 그 재구성에 의존하고 있지만, 전체 내용을 이루고 있는 형식은 개인들간의 상호 주관적 관계로부터 비롯된다. 이 작품에는 매우 독특한 장면 하나가 있다.
영수는 운전기사와 전화통화 중에 기사에게 모욕적인 발언을 한다. 화가 난 기사는 지금 당장 사무실에 갈 테니 그 자리에 있으라고 경고한 뒤에 전화를 끊는다. 그리고 나서 운전기사와 영수가 사무실에서 맞대면하는 장면이 두 번 등장한다. 이 두 장면은 하나의 사건(두 사람의 대면)을 두 개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다. 첫 번째로 제시된 장면은 영수의 점잖은 사과로 별일 없이 화해하는 것으로 끝난다. 우리는 이 장면이 영수의 기억으로 재구성된 것인지 아니면 객관적 사실로 제시된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그 장면에서 제시된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러나 나중에 다시 등장하는 두 번째 장면은 첫 번째와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영수는 운전기사의 폭언과 폭력에 의해 따귀까지 맞으며 모욕을 당한다. 이 장면은 첫 번째 제시되었던 사실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 객관성이란 상대적인 한에서만 가능한 것이므로, 어떤 쇼트가 객관적 관점의 위상을 가지려면, 그것이 다른 장면을 교정하거나 대체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두 번째 장면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처음의 점잖은 사과와 화해가 영수의 주관적이고도 자의적인 기억이었다고 확신하게 된다. 이 두 번째 쇼트는 최초의 화해 사실을 교정하면서, 그 쇼트를 (영수의) 주관적 관점으로 변형시키고, 그 자신이 스스로 객관적 관점의 위상을 취한다. 그런데 이 두 번째 장면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장면이 잠시 지속되다가 카메라는 서서히 왼쪽으로 패닝하여 그 수치스러운 장면을 숨어서 바라보는 수정을 담는다. 따라서 첫 번째 제시된 장면을 교정하여 객관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이 두 번째 장면은, 사실은 수정의 주관성에 의해 교정된 또 하나의 주관적 이미지였음이 드러난다. 이 두 번째 쇼트에는 아주 복잡한 문제가 있다.
우리는 흔히 영화적 지각의 두 형태(주관적 지각과 객관적 지각)를 말한다. 주관적 지각은 하나의 장면 안에서 부분을 이루고 있는 인물이나 사물에 의해 포착된 지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들뢰즈(G. Deleuze)는 이를 대체로 세 가지로 분류했는데, 우선 눈이 부상당한 사람이 자신의 파이프를 보고 있는 경우에, 이를 흐린 초점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 감각적 주관성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카메라의 지각은 부상당한 그 사람의 주관적 감각과 동일한 것이 되어 있다. 다음으로는 춤이나 축제의 풍경이 그 안에 참석하고 있는 어떤 인물에 의해 보여지는 경우이다. 이를 행동적 주관성이라고 부른다. 움직이고 있는 인물이 어떤 대상을 볼 때에는, 그 자신의 움직이는 방식에 따라 풍경이 보이므로(흔들거리거나 빙빙 돌거나), 행동 중에 있는 경우라도 주관적 형식을 띠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감정적 주관성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다. 예로, 어떤 여자가 칭찬하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이 마치 거대한 나무 위에 군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이다. 사실은 땅 위에서 단지 시이소 놀이를 하고 있을 뿐이었지만, 카메라는 그 여자의 감정이 투사된 주관성으로 그 주인공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들뢰즈의 지각-이미지에 대한 이 예들은 그의 책 Cinema I (Minneapolice, 1986)에서 p.71쪽을 참고). 이 이미지들이 주관적 특질을 띠고 있다고 간주될 수 있는 것은, 이 장면이 나오기 이전에 혹은 그 이후에 등장하는 다른 이미지들과의 비교를 통해 교정되기 때문이다. 거대한 나무 위에 군림하는 것처럼 보이던 그 인물은 나중에 가서야 시이소에서 내려오는데, 그 때서야 비로소 관객은 그때의 장면이 여자의 주관적 지각이었음을 알게 된다. 또한 이미 관객은 눈이 부상당한 한 남자와 그의 파이프를 본 바가 있기 때문에, 흐릿하게 처리된 그 파이프의 이미지가 그 남자의 주관적 지각이었음을 알게된다. 이렇게 본다면 영화에 있어 주관적 이미지는 다른 이미지와의 비교에 의해서만 판단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객관적 지각이라고 불리는 것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객관적 지각은 흔히 특정한 화면 외부에 있는 누군가의 관점을 통해 보여진 사물이나 풍경을 지칭한다. 확실히 영화에서는 주어진 화면에 속하지 않는 다른 인물이나 사물의 관점에 의해 포착된 지각이 많이 등장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객관적 지각 역시 상대적으로 혹은 비교에 의해서만 정의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화면 외부에 있다고 간주된 관점은 언제든지 화면 내부의 요소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 지적했듯이 우리는 영수와 운전기사의 대면을 담은 첫 번째 쇼트를 객관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객관성은 영수가 기사에게 모욕을 당하는 두 번째 쇼트에 의해 교정되어, 이전에 보았던 점잖은 화해가 사실은 (영수의) 주관적 기억을 암시하는 이미지로 대체되었다. 두 번째 장면 역시 마찬가지이다. 관객은 지금 목격하고 있는 수치스런 장면이 객관적인 것이라고 간주하지만, 곧 이어 수정이 목격하는 장면이 등장하면서 그 객관적 이미지는 수정의 주관성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영화에 있어 객관적 지각이란 다른 지각을 수정하고 대체하거나 밀어내면서 나오는 것 같다.
따라서 영화적 지각을 주관성과 객관성으로 뚜렷이 구분하는 것은 명목상으로만 가능할 것이다. 베르그송은 지각에 있어 주관적 지각과 객관적 지각을 뚜렷이 구분하는 것은 이론상의 추론일 뿐임을 분명히 한 적이 있다. 실제의 지각이란 그 두 이미지가 혼동되어 있는 상태일 것이다. 특히 영화에 있어 이미지의 객관성과 주관성은 상대적으로만 파악할 수 있다. 특정한 대상을 선택하여 본다는 것 자체가 이미 주관적 이미지의 투사가 없이는 불가능하며, 또한 주관적 이미지란 이미 특정한 대상이 객관적으로 보여진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양방향 화면(shot-reverse shot)에 있어 관찰자와 관찰대상의 상호보완적 기능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양방향 화면에서의 관찰자와 관찰대상은 서로 교차하면서, 하나가 다른 하나의 관점에 의해 포착되고, 또 그 반대의 관점에 의해 다른 하나가 포착된다. 예컨대, 무엇인가를 바라보고 있는 인물을 보여주고, 이번엔 그가 바라보는 대상을 보여준다. 이때 우리는 전자를 객관적 이미지로, 후자를 주관적 이미지로 결정할 수가 없다. 이미 전자는 모종의 주관성에 의해 포착된 지각일 수 있으며, 반대로 후자 역시 전자의 주관적 지각이 아닌 그 자체 드러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소설에 있어 비 초점화(zero focalization) 형식을 보면 서술자는 인물의 내부와 외부를 자유롭게 왕래하는데, 이것은 객관성을 추구하려는 노력이기보다는, '서술자=신'의 등식을 정당화하기 위한 형식의 최대화라고 말할 수 있다. 모더니스트 소설가들의 양식을 관류하고 있는 '저자의 사라짐'이나 '몰 개성' 혹은 '비 매개'와 같은 개념들 속에는 저자의 신(神)적인 망상의 결과라는 역설이 숨어있다. 저자는 (전통 소설에서처럼)스스로 등장하거나 지시되면서 세계의 일부가 되기를 그치고, 사라짐으로써 오히려 세계에 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식된 신이 아니라 매순간 '느껴지는 신'이 된다(Francis Streegmuller, ed. and tr. The Selected Letters of Gustave Flaubert (N.Y., 1957) p.127.). 조이스(James Joyce)는 『율리시스(Ulysses)』에서 서술자의 위상을 범신론적 신으로까지 고양시키고 있는데, 예를 들어, 우선 한 인물이 속해있는 방안의 풍경을 객관적으로 묘사한다. 그리고는 점점 그 인물의 외양으로 묘사가 집중되면서 그 인물 쪽으로 다가간다. 이제 화자와 인물은 너무 가까워져서 거의 구분할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하고, 급기야는 그 인물이 보는 방식에 따라 방안과 창문 밖에 펼쳐진 바다를 묘사하기 시작한다. 그 인물 속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이것은 마텔로 탑에서 친구들과 살고 있는 스티븐(Stephen Dedalus)을 묘사하는 장면을 참고. James Joyce. Ulysses. (Oxford, 1998). pp. 3-9). 조이스는 이를 더 밀고 나간다. 우리에게는 '촬스 삼촌의 원리'로 잘 알려진 자유간접화법이 그 예이다. 어떤 인물을 묘사하기 위해 그 인물의 고유의 어조를 사용하거나, 그 인물의 내적인 상태를 통해 그의 외관을 묘사하는 것이다. 이것은 더 이상 내부와 외부를 순차적으로 왕래하거나 교차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두 체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방식이다: "He[Bloom] foresaw his pale body reclined in it at full, naked, in a womb of warmth, oiled by scented melting soap, softly laved."(James Joyce. Ulysses (Oxford, 1998). p. 83) 이 예는 목욕탕에서 자신의 몸을 들여다보는 장면을 블룸(Leopold Bloom) 자신의 감각적 주관성("a womb of warmth", "scented melting soap", "softly laved")을 통해 객관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서술자는 인물의 주관성이나 스타일로부터 '감염(contagion)'되어, 내부에 있는 것도 외부에 있는 것도 아니다. 이와 유사하게 영화에서는 양방향 화면의 "극단적인 수축"이 일어나기도 한다. L'Herbier의 El Dorado에 좋은 예가 있는데, 미친 여자의 모습을 (객관적 관점으로)제시하고 난 다음에, 그 여자의 관점에서 그녀가 보고 있는 대상을 흐린 초점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 두 화면을 결합하여, 무엇인가를 바라보고 있는 미친 여자가 이미 한 화면 안에 흐린 초점으로 제시되는 것이다(이 예는 Deleuze의 Cinema I (Minneapolis, 1986)에서 p. 72를 참고). 이것은 그 여인의 주관적 상태를 통해 포착한 그녀 자신의 객관적 이미지이다. 여기서 객관적 지각과 주관적 지각은 서로 엉키고 수축되어 동시에 펼쳐진다.
물론, 홍상수의 저 장면에는 자유간접 화용법을 직접적으로 사용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양방향 화면을 역순으로 진행하면서(즉, 관찰자를 보여주고 다음에 관찰대상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관찰대상을 보여주고 관찰자가 나온다), 카메라는 시종일관 외부에 머물러 있다. 만일 수정이 목격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다음으로 영수가 모욕을 당하는 장면이 나왔다면, 문제는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또한 그 장면 어디에도 수정의 주관적 관점을 예시하는 요소를 찾아 볼 수가 없다. 흐린 초점도 사용하지 않았으며, 수정에게서만 포착할 수 있는 고유한 어조 또한 발견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수정을 객관적으로 보여줄 뿐이었다. 그런데도 어느새 우리는 영수가 모욕을 당하는 장면까지 포함하여 그 장면 전체를 수정의 주관적 포착으로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 장면에서 왼쪽(수정쪽)으로 서서히 이동하는 패닝 과정에서 어떤 알 수 없는 마술이 작용한 것일까? 여기서 패닝의 중요성은 사건의 모든 광경을 하나의 이미지로 보여주기 위해 프레임의 물리적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노력으로 국한되거나, 또한 그것이 단순히 풍경의 흐름을 통해 하나의 지각을 다른 하나의 지각으로 교정했거나 대체했기 때문이 아니다. 여기서 패닝의 더 근본적인 중요성은 카메라가 서서히 이동하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특정한 지각의 체계가 구분될 수 없는 흐름으로 변질되고 있는 이미지를 보여주었다는데 있다. 이것이 바로 베르그송이 말했던 실제의 지각 속에 깃 든 비결정성이다. 규정할 수 없는 실제의 지각 속에서 물질은 정신적 순간의 최초의 결정이 되고, 마찬가지로 정신은 물질적 순간의 최초의 결정이 될 것이다. 그것은 마치 빛의 굴곡이 점점 내 곁으로 나가오더니, 어느새 갑자기 나도 모르게 나의 의식이 되어버리는 사건과도 같다. 사건이 있고 그 사건의 당사자들이 있고 또 그 사건을 외부에서 바라보는 객관적 인물이 있고 그 인물을 다시 화면 안으로 끌어들이는 카메라가 있다. 이들은 모두가 뚜렷이 구분되지 않은 채 서로 엉켜 붙어, 하나가 다른 하나를 교정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변질되고 흐르면서 상관적 관계를 이루고 있다. 이것이 바로 지각의 중화된 이미지일 뿐 아니라, 지각의 흐름이며 상태들간의 이행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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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 적임자라...피곤하지 않고 할만한 모양이네요^^ 그럼 적임자지요 뭐.
제 경우같으면 지상이 면직되어 천국이 배당되거나 지옥이 배당되거나 별 신경쓰이지 않을 거 같아요. 아, 어차피 자기 원하는 데로 처음부터 배정된 사람이 몇이나 있겠어요.ㅎ 슬슬 제맘에 들게 만들다가 능력에 부치면 그뿐이지요. 원체 모두에게 할 수 있는 것의 한계는 있으니까. 저는 자신이 거의 에피쿠로스의 가운데 토막에 이른게 아닌가 할 때가 있어요.^^ㅎㅎ
스스로 즐거울 수 있다면 어지간한 건 다 넘길 수가 있어요.물론 투덜거리는거야 인간적인 애교에 속하는 것이라 생략할 수 없지만요.
노트북도 안가지고와서 시골 피시방에 있답니다.^^
아래에 주신 답글에 대한 덕담인데 모쪼록 즐거우시기를요.갈수록 그런 생각이 들거든요. 평정한 즐거움에 대적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사람들이 그걸 안다면 이 세상 문제의 거반은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다.ㅎㅎ
연인들이 만천하에 있어 시집을 갈 수가 없습니다.^^
좋은 나날 보내십시오.
시골 피시방?
봄이 올 때까지 칩거하십니까? 만천하에 있는 연인들을 피해?
그런데 또 웬 피시방이세요? 관리는 해야겠다?
그래서 반토막이라는 건가요?^^
요즘 세상에 "시집을 간다"는 표현을 쓰는 분은 드문데. . .
ㅎㅎ 가운데 토막이라고 하였답니다. 하지만 반토막이란 표현이 제게 더 맞는것도 같아요.
하지만 너무 예리하게 말씀하시면 도망갈 구멍찾기가 어렵습니다.^^게다가 저는 심오하게 일관된 자세같은 건 안좋아하거든요. 재미가 하나도 없잖아요.휘파람불면서 동네 강아지 놀려먹는 거 같은 그런 재미를 사람들은 잘 몰라요.^^
아` 요즘 사람이 아닌가보죠.^^ 어린시절 탓이 좀 있어요.옛날책을 좀 많이봤거든요.
제가 좋아하는 옛날식 표현중에 '차 한잔이 다 식기전에' 혹은 차 한잔을 다 마시기 전에'와 같은 시간 표현들이 있어요.삼국지연의에서 관우나 장비가 누구의 목을 금방 따온다는 것인데요. 전 오후가 되었다 가 아니라'나무그늘이 길어졌다' 뭐 그런 표현들이 참 좋아요.유려함요.일찌기 앨빈 토플러가 물러난 뒷물결로 표현한 그런 것들요.^^
시집 간다란 말엔 약간의 이데올로기가 들어있지만 이미 시효가 지난 이상은 그 이데올로기가 말에서 발생하지 않으니 별로 의식할 필요가 없는 거 같고.물론 불쑥 쓴 말에 불과하지요 ^^.
훈님께선 아무래도 돐날 연필을 잡으셨던가 봅니다.
文에서 音을 통해 가끔씩 쉬며 일하시기를요.^^ 일에 너무 시달리지 않으셨음 좋겠어요.
대문에 바꿔 놓으신 글은 엄청난 비아냥이네요.^^
사실이 아닌 것이 아닌걸 글 쓰시는 분이 올려놓으니그렇게 보여요.
나날이 웃음이 너무 날카로워지시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요.
제가 뭐 염려할 주제는 못됩니다만.^^
반면 저글이 실례란 측면에서 보면 사람들이 저렇게 참 노골적인 솔직함인지 뻔뻔함인지을 가지기도 한다는 게 참 울어야할 지 웃어야할 지 알쏭달쏭할 때가 있어요...저 말이 실제가 아니라면 저 말은 마치 비웃음이 아니라면 조지 오웰류의 통치자 자신의 연설로 들리는데 그 누군가들이 실제 그걸 입에 담는단 말이거든요...쩝!
시골 피시방은 계실만 한가요?
화웅의 목을 치러 가기전에 조조가 건넨 더운 술잔을 받으면서 관우가 했던 말이죠? . . .
그리고 솔직히 말해, 저는 文보다는 딴따라 기질이 더 강한 사람입니다.^^
내재된 그 본성이 가끔씩 히스테리처럼 꿈틀거리죠. 뭐 억누르고는 있지만.
그리고 저 락펠러의 연설 발췌문은 금융권력과 언론의 동반관계를 드러낸 코멘트인데. . . 무시무시 하죠? 문제는 그 사람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건데. . . 음
자게판 좀 돌봐주세요 -_-;; 몸매들이 예쁘긴하더만 그래도 그렇지...
^^ 올 2월엔 제가 기계처럼 해야될 일이 너무 많아서
문예노트를 클릭하는 것조차 부담이 되어 한 동안 둘러보질 않았는데 . . .
곧 바로 외부의 적들이 침입을 했군요. . . .
고맙습니다. -_-
어쩐지 게시판은 꼭 제꺼 같아서요... *^^*
아무래도 미루님께 관리자 자리를 넘겨야 할까 보네요?!
제가 오히려 자격미달처럼 보이는군요. . .^^
독일어의 hell은
밝다(bright)는 뜻